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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넘어 더 큰 별로 뜬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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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넘어 더 큰 별로 뜬 전설 [별을 쏘다·22·끝] '국보투수' 선동열을 말하다
1997년 4월 4일. 요코하마와의 나고야 홈 개막전에서 3대 2로 앞서가던 주니치는 9회초 투아웃 수비에서 3루까지 진루를 허용하며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그 순간 교체되어 마운드에 올라서는 선동열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시범경기에서 팀내 불펜투수중 가장 많은 이닝을 등판하며 테스트를 받은 끝에 간신히 '재신임'을 받아 올라선 무대였다. TV 앞의 팬들 역시, 그를 응원해온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초구 스트라이크. 역시, 올 해는 다르겠지. 팬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다음 순간, 그가 몸 쪽을 붙인다고 던진 직구가 포수 미트를 스치며 뒤쪽으로 빠져나갔고, 3루 주자가 홈으로 쇄도해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스크를 집어던진 포수가 뒷 쪽으로 달려 나가고, 다시 선동열이 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멀지 않은 곳에서 공을 집어든 포수의 송구가 홈에 지키고 서있던 선동열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순간, 이미 3루 주자의 발은 홈베이스로 밀려들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뒤늦게 태그한 글러브를 들어올리며 주심을 바라보는 선동열. 아, 다시는 볼 수 없을 듯 얼어붙어있던 선동열의 얼굴.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자리에서 안타도 아닌 폭투로 팀 승리를 날려버리는 어이없는 상황.

그랬다. 친절한 일본 중계화면의 느린 반복화면이 아니더라도 분명한 득점이었다. 그러나 무엇에 씌었던지, 아니면 평생 처음일 지도 모를 선동열의 갈구하는 표정이 환각을 일으켰던지 주심은 우렁찬 목소리로 아웃사인을 내렸고, 경기는 그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길길이 뛰어오르며 기뻐하는 선동열. 그러나 화면 앞에서 눈가의 웃음과 입가의 씁쓸함이 일으키던 어색한 충돌의 서먹한 느낌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

한국야구의 전설
▲ 1996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시범 경기에서 투구하는 선동열 ⓒ연합뉴스

선동열이라는 이름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 속에 누구도 넘볼 수 없이 높이 솟아오른 아성이자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그 누구의 근접도 허용하지 않은 압도적인 강자였을 뿐 아니라, 사라져간 뒤에도 아주 오랜 기간동안 도전의 목표물이 되고 존경과 경이의 대상이 될 만한 업적으로 남겨져있기 때문이다.

선동열. 굳이 그 공의 빠르기와 묵직함, 변화구각의 날카로움을 미사여구로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의 위대함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기록표에 적힌 숫자들의 '때깔'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선발투수로서 세 번 올랐던 20승 고지와 마무리투수로서 사상 최초로 기록했던 40세이브포인트를 비롯해 통산 146승과 132세이브를 올렸고, 투수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부문에서 통산 1위에 오른 채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물론 그 뒤로 한국 프로무대에서만 그보다 두 배 가까이 오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송진우를 비롯한 몇몇 후배들에게 다승과 탈삼진 등의 기록을 넘겨주고 있지만, 앞으로 그 누구도 절대 깨지 못할 기록들 역시 수없이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통산 2위 윤학길보다 10개나 많은 무려 29번의 완봉승 기록이 그렇고, 무려 세 번이나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던 업적이 그러하며, 11년간 한국무대에서 기록한 통산 1.20이라는 눈부신 평균자책점이 그렇다. 물론 피안타율, 피홈런율 같은 자잘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기로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의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 보든 우리 현대사의 무시 못 할 중대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중심에 선 해태 타이거즈라는 무적함대가 야구장을 휩쓸며 호남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야구팬들에게 차례로 패배의 쓴맛을 선사했기 때문이며, 반대로 정치 경제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왔던 한의 땅 호남 민중들에게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시원한 속풀이의 장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1980 ~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으는 곳은 다름 아닌 야구장이었다. 주말이면 흔히 그곳으로 암표상들이 몰려들었고, 홈팀이 납득 못할 무기력한 패배라도 당하는 날이면 상대팀 선수단 버스가 불타기도 했으며 홈팀 선수단의 해명과 석고대죄를 요구하는 군중들이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쳐대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타이거즈가 압도적인 위력으로 대구와 대전과 서울의 팀들을 연달아 무릎 꿇리던 그 때, 때로 넘치게 달아오른 야구장 한 켠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김대중'이라는 구호가 외쳐졌는가 하면, 야구장 앞 포장마차에서는 감격의 환호 뒤끝으로 '여기서라도 기를 펴니 살 것 같다'며 주책없는 눈물을 훔쳐내는 전라도 사투리들이 밤늦도록 낮게 메아리치곤 했다.

저항의 시대, 야구장의 독재자

대개 운동장의 열기는 거리와 광장의 열기에 반비례하는 것으로 읽히곤 한다. 그래서 변혁을 설계하는 이들로서는 대중들에게 지나치게 매력적인 스포츠가 참 골치 아픈 적이었으며, 반대로 정치적 비판의식의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에게는 만만하게 써먹을 수 있는 편리한 면피도구로 여겨지곤 했다. 어차피 80년대 초반 이 땅에서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의 프로화가 시작된 내력 역시 살육의 핏자국을 지워보려 했던 쿠데타 세력의 정치공작에 뿌리박혀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1980 ~ 90년대 야구장에서의 타이거즈 열풍은 호남 민중들의 정치적 저항의식에 놓은 마취제였다기보다는 그들이 끝내 자존감을 놓지 않으며 부도덕한 국가권력의 희생양이라는 공감으로 조용히 뭉치고 버텨낼 수 있게 해준 하나의 청량제였고 시원한 해갈의 냉수 한 모금에 가까웠다. 2002년의 여름의 월드컵이 그 해 겨울의 광화문을 밝힌 촛불의 심지가 되고 연료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선동열이 입단 2년을 맞아 0점대 평균자책점으로 24승을 거두며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86년에 팀의 두 번째 우승을 이뤄낸 타이거즈는 그로부터 무려 4년 동안이나 그 자리를 내놓지 않았고, 그 뒤로도 한 해 건너 한 번씩 91년과 93년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선동열이 해태 타이거즈에서 뛴 11년 동안 모두 6번이나 우승을 했던 셈이다.

그 사이 선동열이 가장 부진했던 것은 2.73까지 평균자책점이 '치솟았던' 94년, 그리고 평균자책점은 불과 0.28밖에 되지 않았지만 부상으로 32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던 92년 정도였다. 그는 선발로 나서면 언제라도 20승을 기록할 수 있었고, 마무리로 돌아선 뒤로는 40개 안팎의 세이브포인트를 기록했다. 그는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상대 타선에 조급증을 유발시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투수였고, 김응용 감독은 그 점을 십분 활용해 시도 때도 없이 불펜에 그를 올리는 심리전을 폈다.

그 시절, 시즌 초반 '야구전문가'들의 한 해 예상평은 별 것 없었다. 뚜렷한 전력보강에 성공한 두어 팀을 거론한 다음, 과연 그들이 해태 타이거즈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마무리하면 거의 적중률 100%였기 때문이다.

영원한 강자는 없다

그러나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말이 진리인 이유는 역사에 다시없을 월등한 재능과 기량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자만', 그리고 그보다도 더 두려운 '무료함'마저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동열, 그래서 해태 타이거즈의 질주는 거침이 없었고 끝이 없었다. 그러나 십여 년간 이어진 독주는 달리는 이에게나 좇는 이에게나 무료한 것이었다.

평균자책점이라는 영역에서 이미 전무후무할 철옹성을 쌓아놓은 데다가 김시진과 최동원이라는 선배가 지키고 있던 통산 최다승과 통산 최다탈삼진의 고지마저 함락시켜버리고 팀의 우승이라는 과업마저 배가 부를 지경으로 포식한 선동열은 무기력증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선동열의 호투는 뉴스가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고, 그는 난조를 통해서만 뉴스를 생산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선수였다. 이 땅에서 그가 탐 낼만 한 목표는 이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무렵 정치권에서는 김대중이 영남의 거부감을 깨나가는 대신 충청권과의 연합을 통해 우회하고 포위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듯이, 야구장에서는 거꾸로 상대 타자와 구단들이 더이상 선동열 파해법을 찾기보다는, 선동열과의 대결을 포기하고 피해가는 걸로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투수 한 명이 모든 경기를 던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저 선동열이 마운드를 비운 사이 최선을 다해 승부를 결정짓는 데 전념했다. 더 이상 누구도 선동열의 공을 노리지 않았다.

선동열은 굳이 새로운 구질을 개발할 필요도 없었고, 또 굳이 인심 잃어가며 타자의 몸으로 공을 바짝 붙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마음 편하게 던져보다가 혹시나 싶을 때 여느 투수들의 직구보다 빠르면서도 어느 투수의 것보다도 날카로웠던 슬라이더, 그리고 시속 150킬로미터를 훌쩍 넘는 비현실적 스피드의 속구 한두 개로 삼진을 솎아내면 그만이었다. 승부에 영향이 없겠다 싶은 상황이면, 타석에 들어선 대학 선후배들에게 밋밋한 직구를 던져 안타를 선심 썼던 것도 그 시절이었고, 경기 당일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마운드에 올라 완봉승을 거두며 상대 타선에 몇 갑절의 모욕감을 선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더 이상 목표를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은, 진심이더라도 쉽게 꺼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선동열일 때 문제는 조금 달랐다. 정말 10년이 넘도록 지겹게 혼자서만 달려온 길의 외로움과 무료함, 그것은 '국보'라는 호들갑스런 별명으로 치켜세워준다고 해도 달래질 수 없는 것이었음을 팬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진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당혹감

해태 유니폼을 입은 선동열이 가장 집중해서 공을 던졌던 경기는 한일슈퍼게임이었다. 그것은 일본야구라는 흥미로운 고지로의 등정이었고, 또한 일본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향한 막연한 구애의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91년 한일슈퍼게임 5차전에서, 발목부상에도 불구하고 선발로 나서는 간만의 투혼을 발휘한 선동열은, 당시 일본 타격 트리플크라운에 빛나는 오치아이를 시작으로 5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최종전에 이어 일본 프로야구가 십 년을 두고 선동열을 재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선동열은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했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최강팀 미국을 상대로 11개의 삼진을 잡아냈던 19살 때부터 외국 팀들의 구애를 받아왔던 그는 병역, '노비문서'라고 불렸던 꽉 막힌 프로계약, 그리고 고향 팬들의 부담스런 기대와의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1995년에 드디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임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선동열의 호소에, '국보가 유출'되어 '왜놈들 노리갯감으로 전락'한다며 흥분했던 야구팬들의 마음이 드디어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바지자락을 잡고 늘어지던 해태 구단의 대국민설문조사에 구단의 기대와는 달리 80% 가까운 이들이 '일본진출 찬성'이라는 몰표를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의기양양 건너간 일본 땅에서 선동열은 일생일대의 험한 도전에 직면하고 만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한국의 야구팬들도 일대 혼란과 악몽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첫 해인 96년 마무리로 나서 거둔 성적은 단 세 개의 세이브와 5.50의 평균자책점이었다. 그 해 그가 단 54이닝을 던지며 허용한 33개의 자책점은, 한국에서 262이닝을 던졌던 86년에 허용한 자책점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즌 중 '2군'이라는, 일본보다도 낯선 공간에 몸을 담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애초에 그의 일본 진출을 언론에서는 '남벌'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남방 일본의 야구를 납작 무릎꿇게 하라. 그러나 선동열이라는 이름의 원정대는 일본땅에 발을 딛는 동시에 봉쇄되어 포위공격을 받았고, 그대로 무력화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대로 충격이었고, 열패감이었다. 그를 좋아했던 이들 뿐 아니라 그를 죽도록 미워했던 대구의, 부산의, 대전의, 서울의, 인천의 야구팬들에게도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낭패였다. 최소한 선동열이라면, 그렇게 자신들의 영웅을 무참히 밟아버리고 간단히 한국무대를 평정해버린 선동열 정도라면 일본무대에서 최고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무너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발끝의 티끌만큼도 따라오지 못할 풋내기 대학생 박찬호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10승대에 올라선 것에 그대로 의지해 '메이저리그로 가더라도 당장 사이영상을 차지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투수'로 믿어지던 선동열이었다. 그러나 그는 매 경기 난타당해 국내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풀죽고 불안한 표정으로 공을 넘기고 밀려 내려가는 모습을 되풀이했다.

꽤 많은 영역에서 그렇듯, 일본은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높은 수준의 야구리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그 수준차가 한국의 '국보' 선동열조차 '2군' 쯤에 줄을 세울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지레 '선동열'이라는 이름 앞에 미리 무릎 꿇던 한국인 타자들 속에서 수년간 무뎌져왔던 칼날로 갑작스레 냉정한 전장에 나서면서 느껴야 했던 당혹감이었으며, 목표를 잃은 포만감 속에서 잃어버린 전투본능과 전투태세의 증거였다.

배부른 맹수에서 날 선 야수로
▲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 감독. IMF 당시 '재기의 신화' 선동열이 그의 좌절만큼이나 어이없이 밀려내려가던 한국인들에게 던진 희망은 그의 직구만큼이나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뉴시스

96년 시즌이 끝나고, 한 차례 독한 심정으로 쌌던 짐을 더 독한 마음으로 풀어놓은 선동열은 그의 삶에 가장 가치있는 도전을 감행했다. 스프링캠프에서는 해태 시절의 10배 가까운 3000개의 공을 던졌고, 휴가기간도 루키군 투수코치를 붙들고 늘어져 개인훈련으로 채웠다. 허리둘레가 줄었고, 투구폼이 바뀌었으며, 눈빛과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그 시간동안 배부른 맹수에서 시퍼런 눈빛의 야수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97년 개막전에서의 찜찜한 첫 세이브.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찜찜함 대신 '올 해는 뭔가 되겠구나' 하는 직감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것은 그 돌발적인 상황을 행운의 증거로 삼아 마음껏 풀어놓을 실력을 비축한 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의 다른 느낌이었다. 흔히 강타자들의 슬럼프를 끝내주는 것은 호쾌한 장외홈런보다는 구질구질한 '바가지 안타'인 경우가 많듯이 말이다. 선동열은 그 첫 등판에서 거저 주운 세이브를 밑천 삼아 그 해 39세이브포인트와 1.28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시즌 내내 홈런을 단 한 개도 내주지 않는 '원래의 선동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듬해인 98년도 32세이브포인트와 1.48의 평균자책점. 서른 일곱에 접어들었던 그의 마지막 해 99년에는 조금 주춤하면서도 29세이브포인트와 2.61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팀의 우승. 해마다 '일단 앞선 경기는 그대로 끝내주는' 선동열은 일본인들에 의해 한국 시절 가졌던 별명 '무등산 폭격기'보다도 더 호들갑스런 '나고야의 태양'으로 추켜세워졌다.

'최강의 신화'보다 값진 '재기의 신화'

내친 김에 달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멈추어 섰다가 다시 달리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정상에 오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밀려난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대개의 경우 불가능할 만큼 힘겨운 일이다. 따라서 선동열의 투수인생에서 위대했던 순간이 있다면, 그의 모든 찬란한 기록들이 수립되던 순간 앞에 96년과 97년 사이의 시간들이 놓여야 옳다.

그는 오기의 투혼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살렸으며, 그 뒤로 수십 년간 후배들에게 부딪쳐 대결할 만한 목표를 제시해주었다. 결국 재기에 성공함으로써 그가 앞서 쌓아올린 업적들은 거미줄 가득한 허탈한 옛 고지가 아니라, 기꺼이 바라보며 딛고 올라설 단단한 벽이자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렵, 현해탄 건너 IMF라는 날벼락이 떨어진 한국땅에서, 어설픈 돈맛에 흥청거리다가 갑작스런 추락에 당황하던 한국인들에게 최소한의 자존감과 희망을 지켜준 것은, 메이저리그 10승대의 박찬호와 더불어 그 선동열이었다. 특히, '재기의 신화' 선동열이 그의 좌절만큼이나 어이없이 밀려내려가던 한국인들에게 던진 희망은 그의 직구만큼이나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세상 어느 구석에 야구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했던 선수가 하나 있었음이 무엇 그리 큰 일이랴 싶을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야구공 한 번 만져볼 일 없이 살아가며, 야구장에서 밥도 떡도 나오지 않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내 생각에 선동열쯤 되는 신화를 가진 한국야구와 야구팬들은 운이 좋다. 그 이름이 그저 재능과 능력, 그래서 입이 떡 벌어질 강력함만이 아니라 끝내 고개 숙여지지 않는 잔인한 좌절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 그리고 투지와 희망까지 새겨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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