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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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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아아, 박종철" [그해 6월·1] 다시 돌아보는 박종철사건과 6월항쟁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6월항쟁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원점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에 꼭 5개월 앞서 경찰관서의 한 골방에서 일어난 20대 청년의 죽음은 노도와도 같은 6월항쟁을 불러온 기폭제였다.

박종철. 우리가 '민주화 20년'을 기념하는 올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과 과제를 둘러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제안하는 여러가지 행사가 많이 기획되고 있다. <프레시안>도 몇 가지 행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우선 6월항쟁의 단초가 되었던 박종철의 죽음과 은폐조작 폭로 과정을 되돌아보는 기획물을 마련했다.

당시 박 군 고문치사의 은폐조작 사실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정남 선생(김영삼 정부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 그해 초부터 6월에 이르는 긴박한 흐름 속에서 최근에 와서야 공개하게 된 비화와 새로운 관점을 담은 귀한 글을 두 편 보내주었다.

첫번 째 글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와 은폐조작 및 그에 대한 폭로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지만 역사적 격랑 속에서 한 사건의 의미망이 어떻게 형성되고 나아가 큰 물줄기를 이뤄내는지를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다. 독자들도 '민주화 20년'을 되새김질 하는 출발점으로 그날 박종철 군의 죽음과 부활을 음미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우선 이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1월14일, 오전 11시 20분

1987년 1월15일 오전, 중앙일보 검찰청 출입기자 신성호는 흔히 그랬듯이 검찰 간부들의 방을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 "경찰 참 큰일 났어!"라고 말하는 한 간부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것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신성호는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다 그런 일이…"하고 사건의 내용을 아는 척하며 접근했다. 그렇게 해서 '남영동' '서울대생' 등 단서가 될 만한 꼬투리를 얻어냈다. 이어서 그는 그 단서들을 바탕으로 검찰 관계자 10여 명을 만나 퍼즐 조각을 맞춰 나갔다. 그 결과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문제는 그 대학생의 인적 사항이었다. 신성호는 서울대 취재를 담당하던 동료기자 김두우로 하여금 학적부를 뒤지게 하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 마침내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하던 중 숨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올해 그의 20주기를 맞아 바로 그 자리에서 추도식이 치러졌다.ⓒNEWSIS

그 날 중앙일보 석간의 돌판(1.5판)에 2단 짜리 기사 하나가 실렸다. 그때가 전두환 5공의 한가운데였고, 더구나 '보도지침'이 엄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기사 하나를 쓰고 싣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 아래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박종철의 이름과 그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작은 기사였지만, 이 특종 보도는 이어서 AP, AFP 등 외신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전 세계에 타전케 했다.

"14일 상호 11시 20분 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수사실에서 조사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21세, 언어학과 3년)이 조사 도중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발표했으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이 보도가 나가자 경찰로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해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6일 오전에 있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는 이렇게 되어 있다.

1월14일 오전 8시 10분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하여 오전 9시 16분경 조반으로 밥과 콩나물국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경부터 신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음.

이 때 경찰이 배포한 보도 자료의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은 한 때 세간의 비웃음과 더불어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쨌든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박 군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보다 앞선 1월 14일 오전 11시 40분,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은 간호사와 함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불려갔다. 동행한 수사관은 꼭 살려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5층 9호 조사실이었는데 바닥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7-8명 되는 수사관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누워 있는 한 청년에게 열심히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연상의 눈에 그 청년은 이미 숨져 있었다. 그들은 "살려낼 길이 없겠느냐"며 계속 허둥댔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의사는 심장 쇼크 요법을 시행했다. 기관지에 튜브를 집어넣어 인공호흡을 시킨 데 이어 캠플 주사를 놓고 30분 동안이나 심장 마사지를 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청년을 되살려 낼 수는 없었다. 수사관들의 요청으로 그 청년은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거기에 가면 혹시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들의 조바심으로 병원 응급실까지는 갔지만, 죽은 사람은 받을 수 없다는 병원의 규정에 따라 시신은 경찰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17일자 동아일보에는 의사 오연상이 대공분실 조사실에 들어갔을 때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고, 방안에는 7-8명의 수사관이 서성이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는 그의 증언이 실려 있었다. 박 군은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는 내용도 거기에는 들어 있었다. 수포음이란 물고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오연상의 이런 증언은 물고문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보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물고문이 있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경찰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4일 저녁 19시 40분경.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 경찰 간부 2명이 박종철의 시체를 유족에게 넘겨주도록 지휘해달라는 관련 서류를 만들어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을 찾아왔다. 이 날 낮 박종철의 죽음이 확인되자 경찰은 부산으로 내려가 영도경찰서장을 대동하고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를 만나 박 군의 죽음을 '쇼크사'로 설명하고 장례절차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검찰만 묵인해준다면 장례절차는 자신들의 뜻대로 치를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수사 중 사람이 죽었을 때 일반적인 절차는 관할 경찰서가 '변사 사건'으로 분류, 사망 경위에 대한 진술 및 현장에 대한 확인을 거쳐 관할 검찰청의 형사부 검사(야간에는 당직 검사)의 지휘를 받아 타살 혐의가 있으면 부검이나 검시를 거쳐 시체를 통한 증거를 확보한 다음 장례를 치르도록 한다. 타살 혐의가 없으면 검사가 검시를 하거나, 또는 검시 없이 바로 장례를 치르도록 유족에게 시체를 건네주게 된다.

이 사건의 경우, '조사 중 쇼크사'라는 경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시체를 유족에게 인도하라"고 지휘하게 되면 십중팔구 경찰은 가족을 협박, 회유하여 시체를 화장하여 처리함으로써 아무런 물증을 남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망사건에 있어 시체에 대한 부검이 없으면 아무런 물증이 없게 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경찰은 이 서류를 공안부로 가져올 것이 아니라 서울지검 당직실로 가서 접수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였다. 그러나 검찰 공안부는 자기들과 한 통속으로 자신들을 봐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날 공안부에는 검사들이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 최환은 우선 기록상 쇼크사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또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1986년), 김근태 사건(1985년) 등 일련의 고문사건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점을 고려, "관할 용산경찰서를 통해 변사사건 발생보고를 올리라"고 지휘하였다. 경찰은 "공안부장이 안 봐주면 대공경찰을 누가 봐 주냐"면서 떼를 썼다. 그래도 안 되니까 경찰 고위층은 물론 안기부 등으로부터 압력과 회유성 전화가 빗발쳤다. 밤에도 상부로부터 집으로 계속 전화가 왔다.

이튿날 검찰은 당일(14일) 형사2부 소속 당직 검사인 안상수를 차출, 공안부장 최환의 지휘를 받아 변사사건을 처리하도록 조치, 최환이 안상수로 하여금 사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처리토록 지시한다. 그러나 사체 부검을 위한 압수수색 영장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사체를 내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최환의 설득으로 가까스로 사체의 인도에는 동의하였지만, 이제는 '사체부검을 경찰병원에서 하자'고 버틴다. 최환이 경찰에서 수사 중 변사한 사체를 경찰병원에서 부검하면 그 결과를 언론과 국민이 믿겠느냐며 설득, 경찰병원에서 가까운 한양대 부속병원으로 옮겨 부검하는 데 가까스로 합의한다. 이렇게 하여 부검담당 의사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황적준 박사를 중심으로 부검팀이 짜이고, 검사 안상수, 박동호 한양대병원 의사 배석 하에 부검을 하게 된다. 가족으로는 박종철 군의 삼촌 박월길 씨가 입회했다.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의 결정과, 그에 따른 부검이 박종철의 사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한양대 박동호 교수의 증언이 박종철은 '쇼크사'한 것이 아니라 물고문으로 죽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혀지게 하는 데 중대한 분수령이 된다.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경찰 측은 부검 감정서에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같은 날 발표된 검찰의 발표와 경찰의 발표가 서로 다른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진실은 잠시 감추어질 수는 있으나 영원히 가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찰 역시 물고문 도중 질식사한 것을 더 이상 숨기거나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특히 황적준 박사의 양심적 증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년 뒤인 88년 1월에 공개되어, 허위로 감정의견을 제출할 것을 강요한 직권남용과 사인을 은폐한 직무유기 혐의로 박종철축소조작은폐의 최종 책임자인 강민창을 구속하게 만드는, 그의 일기장은 그의 양심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1월 15일 오후 4시 40분
이기찬 경정으로부터 "치안본부장 지시이니 사체부검팀을 구성하라"라는 연락을 받음. 모두 4명으로 부검팀을 구성, 오후 6시 20분경 치안본부에 도착, 바로 본부장 방으로 갔다가 5차장 박처원 치안감실로 안내됨. 이때 박 치안감은 "박 군의 사체에 외상이 없고, 3-4회 욕조에 담갔으니 익사일 것"이라고 설명.
· 밤 8시 30분경
한양대 영안실에 변사체 도착. 밤 9시경 사체가 부검대에 올려지고 안상수 검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 박 군 삼촌만 참가한 가운데 부검 시작.
· 밤 10시 25분
부검 끝내고 영안실 사무실에서 안 검사에게 약 40분간 외상부위와 사인에 대해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임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설명.
· 밤 11시 30분경
5차장 승용차로 치안본부에 도착. 본부장 소집무실에서 와이셔츠 차림의 강민창 본부장과 차장 등 간부들을 만나 부검 소견을 설명.
· 16일 새벽 2시
"아침에 있을 급한 불(본부장의 기자회견)부터 끄자"라는 간부들의 설득에 따라 착잡한 심정으로 '외표검사상 사인이 될 만한 특이소견 보지 못함' '내경 소견은 오른쪽 폐하엽 하면에서 출혈반 소견'으로 발표용 부검 소견 작성에 동의.
· 아침 7시 40분경
본부장실로 직행, 잠옷 차림의 강 본부장 만남. 가슴부위와 목 부위의 압박에 의한 피하 출혈 사진을 제외한 나머지 부검 사진 13장을 본 강 본부장은 만족한 표정.
· 오후 3시경
부검에 입회한 한양대 박 교수와 박 군 삼촌의 목격담이 동아일보에 비교적 상세히 보도된 것을 읽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부검감정서'만은 사실대로 기술해야겠다'라고 결심.
· 오후 3시 20분
본부장 소집무실과 5차장실을 왕래하면서 대기하는 동안 강 본부장, 박 5차장, 주 4차장, 유 2차장이 나에게 "19일까지 감정서를 '심장쇼크사'로 보고하라"고 회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강 본부장이 "목욕이나 하라"며 국과수 간부에게 10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 줌. 인사하고 나오는데 강 본부장이 "당신 은혜는 잊지 않겠다"라고 말함.
· 저녁 7시 20분
여의도 모 호텔에서 목욕을 하고 귀가.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 이루지 못함.
· 17일 아침 6시 10분경
애들을 스케이트장에 데려다 주면서 아내에게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를 작성하겠다"라고 결심을 밝힘.
· 오후 5시경
형님을 만나 조언을 들은 뒤 함께 친구인 배모 검사를 만남. 배 검사는 "정치적 문제이니 만큼 신중하게 처리하라"라고 말함. 돌아오는 길에 형님은 "사실대로 알리는 것이 내 생각이다"라고 조언해 주며 격려.
· 밤 9시 55분
국과수 간부의 연락을 받고 워커힐 호텔 커피숍에 도착. 이 간부는 "3차장에게 '모든 사실을 정확히 밝히겠다'고 최종 보고했다"라고 전했으나 3차장(이경조 치안감)은 국과수에서 사인 문제를 어느 정도 묵인해 줄 수 있는가 물었다고 한다.
· 밤 10시 10분경
국과수 간부에게 워키토키로 연락이 옴. 신길산업(특수수사 2대)으로 부검의 조서를 받으러 오라는 통보.
· 새벽 4시
특수수사 2대 김기평 수사관에게 참고인 진술을 통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음.


박종철 군의 시신은 16일 오전에 벽제로 옮겨져 9시 10분에 화장되었다. 그 때 동아일보의 '창(窓)'이라는 기사는 화장에서 임진강에 그 유골이 뿌려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 1988년 1월 12일, 박종철의 1주기를 앞두고 그의 유해를 뿌린 임진강 가를 다시 찾은 아버지 박정기 씨.

16일 오전 8시 25분 박 군의 시체는 영안실을 떠나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져 오전 9시 10분 화장됐다. 두 시간여 화장이 계속되는 동안 아버지 박정기 씨는 박군의 영정 앞에서 정신 나간 듯 혼잣말을 계속했고, 어머니 정차순 씨는 실신, 병원으로 옮겨졌다.
화장이 끝난 박 군의 유골은 분골실로 옮겨졌고, 잠시 뒤 하얀 잿가루로 변해 형 종부 씨의 가슴에 안겨졌다. 종부 씨는 아무 말 없이 박 군의 유해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경찰이 마련한 검은색 승용차에 올랐다.
잠시 후 일행은 화장장 근처의 임진강 지류에 도착했다. 아버지 박 씨는 아들의 유골 가루를 싼 흰 종이를 풀고 잿빛가루를 한 줌 한 줌 쥐어 하염없이 샛강 위로 뿌렸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 박 씨는 가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박 씨는 끝으로 흰 종이를 강물 위에 띄우며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통곡을 삼키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흐느끼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경찰병원 영안실에서 막내아들 종철의 시신을 붙들고 "내 아들이 대체 왜 죽었소? 못돼서 죽었소? 똑똑하면 다 못된 거요?"라는 독백을 거듭했던 그 어머니 정차순 씨의 말과 임진강 지류에서 잿빛 유골 가루를 샛강 위로 뿌리면서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하고 허공에 대고 외쳤다는 아버지 박정기 씨의 말은 절창이 되어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박종철 군의 죽음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어쩌면 곧 자기 자신의 일일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만큼 그 말은 시대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창한 웅변이 어떻게 이 말의 진실을 당할 수 있으랴.

부검에 입회했던 한양대 병원 박동호 교수와 삼촌 박월길 씨는 자신이 듣고 본 것을 언론에 증언했다. 동아일보 1월 16일자는 그들의 증언을 인용해 "숨진 박 군은 머리에 피하 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 십 군데에 멍 자국이 있었다"고 보도하였고, 이어서 각 언론은 경쟁적으로 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의혹을 제기하여 국민의 양심을 자극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문 사실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이제 국민은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당국으로서도 이제 더 이상 고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고위 관계자들은 1월 17일, 관계부처 장관과 유관기관 책임자가 참석한 정부대책회의,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것을 연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된 것은 경찰로 하여금 자체 조사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다. 내무부와 치안본부 측은 이미 이때부터 '대공수사요원의 사기' 운운하면서 경찰에 의한 자체조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의 결정은 권력기관 내부의 힘의 강약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경찰로 하여금 자체 조사토록 결정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사건 조작의 개연성은 상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이 그토록 집요하게 자체조사를 요구한 이면에는 사건 조작의 음모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전두환 정권 자체가 사실상 양해하고 추인해 준 셈이다.

이리하여 18일, 경찰은 자체조사에 들어갔고, 요식적인 절차를 거쳐 두 명의 수사관이 물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조사를 마무리 지었다. 신길동 치안본부 특수수사 2대에서 조사할 때부터 재조사요원들은 상부로부터 "조한경 경위 등 2명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경찰 상층부가 이미 조작 은폐 사실을 알고 그렇게 지시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조작에 개입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는 증거다.

19일, 치안본부장은 자체조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면서 "이번 사건은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 의욕 때문에 빚어졌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박종철 군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 군의 소재를 알고 있음이 확실함에도 진술을 거부하자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위협 수단으로 대공수사2단 5층 9호 조사실에서 박 군의 머리를 욕조 물에 한 차례 잠시 집어넣었다가 내 놓았으나 계속 진술을 거부하면서 완강히 반항하여 다시 머리를 욕조 물에 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행 시간은 8시 10분, 사망 시간은 11시 20분 경. 사망원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복부 팽만은 조사관의 인공호흡과 초진 의사의 호흡기 주입으로 인해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 현상임. 폐조직 검사 결과 수분이 검출되지 않았으며, 폐결핵 병력에 의한 폐 손상 흔적이 있었다. 왼손 부위의 타박상은 연행 과정에서 저항으로 생긴 부상이다. 부검내용 중 경부압박 이외의 사항은 박 군의 사망 원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 조한경, 강진규의 영장 집행 때는 그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이처럼 똑 같은 복장의 경찰관 20여 명이 동원되는 초유의 코미디가 벌어졌다. 이 장면은 국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을 뿐이다.

같은 날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이 해임되었다. 22일에는 고문경관의 직속 상관인 유정방 경정과 박원택 경정에 대한 징계가 결정되었다. 19일 오후 5시 30분경에는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이들 경관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날 경찰이 벌인 피의자 호송작전은 일찍이 그 유례를 볼 수 없었던 기상천외의 것이었다. 두 경찰관은 '신길산업'이라는 위장 간판이 달린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연행되어 있었다. 저녁 9시 40분경에 나타난 두 대의 미니버스 안에는 20여 명이 똑같은 점퍼를 입고, 모자로 얼굴까지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고문 경관으로 지목된 조한경, 강진규의 얼굴을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쇼였다. 경찰은 그들이 대공수사관들이기 때문에 북한 측에 그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거창하게 둘러댔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가짜로 두 사람만을 고문 경관으로 내세운 데 대한 배려요, 예의였을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이러한 작전 끝에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 호송작전으로 국민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20일 낮 1시 40분,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는 박종철 군에 대한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방학 중인데도 1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조속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박종철이를 두 번 죽이지 말라"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구호를 외쳤다. 언어학과 학생들의 추도시 '우리는 너를 결코 빼앗길 수 없다'가 여학생에 의해 읽혀질 때는 누구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박종철, 그는 누구인가? - 그 끈끈하고도 치열했던 21년의 삶을 돌아보며

박종철은 1965년 4월1ㅣ일 부산에서 공무원을 하는 아버지 박정기 씨와 어머니 정차순 씨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산 도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 혜광고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보통의 공부 잘 하는 학생이 걷는 평범한 길을 걸었다. 하얀 얼굴과 재치 있는 언행으로 주위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979년, 부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의 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그는 막연하게나마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잡았다. 1983년 서울대학교에 응시했다가 실패, 재수를 하면서 당시 서강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형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또 형의 서가(書架)에 꽂혀 있는 책들을 틈틈이 보면서 나름대로의 뜻을 세우게 되었다.

1984년, 그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해서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오직 억압박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몸소 농촌 생활도 체험했고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일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억압 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그들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위해 한 치의 타협 없이 치열하게 싸워 나갔다. 그는 대학 1학년 등 저학년 학생이 흔히들 가질 수 있는 두려움과 회의를 자기와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극복하면서 1984년 봄의 도서관 철야농성, 4.19기념식을 마치고 4.19희생자 묘소가 있는 수유리에서의 투쟁 등 학교에서, 거리에서, 농촌에서 싸웠다.

2학년에 들어서는 언어학과 2학년 대표가 되어 선배, 후배와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면서 과 구성원들을 굳게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던 그는 1985년 5월, 사당동 가두시위와 관련 구류 5일, 6월의 구로 가두시위로 구류 3일을 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오히려 그가 막연하게 설정했던 삶의 방향을 한층 구체화시키고 확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는 항상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서 고민했으며,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는 이 땅위에 축적되고 있었던 모든 모순을 척결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노라 다짐했으며, 그것을 몸소 실천했다.

3학년이 되면서 과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인문대학의 제반 학생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86년 4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와 그 시위에 참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감옥에서도 학습(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한 독서)을 멈추지 않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심신을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쉬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밝히면서 투쟁의 의지를 강고히 했다. 7월 중순에 집행유예로 나와서는 3개월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했다.

1984년 봄부터 86년 4월 그가 구속되기까지 그의 행적은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였으며, 오직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이 땅의 모순을 직시하는 삶이었다. 우리는 그의 짧았던 생의 편린들을 통해 우리 사회 안의 첨예한 모순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그것을 개선 광정하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처절한 투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우 일동


이상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우 일동이 엮은 박종철 군의 일대기다. 간략하지만 그의 일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는 재수하면서 서강대학교에서 가톨릭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학생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던 형 종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재수 끝에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학생운동에 관하여 순수한 새내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이미 전태일의 전기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고, "열사라는 단어는 저를 비장하게 만듭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성숙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일에서 솔선하는 원칙주의자였다.

농촌활동에서는 식사할 때는 그 자신 기꺼이 주방장이 되어 동료들의 식사를 챙겼고, 정리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철저한 호랑이 감독이 되었다. 농활 때 농민이 차려주는 새참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을 때 농민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새참 먹기를 끝까지 반대했다. 국수가 불면 버려야 한다면서 성의를 받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음에도 그는 한사코 새참 먹기를 거부했다.

학생들의 마지막 투쟁이라 할 시험 거부 문제가 나왔을 때, 그는 단호히 시험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에 확고히 섰고, 또 그것을 관철했다. 85년 두 차례에 걸쳐 구류를 살면서도 거리투쟁에는 어김없이 참석, 가장 열렬하게 싸웠다. 그래서 그에게는 '억세게 재수 없는 싸움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성동구치소 수인번호 80번으로 감옥을 살 때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감옥에서는 단전호흡과 요가를 익혔고, 그것을 그는 또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는 사회 현실을 알면 알수록,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이 사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더욱 짙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내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서클의 표어요 목표였던 "먼저 인식한 자가 먼저 실천한다"는 데 철저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던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세미나를 하려는데 책이 없어 고생하는 후배에게 선뜻 책을 사준다거나, 1986년 말 건국대에서의 농성으로 구속된 과 후배에게는 한 벌밖에 없는 자신의 겨울 외투를 선뜻 차입시켜 준 일도 있었고, 한겨울에도 얇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 후배에게 두터운 겨울 바지를 사다준 일 등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베푸는 삶에 익숙했다. 그와 하숙생활을 같이 했던 한 동료는 박종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남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늘 바쁜 종철은 그렇게 '부자'였습니다. 그의 서클 사람들은 그를 '운동권의 자선사업가'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자신을 위해 뭔가를 끝까지 소유하려 하고 집착하는 일은 종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그렇게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것이겠지요.

우리는 박종철과 박종운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종운이라는 이름은 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모든 동지를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가 박종운의 거처와 관련해 빌미를 줄만한 말을 끝까지 아니한 것은 그의 강한 책임의식을 엿보게 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살아서의 품성이었다.

평전에 의하면, 박종철이 박종운을 처음 만난 것은 85년 1월, 팀 동료들과 함께 겨울 합숙을 하던 때였다고 한다. 오류동의 자취방에서 합숙을 했는데,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어둠을 피해 간 곳에 박종운이 있었다. 운동권의 사람이었던 박종운은 후배들에게 그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종철에게 그 얼굴은 알 만한 사람,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들은 인사를 주고 받았고, 그 이름도 형제 같은 두 사람은 이내 친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85년 여름, 박종운은 민추위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몸이 된다.

86년 11월말, 박종철은 하숙방에서 서클 선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종철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엉뚱하게도 박종운이었다. 박종운은 얼마 전 호구조사 때 동사무소 직원과 경찰에게 신분이 노출되자 책과 옷가지를 남겨둔 채 도망쳐 나와 아는 사람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하룻밤씩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런 생활 중 박종철이 하숙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박종운이 다시 찾아온 것은 87년 1월 8일이었다. 박종운은 한 차례 구속 사태가 몰고 간 뒤끝,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의 연결을 박종철에게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종철이는 기꺼이 박종운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종철은 한사코 마다하는 그에게 꼬깃꼬깃한 1만원과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주었다. 목도리는 누나 은숙이가 털실로 직접 짜 준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

1987년 1월 14일 새벽, 전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신 종철이는 자고 있었다. 그 하숙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종철을 억지로 깨운 후 차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남영동 대공수사2단 5층 8호실로 끌고 갔다. 바로 9호실로 옮겨졌고 고문을 당하다가 14일 오전 11시 20분, 박종철은 숨졌다.

그와 부산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월 12일이었다. 13일부터 일본어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로 간다면서 하직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직장의 숙직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 저 올라갑니다."
"응, 그래라."

그것이 부자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박종철이 물고문 끝에 숨진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김근태 고문사건으로 고문에 몸서리치고 있던 국민은 자신에 대한 혐의가 아니라 수배자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끌려간 한 대학생이 주검으로 나온 데 대하여 치를 떨었다. 그것이 언제 내 일, 내 자식의 일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 1987년 봄의 어느날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박종철의 죽음 앞에 맨 먼저 달려간 사람들은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의 어머니들이었다. 그들은 1월 16일 오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으로 몰려가 통곡하며 외쳤다. "우리의 아들 박종철을 살려내라." "살인수사 사주하는 독재정권 몰아내자." 이를 필두로, 대한변호사협회,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성명을 발표하여 더 이상 고문하는 정권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 이러한 분노와 호소가 집적되어 1월19일에는 함석헌, 홍남순, 김영삼, 김대중 등 전국에서 각계 대표 9782명으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된다. 이 준비위원회가 2.7 국민추도회와 3월3일에 있었던 '박종철 49재'와 '고문추방민주화대행진'을 주도한다.

전두환정권은 2.7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 3일작전을 벌였다. 당일에는 전국에서 2만5000명의 전경을 차출해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민들은 집회 대신 시가전으로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정각 명동 성당에서 종이 울렸다. 박종철의 나이와 같은 스물한 번이었다. 이 날의 투쟁은 규모 면에서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광범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눈에 띄었다. 수백 대의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다. 연도와 빌딩의 창가에 빽빽이 늘어선 시민들은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고,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같이 불렸다. 경찰이 시위대를 연행하면 시민들이 '우' 하는 야유를 보내는가 하면, 직접 경찰과 몸싸움을 벌여 이들을 구출해 내기도 했다. 이 날은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부산, 대전, 광주, 마산, 전주 등에서도 추도시위가 열렸고, 전국에서 연행된 사람이 798명이나 되었다.
▲ 1987년 3월3일, 부산 사리암에서 치러진 박종철의 49재 모습.

3월3일, 박종철 49재와 '고문추방 민주화 대행진'이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주요 도시에서 추진되었다. 경찰은 6만여 명을 동원하여 원천봉쇄에 나섰다. 불교 5단체의 승려와 신도 200여 명이 박종철의 영정을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으며, 조계사 부근에서 재야인사들과 신민당원들은 침묵을 상징하는 '+'자 모양의 검은 반창고가 붙은 마스크를 쓰고 시가지 진출을 시도했다. 풍선을 들고 행진하는 시위 형태도 선보였다. 2월7일의 추도회와 3월3일의 49재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이루어졌고, 또 다수의 시민들이 동참했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의 전초전이자 예고편의 의미를 지닌다.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정기 씨 내외는 원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1월16일 화장된 박종철 군의 영정을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 있는 사리암에 안치했다. 종철이의 영정을 받아준 사리암의 스님은 백우 도승스님이었다. 그 스님은 이 일로 해서 언론의 조명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2월7일의 추도식과 3월3일의 49재가 열린 곳도 사리암이었다. 사리암은 이 일로 해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리암에서는 행인통제가 극심했다. 그래도 2300명의 군중이 모였고, 특히 부산시내 각 사찰의 스님들이 대거 몰려와서 종철이의 재를 올렸다. 기관원이 회유하고 협박하고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과 군중이 법당의 안과 밖을 가득 메웠다. 당시는 생존해 있었던 부산문학의 거두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선생이 추도사를 했다. 경찰 당국에서는 사리암 주지스님에게 시간을 줄여라, 당일 절차를 생략하라는 등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참석한 사람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서 당일의 행사를 마무리했다.

국민이 이렇듯 행동을 통해 박종철의 죽음에 분노하고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이를 효과적으로 분쇄했다고 판단하고, 4월13일 이른바 호헌조치라는 것을 발표한다.

4·13 호헌 조치와 더불어 국민의 관심은 이제 '호헌'과 '호헌반대'라는 정치투쟁으로 옮겨간다.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항의는 일단 뒤로 묻히고, 전두환 정권은 '호헌'을 향해 발 빠른 행보를 서두른다. 야당과 재야민주화운동 진영은 단식투쟁 등 필사적으로 호헌반대투쟁을 전개하지만 '호헌'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대로 가면 국민의 손으로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직선제 개헌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 1987년 5월 18일,고(故)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상 조작 폭로 성명을 읽고 있다.

바로 그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5월 18일, 명동 성당에서 있었던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이 성명은 아직도 감추어지고 있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게 하는 것은 물론, 정국의 흐름과 뱡향 마저도 일순에 바꾸어 버린다. 그야말로 '말씀의 폭풍'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성명은 박종철 군을 물고문한 범인은 기왕에 구속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외에 3명이 더 있다면서, 그들은 학원분과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장 반금곤, 경장 이정호로, 현재도 경찰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다. 이 성명은 이어서 이 조작이 정권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지적한다.

범인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하여 짜여지고, 또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 사건의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고문치사사건 직후 직위해제 되었다가 4월8일 버젓이 복직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단장 전석린 경무관,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과 역시 간부 홍승상 경감 등이다. 특히 5과장 유정방 경정은 박종철 군 사건 진상 은폐와 사후 처리를 지휘한 장본인이다. (…) 검찰은 이 사건 조작 내용을 알고 있으며, 이 사건의 범인의 조작과 진상은폐의 책임은 현 정권 전체에 있다. 당초의 검찰 수사 방침을 경찰의 자체 수사방침으로 바꾸게 한 1월 17일의 관계기관 대책회의 결정은 전적으로 현 정권의 진상 은폐와 사건조작을 위한 것 이었다. (…)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군의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사제단의 발표가 있고 나서, 초조한 하루 이틀이 지나고, 5월21일 오후 6시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기자회견을 통하여 범인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29일에는 검찰이 축소·조작을 주도한 대공수사 2단 단장 박처원, 5과장 유정방, 5과 2계장 박원택을 범인도피죄로 구속수감하였다. 그러나 사제단이 강력히 의혹을 제기한 축소·조작은폐의 최고 책임자라 할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이번 재수사에서도 제외되었다. 축소 조작과 은폐는 이때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제단 성명의 파장은 날로 커가고 있었다. 법원에서 뒷날 판결로 확정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경위와 축소·조작을 주도한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의 피의사실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 조한경은 치안본부 대공3부 5과 2계 소속 경위, 같은 강진규는 같은 계 소속 경사, 같은 황정웅은 1986년 11월 11일부터 같은 계에서 경위로 근무하다가 1987년 2월 16일 경북 경산경찰서 대공과 대공2계장으로 전보된 자, 같은 반금곤은 1986년 11월 11일부터 위 치안본부 대공3부 5과 2계에서 경장으로 근무하다가 1987년 2월 16일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계로 전보된 자, 같은 이정호는 1987년 1월 9일부터 위 치안본부 대공3부 5과 2계에서 경장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2월 16일 서울시경 공안수사단으로 전보된 자 등인 바,

피고인들은 공동하여 1987년 1월 5일경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생인 피해자 박종철(남. 21세)이 동교 민민투 위원으로서 서울대학교 민추위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공소 외 박종운(남.25세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4년 제적)을 은닉하면서 동인과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위 박종철을 연행 조사하여 특진대상 수배자인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지도부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하기로 수사계획을 세운 후 1987년 1월 14일 오전 7시 20분 경 피고인 조한경, 같은 황정웅, 같은 반금곤, 같은 이정호 및 공소 외 정래인(치안본부 대공3부 5과 2계 소속 경장), 같은 김병식(같은 계 소속 순경)등이 서울 관악구 신림9동 246의 26 소재 위 박종철의 하숙집에 집결하여 동인을 연행, 같은 날 오전 8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 96의 1 소재 치안본부 대공2부 건물 5층 제8호 조사실로 데리고 간 후

그곳에서 피고인 조한경이 위 박종철에게 동인의 인적사항, 조직, 사상관계 등에 관하여 1차 신문을 하고 2차로 같은 날 오전 10시 40분경 같은 층 제9호 조사실로 신문장소를 옮겨 그곳에서 위 조한경 및 동인의 지시로 같은 날 오전 10시 25분경 수사팀에 합류하게 된 피고인 강진규가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에 관하여 위 박종철을 신문하였으나 동인이 계속하여 위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가혹행위를 가하여 진술을 받아 낼 것을 마음 먹고,

피고인 조한경은 같은 이정호에게 위 제9호 조사실 안에 있은 욕조(길이 123cm, 높이 57cm, 폭 74cm의 인조대리석제)에 물을 채우라고 지시한 후, 바른대로 말하지 않는다면서 주먹으로 위 박종철의 가슴을 수회 때리고 발로 동인의 다리를 1회 걷어차고 위 강진규도 이에 가세하여 주먹으로 동인의 가슴 등을 수회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후 물이 가득 찬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간 다음 위 조한경은 피고인 이정호에게 제14호 조사실로 가서 그곳에서 공소 외 하종문을 신문하고 있던 피고인 황정웅, 같은 반금곤을 불러오게 한 후 위 박종철에게 재차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위 박종철을 혼내주라고 지시하여 이에 피고인 강진규, 같은 반금곤이 조사실 안에 있던 수건을 사용하여 위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피고인 반금곤은 위 피해자의 오른쪽에서 왼팔을 동인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고, 같은 황정웅은 왼쪽에서 오른팔을 동인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어 붙잡아 함께 등을 누르고 위 강진규는 욕조 안에 들어가서 양손으로 위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속으로 누르다가 한참 후에 끌어내는 가혹행위를 2-3회 반복한 후 다시 박종운의 소재를 신문하였으나 역시 모른다고 하자

피고인 조한경이 좀 더 혼을 내주라며 재차 가혹행위를 지시하면서 피고인 이정호에게도 합세할 것을 지시하여 동인은 위 박종철의 결박된 다리를 들어 올리고 다른 피고인들은 앞서와 같은 방법으로 위 피해자의 머리를 물속으로 2-3회에 걸쳐 누르는 등 가혹 해위를 가하는 동안 위 박종철의 목 부분이 위 욕조의 턱(높이 57cm, 넓이 6.5cm)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함으로써 같은 날 11시 20분경 위 제9호 조사실에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동인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축소소작


△사건 발생 당일인 1월 14일 오후 5시경 치안본부 대공3부 사무실에서 고문경찰관 5명이 모여 '조 경위 등 2명이 수사하다 박 군이 졸도 사망한 것'으로 구두로 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1월 15일 오전 박원택 경정이 고문경찰관 5명을 불러 모아 이들이 구두 약속대로 조서 받는 연습을 하게 하고 각자의 역할을 숙지하도록 했다.
△1월 17일 밤 11시경 유정방 경정은 특수수사대 조사관실을 방문해 조 경위 등 2명이 범행 모두를 뒤집어쓰도록 설득했다.
△1월 18일 오전 10시경 동료직원 10여 명이 조한경을 찾아가 회유를 했고, 박 치안감도 이들 2명을 찾아가 두 사람이 모두 책임지고 나가라고 설득했다.
△1월 19일 오후에는 유, 박 경정이 다시 찾아가 경찰조사 때와 같이 검찰에서 진술하라고 하는 등 범인을 축소 조작했다.

은폐공작

△2월 19일 유 경정 등 6명이 교도소로 조 경위 등을 면회 갔을 때 조 경위가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하자 박 치안감이 3월 8일 교도소로 다시 찾아가 조용히 있으라고 설득했다.
△3월 9일 박 치안감이 가족들을 만나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3월 19일에는 변호사 선임을 취소하라고 종용했다. 유 경정은 3월 11일부터 5월 17일까지 10회에 걸쳐 그 가족들을 만나 사건을 은폐하도록 설득했다.
△한편, 박 치안감은 4월 2일 신탁은행 이촌동 지점에 조한경과 강진규 명의로 5000만 원짜리 개발신탁장기예금 2계좌 씩 2억원을 가입한 뒤 다음 날 의정부교도소로 이들을 면회가 예금증서를 보여 주면서 회유하였다.


<필자 주 :

· 고문경찰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1심에서 15년을, 2심에서는 10년과 8년을 각각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어 강진규 경사는 1992년 7월에, 조한경 경위는 1994년 4월에 각각 가석방되었다. 추가로 구속되었던 황정웅 경위는 징역 5년, 반금곤 경장은 징역 6년, 이정호 경장은 징역 3년을 각각 확정 선고 받아 복역중. 이정호 경장은 1990년 5월에, 황정웅 경위는 1990년 12월에, 반금곤 경장은 1991년 12월에 각기 석방되었다.
· 축소 은폐 조작에 관여하였던 상급자 박처원 치안감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 유예 3년, 유정방, 박원택 경정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확정 선고받았다.
· 축소 은폐조작의 최고 책임자였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1988년 1월 15일, 직권남용 및 직무 유기 혐의로 전격 구속되어 최종적으로 1993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확정 선고받았다.>


한편,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가열차게 폭발하기 시작하자, 전두환 정권은 5월 26일 오전 전면개각을 단행했다. 노신영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대신 이한기 전 감사원장이, 장세동 안기부장이 퇴진하고 안무혁 국세청장이, 김성기 법무장관과 정호용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정해창 대검차장과 고건 민정당의원이 들어왔다. 검찰총장은 서동권에서 이종남으로, 치안본부장은 이영창에서 권복경으로 각각 경질되었다. 이번의 개각은 오로지 박종철 고문치사축소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전두환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던 노신영 총리와, 5공 정권의 2인자로서 그동안 정국을 좌지우지했던 장세동의 퇴진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한편 사제단의 폭로는 4.13호헌조치 이후의 소극적, 분산적 개헌운동을 범국민적 차원의 적극적, 통합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5월23일 '박종철군 국민추도위원회'는 '박종철군 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로 확대되더니, 27일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로 결성된다. 국민운동본부는 이후 6월 10일의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범국민대회', 6월18일의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 6월 26일의 '민주화대행진' 등 일련의 6월 민주항쟁을 이끌어, 마침내 6.29선언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었다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 날
우리가 모두 해방춤을 추게 될 그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리라.

- 언어학과 친구들이 1월20일 박종철에게 바친 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에서
▲ 서울대 교정에 세워진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시비(詩碑).ⓒ프레시안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건국에 다음가는 큰 사건을 든다면 아마도 그것은 30여 년에 걸친 권위주의적 군사정치문화를 청산하고, 이 땅에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일일 것이다. 30여 년에 걸친 민주화투쟁사에서 한국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가장 역동적으로 펼쳐졌던 시기가 바로 1987년 1월에서 6월까지의 기간이었다. 투쟁은 광범하고 치열했으며, 그 승리 또한 극적이었다. 그 장엄한 투쟁의 시작에서 끝까지 한국국민은 박종철과 같이 있었다.

박종철은 그 해 1월 14일에 죽었으나, 투쟁의 고비 고비마다 살아 나와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소생시키고, 더욱 강렬하게 불타오르게 했다. 어떻게 보면 박종철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순국했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할 때, 그 때마다 부활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섭리랄까, 역사의 힘이랄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뜨거운 손길을 느낀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박종철이었던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이 이 나라 민주시민의 장엄한 승리로 끝나고 이한열을 광주로 떠나보내던 날 100만 인파는 이한열에게 뜨거운 눈물을 보내주었다. 그것은 곧 박종철에게 보내는 뜨거운 눈물이기도 했다. 6월항쟁의 그 승리의 날, 그 시가 예언했던 것처럼 박종철은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었다.' 고려대학교의 김일수(金日秀) 교수는 87년을 보내면서 박종철 군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그 뜻을 새겼다.

박종철 군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그 암울한 어둠을 지나 새벽에 이르는 밝음을 깨우쳐 준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죽음은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온갖 인권침해와 고문과 희생의 값진 유산들을 한데 묶어 다시금 뜨거운 열기로 확산시키는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그의 죽음에서 모든 민주화의 함성은 한 줄기로 모였다가 다시금 여러 갈래의 다양한 목소리로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목마름의 시기를 달래기 위해 그의 영혼은 한 번의 죽음으로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우리들의 가슴속에 이젠 고문이란 반인도적 반도덕적 범죄가 가능한 독재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열망을 심어주기 위해 그의 영혼은 다시 살아나 허위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다시 밝혀주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국가가 인간을 위해 봉사하며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박 군은 잠자는 우리들의 의식을 흔들어 깨운 뒤 심어주었던 것이다.

박 군 고문치사사건의 두 번에 걸친 충격 없이 우리는 이한열 군 사건의 열기를 생각할 수 없다. 박 군 사건 없이 6.10대회와 6.26대행진의 시민항쟁을 생각할 수 없다. 박 군 사건 없이는 '6.29선언'의 진정한 배경을 읽을 수 없다. 박 군 사건의 도덕적 우월의 힘이 없었더라면 도덕성의 추정을 받고 있는 공권력의 힘을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박 군의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돌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한 고귀한 죽음으로 승화시킨 시민의 용기와 의지와 힘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민의 힘이 민주주의의 원동력이며, 그 힘의 지지를 받는 정치권력만이 도덕성과 신뢰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값진 경험을 통해 확인했다.


박종철 군은 우리로 하여금 또한 진실은 마침내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박종철은 그 자신의 죽음의 진실을 그의 힘, 진실의 힘으로 끝까지 추적, 밝혀냈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고,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한 꺼풀씩, 한 꺼풀씩 그 거짓의 가면을 벗겨 나갔다. 1월 14일 저녁,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관들이 서울지검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를 찾아와 박종철의 사인을 쇼크사로 처리하고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 화장처리 하겠다고 품신했을 때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부검케 한 것부터가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1월 15일,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의혹에 찬 사망보도, 8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중앙대병원 의사 오연상의 용기 있는 증언, 87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동아일보 김차웅, 황호택, 임채청의 심층취재, 부검의 황적준 박사의 양심적인 감정의견, 박동호 의사와 삼촌 박월길 씨의 증언 등 이런 것들은 그 때 그 시절에서는 결코 쉽게 나올 수도, 보도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키 170cm, 체중 60kg의 건장한 청년을 경찰관 두 명이 고문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진술을 그대로 믿은 검찰의 초동수사, 2월 27일 두 경찰관으로부터 3명의 고문경관이 더 있다는 양심고백을 듣고도 이를 방치한 검찰로 하여 영원히 묻힐 뻔했던 박종철 군 죽음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은 교회와 사제의 모든 것을 걸고 던진 엄청난 모험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그 때 그 시절은 가장 온순한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열렬한 투사가 되게 하던 시절이었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하고 외쳤던 그 아버지는 부산시청의 착하고 성실했던 말단의 공무원으로부터, 아들을 대신하여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고 일구어내는 늦깎이 투사가 되었다. 그 분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네크라소프의 시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슬픔과 노여움을 가지고 이 나라, 이 공동체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분은 아들이 없는 세상, 그 세상에서 아들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나오고 있다. 이제는 민주화운동의 중후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힘든 일, 궂은 짐을 도맡아 지고 있다. 그리고 그 분은 죽은 아들을 위한 싸움을 통하여 이 나라 사법 사상 최초로 '신원권(伸寃權)'을 인정받았다.

혈연으로 맺어져 운명적으로 고락과 영욕을 함께하는 가족 공동체에 있어서는 가족 중 누가 뜻밖의 죽음을 당한 경우에 나머지 가족들이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결과 억울한 일이 있었을 때는 법절차에 호소하여 그 원한을 풀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는 다른 사람들이 침해하여서는 안 될 하나의 권리로서 신원권이라고 편의상 이름할 수 있으므로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과 강민창 피고의 진상 은폐 행위는 원고 박정기 등에 대한 신원권의 침해로서 정신적 고통을 가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박종철의 누나 은숙은 박종철 제2주기 때 "철아, 너의 사랑하는 동지들은, 우리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이다. 민중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참 세상, 바른 세상이 오는 날, 바로 그 날에 철아, 나는 너의 흔적을 쓸어안고, 우리 전에 같이 추었던 해방춤을 추며 여태까지 안으로 삼켰던 오열을 토해낼 수 있는 게다. 편히 쉬어라. 사랑하는 내 동생 철아"라고 썼다.

그렇다. 6월항쟁을 승리로 끝냈을 때 우리 모두는 해방춤을 추고 뜨거운 눈물을 박종철에게 보내 줄 수 있었다. 박종철로 하여 점화된 87년의 민주화대투쟁은 박종철과 더불어 장엄한 승리로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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