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9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재야 문화운동 단체인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47)씨가 이런 질문을 남기고 분신했다. 온몸의 39%에 3도화상을 입은 그는 현재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그가 말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1988년 우리마당이 남북공동행사인 '통일문화큰잔치'(위원장 문익환)를 준비하던 도중 괴한들이 사무실을 습격하고 여학생을 성폭행하는 이른바 '우리마당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건 이후 수사기관과 언론, 국회 등에서는 사건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2004년 <시사저널>에서는 "북파공작원들이 우리마당 사건을 일으켰다"는 관련자의 증언이 공개됐지만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이 사건의 변론을 자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여 년간 진상 규명을 요구해온 김기종 씨가 지난 8월부터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왔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간 김기종 씨의 모습을 지켜봐온 김 씨의 후배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이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그는 "그가 분신을 결행한 까닭은 피습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정권과 대통령이 들어서도 진실규명의 실마리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소외되고 은폐되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었다"며 정부가 하루빨리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편집자>
한강성심병원 3층 중환자실에 소처럼 선한 눈을 가진 한 남자가 누워 있다. 재야 단체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 씨(47)다. 20년 전인 1988년 '우리마당'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지난 10월 19일 청와대 앞에서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전신에 39%의 화상을 입어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지금까지 3차의 수술을 받으며 고통스런 투병을 하고 있다.
1980년 성대 법대를 입학한 그는 문무대 입소 반대 투쟁으로 군사정권에 저항을 시작했다. 그는 재수 시절 인연을 맥으로 각각 다른 학교로 입학한 동료들과 함께 지속적인 모임을 모색했고 그 모색은 자연스럽게 반 군사 독재, 반외세 문화라는 시대적 초점으로 연결됐다.
김기종씨는 자기를 항상 마당지기라고 소개한다. '마당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이에게 마당은 민족의 마당, 민중의 마당이었다. 대학시절 우리마당의 공간 확보를 위해 그가 내논 첫 구호가 "'신라화랑' 어디 가고 '스카웃'이 판을 치고, '보부상'은 어디 가고 '라이온스' 판을 치나!" 이었다.
지금도 일부에서 일상용어가 된 사진이라는 한자어를 '빛그림'이라는 우리말로 바꾼 이도 그이라고 한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우리마당'을 만들며 "'뽕짝, 팝송'보다는 우리 '민요, 소리'를, '디스코, 고고'보다는 우리 '놀이, 탈춤'을, '기타, 리코더'보다는 우리 '장구, 단소'를"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우리마당'은… 1982년에 신촌에서 시작된 민족민중문화단체 '우리마당'은 종교의 신세를 지기만 했던 당시 가난하고 힘들었던 민족민주운동에게는 공간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절실한 마당이었다. 수많은 시국사건과 시위가 이곳에서 준비됐고,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민족민주운동단체들의 창립 장소가 되었다. 물론 문화 공간으로 자기 역할을 잊지 않았는데 1983년부터 이어진 '우리마당 문화교실'을 통해 수천 명 이상이 풍물, 대금, 단소, 탈춤을 습득했고 문화 패거리를 형성했다. 유홍준, 임진택씨 등이 강의와 판소리 공연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문화제 하나가 엄청난 투쟁이었고 그 투쟁의 뿌리로서 신촌의 '우리마당'은 마당의 역할을 다했다. |
1988년 일어난 '우리마당 피습사건'
1988년, '우리마당'은 서울 올림픽을 남북이 공동개최하자고 주장했고 이를 위해 올림픽 남북공동개최를 염원하는 '통일문화큰잔치'(위원장 : 문익환)를 기획했다. 그러나 '통일문화큰잔치'를 며칠을 남겨둔 때 소위 '우리마당 피습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마당'만이 아니었다. 당시를 전후로 해서 괴한들에 의한 잇따른 린치사건이 있었다.
당시 야당인 평민당이 조사한 '우리마당 피습사건' 발표 개요는 다음과 같다. 계획된 테러였던 것이다.
"우리마당 피습사건은 <중앙일보> 오부장 테러사건을 저지른 정보사령부 우이동 지대장 박철수 소령의 휘하에 있는 박희실 대위 팀이 저질렀으며, 현장지휘는 김학두 중사가, 강간은 손영춘 중사가, 남자를 각목으로 친 것은 정모 하사가, 김천연 하사도 현장에 있었고, 나철식 하사는 건물 입구를 지켰다고 한다. 또 범행 지시는 정보사 파견부대장 이규홍 준장이 직접 했는데 이 준장은 '강도, 강간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여자가 있으면 손대도 좋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2004년 <시사저널> 보도는 더 자세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사는 산하에 북파공작원 중 현역과 예비역으로 각각 따로 구성된 정치 공작 팀을 여러 개 두고 있었고, 이들은 경쟁적으로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증언자 이종일은 '우리(북파공작원들)는 5, 6공 당시 정보사령관(이진삼), 감찰과장(이상범), 3처장(한진구) 등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던 정보사 소속 정치공작 테러 조직의 일원으로 채용되어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다수의 정치공작 작전에 투입되어 성과를 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이상범 중령 산하 남산 대에는 우리 팀 외에 몇 팀이 더 있었는데 그 중에서 북파 훈련 동기들인 김00와 나00이 소속된 팀에서 우리마당 사건을 일으켰다'라고 명백하게 진술했다."
진실 규명에 '때를 보자'던 노무현 변호사
이 사건이 국가 권력에 의한,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의해 민족민중 문화는 물론 통일 문화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저질러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마당 피습사건'은 국가 권력에 대한 폭력으로 제대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1988년 중앙일보 오홍근 부장 테러 등 연달은 사건으로 '보안사'가 '기무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군부'에 대한 접근의 조심성을 전제로 신중하게 진실 규명을 하자, 곧 시기를 봐야 한다는 주변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이런 의견을 낸 사람 중 하나가 당시 마당피습 사건의 변호사이자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김기종씨가 급기야 분신을 결행한 까닭도 거기 있다. 피습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정권과 대통령이 들어서도 진실규명의 실마리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소외되고 은폐되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었다. 이에 대해 마당지기는 분신 전에 우리 사회에 묻고 있었다.
1988년 8월 17일 새벽 사건 발생 당시, 특종보도를 하였던 기자님들 왜 입 다물고 있습니까?
수사를 진행했던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군은 왜 수사 결과를 아직 발표 않고 있을까요?
국정조사까지 시행했던 우리 국회 역시, 왜 머뭇거리고 책임 회피하고 있나요?
그리고 때를 기다리자며 논하던 소위 인권 변호사님들, 언제까지 기다릴까요?
(당시 담당 변호사님들이 이제 대통령, 법무부장관,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되고서도 해결 못한다면…)
- 김기종 씨가 뿌리고 다니던 유인물 내용 중에서
외면에 분신으로 항거한 마당지기…"나는 진실을 원한다"
이런 질문과 함께 수주일을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김기종 마당지기는 정부와 청와대의 외면 속에 분신 항거에 이르렀다. 3도 화상. 죽지 않은 게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그 후 한 달이 조금 넘게 흘렀다. 그 사이에 정해진 노동열사의 분신의 아픔도 있었다. 민중 문화, 통일 문화, '우리마당'과 결혼했다며 결혼도 마다하고 김기종 선배가 살았던 27년의 세월이 남긴 것은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주변 동문들과 친인들이 번갈아 병간호를 하고 치료비 모금을 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너무 많이 모자란다. 조국을 사랑하고 통일을 염원하고 문화를 갈구해서 지독하게 외로웠던 생이 겪는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도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그저 눈물이다.
며칠전 김기종 선배의 점심 간호를 했다. 보자마자 김 선배는 눈물이다.
"내 몸짓이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진실을 원한다. '우리마당 피습사건'은 개인의 피해 사건이 아니다. 피해 당사자 진술이 먼저 필요하다는 입장을 들었는데 개인의 피해 문제가 아니라 민중문화와 통일 문화에 대한 국가 권력의 폭력이라는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당시 개인적 피해자들은 이런 기억 자체를 떠올리기 싫어한다.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실 규명의 책임은 피해 개인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힘으로 정권을 만든 현 정권, 진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들의 몫이다. 나는 호소하고 호소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오직 싸늘한 외면이나 무시였다. 스스로 아는 진실을 밝히지 못하면서 과연 진정한 진실과 화해가 가능한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내 생과 내 호소가 외세와 군사 독재 문화와의 투쟁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본질을 외면하는 껍데기들과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우선 몸부터 낫자고 말하면서도 내 눈도 젖어온다. 피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배의 저 깊은 설움의 뿌리는 무엇일까? 진실이 영원이 은폐될 위기(선배는 이명박의 집권을 그렇게 말했다)일까? 의례적인 병문안 하나도 없는 당시 변호사님이자 현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일까? 아니면 평생을 통해 달려온 우리 마당의 황폐함일까?
돌아오며 생각한다. 오직 죽음으로만, 죽음을 각오한 투쟁으로만 자기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생의 외로움은 도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일까? 우리는 과연 이런 요구를 무엇으로 외면할까?
그래서 이 사회에 마당지기의 이름으로 다시 묻는다.
1988년 8월 17일 새벽 사건발생 당시, 특종보도를 하였던 기자님들 왜 입 다물고 있습니까?
수사를 진행했던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군은 왜 수사 결과를 아직 발표 않고 있을까요?
국정조사까지 시행하였던 우리 국회 역시, 왜 머뭇거리고 책임 회피하고 있나요?
그리고 때를 기다리자며 논하던 소위 인권 변호사님들, 언제까지 기다릴까요?
(당시 담당 변호사님들이 이제 대통령, 법무부장관,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되고서도 해결 못한다면…)
* 현재 김기종 씨의 지인들은 그를 돕기 위해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모금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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