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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병 국가주의'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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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병 국가주의'는 이제 그만! [기고] 2006 도하아시안게임…선수들이 주인공이다
제15회 '도하아시안게임'이 지난 16일 막을 내렸다. 1974년 팔레비 왕 체제에서 근대화를 추진하던 이란이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이후 중동에서는 32년 만에 열린 도하아시안게임은 역시 서구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카타르의 야심작이었다. '현대화 경쟁'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국 두바이에 한 발 뒤지는 듯하던 도하를 '세계적' 도시로 각인시킨 대회다.
  
  이번 대회는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우선 더욱 강고해진 '절대 강자' 중국의 아성이다. 중국이 2진급 선수들을 내보내 획득한 165개의 금메달은 2위 한국부터 6위 이란까지 5개국의 금메달을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두 번째는 이번에 확실하게 자리 잡은 스포츠에서의 '국제적 노동분업'이다. 인구 70만의 카타르는 이번 대회를 위해 각 종목의 우수 선수들을 돈으로 사들여 출전시켰는데 마라톤에선 아프리카 선수까지 수입했다. 또 개·폐회식 연출은 유럽인, 대회 운영은 호주인들에게 돈 주고 맡겼고 식당 종업원, 청소부, 운전사 등은 필리핀, 인도, 스리랑카, 네팔 등에서 수입해 충원하는 식으로 대회를 꾸렸다.
  
  세 번째는 우리 기초종목의 변함없는(!) 부진과 구기종목의 참패다. 특히 '귀족' 선수들로 구성된 남자축구, 야구, 남자농구의 연이은 패배는 승리 이상의 뉴스거리였다. 차별대우를 당연시 하는 축구대표팀, 대표팀에 선발되는 것에 짜증을 내는 야구선수들, 아시안게임 출전 48년만에 첫 노메달이라는 업적을 이룬 남자농구팀은 참으로 많고도 반갑지 않은 가십거리를 만들어냈다. 대표팀이 어쩌다 운동선수들의 '군면제 프로젝트'가 돼 버렸나.
  
  다시 도진 금메달병
  
  그런데 대회 기간을 관통했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일본을 누르고' '2위 달성'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다시 '금메달병'이 도졌다. 특히 초반에 금메달이 나오지 않고 일본에 뒤지게 되자 아예 까놓고 금메달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는 주체가 아닌, 국가에 금메달을 바쳐야 할 도구가 돼 버렸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기점으로 방송사들은 자랑스런 은메달, 동메달리스트들을 한 순간에 패배자, 역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코멘트를 삼가기 시작했다. 결승에 올랐다가 지는 경우 과거와 같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안타깝습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던 관행을 없앤 것이다. 사실 "금메달보다 더 값진 은메달", "금메달과 다를 바 없는 동메달"을 너무 남발해 좀 '오버' 하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긍정적 변화였다.
  
  과거와 같은 상식 밖의 코멘트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방송중계나 신문보도는 금메달 위주로 가버렸다. 한국선수단의 성패는 오직 금메달 수에 매달려 있었고, 대회 기간 등장한 '인간승리'도 모두 금메달리스트들의 것이었다. 필자가 어제 본 대회 하이라이트 방송도 실은 '금메달 하이라이트'였다. 외국 언론의 경우 감동적인 사연은 금메달리스트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던데 우리는 꼭 금메달을 따야만 '드라마'도 되고 '역경'도 등장하고 감동도 생산되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말이다, '금메달 수'는 '예상'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국가가 아니라 선수들이 주인공
  
  아직도 스포츠를 국위선양이나 국력과 연결시키는 것은 대단히 구시대적 발상이다. 우리가 지지리도 못살고 왜소했던 시절엔 외국에서의 승전보는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지난 월드컵 덕택에 온 국민이 '토고'라는 나라를 알게 된 것처럼 스포츠는 국위를 선양한다. 이는 꼭 이겨야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 쯤 되는 '급'에 오르고서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국위선양이나 국익기여의 정도를 계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주인공임에도 그들을 메달제조기로 격하시키고 일본과의 경쟁에 올인 하는 바람에 선수들의 기량의 경연장이자 드라마틱한 감동의 보고(寶庫)인 스포츠제전을 국가간 대결로 환원시켜 버리는 체육계, 언론, 그리고 우리들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번에 선수단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국민 여러분께서도 일본에 내내 뒤지다가 마침내 역전에 성공하자 안도하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자.
  
  물론 체육계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언론은 이야기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젊은이들의 축제를 국가간 대결로 만들어 버리고, 메달의 빛깔과 수로 평가하고 결론 짓는 행태는 분명 우리가 내던져 버려야 할 구태다. 과거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핵탄두, 우주 개발, 올림픽을 통해 체제경쟁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직도 그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인정받길 바라는 일종의 '인정투쟁'이 지나치다. 우리는 우리가 가난하지 않다는 것을 세계에 보이려 올림픽을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이미 우리는 충분히 인정받았다. 그 이후 올림픽에서 메달도 많이 땄고 축구도, 야구도 좀 하는 나라로 알고들 있다. 그뿐인가. '쌤썽(Samsung)'과 '현다이(Hyundai)'도 이제 웬만한 외국인들에게 일상적 용어가 됐다.
  
  이제 여유를 갖고 스포츠 그 자체를 즐겨도 될만한데도 아직도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스포츠에 '국가'와 '민족'과 '국력' 등을 강제로 주입해서 스스로 흥분한다. 또 박지성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촌평했듯 스포츠는 도구일 뿐 승패만을 따진다. 우리만큼 '몇 등,' '금메달 몇 개'에 집착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국가를 앞세운 지나친 집단주의는 당연히 개인을 말살한다. 오직 성적과 메달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우리 체육계의 관행은 다양한 폭력과 부조리를 방치해 왔고 이에 부응하는 언론은 아시안게임과 같은 축제에서조차 성적에 따라 선수들을 차별한다. 외국에서는 예선탈락도 대중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전달하는데 말이다. 또 오랜 세월 당해 왔다는 인식이 팽배해서인지 뭉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게 곧잘 폐쇄적으로 흐른다. 경기에 지면 희생양 찾기에 바쁘고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까먹는다.
  
  이제 '강박' 버리고 스스로에게 '여유' 선사할 때
  
  이렇듯 스포츠가 집단적, 국가적으로 치달은 이유가 뭘까? 물론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윤치호, 이광수, 신채호 등 식민 시기 계몽주의적 지식인들은 조선의 숭문(崇文)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판단했기에 상무(尙武)를 강조했고 따라서 젊은이들이 체육을 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 스포츠엔 민족의 한과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대한체육회장도 윤치호, 신흥우에서 여운형, 신익희, 조병옥에 이르는 당대의 엘리트들이 맡아 왔다.
  
  1896년 <독립신문>은 우리 학생들이 축구 하는 실력이 일본 학생보다 백배 낫기 때문에 '조선이 암만 하여도 나라가 되겠다'고 썼고 1920년 <개벽>은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는 기사에서 야구, 정구도 좋지만 축구를 해야 다리가 길어지고 튼튼해져서 '민족적 신체 결함'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이광수의 표현대로 '눈동자가 풀렸고 입은 벌어졌으며 (…) 기력이 보이지 않고 안색도 누런 때문에 그 용모에서 쇠퇴, 궁색, 천함이 찍혀 있는 조선인'을 개조하는 데 체육은 급선무였다. 그래서 신채호는 한국 청년의 나약함은 유교 교육이 체육을 배제한 결과라며 대한매일신보에 '덕, 지, 체 삼육에 체육이 최급'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동시에 체육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선진문명 자체와 동일시 되기도 했다.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은 스스로를 '20세기의 스포츠맨'이라 칭했다. 사실 그는 운동을 즐기지도, 잘 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병약해 요절했다. 그는 스포츠를 통해 근대를 갈구했다. 스포츠와 근대를 동일시하고 진정한 '스포츠맨'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조선 말 서구를 알게 되면서 싹튼 열등감이 스포츠에서는 지금도 계속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우리를 우리의 눈이 아닌 '타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럴 것이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그 수많은 나라들 중에 우리만큼 '잘 나가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아무리 말이 많고 못나 보여도 우리는 정치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손꼽히는 나라다. 교육 분야와 사회안정 측면에서도 대단히 성공한 개도국이다.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아마도 대만 정도가 비근한 예가 될 것이다.
  
  경기력 향상은 '저변확대'가 열쇠다
  
  대한 체육회는 이번에 부진했던 종목들과 특히 기초 종목에 대한 대책 마련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책이 '메달 따기'를 위한 소수 엘리트 선수의 집중 육성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변을 확대하는 쪽으로 가야 할 것이고 따라서 생활체육이나 클럽스포츠 지원 등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생활체육으로 돌아섰던 일본이 다시 엘리트체육 육성에 나서서 한국을 다시 추월할 것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우리도 엘리트체육 쪽으로 가야 한다는 논리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이 생활체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엘리트체육 지원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다. 엘리트 쪽도 꾸준하게 지원했다. 일본의 경기력 향상은 바로 그 생활체육 지원의 결실을 이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선수는 저변이 넓을 때 많이 나온다. 브라질에서 호나우두와 호나우디뉴 같은 세계적 선수가 나오는 것은 당연히 많은 이들이 축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황을 감안해 보면 우리에겐 박지성, 이영표 정도가 딱이다. 그래서 하늘은 공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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