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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잃은 민주파 유권자, 누가 책임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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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갈 곳 잃은 민주파 유권자, 누가 책임져야 하나?

[2007 대선이야기] 대중의 항의를 이해 못하는 정치세력

이번 대선의 승자는 누가 될까? 이명박 후보가 낙마할 수도 있을까? 이회창 후보는 지금의 지지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정동영 후보에게도 기회는 올까?

정당체제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한 한국정치에서 이런 종류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전문가-비전문가, 정치가-일반인, 정치학자-비정치학자 사이에 특별히 예측력의 차이는 있기 어렵다. 가능한 시나리오는 선거 전문가들 사이뿐 아니라 각종 매체와 일반인들의 대화 속에도 다 있고 그러니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맞게 되어 있다. 대선이 끝나면 결과를 맞춘 점쟁이가 늘 등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모든 점괘가 다 있었으니 어떤 경우든 족집게 점쟁이는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를 무규범적인 게임의 논리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공동체의 민주적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의 핵심이라 할 선거경쟁이 불확실한 게임의 논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사태 변화와 관련해 경마식 예측은 지양한다 하더라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마 일관된 해석의 틀을 발전시켜 보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실천의 논리를 확보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에 대한 고전적 정의의 하나는 '정당이란 하나의 조직화된 의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정당, 좋은 정당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론을 둘러싸고 복수의 당파적 의견이 경합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필자가 이야기하려는 것도 바로 그러한 파당적 해석의 하나일 것이다.

보수우위의 정치구도를 만든 두 요인
▲ 무소속 출마를 강행해 11월 대선판을 일대 요동치게 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사진은 12일 선거사무실에서 '버스민생투어' 출정식에 앞서 선거상황판 현판을 하고 있는 이 전 총재. ⓒ뉴시스


승자와 패자를 예측하는 문제를 잠시 접고,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지금의 정치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나라당이 중심이 된 보수블록이 전체 여론시장의 60% 안팎을 지배하고 있는 문제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현상일까? 그건 아니다. 상황의 기본 구조는 정확히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하다. 그때 표출됐고 그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직 정부에 대한 강한 책임추궁 경향이 정치상황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정치학에서 '전망적 투표'와 대비해 '회고적 투표'라고 부르는 현상의 한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유권자의 행위결정이 각 정당이나 후보의 이념이나 정책, 인물의 신뢰성 등 미래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에 의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임기를 마쳐가고 있는 현직 정부와 대통령의 통치행위 전반에 대한 부정적 평가 내지 책임추궁의 욕구가 유권자 의식을 압도해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난 해 지방선거에서 권위주의 집권당의 흐름을 잇는 보수정당이 서울과 수도권에서 압승한 것은 1967년 선거 이후 처음이었다. 또 지지정당을 묻는 유권자 의식조사에서 대체로 "지지정당 없다"는 응답이 대세였던 그 이전과는 달리 이때를 기점으로 한나라당이 50%를 넘나드는 정당지지도를 유지해왔다. 이것 역시 민주화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다.

도덕성의 치명적인 문제와 함께 나로서는 그 어떤 인간적 매력도 찾기 어려운 이명박 후보가 1년 이상 높은 지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달리 설명이 안 된다. 1997년 대선에서도 외환위기를 초래한 집권당을 대상으로 책임추궁을 지향하는 투표경향은 있었지만 최근처럼 상황 전체를 압도하는 지배적 변수였던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민주 대 독재"라 부르든 "진보 대 보수"라 부르든 기존 선거를 특징지었던 정당블록을 가르는 문턱 내지 경계선이 매우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형식적으로는 개인의 결정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집단으로서 투표'한다. 노동자로 투표하느냐(계층), 보수적 정향에 의해 후보를 결정하느냐(이념), 남부출신으로 투표하느냐(지역), 여성으로 투표하느냐(성), 낙태를 반대하는 카톨릭 교도로서 투표하느냐(종교) 등의 투표행위의 결과가 정당체제의 성격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15번의 전국적 선거를 경험한 우리의 경우도 대다수 유권자의 투표패턴에는 나름대로의 체계와 안정성이 있었다.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수적이라 생각하고 민주화의 진전에 소극적인 유권자와 그 반대의 유권자가 매 선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는 대체로 예상 가능했다. 아무리 뭐래도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진 과거 권위주의에 기원을 둔 정당은 찍을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일종의 블록 간 경계 역시 확실히 작용했다. 그런데 유권자의 투표 패턴에서 바로 이 블록 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2년 사이 유권자 의식조사 자료를 보면 자신의 정치성향을 진보라고 답한 사람 중에서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응답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과거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 중 현재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간 한국정치의 향배를 결정했던 '주축 유권자'(pivotal voter)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민주파' 유권자가 가장 큰 규모로 존재하는 곳은 수도권의 30-40대와 지역으로는 호남이다. 중대한 고비마다 한국정치의 퇴행을 막은 것도 이들이고, 제도권 정치영역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던 노무현이라는 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주역도 이들이었다. 민주주의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합리적 유권자'의 모습에 가까운 한국적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들 민주파 유권자였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이회창의 귀환'과 보수블록의 지배적 위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도권 30-40대 민주파 유권자의 '실종'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정치의 주축 행위자로서 민주파 유권자의 역할은 이제 종결된 것일까?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민주화이후 체제는 이제 보수적으로 재편되는 경로로 나아갈 것인가?

유권자의 보수화?
▲ 현 보수우위의 정치구도를 유권자의 보수화 내지는 비합리성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연합

최근의 상황변화를 두고 유권자 나아가 시민사회의 보수화로 정의하는 지적을 가끔 보게 된다. 현 정부에 대한 맹목적 책임 추궁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유권자의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 아직까지는 논리적 설명이나 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 중요한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은 주제다.

만약 이회창의 등장이 보수 블록의 확대 재생산을 가져온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내년 4월 총선으로 이어진다면 그러한 주장은 확실히 힘을 얻을 것이다. 대선과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거나, 보수세력이 분열되더라도 냉전-반공을 중심 내용으로 한 정당과, 개발과 성장우선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당으로 나눠져 이 두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확실히 그것은 '87년체제'라고 불리는 민주화 이후 체제의 보수적 재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권자의 보수화 내지 비합리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접근은 잘못이기도 하고 매우 위험한 논리로 이어지기 쉽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충격이 만들어 낸 유권자 편성 구조는, 민주파 유권자가 크게 성장했지만 기존 체제의 유지를 원하는 유권자를 압도할 정도는 아닌 상황 내지 이들 사이의 균형을 특징으로 한다. 이 기본 구조는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유권자 의식조사 결과들을 보면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가 보수적 정향의 유권자와 계속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해 지방선거 이전까지 그간 어떤 선거도 이들 유권자가 보수의 방향으로 옮기거나 해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표출할 적절한 정치적 대안을 갖지 못했을 때였다. 지난 해 선거가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고 봐야 한다.

최근 여론조사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선거를 유권자의 행태로 환원해 설명하는 경향이 과도하게 확대되었다. "유권자가 바로 서면 나라가 바로 선다"는 등의 비민주적 논리나 심지어는 "유권자 의식개혁운동"과 같이 극도의 권위주의적 언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될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민주주의 정당이론의 고전들이 말하는 것은 그 반대이다.

사회학적 정당이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한 립셋·로칸(Lipset & Rokkan)은 "정당으로 조직된 대안들이 유권자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권자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정치적 조건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갈등이론에 근거해 정당이론의 한 패러다임을 개척했던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 역시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민주권이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좋은 정당 대안을 가질 때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면서 유권자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도외시 한 채 여론조사를 근거로 유권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론들이 왜 반민주적인가를 통렬히 비판했다.

현 정부에 대한 책임 추궁 경향이 국면을 지배한다고 해서 이를 유권자의 비합리성으로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다. 정당이론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로 인정받는 피터 마이어(Peter Mair)가 강조하듯, 현직 정부에 대한 평가가 유권자 투표결정을 좌우하는 '회고적 투표'의 양상은 정당 간 차이가 약해질 때 나타난다. 이 차원에서 문제를 보면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의 사례가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집권당의 정책이 보수적 야당과 동일해진 정치구조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김영춘 의원의 사례가 보여주듯, 80년대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신한국당-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열린우리당으로 또 옮겨 국회의원을 하다가 다시 움직여 문국현 후보의 선대본부장을 맡을 수 있는, 그야말로 좌우를 넘나들 수 있는 정당체제의 무이념성이 더 문제인 것이다.

그간 민주파 유권자 대다수는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 야당의 명맥을 지켜왔던 이른바 '제도권 야당'을 지지해왔다. 그 덕분에 이들 정당과 지도자들이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집권도 할 수 있었다. 이들 정당이 내세웠던 이상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었다. 적어도 이 이상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까지 민주파 유권자의 대안 속에서 한나라당은 존재할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동안 그러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현실은 객관적으로 점점 분명해졌다. 두 정부 하에서 중산층과 서민은 회복하기 어려운 희생을 감수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외환위기 극복을 내세운 정부를 믿고 고용과 소득을 위협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수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도 점점 분명해졌다. 결국 신자유주의 이외에 다른 경제적 대안이 존재할 수 없다면, 따라서 그 안에서 성장하고 그 안에서 일자리가 느는 변화만이 가능하다면 같은 주장을 하는 한나라당 후보를 배제해야 할 이유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과 같은 보수블록의 압도적 우위 상황을 가져온 것은 유권자의 보수화가 아니라 민주정부와 관련 정당들의 보수화 때문이지, 그 역은 아닌 것이다.

지난 10년을 집권한 민주정부와 여당이 제대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정부 운영에 있어서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신뢰감과 책임성을 보여 주지도 못한 것에 실망도 하고 불만도 많았지만, 이들 민주파 유권자들의 경우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수없이 많다. 그러던 이들이 그간의 일방적 기대를 접고, 이제는 보수정당의 집권도 허용할 수 있다면서 무언의 강력한 항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항의가 의미하는 바를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범여권의 범위 안에 있는 정치세력들뿐이다.

87년 체제의 변화와 지속성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민주화 이후의 정당체제는 제도권과 비제도권, 정당 대안과 유권자,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사이의 괴리와 그로 인한 불안정한 이중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잘 알다시피 한국에서 권위주의의 퇴장은 정당이 아니라 거리에서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체제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기존 정당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은 배제되었다. 기존 정당들이 게임의 규칙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동안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노동운동이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었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도 확대되었다. 민주화의 대중적 에너지는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두 영역으로 분리되어 대표되었던 것이다. 대다수 유권자 역시 민주화의 충격에 매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민주화 이후 여러 선거결과가 보여주었듯이 강한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유권자의 규모는 현상유지적 정향을 가진 유권자 규모와 경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용어인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란 용어는 민주화 이후 체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제도권 내 정당체제의 보수적 사이클은 자주 비제도권의 운동적 도전에 의해 단절되었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집권당의 승리는 뒤이은 총선에서 집권당의 패배와 여소야대로 이어졌고, 73.4%의 의석을 결집했던 1990년의 3당합당의 시도 역시 뒤이은 선거에서 절반에 가까운 의석을 잃을 정도로 참패했다. 반호남지역주의를 넘어서 DJ도 집권했고, 마지막 순간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의 열망을 집약해 노무현 후보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충격이나 2004년 탄핵반대 집회 등도 유사한 특징을 갖는 사례이다.

요컨대 제도권 정당체제의 보수적 사이클과 비제도권 시민사회와 유권자의 변화지향적 요구 사이의 동태적 이중구조 위에서 87년 체제는 매우 경합적인 정치상황을 주기적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특히 대통령 선거의 경우 선거 막바지에 사회적 힘이 모두 다 들어오면 여야 후보간 간발의 차이를 둘러싸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안정한 균형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다. 1997년과 2002년 선거 모두 2% 안팎의 득표율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이번 대선에서는 어떻게 될까?

앞서 거론한 샤츠슈나이더는 유권자 편성구조의 변화는 적어도 30년 단위의 한 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무슨 이론이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경험법칙이라고 한다. 그만큼 한번 형성된 정치의식은 쉽게 잘 변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유권자 편성구조는 80년대 말 거대한 운동이 몰고 온 체제변동의 강력한 충격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로 등장한 민주파 유권자들의 정치의식과 이후 수많은 선거를 통해 보였던 이들의 투표행태가 한 순간 포말처럼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유권자의 차원에서 87년 체제의 구조는 아직 해체를 말할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선거를 40일도 안 남겨 놓은 지금 이들의 기대를 응집하기에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현실은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

정당체제의 구조적 조건만으로 보면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매우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집권당과 범여권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자 하는 민주파 유권자에게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낼 수 있었다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응집력 있는 당조직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당내 경선이 변화의 전망을 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현재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실패는 다름 아닌 '대통합론' 그 자체에서 비롯된 바 크다. 반야당 대통합 전략의 기본 특성은 다른 정당의 후보들과 상대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야당 집권을 허용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절대적 경쟁론을 지향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 정당경쟁의 구도를 양당제의 형태로 양극화시켜야 하고 다른 한편 야당 집권에 대한 '두려움의 동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이런 성격의 정치전략의 경우 상대가 집권당이라면 몰라도 야당일 때는 효과를 갖기 어렵다는 점이다. 게다가 대다수 유권자가 현직 정부에 대한 책임추궁의 경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 있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동원하는 것의 부정적 효과는 더 크게 나타났다. 경선을 통해 후보를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은 거대 야당 후보와의 경쟁체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곧바로 군소 정당들과 후보단일화 논의에 스스로를 결박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더 비극적인 결과는 이회창 후보의 등장과 함께 보수블록이 더 크게 확장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반야당 대통합론이 대중의 항의를 얼마나 잘못 이해한 것인가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예도 없다.

두려움의 동원과 절대적 경쟁론에 의존한 대통합 전략은 퇴로를 스스로 차단한 것이기 때문에 유연성을 갖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다보니 무익한 후보단일화론에 계속 매달리거나 뭔가 더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상황을 무책임하게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결과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 내부로부터도 패배의식이 커지는 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와 연합한다면, 그 순간 수도권의 민주파 유권자가 이들에게 돌아올 여지는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한 민주파 유권자가 같은 방향의 통일된 선택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되었다. 누가 책임져야 할까?

새로운 종류의 정당을 기대하며

사실 난 한국의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퇴행하지 않고, 이런 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느린 발전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민주파 유권자의 존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안정한 균형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87년 체제의 구조적 특성들과 그 안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역동적 정치변화들은 모두 이들 덕분에 가능했다.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의 구조와 변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들만큼 중요한 변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한 동안은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해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이들의 기대를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정당 대안들이다. 그들의 허약성과 무책임성이 대선의 정치상황을 나쁘게 만들고 있으며 보수우위적 정당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늘 "지역주의 때문에", "보수언론 때문에"로 외부화했고 이제는 "유권자의 비합리성 때문으로" 외부화하려 한다. 사태를 더 나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들이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집권한다면 보수의 장기집권체제가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협박 담론'이 덧붙여 다니는 것도 유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나라당이든 주류언론이든, 관료행정체제든 재벌대기업이든 어느 구석을 살펴봐도, 난 그들이 한국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비전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 전혀 들지 않는다. 따라서 설령 보수세력이 집권한다 하더라도, 정당체제의 보수적 재편이 일본처럼 제도화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정당대안이 존재한다면 민주파 유권자의 역할은 복원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와 다름없는 성장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나쁜 결합 하에서 삶의 조건을 위협당한 다수 저변계층의 요구를 대변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도 불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 발전모델을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정당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은 열려 있고, 또 민주파 유권자 사이에서 실제로 절박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본다.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나고 있지만, 한국사회는 민주파 유권자가 기다려 줄 10년의 기회를 더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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