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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전어, 겨울 막회를 기가 막히게 먹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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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전어, 겨울 막회를 기가 막히게 먹는 방법! [프레시안 books] 황선도의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
실향민의 자식으로 휴전선 인근에서 태어나 남해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무수히 많은 전학을 다닌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고향'이 뭔지 잘 모른다. 나는 사전적인 의미와 상관없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고, 찾아가기만 하면 가족만큼이나 따뜻한 벗들이 있는 곳을 고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2003년 가을부터 한 동안 내 고향은 '오두막'이었다. 일산 중산마을의 테이블 네 개짜리 작은 맥줏집. 거기서 많은 형제들을 만났다. 오뎅탕을 즐겨먹던 오두막이 문을 닫자 길 건너편 골목의 '주문진'이 내 고향이 되었다. 제법 돈이 들 수밖에 없는 횟집이다.

오두막의 형제들은 모두 주문진으로 옮겨갔다. 공간이 옮겨지자 대화 주제도 바뀌었다. 이젠 생선이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오두막과 주문진의 터줏대감인 낮도깨비라는 친구는 황선도를 초등학교 입학식 날 만났다. 선도는 2, 3학년 때부터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그렸다. 선도가 심미안으로 고른 편지지에 낮도깨비가 낯간지러운 연애편지를 썼고, 그 편지가 효험을 발휘하여 제법 먼 곳에 살던 여학생이 대전역 시계탑까지 사내애들을 만나러왔다. 선도는 고등학교 시절, 기산 정명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붓을 놀리더니 마침내 전시회까지 열었다. 먼 훗날 선도는 그림을 그리고 낮도깨비는 글을 써서 함께 책을 내자는 꿈을 꿨다.

▲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황선도 지음, 부키 펴냄). ⓒ부키
꿈은 꿈일 뿐. 선도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없었다. 충청도 양반가 출신의 공무원인 아버지의 벽은 높았던 것이다. 바다 구경을 하려면 서너 시간은 버스를 타고 가야할 동네에서 난데없이 해양학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 전에는 바다 한 번 구경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림을 못 그릴 바에는 별이라도 보겠다는 심정이었으리라. 하지만 별을 보겠다던 심산은 여지없이 깨지고 어렵사리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지랄 맞게도 국가기관 연구소의 공무원이 되었다.

나는 황선도 박사를 일산에 있는 몇 개의 술집에서만(!) 만났다. 해외 연구기관에 나가서 공동연구를 하고 귀국한 후에도, 해외 자원량 조사를 위해 몇 개월씩 배를 타고 나갔다 온 후에도, 직장이 있는 바닷가 연구소에서 일산으로 올라온 후에도 그는 내 고향을 찾았고, 물고기를 이야기했다. 그 '야부리'가 보통이 아니었다. 좌중을 휘어잡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낮도깨비가 빙부 상을 당했을 때 문상을 와서는 아예 시골집 건넌방 하나를 꽉 채운 문상객들을 밤새 들어다 놨다 했다.

낮도깨비는 선도에게 그 야부리를 글로 엮으라고 다그쳤다. 한 5년쯤 닦달을 받더니 띄엄띄엄 한 꼭지씩 쓰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는 내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으이그, 내가 그 동안 옆에서 들은 이야기만 해도 벌써 두 권 분량은 넘겠다." 선도가 고향에 들리는 횟수가 적어졌다. 그러더니 <한겨레>의 웹진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향 친구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내 책 언제 만들어 줄 거야?" (아니, 자기 책을 왜 친구들이 만들어 주나…….) 과학책, 특히 생태 쪽 책을 잘 만드는 출판사에서 제안이 왔는데 거기서 내야 하는지 물었다. 약 3분 동안 고민 후 다른 출판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황선도 박사의 이야기는 철저히 과학적이기 때문에 굳이 과학책처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부리를 진정한 야부리로 승화시킬 수 있는 출판사가 떠올랐다. 그 출판사의 편집부장은 생물학 전공자다. 그는 생물학보다는 경제학을 훨씬 진지하게 공부한 덕분에, 과학자보다는 대중의 눈높이에 더 친근해 보였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 자신의 첫 책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는 황선도 박사. ⓒ이규동

책은 기본적으로 먹는 이야기를 한다. 월별로 우리나라 제철 대표 어류 16종을 선정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를테면 1월 명태, 4월 조기, 8월 뱀장어, 9월 갈치와 전어, 뭐 이런 식이다. 물고기 이름의 유래와 속담, 그리고 맛있게 먹는 법과 맛집을 그야말로 맛깔스럽게 버무렸다. 여기까지는 굳이 해양학 박사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는 여기에 과학을 덧붙인다. 물고기의 생태는 물론 특정 물고기의 화학적 성질까지 이야기한다. 여기서도 다른 과학자와 차이가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내가 만약 뱀장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다짜고짜 분류학적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기껏 재미있게 쓴다는 게 "뱀장어는 뱀일까, 물고기일까?" 같은 질문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뱀장어가 뱀이라면 파충류니까 허파로 숨 쉴 테고, 어류라면 아가미로 숨 쉴 거다. 그런데 아가마로 숨 쉬니까 물고기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뱀장어가 뱀인지 물고기인지 궁금하기나 하겠는가, 아니 그게 누가 뱀이라고 생각하겠는가.

황선도는 "뱀장어는 왜 회로 먹지 않는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윽, 나도 정말 궁금하다. 흰 살 생선은 대개 회로 많이 먹는다. 그런데 보양식이라는 뱀장어는 왜 회로 안 먹느냐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질문을 던지고는 과학적으로 대답한다. "뱀장어의 피에는 이크티오 톡신이라는 독이 있는데, 이 독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독이 인체에 들어가면 중독 증상을 일으켜 결막염이나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열을 가하면 이런 독성이 없어진다." 여기에 현장 과학자만이 겪어서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아 그 맛을 더했다. 실뱀장어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그리고 왜 그렇게 비싸야 하는 생태적 비밀은 무엇인지, 뱀장어가 알을 낳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를 헤엄쳐야 하고 그 고통의 결과 큰 눈과 꼬리만 남은 채 죽어가는 과정을, 과학과 일상을 넘나들며 (설명한다보다는) '야부리를 깐다.'

나는 저자보다 더 일찍 책을 받아봤다. 즐겁게 읽었다. 책 엄청 재밌다. 하지만 다른 책의 서평을 쓸 때처럼 흥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10년 동안 지겹게(?) 들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글은 야부리의 재미에는 미치지 못한다. 황선도의 진짜배기 물고기 이야기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면서, 입으로 맛보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한다.

그동안 수없이 횟집을 드나들면서도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지 못해 정치인 욕이나 했다면 일단 책을 구입해서 읽으시라. 회 한 점을 먹어도, 자반고등어 반찬에 밥 한 숟가락을 먹어도 즐거워질 것이다. 그리고 황선도를 찾아 그의 직장이 있는 부산으로 찾아가든지, 아니면 그가 주말을 보내는 일산으로 오시라. 주문진 막회집에서 그를 만나시라. 물고기와 야부리의 진수를 맛보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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