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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프로토타입, 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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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프로토타입, 차범근 [별을 쏘다②] 그때 우리는 그를 보는 재미에 살았다
1970년대는 '멸공'과 '수출입국'의 거대한 현수막이 온 나라를 뒤덮었던 시기다. 밖으로는 '북괴'의 남침 야욕을 경계하고 안으로는 땀흘리며 개미처럼 일하고, 악착같이 저축해야 할 때였다. 당시 1등 '수출역군'은 전국의 '공단'에서 밤낮 없이 일하던 앳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만든 가발과 의류는 당시 금보다도 소중했던 외화를 벌어 들였다.

이러한 '전형적' 양식의 외화 획득도 있었지만 이보다 더 적극적인 외화벌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인력 수출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 서독으로 '수출'된 간호사가 1만 명, 광부가 8000명이었다. 서독 정부는 이들의 노동력을 담보로 1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당시 광부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돈이 국내 GNP의 2%에 달했다는 사실에서 보듯 그들은 남한이 이룩한 경제신화의 종자돈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1978년 광부도, 간호사도 아닌 전혀 새로운 상품(?)이 서독으로 수출된다. 사실은 국보였다. 그리고 국가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위선양을 위해서였다. 바로 차범근이라는 축구선수. 그의 허벅지는 보통 사람 허리 굵기라 평가됐고 11.3초라는 그의 100m 기록은 온 국민이 알고 있었다. 축구 기술도 아시아 최고였지만 특히 그의 신체는 우리가 세계에 내 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머신(Machine)'이었다.

차범근, 그는 곧 한국 축구
▲ 차범근 감독 ⓒ연합뉴스

그 시절 차범근은 우리의 우상이었다. 차범근이 골을 넣은 경기를 본 다음 날, 학교에 가면 다짜고짜 "어제 봤어?"로 하루가 시작됐다. 하교길 친구와 돌멩이 차며 집에 가면서도 차범근 얘기였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1972년, 열아홉 대학 1년생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된 그는 곧 초아시아급 선수가 된다. 당시는 국민들이 보고 즐길 거라곤 고교야구와 박스컵 축구(Park's Cup·'박정희배' 국제축구대회) 뿐인 시절이었다.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배 축구대회, 태국의 킹스컵 축구대회와 함께 아시아 3대 축구대회였던 박스컵은 사실상 국민행사였고 온 국민이 즐기는 (사실 '여자 빼고'였지만) 스포츠 이벤트였다. 1976년 당시 언제나 껄끄러운 상대였던 말레이시아에게 6분 남기고 4 대 1로 뒤진 상황, 차범근은 혼자 세 골을 몰아쳐 동점을 만드는 드라마로 국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떠밀기도 했다.

혼란의 시대여서 그랬는지 방송국도 그 경기의 테이프가 없다 하고 차범근도 두골은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 한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기억이 없다고 한다. 이 경기는 필자도 '마루'에서 혼자 흑백텔레비전으로 시청한 경기였는데 말레이시아의 골은 기억이 나는데 차범근의 골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흥분을 넘어 광분한 탓이리라.

한국을 알린 최초의 한국인

1978년 서독에 진출한 차범근은 군복무 문제 때문에 다시 귀국해 공군에서 군복무를 완전히 마치고 1979년 다시 독일로 가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한다. 한국 스포츠선수로서는 최초로 외국에 진출한 것이다. 서독에 진출한 그는 곧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다. 79~80시즌 12골로 득점 7위에 오르면서 독일 언론으로부터 '차붐'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또 독일에 먼저 진출한 일본 대표 출신 오쿠데라가 속한 FC쾰른과의 첫 대결에서 두 골을 터뜨려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세웠고 고국에 계신 우리들을 즐겁게 했다. 89년 서른일곱에 은퇴하기까지 11년 동안 말이다.

요즘 젊으신 분들 중엔 분데스리가에서의 차범근의 활약에 의문을 표하시는 분들이 있나 보다. 차범근의 탁월함을 어떻게 객관화 하고 수치화 할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하지만 이 정도면 어떨까? 80년 세계축구 베스트 11,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키커지 선정 '8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 그리고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서 연봉 랭킹 3위. 아직 부족한가? 그럼 FIFA 선정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 '20세기 세계축구를 움직인 100인' 같은 건? 이 정도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분은 독일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 하시는 수밖에 없다 하겠다.

그리고 차범근을 박지성, 이동국 등의 선수들과 비교하시는 분들이 있는 듯하다. 죄송하지만 '비교불가'다. 서독에서 그의 귀화를 논할 정도의, 유럽 최고의 공격수였다. 그는 유럽에서 '꼬레아'를 알린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지금과 같은 미디어의 난리법석이 없던 시절,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들이 하도 많아 MBC는 그의 경기를 녹화해 매주 방영하기도 했다. 백인들 틈바구니에서 그라운드를 휘젓는 '갈색폭격기'는 우리의 가슴을 펴게 해 주었다. 그의 등번호였던 11이라는 숫자는 희망, 탁월함, 승리, 태극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개발'시대와 '소비'시대의 연결고리

그는 우리가 그토록 흠모하던 '국제적'으로 '우수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당시 사회가 절실하게 요구했던 '강인함'의 표상이었다. 그의 몸은 당시의 이상형이었다. 179cm의 큰 키, 남들 허리만 하다는 허벅지, 그 신체가 창출해내는 100m 11초 3의 아름다움, 그리고 작지 않은(?) 얼굴에 스포츠형 짧은 머리는 그 시절 '한국형 남성상'의 대표격이었다. 지금이야 비, 장동건, 권상우, 원빈 등 곱상한 얼굴의 연예인이 추앙받고, '몸만들기' 때문에 몸에다 돈을 쳐바르기도 하지만 차범근의 시절은 달랐다.

워낙 못 먹고 헐벗었던 시절 선망하는 남성의 모습은 영화배우 이대근과 탤런트 백일섭 같은 남자들이었다. 남자는 어딘가 넉넉해 보여야 했고 그래야 인물도 좋아 보였고 '정력'도 있어 보였다. 그래서 이대근은 에로 영화계 최고의 배우였고 백일섭은 대웅제약을 일으켜 세운 '피로회복 간장약 우루사'의 간판 모델이었다. 그런데 80년대 서양의 선진국 독일에서 활약하며 백인들을 주눅 들게 했던 차범근의 몸은 이대근, 백일섭의 몸과는 또 다른 몸이었다. 더 균형 잡히고 서구적(?)인 몸이었다. 미래지향적인, '프로토타입(prototype) 몸'이었다.
▲ 남성화장품 광고모델 시절 차범근 선수 ⓒ프레시안

유럽에 진출해서는 유행을 앞서 가기도 했다.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던 '바가지머리'를 하고 방한 하기도 했다. 비록 그 머리가 국내에서 유행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서양에서도 인정 받은 원조 '몸짱'이다. 요즘과 같은 미디어시대 안정환이 아무리 인기가 있고 남성화장품 모델로 이름을 날리더라도 그는 차범근이 발자국을 따라갈 뿐이다. 이미 그 20여년 전에 차범근은 피어리스 남성화장품 광고 모델이었다.

그 시절 광고를 찍은 운동선수는 대부분 복싱 세계참피언들이었다. 그런데 불굴의 투지와 헝그리 정신으로 세계 최고의 경지에 오른 복싱 챔피언들이 등장한 광고는 거의 모두 경기 장면이거나 두 주먹 불끈 쥐고 수그린 얼굴에 불타는 듯한 눈매를 연출하며 수출입국을 다짐하거나 '체력은 국력'을 호소했다.

그러나 차범근의 이 광고는 운동선수로서는 의당 지녀야 할 국가주의적 강박이나 남성우월적 과시의 부담을 떨쳐 버리고 다소 어설펐지만 친근감과 섹시함으로 다가가려 하고 있다. 개발독재사회에서 소비사회로 진화하려는 시대적 조짐을 엿보게 한다. 사실 그가 독일에 진출하며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한 7800만원의 연봉, 이후 레베쿠젠에서 받은 억대 연봉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는 대기업 임원 월급이 50만원 정도일 때였다.

11번의 날개 없는 추락

차범근은 원래 무덤덤해서 눈치 빠른 사람도 아니고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니다. 고려대 1학년 때 연고전에서 싸움이 났는데 눈치 없이 혼자 벤치에 남아 있다 이후 일주일 동안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그이기에 언론과 사이가 안 좋은 경우도 있었고 때론 심하게 당하기도 했다.

서독 시절 유럽에 온 네 명의 기자들이 취재를 이유로 차범근에게 여비를 제공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를 거절한 이후 국내에서 상당 기간 험담 수준의 기사가 나간 것이 하나의 예다. 1997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승승장구 할 당시, 승리의 근원을 몽땅 하나님께 몰아 드리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버리는 바람에 신문 지면을 통해 김용옥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때는 솔직한 반박문으로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도쿄대첩의 영웅 차범근을 나락으로 내던진 사건은 프랑스월드컵에서의 참패일 것이다.

사실 그 책임을 왜 차범근 혼자 뒤집어 써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지만 그는 결국 대회 기간 중 해임 되고 벨기에 전을 앞두고 홀로 귀국한다. 생각해 보면 축구협회도 비겁했고 우리들도 경솔했다. 협회는 '원래 우리는 잘 하는데 쟤 때문에 졌다'며 책임을 전가한 것이고 우리는 차범근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마구 패고 씹고 했던 것이다.
▲ 1997년 당시 프랑스월드컵 기간 도중 해임돼 귀국했던 차범근 감독 ⓒ연합뉴스

그러나 정작 그가 이 땅에서 사는 것조차 어려워 중국으로 도피해야 했던 이유는 프랑스월드컵 직후 8월 <월간조선>에 축구계 승부조작을 폭로하면서다. 사실 차범근은 그에게 '은인'인 장덕진 전 축구협회 회장의 아들로 '인사차' 집에 온 <월간조선>의 장원준 기자를 믿고 미주알 고주알 축구계 사정을 이야기 한 것인데 이를 정식 인터뷰로 간주한 장 기자는 모든 내용을 기사화 한다. 1년 전만 해도 '대통령' 이야기가 나오던 차범근이 월드컵에서의 2패로 인해 '역적'이 되더니 이젠 축구계 내부의 문제를 외부에 까발린 '배신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차범근이 무참하게 박살이 난 또 다른 이유는 인터뷰 내내 옆에서 거들고 끼어든 아내 오은미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었다. 차범근이 잘 나갈 땐 오은미도 존경의 대상이었고 바람직한 여성상이었다. 그녀의 '적극적인 내조'에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표했고 억대의 광고출연료도 받았으니 그녀의 이미지는 상종가였다.

그러나 '남자들'이 '축구'를 이야기 하는데 그녀가 끼어들어 축구계의 비리를 나서서 폭로한 것은 한국 남성들의 뇌관을 건드린 꼴이었다. 덕분에 차범근은 아내에게 휘둘리는 '못난 남성'의 전형이 됐고 오은미는 설치는 여성, 남편 발목 잡은 여성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여성으로서의 의무를 구분 못하고 나선 그녀'를 나무라는 신문 사설이 등장하기까지 했는데 그녀에 대한 반감이 워낙 강력해 여성계는 숨죽이게 됐을 뿐 아니라 여성계 인사조차 오은미를 비판하게 된다. '영웅'은 역시 그 사회의 가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걸까.

쌩큐~ 차범근

이제 감독으로서 승부하는 차범근. 베켄바우어와 플라티니는 행정가로서 그들의 전설을 이어가고 있기에 차범근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왜 우리나라는 훌륭한 선수들이 감독의 길로만 몰려드는 걸까? '행정'이 홀대 받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그가 감독으로서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실 아니어도 좋다. 그가 모든 걸 다 가져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그때 그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좋았다. 골목에서 '또옹~퍼'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던 흑백 시절, 살기가 조금은 피곤했던 시절이지만 우리는 그를 보는 재미에 살았다. 차범근. 쌩큐~ 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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