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리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테제를 발전시켜 액체 근대 혹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열쇳말을 고안했다. 모든 것이 흐물흐물해진 이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더 나은 삶을 발명할 수 있을까? 이 흐물거리는 무한정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자유는 우리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2002년 <자유>(문성원 옮김, 이후 펴냄)가 처음 출간된 이래 꾸준히 주요 저작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사회학자다. 그는 1925년 유대인으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체험한 뒤 홀로코스트, 마르크스주의, 현대성 등의 주제에 천착하며 깊이 있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야만의 시대인 20세기를 관통한 뒤 예측 불가능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자의 통찰력은,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일깨운다.
'3인 1책 수다'의 마지막 시간은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최근 출간 도서, <유행의 시대>(윤태준 옮김, 오월의봄 펴냄)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안규남 옮김, 동녘 펴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세 명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 '3인 1책 수다'는 인터파크도서 웹진 <북앤>() 에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 방향을로 이현우, 김용언,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
이현우 : 오늘이 '3인1책수다' 마지막 시간인데, 어떤 책을 고를지 고심하다가 근래 많이 소개되고 있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들을 다뤄보기로 했습니다. 워낙 책을 많이 쓰는 저자인데 국내에도 분기별로 한두 권씩 나오고 있죠.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 <유행의 시대>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입니다.
<유행의 시대>는 바우만의 키워드인 '유동하는 근대 세계' 시리즈에 속하는 책입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근래 사회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에 대한 바우만의 문제의식을 짤막하게 집약해서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즘 바우만이 사회학자라기보단 현자의 이미지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한국 사회와 연관하여 바우만의 두 책이 어떤 지침이 될 수 있을지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에 대한 인상부터 각자 얘기해 주시죠.
이권우 : 서구 사회에는 확실히 팸플릿에 관한 전통이 있나 봐요.
이현우 : 네. 사회학적 에세이죠.
이권우 : 루소의 <사회계약론> 이후 이어진 팸플릿의 전통이 있죠. 이후 마르크스나 레닌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시급한 현안에 대해 자기 사상을 요약한 팸플릿을 쓰고 세상에 던져서 파문을 일으키는 전통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의 장점이라면 만연한 불평등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있고, 동시에 팸플릿이기 때문에 논증의 양적 부족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행의 시대> 같은 경우, 개인적으로 1부 ''문화'라는 개념의 역사적 여정에 부치는 몇 가지 주석'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어요. 유동하는 근대 개념에 맞춰 문화를 설명하고 있죠. 말하자면 근대사회에서 문화를 계몽 혹은 부르디외 식의 구별짓기로 바라봤다면, 바우만은 지금 단계를 '잡식성'으로 파악하고 있어요. 상당히 신선하죠. 사실 주변을 둘러봐도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이 록음악도 좋아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구별짓기를 넘어서는 바우만의 지적이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었어요.
김용언 : <유행의 시대>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의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공통점을 추출해야 할지 좀 고민스러웠는데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말씀하신 대로 사회학자의 긴 에세이 같은 느낌이었어요. 경제학 쪽의 엄밀한 통계자료를 최소한의 논증으로 제시하되 불평등이 가져올 파국에 대한 저자 본인의 근심에 대해 에세이를 썼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행의 시대>는 제목 때문에 오해할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1장의 경우, 문화란 개념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바뀌어 왔고 지금에 와서 어떻게 예전의 그 논의를 뛰어 넘어야 하는가를 서술했기 때문에 뒷부분도 비슷한 톤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본격적인 후반부의 포인트가 달라지죠. 바우만의 중요한 키워드인 유동성과 국가를 함께 이야기하면서, 예전 같지 않은 국가 내 공동체 사이에서 문화가 그 공동체들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어떻게 담당할 것이냐를 진지하게 제안하지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유행'이 아니라 '문화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유행의 시대>(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
이권우 : 그런 전략이 인문학 쪽에서도 효과가 있나요?
이현우 : 가끔 있지요. 바우만의 또 다른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이 그런 경우에요. 원제는 '유동하는 근대사회에 보내는 마흔 네 통의 편지' 정도로 번역이 될 겁니다. 사실 그런 제목은 독자들에게 어필하기가 힘들지요.(웃음)
생각해보면 재독 철학자 한병철과 지그문트 바우만이 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피로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나 <시간의 향기>(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같은 최근 저서들이 다양한 철학자들을 인용하면서도 독자들에게 소프트하게 통할 수 있는 여지를 줘요. 가공하고 해석을 첨부하는 스타일이 한국 독자들에게 통하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만하게 읽히는 쉬운 책은 아닙니다만. 바우만 역시 사회학자의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소프트한 스타일을 보여주죠. 그런 책들에 대한 수요가 국내에 좀 있는 듯합니다.
이권우 : 바우만은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출판사 펴냄)에서도 근대 체제 변화의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적극 인용됩니다. '액체화된,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이 상당히 이미지가 강하면서도, 근대의 몰락에 대한 유용한 학술적 개념으로 자주 수용되면서 인기를 끄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현우 :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티나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 규정 용어 대신, 자신이 만든 '유동하는 근대(리퀴드 모더니티)'라는 신조어를 사용합니다. 이 시리즈의 책을 많이 펴냈고, 국내에도 <액체근대>(이일수 옮김, 강 펴냄), <유동하는 공포>(함규진 옮김, 산책자 펴냄), <리퀴드 러브>(조형준·권태우 옮김, 새물결 펴냄) 등 다수가 소개됐어요. 포스트모던이라 통칭되는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 사회학적인 공로가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단어가 한국어 상으로는 '모더니티 이후' 정도의 의미 말고는 말해주는 게 별로 없는데, '리퀴드 모더니티'는 이미지로 강력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사는지에 대한 그림이나 조감도를 갖고자 할 때, 유력하게 참고할 만한 사회학적 통찰 아닌가 싶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말고 국내에 이만큼 지속적으로 소개된 사회학자들이 거의 생각나질 않아요. 개인적인 독서 경험으로는 리처드 세넷 정도입니다. <뉴캐피털리즘>(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장인>(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등이 출간됐죠. 바우만과 세넷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비슷한 시기를 각자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건데, 이 두 사람이 자주 소개되고 읽힌다는 건 그만큼 잘 읽히게끔 쓴다는 뜻일 것이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우리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겠죠.
이권우 : 포스트모던에 대한 기존 해설들이 체제의 연장이나 성숙을 강조했다면, 바우만은 '거대한 전환'이라는 강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쪽인 듯합니다. 그래서 '유동하는 근대'가 좋은 개념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특징짓는 개념어를 찾으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잖아요.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는 신자유주의의 단말마적 비명이 체제 종결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우리에겐 다른 낙수 효과가 필요하다
이권우 : 그나저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제목이 참 좋습니다.(웃음)
김용언 : 부제도 강력해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 서평가 이현우. ⓒ프레시안(최형락) |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복음 13장 12절)
사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 나오는 불평등의 현실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 같지만, 통계로 다시 확인했을 때 여전히 놀랍습니다. 1대 99도 미화된 겁니다. 0.1대 99.9의 사회라고 봐야 하죠. 바우만도 초반에 통계를 인용하고 있지만,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합하면 가난한 25억 명의 재산을 전부 합친 것의 두 배에 달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시대가 없었어요. 통상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불평등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자각이 우리에게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통계상의 조작까진 아니더라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 중에,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20퍼센트 등의 문구를 떠올렸습니다. 그 문구 속에서 상위 20퍼센트 내의 차이가 지워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내부에서도 엄청난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니까요. 아주 극소수의 과두 재벌과 일반적인 부유층과의 낙차마저도 상당히 커요.
이권우 : 이번에 정부가 증세개편안을 처음 내놨을 때 난리가 났죠. 연봉 5000만 원부터 증세하려 했던가요?
이현우 : 처음엔 3450만 원부터였어요. 그 정도 소득을 중산층으로 분류하려는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는 생계유지에 가까운 층이죠.
김용언 : 방금 말씀하신 상위 20퍼센트 내의 낙차 때문에 생기는 기이한 분위기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충분히 많이 번다고 느끼는 사람들조차 <조선일보> 등의 매체를 통해 "먹고 살기 힘들다", "교육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요. 그 발언을 읽는 '중산층', 즉 3450만 원의 연봉을 받는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집 한 채 있으면 나는 중산층이라고 믿었고. 한국에선 부동산을 통한 인생역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언젠가 '위쪽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다 사라졌어요. 상위 20퍼센트 사람들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마당에, 자신이 결코 '중산층'이 아니며 99.9퍼센트 저 아래쪽에 속해 있다는 것을, 그 현실과 꿈의 괴리를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권우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22쪽에 흥미로운 문장이 나옵니다. 바우만이 <설국열차>를 본 걸까요?(웃음)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대가 얼마나 강고하게 불평등의 구조를 체제화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현우 : 바우만의 첫 번째 문제의식은 유례없는 불평등, 부의 편차이며,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입니다. 바우만은 '거짓 믿음'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유포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지요. 우리도 많이 속아 넘어간 이데올로기인데, MB정부 때의 '낙수 효과' 주장이 틀렸다는 걸 지난 5년 동안 배웠잖아요. 기업의 이윤이 늘어나고 부유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중산층과 서민에게까지 그 효과가 재분배될 것이라 주장했지만, 그 같은 경제학적 이론이나 예측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분명합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49쪽에 보면, 바우만은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경제성장'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죠. 지금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로, 키워드만 창조경제로 바꾼 채 '성장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용언 : '착한 성장'이라는 말도 나오더군요.(웃음)
이권우 : 암묵적 전제 두 번째가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입니다. 즉 '소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죠.
이현우 : 세 번째는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네 번째가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입니다.
▲ 도서평론가·한양대 특임교수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의 36쪽에, 마가렛 대처의 연설이 인용됩니다.
"우리가 개인들을 존중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개인들이 모두 같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 우리 아이들의 키가 더 클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크도록,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클 수 있도록 하자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 대니얼 돌링이 반박합니다.
"대처는 '잠재력을 키와 같은 것' 즉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또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상이한 개인들은 상이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잠재력을 펼칠 능력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상이한 능력을 타고 나는 것으로 상정한다."(같은 책, 37쪽)
대처로 대표되는 이 같은 인식의 후퇴가 어떻게 생겨난 건지 궁금합니다.
이현우 : 사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미국 사회에서 제대로 확산된 적은 없었어요. 유럽 전통의 아카데믹한 차원에서 혁신을 얘기할 때 소수에게 받아들여졌고… 요즘 한국 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불평등에 대한 교정이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종북 철학자가 되겠죠?(웃음) 평등주의적 관점이라는 게 극좌 포지션이 되어버렸는데,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문제 제기되었더라도 얼마만큼 공유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보다 더 많이 유포된 건, 가령 불평등은 자연스럽고 경쟁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시장 자본주의적 관점이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유례없는 불평등의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액체 근대' 이전, 말하자면 고정된 딱딱한 근대 시절에는 일본이 한국 사회의 모델이었죠. 직업을 한번 선택하면 바뀌지 않고 종신고용이 보장됐으며, 퇴직 후에는 노후가 보장되는 사회요. 자본주의의 어떤 단계에서는 그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상징적으로 임금 피크제(일정 연령이 되면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정년은 보장하는 제도.-편집자)도 그런 종류가 아닌가 해요. 우리가 경험 못한 제도거든요. 임금은 호봉수에 따라 계속 올라가기 때문에 퇴직 직전에 가장 많은 액수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제도가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겁니다. 징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안규남 옮김, 동녘 펴냄). ⓒ동녘 |
"①엘리트주의가 효율적이다. ②배제는 정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며, 부에 대한 욕망은 삶의 향상에 이바지한다. ③이런 것들로 인해 초래되는 절망은 불가피하다."
이런 거짓 믿음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묵인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경제성장이 정말 유일한 길일지 한번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이현우 :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게 예전에 밝혀졌잖아요. 한국의 경우 경제 불평등이 심화된 시기가 IMF 사태 이후부터던가요? 최근에 나온 책 중 <더 많이 공부하면 더 많이 벌게 될까>(필립 브라운 외 지음, 이혜진·정유진 옮김, 개마고원 펴냄)을 보면 글로벌 지식 시장이 형성됨으로써 더 이상 학력이 소득을 보장하지 못한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분석이 나와요. 미국 같은 경우도 IT 전문가가 필요하면 인도에서 저렴하게 충당하는 거죠. 원제가 '글로벌 옥션(The Global Auction)'입니다.
이것도 당장 우리에게 해당되는 곧 도래할 미래입니다. 과거 한국사회를 지탱했던 요인 중 하나가 교육 신화였어요. 부모 세대가 가난하더라도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얻으면 집안도 일으켜 세우고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는 신화요. 하지만 이젠 그 믿음이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이권우 : 이미 그런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 많이 진출하는데, 그럼 중국 전문가들의 수요가 있을 것 같잖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언어의 장벽을 해결해주는 사람들이 화교래요. 한국어도 되고 중국어도 되고 또 영어 공부도 했기 때문이죠.
이현우 : 아이들한테 중국어를 많이 가르친다고 하던데…뒷북일 가능성이 높은 거죠.
이권우 : 자본이 원하는 인적자원은 끊임없이 싼 노동력으로 대체되고 있으니까요.
이현우 : 말로만 글로벌 인재를 외치지만, 교육 제도가 그처럼 변화된 시대적 환경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아요. 바우만의 주장도 사회의 전체적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데, 과연 우리에겐 그런 문제의식 뿐만 아니라 변화를 가져올 역량이 존재하는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이권우 : 경제성장에서는 생태적 한계가 있습니다. 과연 화석연료에 기초해서 이뤄지는 성장이 지속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믿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현우 : <쓰레기가 되는 삶들>(정일준 옮김, 새물결 펴냄)에서 바우만이 그런 지적을 했죠. 오늘날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우,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 노동자의 경우 조금 있으면 미국 중산층과 똑같은 소비욕구를 가질 수 있잖아요. 그걸 충족시키려면 지구가 3개 필요합니다. 서구식 풍요라는 게 단순하게 산술적으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모델이에요.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런 얘길 들었어요. 프롤레타리아의 소망이 무엇인가?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유토피아가 부르주아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이상사회의 모델일 수 있겠지만, 그런 방식의 소비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권우 : 바우만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낙수 효과에 대한 기대라고 분석했지요.
이현우 : 낙수 효과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문제는 '알고 있음의 낙수 효과'가 밑에까지 내려가진 않는다는 거죠. 지적인 사회의식의 낙수 효과가 필요한데, 그게 없어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해도 50퍼센트 대죠. 그 많은 지지층이 기대하는 건 박정희 시대의 향수, 성장에 대한 기대, 낙수 효과에 대한 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프레시안(최형락) |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아, 회고적으로, 단지 회고적으로만)."(115쪽)
전 한국 사회가 유동적인 사회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그럴 수 있어요. 취향이나 문화, 사소한 라이프 스타일 등에 대해선 유동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너무나도 단단하고 바뀌기 힘든 사회인 것 같습니다.
아까 박정희 시대와 박근혜 시대를 비교하면서 경제성장에 대한 향수가 지속된다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박정희 시대는 벌써 40년 전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40년 전으로 돌아가 그 기적을 되풀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유리한 역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단단한 사회 자체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방증 아닐까요.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한쪽에선 "그래, 뭐 우린 망했지"라고 냉소하면서 스스로의 결핍을 방어해요. 다른 한쪽에선 그보다 훨씬 큰 허위의식이 존재합니다. 한쪽은 냉소하면서 다가올 파국에 가림막을 치려 애쓰고, 또 한쪽은 변치 않는 허위의식을 믿고 따르고 있어요. 이 양쪽이 팽팽하게 존재하는 한 한국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이 없지 않을까요.
이권우 : 액체화된 근대를 고체화된 근대로 착각하고 있죠.
이현우 : 지금 권력층이 평균 연령 70대인 분들이잖아요.(웃음) 그런 분들에겐 고정적이고 단단한 현실이 있고, 그 아래 연령대에는 분명 유동하는 현실이 있어요.
이권우 : 집권층이 유동하는 근대에 대한 개념이 없는 채 경제 정책을 편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약속한 바를 지킬 수 없고요. 그걸 꿰뚫어볼 수 있는 시민적 각성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용언 : 바우만은 "인위적인 맹목은 유전"이라고 하더군요.(웃음)
이현우 : 개인적으로 이 정도 수준의 책은 고등학생들도 읽고 토론하는 단계까지 가야 뭔가 변화의 계기가 마련될 것 강습니다.
이권우 : 결국 낙수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낙수'시킬 수 있을까, 그걸 고민해야겠네요.
이현우 : 비판적인 인식의 낙수 효과, 성장신화의 낙수 효과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의 낙수 효과가 필요하지요.
이권우 : 이런 상황에서 대안적 세력이 시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명백한 자료, 낙수 효과의 허위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어도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의 광범위한 대안적 세력들이 게으르거나 설득력이 부족하거나 둘 중 하나겠죠.
▲ <액체근대>(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강 펴냄). ⓒ강 |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게 목표이다. 미국인의 하위 75퍼센트와 전 세계 인구의 하위 95퍼센트가 민족적, 종교적 적개심, 성적인 관습에 관한 논쟁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 일어나는 짧은 유혈 전쟁을 포함하여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사사건(pseudo-events)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주의를 자신들의 절망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은 별로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다."
빈부의 차이, 제도 불평등에 대한 인식에 대한 관심으로 옆으로 돌리는 것. 한국 사회의 경우 지역주의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과거 기득권층의 최대 발명품이 지역주의라고 봐요. 여전히 여론 시장을 장악해요. 상징적인 게 지역주의 아이콘이었던 분이 지금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고 계시잖아요. '우리가 남이가'주의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게 우리사회의 불편한 진실 같습니다. 이 역시 가난한 사람들끼리 다투도록 만드는 조작의 일종이죠.
이권우 : 지역주의에 명백하게 덧붙일 다른 요소는 남북간 적대적 공존이지요.
이현우 :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내부식민지'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문화주의'의 아름다운 허상
이권우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소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라는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바우만이, <유행의 시대>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취하는지 살펴볼까요.
이현우 : <유행의 시대> 41쪽에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오늘날의 문화는 사람들이 셔츠를 갈아입거나 양말을 갈아 신는 것만큼이나 자주, 빨리, 능숙하게 자신의 정체성(또는 최소한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바꾸는 능력을 습득하도록 요구한다."
당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소비한다면. 이런 식의 소비주의가 말하자면 유동하는 자기 정체성이며, 경제적 논리와 완벽하게 부합하게 됩니다.
이권우 : 경제성장을 촉진하려면 소비가 당연히 이뤄져야 합니다. 둘은 쌍생아 격인데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75쪽을 인용하겠습니다.
"행복 추구는 곧 쇼핑이라는 것, 행복은 상점 진열대에서 찾아야 하고 상품 진열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오늘날 이것은 자명한 공리이다."
그리고 바로 옆 페이지 74쪽을 보면, "그러한 믿음들은 현재의 소비자와 장차 소비자가 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화려한 상품들(행복한 삶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는 보상들)의 향연에 매일 초대받지만 결국은 매일 같이 배제되고 참석을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원한이 생겨나고 쌓이는 것을 막지는 못 한다."
그런데 이 자체의 흐름을 왜 거부하지 못할까요. 자신들이 배제되고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쌓이는 분노와 원한이 왜 지금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할까요.
▲ <쓰레기가 되는 삶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
또한 현재의 엘리트들이 더 이상 교육자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지 않고 멀리서 조종하는 전략"을 수행하는 걸 더 선호한다고 하지요.
"현대의 지식 계급이 인간 조건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거나 아예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들은 그런 이유로 다문화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는 이데올로기'라는 도피처를 찾는다."(같은 책, 74쪽)
이건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존하자, 가난에도 가난의 미학이 있어'라는 식의 기만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의 삶은 더 가난하고 불평등한가를 함께 논의하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이어지던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있는데 그건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인정해버리는 순간, 그 불평등으로부터 명백하게 거리를 두게 되는 거지요. 여기서 분노가 쌓여 전체 시스템을 교정할 만큼의 에너지를 내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대 매체에서 이런 '다문화주의'를 굉장히 부드러운 방식으로 유포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현우 : 지젝을 비롯한 좌파 철학자들이 많이 이야기하는데, 오늘날의 지배적 헤게모니 입장을 '자유주의적 관용적 다문화주의라고 합니다. 지젝식 문제의식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중산층 내 진보적 좌파를 자칭하는 이들이, 다문화주의라든가 관용주의를 정치적 올바름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로 고양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차이에 대해 관대해지고, 경제적 불평등도 경제적 차이 정도로, 적대를 차이로 치환시킨다고 비판합니다.
한국적 맥락에서는 '일베'라든가 어버이연합 등의 극우가 갖고 있는 적대감을, 중산층 좌파는 차이로만 해석하는 거죠. 지젝을 다시 인용하자면, 한쪽에선 사납게 날뛰고 있는데 한쪽에선 냉소적으로 뒷짐 지고 있는 교착상태가 현재 우리의 상황입니다. 바우만이나 지젝 모두, 현실은 파국적인데 심각하진 않다는 인식으로 애써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요.
이권우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88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들은 양심의 가책을 달래주고 자아를 고양시켜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적 위계의 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만족과 기쁨을 준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들은 좌절과 자책감을 덜어주는 역할도 함으로써 사다리의 아래쪽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복음이 된다. 물론 별 볼일 없는 엉터리 복음이지만. (…) 대체로 그것들은 반대와 저항의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실패에의 투항과 체념의 고통을 견디기 쉽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도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무시무시하게 부풀어 오른 엄청난 불평등을 감수하게 만든다."
사실 굉장히 절망적인 분석인데, 여기서 벗어나 다른 사회 체제를 꿈꾸려면 역시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개선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이현우 : 전 교육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에도 두 가지 관점이 있죠. 진화의 동력이 경쟁 혹은 협력이라는 관점이요. 협력이 진화에 유리한 동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학 분야의 성과가 이미 나와 있어요. 하지만 그에 대한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조금 더 잘하는 학생이 좀 떨어지는 학생을 도와주는 교실을 만들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지요. 생존의 주체를 개개인으로 고정시키는 교육의 산물이 지금의 모습이 아닐까요.
김용언 : <유행의 시대> 132쪽을 보면, 바우만은 "'인정받기 위한 전쟁'과 평등의 요구를 연계"함으로써 "더 높은 질서의 통합"으로 나아가자는 제안을 합니다. 불평등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인정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이라는 건데, 한국에서 이런 식의 인정투쟁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고민스럽습니다.
이현우 : 인정 투쟁은 아주 단순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주권자의 정당한 권리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걸 제대로 찾고 있지 못하고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보장받고 인정받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봐요.
▲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 ⓒ동녘 |
이현우 : 가능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현실적 전망만 보면 가능하지 않은 건데, 지젝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가 지구의 종말은 상상할 수 있어도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건 쉽지 않죠. 하지만 현재의 시스템이 지속불가능하다면 그 대안을 찾아야 하잖아요.
김용언 : 전적으로 이현우 선생님 말씀에 동의를 합니다만, 아까 언급하신 교육 문제로 환원시키기는 좀 힘들 것 같아요. 이미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경쟁을 시작합니다. 영어로 태교를 하고, 아이를 출산한 뒤에는 부모와 조부모까지 달려들어 소위 '좋은'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 줄을 서지요. 세대를 거듭할수록 자신들의 삶이 뭔가 아쉽고 능력만큼 보상받지 못했다는 억울함 때문에 자식에게 그 이상을 투여하는 강도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잖아요.
교육은 정말 너무나 중요하고 그걸 통해 인간이 진보한다는 기본적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무리 그런 윤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이미 학교 외 공간들에 공고하게 뿌리내린 맹목적 믿음 때문에, 그런 새로운 가치가 뿌리 내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현우 : 지식이나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지만, 거꾸로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불평등을 반전시킬 수 있는 도구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은 가장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재화,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재화예요. 많이 알고 덜 아는 것 사이의 차등적 보상은 가능하지만, 거꾸로 그 차이를 가장 빨리 해소할 수 있는 것도 지식이거든요.
이권우 : 이현우 선생님이 말하는 교육은 결국 제도교육 바깥에서 이뤄져야 하겠죠. 시민사회에서 이런 가치를 어떻게 공유하고 전파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더 많이 해야 해요.
이현우 : 교육이 거창하다 싶으면, 독서로 하죠.(웃음) 독서가 거짓 믿음에 빠지지 않기 위한 일종의 해독제라고 믿습니다. 책을 좀 더 많이 읽고 토론하는 문화로 빨리 바뀌지 않으면 사실 전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아까 잠깐 얘기했지만, 한국의 이전 기득권층의 최대 발명품은 지역주의와 더불어 독서와 공부의 분리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기능적인 인간으로만 만들었죠. 지식은 갖게 하지만, 비판적 사고력은 제거했다고 할까요.
이권우 : 최근엔 기업이나 대학에서도 독서를 강조하죠. 과거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체제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끌어안으면서 창의적 혁신을 주도하겠다는 목적인데요. 또 그걸 주도하는 세대는 전근대적, 고체 근대로서의 가치관을 갖고 있어요. 우리 체제가 그만큼 불안정한데, 어떻게 지속 가능한 새로운 체제를 만들 수 있을까. 제도적 수준에서 경쟁 자체로부터 탈피할 순 없겠지만, 이현우 선생님 얘기처럼 시민들이 함께 읽고 공감대를 확장해가는 독서력만큼은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거짓 믿음에 속지 않는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지요.
'강제 공동 독서'의 즐거움
이현우 : '3인 1책 수다' 마지막 시간인데, 지금까지의 소회를 나누면서 정리할까요.
이권우 : 이 기획 자체가, 공동 독서 문화가 한국 사회에 퍼지길 기대하면서 시작됐지요. 관점과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한 권의 책이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이 발생하는구나를 새롭게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공감하는 부분과 배우는 부분도 많았고요.
또 강제독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본인이 좋아하는 하나의 경향성에만 빠지게 되는데, 세 명이서 돌아가면서 책을 추천하다 보니 제가 평생 안 읽던 범죄소설까지 접할 수 있었잖아요.(웃음) 전문 분야와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끼리 독서하면, 그 사람이 왜 그 책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가치가 있으며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독서는 혼자 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더불어 할 수 있는 행위임을 경험하면서 즐거웠습니다.
▲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봄아필 펴냄). ⓒ봄아필 |
이현우 : 100퍼센트 강제성은 아니고요. 저희끼리 합의한 자발성이 있었잖아요.(일동 웃음) 저도 비슷한 소감입니다. 셋이 모이면 그 중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들 하는데, '3인 1책 수다'가 그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혼자 책을 읽다보면 아무래도 게을러지고 미루게 되는데, 공동 독서에선 그럴 수가 없어요. 공동 독서의 분위기를 저희가 확산시켰는가에 대해선 의문이지만, 사례로서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혹시나 시즌2를 하게 된다면 좀 더 잘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두 분 모두 1년 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시간이었고,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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