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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폭력'이 문제라고? 다들 즐기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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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폭력'이 문제라고? 다들 즐기지 않았나? [정희준의 어퍼컷] 상아탑 폭력의 재구성
스포츠가 그저 '운동'이라고? 아니다. 많은 이들이 보고 즐기고 열광하는 스포츠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스포츠를 해석하면서 이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해 온 정희준 교수(동아대 스포츠과학부)가 <프레시안>에 격주로 칼럼을 연재한다.

문화연대 체육문화위원장이기도 한 정희준 교수는 모두가 침묵할 때 방송매체 등에 의해 상업주의로 물든 월드컵 응원문화를 통타하는 등 한국 사회와 스포츠계가 손잡고 만들어가는 '그늘'에 대해 여러 차례 메스를 가해 왔다. 정 교수는 2004년에는 박찬호와 서태지를 비교하는 글을 써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스스로 선정한 연속칼럼의 문패도 기발하다. <정희준의 어퍼컷>. 스포츠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 혹은 고정관념에 그가 가하는 분석과 문제제기가 권투의 마지막 라운드에 상대방에게 최종적으로 가하는 어퍼컷과 같이 우리의 체증을 쑥 내려가게 만들어주는 통쾌한 펀치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3월 들어 언론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체육대학 신입생에 대한 폭력행사는 특이했다. 우선 수많은 사람과 차가 지나다니는 교문 앞에서 팬티 바람 신입생의 '퍼포먼스'는 엽기적이었다. 나 자신이 체육학과 졸업생이지만 그런 프로그램은 상상도 못했던 바다. 역시 요즘 젊은이들은 독창적이다. 그 정도의 창의력, 본 사람 있나.

세상은 바뀌어도 폭력은 그대로

사실 이번에 (사실은 작년 이 맘 때에도) 문제가 된 K대 체육대학은 박노자 교수가 수 년 전 염려한 바 있다.

"필자는 국내에서 굴지의 체육대학이 있는 곳에서 근무했었는데, 점심 먹을 때마다 체대 학생들과 마주쳤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살아 온 러시아의 문화도 민주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에 열을 지어 '행군'해서 들어오고 선후배 순서대로 차례로 앉고 교수가 나타나자마자 일제히 일어났다가 일렬 전체로 착석하는 체대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재직 중인 학교에도 이번 사건과 유사한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과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가 있다. 입학 전엔 살살 하고, 입학 후엔 제대로(?) 하는 방식이다.

몇 년 전 이 행사의 '정체'를 알고나서야 다른 교수들과, 그리고 학생회와 논쟁을 벌여가며 설득했다. 소통에 장애를 느끼며, 또 '이상한 교수' 취급 받은 끝에 그나마 행사 이름을 '어울림 한마당'으로 바꾸고 행사의 '강도'를 상당히 낮췄다. 사실 그래봐야 '얼차려 한마당'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런데 그 과정에서 특이했던 점은 나이 들고 보수적인 교수들만큼이나 학생들도 이를 지지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3, 4학년들은 압도적 지지였다. 이등병과 병장의 차이인 듯 하다. '고생 끝에 복'이 왔는데 어찌 이를 마다하겠는가.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체대생들의 고교 학업성취도도 과거에 비해 상당히 상승했다. 그런데 이런 '민주화 시대'에 이렇게 '무식'한 폭력적 환영회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3, 4학년생 다수는 왜 이러한 관행이 잘못된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고 꼭 부둥켜안고 있는 것인가.

어쩌다 폭력적 집단주의를 '우리 것'으로 만들었을까

과연 체육대학만의 문제인가? 전혀 아니다. 체대생 아닌 학생들로 구성된 운동부 동아리도 비슷한 의례를 거치는 경우가 상당하다. '운동'엔 뭐가 있긴 있나 보다. 학교 운동부든 운동 동아리든 말이다. 그 안에서는 그야말로 억압뿐 아니라 착취와 차별, 그리고 일상적 폭력을 발견할 수 있다. 연령 또는 학년 차별, 심부름 착취, 성역할 차별, 언어폭력 등 말이다.

운동부나 동아리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예술계 등 '집단 작업'의 특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교수와 학생, 그리고 선배와 후배 간 끔찍스럽게도 엄격한 위계가 존재한다. 어느 예술대 학생은 교수와 시내에 나갔다가 시간을 때우려 백화점에 들어가 '아이쇼핑'을 했는데 교수가 걸어가며 던진 "얘, ○○야. 저 스카프 너무 이쁘지?"라는 말에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그 스카프를 사다 바쳐야 했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자발적 복종이다.

예체능계의 위계는 교수와 학생이라는 도제 시스템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과 학생, 즉 선배와 후배 간에는 더 육체적(?)이고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다. 특히 체육, 무용, 연극 등 집단 작업이 많은 분야는 선후배간 군기잡기와 얼차려 등의 폭력이 빈번하다. 사실 이러한 '군기' 없이 작업은 영 더디기만 할 뿐이다. 결국 '하나' 되길 강요하고 이미 일방적으로 설정한 '집단목표'를 향해 진군할 때 그 집단은 그 어떤 질문이나 이의 제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캠퍼스 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집단성이 요구되고 공동작업이 필수적인 분야는 어디나 마찬가지다. 의대, 공대, 자연대, 농대, 생명과학대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꼭 수술이나 실험이 없어도 대학원이 있으면 또 거기에도 억압과 착취와 폭력이 있게 마련이다. 교수와 학생 간, 그리고 선배와 후배 간에 말이다.

어쩌다 이런 폭력적 집단주의를, 집단적 폭력을, 소위 엘리트들의 공간인 대학 캠퍼스에서 일상화하고 '우리 것'으로 내면화하게 됐을까.

집단주의에 '끈끈함'까지

개화기 외국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왜소함을 알았고 그들의 총칼 찬 모습을 보며 나약함을 느꼈다. 특히 당시 가지게 된 신체적 열등감은 거의 자학과 자포자기 수준으로 외국, 결국은 일본의 지배를 당연시하게 될 정도였다. 그 이후 한편으론 일본엔 '복수'하고, 다른 한편으론 백인들에겐 '인정'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느 쪽을 강조하든 숭문(崇文)을 버리고 상무(尙武)에 열중하며 힘을 합해야 했다. 당연히 군인정신과 집단주의를 강조해가며 열등감을 만회하려 했다.

상무와 근대에 대한 흠모는 통제와 훈육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불러오게 됐고 이는 박정희와 그의 주변의 관료들, 나아가 전두환에게까지 연결되면서 그들이 추구했던 '민족 개조'와 '국민 길들이기'의 텃밭이 된다. 오랜 세월 하나 되길 강요하는 병영국가에서 훈육되며 동시에 길들여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하나됨'을 심하게 좋아한다. 자주 듣는 구호 중엔 '뭉치자'도 있다. 흩어지면 죽는다나(?). 거역하면 왕따 된다. 그리고 그 뭉치고 하나 되자는 곳에는 항상 의식(ritual)이 있다. 문제가 된 체대생들도 바로 이 의식을 보다 더 '의식답게' 하려다 '오버'한 것이다. 물론 오랜 세월 흘러 내려 온 전통에 더 새롭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넣어야 했기에 기예(技藝)에 가까운, 아크로바틱한 동작들도 넣어 안무를 짰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때론 하나됨을 넘어 그 '끈끈함'에 매료되기도 한다. 입으로는 지연, 학연, 혈연을 '공공의 적'이라 떠들면서 별별 모임을 다 만들고 더욱 끈끈해지려 한다.

TV 오락프로그램 중 <보고 싶다 친구야>를 기억하는가. 한 연예인이 야심한 밤 다른 친구 연예인을 얼마나 빨리, 많이 불러내는지 알아보는, 조금은 한심한 프로그램이다. 자기들끼리 노는 걸 바쁜 우리더러 돈 내고 보라는 거다. 그 프로의 어느 구석에 '오락'적 요소가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많은 이들이 보고 즐겼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빨리 많은 친구들을 불러 내는가를 보고 그 연예인의 '끈끈함'을 평가했다. 혹시 우리는 이것으로 그의 인간됨을 평가하지는 않았는가. 한번 되새겨 보시라.

폭력을 '환영'으로 둔갑시키는 이름의 미학

이번 체대 폭력 사건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제까지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주목을 받는가. 물론 작년에 이은 2탄이라는 점도 있고 대낮 길거리에서 벌거벗은 선정성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못된 관행이 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져 온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 그것을 용납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불법, 탈법, 폭력, 갈취인데도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 오랜 세월 이심전심 모른 척 해줬다.

한바탕 소동이 이미 있었지만 예를 들어 '원조교제'도 그런 것이다. 소머리국밥도, 족발도, 닭갈비도 아닌 그것 어느 구석에 '원조'가 있고 '교제'가 있는가. 그러나 우리 어른들끼리 즐기고 탐닉하고 있는데 괜히 쑥스러우니까 '원조교제'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여 스스로 안위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촌지'도 마찬가지다. 사실상의 뇌물로 다른 직종이었으면 당장 구속감인데 이 사회의 선생님들은 50만 대군의 '빽'을 배경으로 엉뚱한 이름을 가져다 붙여 놓고 그 단맛을 쪽쪽 빨고 있는 것 아니었나.

모른 척하는 교수님들, 심하게 비겁하시네

마르크스의 이야기처럼 인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만적 폭력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하고 거시적인 폭력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호들갑을 떨면서 우리 주변의 일상적 폭력엔 관대하다. 또 가끔씩은 요상한 목적성을 부여하면서 폭력을 합리화해 준다. 그게 아니라면 학교에서, 가정에서, 군대에서 벌어지는 그 무수하고도 '무시무시한' 폭력이 어떻게 아직도 용인되고 있을까.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한 주변의 폭력을 내재화시키고 용인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확산하고 재생산해 왔다. 단합을 위해, 예절을 위해, 하나 되기 위해 '어울림 한마당,' '하나되는 시간,' '신입생 환영회' 같은 황당한 제목을 가져다 붙이고는 문 걸어 잠그고 후배, 그것도 신입생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은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라 모두 어른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타협의 대상도, 두 번 생각할 일도 아니다. '아름다운 살인'이란 것이 있을 수 없듯이 선배든 남성이든 교수든 사랑을 이유로, 교육을 이유로, 하나됨을 이유로 때릴 수는 없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다. 특히 제자들끼리 치고받고 하는 걸 모른 척 했다가 군기 다 잡히고 나면 등장해서 위세 부리는 교수님들, 창피한 줄 아시길 간곡히 바란다. 심하게 비겁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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