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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IMF 10년…'불안'에 녹슨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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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IMF 10년…'불안'에 녹슨 일상" ['87-'07, 일상의 혁명⑨·끝] 세대간 좌담
1987년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프레시안>과 문화사회연구소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상의 혁명'이란 주제로 8회에 걸쳐 지난 20년간 우리 일상 속에서 일어난 변화의 양상을 살펴봤다.

'PC통신에서 웹2.0까지', '학력고사에서 논술까지', '배낭여행에서 올빼미 투어까지', '6월 항쟁에서 월드컵까지' 등 다양한 주제로 전개된 이번 기획에서는 6월항쟁 이후 '혁명'처럼 빠르게 전개됐던 일상 속 변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마지막 순서로 1987년 당시 대학생부터 2007년 현재 대학생까지 각기 다른 세대에 속한 이들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좌담을 마련했다.

서로 다른 시대라는 배경을 가진 이들은 <프레시안> 기획에 대한 평가와 함께 각자 느끼는 20년간 사회문화적 변화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떤 부분에서 일치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1987년 이후 우리 사회가 굉장히 빠르게 변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권위주의,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 등 '변하지 않은 것'들로 표현되는 사회의 정체성이 너무 강하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또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관심사가 '먹고 사는 일'에 치우쳐져 있는 사회 분위기는 문화의 질적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라는 지적도 함께 제기됐다.

지난 7월 18일 <프레시안> 사무실에 진행된 이번 좌담에는 1987년 당시 대학생으로서 6월항쟁을 경험한 소민호 일간건설신문 기자, 소위 'X세대'라는 표현이 유행하던 1990년대 초반에 20살을 맞았던 연구공간 '수유+너머' 정정훈 연구원,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를 지난 2000년대 대학에 입학한 국제평화단체 아레나(ARENA) 이안지영 간사, 그리고 지난해 성공회대에 입학한 박조은미 씨가 참석했다.

"소수자의 문화, 개인의 문화가 보다 존중받는 사회"

▲ ⓒ프레시안

<프레시안>:
이번 기획은 87년 이후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돌아보는 것이었다. 기획에 대해 짧은 평을 해준다면.

이안지영: 저에게는 이 기획이 약간 식상했다. 대학에 들어왔을 때 이미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시기였다. 문화라고 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류문화, 소수문화를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주류문화 위주로 서술된 글도 눈에 띄었다.

소민호: 온고이지신이라는 말도 있듯 과거를 돌아보며, 어찌보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변화를 통해 전체적인 변화를 본다는 시도가 괜찮았다.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구체적인 의식주의 변화에 대해 좀 더 많이 다뤘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점이다.

박조은미: 문화변동 속에서 보여지는 사회적인 변화는 최근 생각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1987년 상황을 모르니까 새로운 게 많았다. 표면적으로 문화의 변화가 크다고 보는 분야가 '성의 문화'다. 그 부분이 다뤄지지 않은게 아쉬웠다.

<프레시안>: 각자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20년간 문화적 변화는?

이안지영: 우선 인권, 장애인, 동성애 등 '소수자의 문화'가 수면 위로 등장할 수 있었던 점이다. 1987년 당시에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사람들이 뭉쳤고 그 안에 있던 차이가 부각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하면 큰 변화다.

소민호: '다양화'다. 권위주의, 독재 정권이 일방적으로 문화를 심어주려고 했던 데 대한 반발로서 그런 시도가 있었다고 본다. 1987년 6월항쟁은 사회적 의견이 결집돼 변화를 이뤄내며 성취감을 가져왔고 그것이 소수자에게도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본다.

정정훈: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 굉장히 대중화됐다는 느낌이다. 문화는 일상이라는 생각이라던지, 자신만의 문화, 기호,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노래방이 등장하고, TV 오락프로그램의 형식이 바뀌면서 모든 국민의 '개인기' 현상이 나타났다. 또 이제는 모든 국민이 UCC의 주체가 됐다.

또 가족이나 지역 사회가 아닌 다른 형태의 공동체가 가능해졌다.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교회나 학교, 동네 친구들이 중요했다. 그런데 PC통신이 발달한 이후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자발적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게 됐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됐다는 점이다. 사실 이제 수입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문화적 향유가 가능해졌다. 내 경우에도 수입이 많진 않지만 먹고 살기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데 곳곳에서는 먹고 사는 얘기가 가장 큰 화두다. 예전에 이런 때가 있었나. 먹고 사는 문제가 일상을 구성하는 정치의 핵심으로 들어온 것 같다.

"권위주의, 그리고 변하지 않는 풍경들"

▲ 소민호 일간건설신문 기자 ⓒ프레시안

<프레시안>:
그렇다면 20년간 '달라지지 않은 문화'를 몇 개의 키워드로 꼽아본다면.

소민호: 정치, 교육열, 권위주의라고 생각한다. 정치 철새 같은 행태는 20년 전과 똑같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도 마찬가지다.

권위주의도 여전히 존재한다. 조직문화를 뛰어넘어 교통 문화에서까지 그렇다. 일상적으로 자동차는 자본의 산물인데, 이것이 개인의 삶의 공간, 패턴, 행동양식까지 제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행자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여건이 여전히 어렵다는 것도 권위주의의 한 형태라고 본다.

정정훈: 외제차와 사고가 나면 보험처리가 안되는데, 한 친구는 '외제차 전용도로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전형적인 신분사회의 논리다. 대중 스스로 피하게 만드는 형태의 차별화된 자본들, 일상적인 자본들이 굴러다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이안지영: 저도 변하지 않은 문화로 권위주의를 떠올렸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일상의 성폭력, 서구에 대한 동경, 권위주의다. 이 셋의 공통점은 사람을 위계화, 서열화 시키고, 그 안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거다.

성형수술, 미국 드라마 열풍, 영어 학원 유행이 다 서구에 대한 동경과 연결돼 있지 않나. 재미있는 건, 자국 문화에 대한 우월감도 강해졌다는 점이다.

또 우리가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그렇게 외쳤지만, 삶 속에서는 과연 그런 민주주의가 얼마나 확장됐는지 회의가 드는 부분이 있다.

"자본에 흔들리는 삶, '희망'은 교육열로 표출되는 '민주 사회'"

▲ 아레나(ARENA) 이안지영 간사 ⓒ프레시안

소민호:
영어 열풍은 사교육 열풍으로 이어진다. 우리 아이도 몇 개 기본적인 소양을 위해 학원을 다닌다. 사교육 시장에 뛰어든 친구나 선후배가 많다. 양극화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고급 학원이나 현지로 보내거나 식의 교육열이 상당히 과열되고 있다고 본다.

정정훈: 최근 '누가 서울대에 들어오는가'를 조사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서울 강남 출신이 가장 많았다. 또 아버지가 의사, 변호사, CEO 급 자녀와 다른 직업을 가진 아버지 자녀 간의 격차가 6배가 나더라. 정확하게 대도시, 부유층에 살고 있는 이들이 서울대로 진학하는 것이다. 학력이 세습되고, 부가 세습된다.

박조은미: <강남엄마>라는 드라마가 있지 않았나. 최근 입학전형이 많이 바뀌면서 주요 사립대학에서는 영어전형, 외국어전형을 많이 뽑는데 이건 정확하게 조기유학을 경험한 학생을 위한 전형이다. 입학제도부터 그런 이들을 위한 제도로 바뀌고 있다. 요즘에는 개천에 용이 안 산다는게 정설이다.

이안지영: 이랜드 사태 관련 인터뷰를 보면 주부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이유 중 "자식 학원비 대려고 한다"는 답이 1위였다. 부의 축적을 위해서 교육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찌됐건 교육이 하나의 희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슬프다.

<프레시안>: 80~9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 중 적잖은 수가 사교육 시장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20년간 사회문화적 변화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느낌이다. 그들이 자녀의 교육비에 투자하는 비용 역시 상당하다.

경제 민주화라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문화는 경제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본다. 1987년은 정치적 민주화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만 사실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는 경제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이안지영: 삶이 자본에 의해 흔들리는 정도는 예전보다 훨씬 강화됐다. 다들 영어 자격시험에 매달린다. 모든 이들이 잘 살고, 잘 먹고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는 것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둔다.

단순히 소득수준이 높아졌고, 1987년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하지만 그 속에 무엇을 담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 이후의 과정을 만들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정훈: 87년 체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거나, 먹고 사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팽배하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문화의 시대로 한바퀴 돌아서 다시 온 것은 경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문제였다고 본다.

"대부분의 산업들이 '불안'을 먹고 큰다"
▲ '수유+너머' 정정훈 연구원 ⓒ프레시안

<프레시안>:
지난 20년간 넓어진 '다양성' 등 긍정적인 문화적 변화가 확장되기 어려운 것도 지적해준 사회 분위기와 맞물린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안지영: 권위주의, 위계 질서가 존재하는 한 다문화 사회 실현이 참 어려울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엔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우리는 차이를 전제로 둔 문화 안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정정훈: 한가지 분명한건 지난 20년 역사 중 1997년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IMF가 한국 사회에 굉장한 변화의 조건이었다. IMF는 한국 사회의 큰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가난한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공포와 함께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팽배한 것 같다.

그 결과가 현재 한국 사회와 무관치 않다. 그것은 '불안'이다. 이랜드 파업에서 우리도 살아야 한다는 지역 상인들, 새만금이나 평택 사태에서 '우리 동네도 개발해야 한다', '미군기지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민들의 논리 속에는 아무도 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불안이 너무 강한거다.

대부분의 산업들은 불안을 먹고 산다. 자기개발 산업, 토익, 해외연수.. 직장인들도 새벽에 일어나서 영어공부하고, 끝나고는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다. 거기에는 보장할 수 없는 불안이 증식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다.

끊임없이 불안을 조장하고 있는 사회, '돈이 너를 행복하게 할 거야'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진 시스템에서 벗어나기가 참 어려울 것 같다.

박조은미: 대학에서 상대평가제에 시달리는 친구들은 정말 팍팍하게 살더라. 수업에 한 번 지각하면 벌점이 나오니까 거의 고등학교때 처럼 시간표를 짠다.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타인에 무관심한 세대, 변화하는 사회를 끌어안을 수 있을까"

▲ 박조은미 성공회대 대학생 ⓒ프레시안

<프레시안>:
앞으로 다가올 20년 동안 한국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각자 자유롭게 예측해 본다면?

소민호: 젊은 세대의 특성을 보면, 다양화되고 개인주의화 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질적인 문화요소, 복잡다단한 문화를 섭취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가진 세대가 사회 변화를 이끄는 쪽으로 나가야 된다고 본다.

이안지영: 앞으로 20년동안 지금처럼 이주가 확산되면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은 깨질거다. 그걸 어떻게 메꿀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것 같다.

1987년 절차적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그 무언가를 완성한 이후 사람들은 '우린 뭔가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년간 민주적 사회를 이루려는 작업이 사회 곳곳에서 진행돼 왔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본다. 일상에서 성취하려고 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2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젊은 세대를 성급하게 보편화할 순 없지만 '무관심'이 가장 큰 특징인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관심은 굉장히 많지만 나 아닌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은 굉장히 줄어든 것 같다. 나를 중심으로 맺는 공동체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은 많이 사라졌다.

박조은미: 딱히 우리 세대가 공동체성을 상실했다고 보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생도 1학년 후배를 보며 '신입생들이 무섭다'고 한다. 언제나 후배 세대는 늘 예의가 없고, 늘 개인주의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면밀하게 봐야 할 것 같다. 우리 세대도 어떨 때는 개인간 연대와 유대에 목이 말라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빈부의 격차 등 사회의 비대칭성이 더 커진다면 뭔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랜드 사태를 보면서 엄청난 물량의 제품으로 표현되는 자본 사이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면서 싸우는 노동자를 봤다. 이런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는 20년이라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어떤 시점이 올거라고 본다.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 중요한 화두가 되지 않을까.

정정훈: 주변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결혼을 늦게 하거나 안 하려는 이들도 많다. 한국 사회에 비혼자가 늘어날 거란 생각이 든다. 가족 개념이 좀 바뀌지 않을까.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공동체 개념이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지금 한국은 '나 하나 살기', 기껏 확대돼 봐야 '내 가족'이 각 개인의 관심사다. 이런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이 깨지고 서로 삶의 방식이나 지향이 같은 사람들이 가족보다 더 강한, 그렇지만 가족주의적이지 않은 공동체를 형성해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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