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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잃은 공권력…씁쓸한 '부산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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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잃은 공권력…씁쓸한 '부산의 밤' <기자의 눈> 공권력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따 시원소주 싱거워서 거시가 허네. 호남 사람들 입맛에는 잎새주란께. 근디 아그야. 이 소주 주둥아리가 왜 길쭉해진 줄 아냐. 이거시 다 전두환이 놈이 꽃병(화염병의 은어)을 못 맹글게 할라코 그랬잖냐. 주둥아리가 길어지면 심지를 두 배로 넣어야 되고 잘 빠져셔 맹그는데 시간이 서너 배는 더 걸린단께. 병도 더 단단해졌어라. (병을 자기 머리에 툭툭 치며) 이것 보드라고."

18일 '아펙반대, 부시반대 1차 범국민대회'가 끝난 밤 9시경. 부산대 앞 식당에서는 광주에서 온 노조원과 학생 5명이 늦은 저녁 식사에 반주를 곁들이며 이날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학생 한 명의 이마에는 반창고 서너 장이 길쭉하게 붙어 있었다.

***전경버스 바리케이드에 이어 컨테이너 바리케이드**

경찰의 시위 차단 및 진압 방법이 날로 '진보'하고 있다. 과거 폭력시위의 대명사였던 화염병과 최루탄, 백골단이 사라진 자리에는 경찰 버스가 등장해 시위대를 가로막았고, 이번 부산 APEC에서는 '항만물류의 중심' 부산답게 컨테이너가 등장했다.

경찰은 집회 장소인 수영강변도로에서 APEC 주행사장인 BEXCO로 향하는 다리인 수영 1,2,3교를 봉쇄하기 위해 컨테이너를 2단으로 쌓고 접근을 원천봉쇄했다.

초반에는 시위대의 맹공이었다. 경찰은 컨테이너 위에 병력을 배치해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의 컨테이너 접근을 막았으나, 시위대는 어렵지 않게 컨테이너에 접근해 컨테이너의 고정 고리에 밧줄을 묶고 당기기 시작했다.

육중해 보이던 컨테이너는 조금씩 움직이더니 아래로 고꾸라지며 위에 있던 경찰 10여 명이 추락해 부상을 입었다. 무리하게 컨테이너를 붕괴시킨 시위대의 잘못도 크지만 컨테이너가 무너질 것을 예상해 컨테이너 위의 병력을 적절한 시점에 대피시키지 않은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 있는 대응도 아쉬웠다.

그 뒤 시위대는 사람 키 두 배 길이의 대나무 봉과 쇠파이프를 들고 컨테이너를 두드리며 맹렬히 경찰을 공격했지만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의 접근을 막았고, 2시간여가 흐른 오후 6시경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농민회와 일부 노조가 시위 장소에서 빠지며 범국민대회는 마무리 국면으로 돌아섰다.

***"나이 처먹었으면 집에 처박혀 있지 왜 나와서 지랄이야" 흥분한 경찰들**

그러나 범국민대회 사회자의 "이번에는 마지막 순서로…"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은 시위대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시켜 압박해 들어왔다. 경찰의 '대반격'이었다.

시위대는 대나무 봉과 쇠파이프, 돌로 경찰에 맹렬히 저항했지만, 밀고 들어오는 경찰 병력에 계속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전.의경들은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전.의경들이 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날은 특히 시위대로부터 빼앗은 대나무 봉을 뒤로 빼서 부러뜨리는 대신 전.의경들이 그대로 들고 서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맨 앞줄의 전.의경들은 방패를 하늘 높이 흔들며 "덤벼 개XX들아"라며 온갖 욕설이 포함된 괴성을 지르는 등 시위대를 자극했다.

흥분한 전.의경들의 욕설도 도를 넘어섰다. 시위대 옆으로 빠져 경찰 쪽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6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농민에게 "나이 처먹었으면 집에 처박혀 있지 왜 나와서 지랄이야, XX놈아"라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사진기자들에게 "이 XX놈들아. 니들이 사진 찍어서 우리가 맞잖아"라며 벽돌을 던지기도 했다.

이렇게 흥분한 전.의경들에게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시위대가 던진 돌은 다시 시위대로 돌아오기 마련. 이날 전경들은 시위대를 정조준해 돌팔매질을 했고, 돌이 날아들 때마다 한두 명씩 길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렸다.

***공권력의 권위는 품위를 지킬 때**

30분도 채 되기 전 시위대는 강변도로를 모두 빠져나갔고, 경찰은 전열을 다듬었다. 뒤에서 이들을 지휘하던 현장 지휘관이 앞에 나서서 "OOO중대 오늘 정말 잘했다. 귀대하면 포상휴가다"라고 외쳤고, 전.의경들은 "와~"라고 환성을 올리며 '승리'를 만끽했다. 경찰 지휘부도 이날 시위 진압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며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효적절한 시위 진압의 수준을 넘어서서 해산 중인 시위대를 향해 굳이 병력을 투입해 밀어낼 필요가 있었는지, 또 흥분한 전.의경들의 폭언이나 행동을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독려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물론 '맞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정서도 십분 이해하지만 경찰은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다운 품위가 있었어야 할 것 같다. 권위는 스스로 품위를 갖추는 데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2년간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60대 노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전.의경들의 '아픈 경험'이 그들 인생에 어떤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인지, 나아가 현역 군복무보다 왜 전.의경 복무의 '군기'가 더 세고 견디기 힘들다고 하는지를 경찰 수뇌부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찢어지고 부러지고 떨어지고 시위대-경찰 아수라장…같은 시각 궁중요리 만찬**

경찰에 밀려 수영 강변도로를 빠져나온 시위대는 부상자 치료에 여념이 없었다. 보건단체의료연합 등 의료단체들이 치료를 맡았는데, 한 관계자에 따르면 부상자만 60~70명에 달하고, 1명은 의식불명 상태였다가 깨어났으며, 병원에 긴급 후송된 인원만 20명 가량이라고 전했다.

한편 거리에서 시위대와 전.의경들이 이렇게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며 수십 명이 쓰러져 가는 동안, 같은 시각 강 건너 완벽하게 봉쇄된 BEXCO 안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20개국 정상들이 세계적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가면 한국 전통궁중요리로 만찬을 나눴다고 한다. 2005년 11월 부산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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