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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 국민의 의분에 불을 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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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 국민의 의분에 불을 지르다 [그해 6월·2] 이름없는 의인들과 사제단의 결단
20년 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부터 6월항쟁에 이르는 기간을 되짚어보는 김정남 선생의 두번째 글을 소개한다. 이 글은 주로 박 군 사건의 은폐조작 사실이 폭로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공개된 '당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 한재동'의 역할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역사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서 '이름없는 의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겨보자는 뜻이 행간에 깔려 있다.

이 글의 필자인 김정남 선생은 2년 전 펴낸 저서 <진실, 광장에 서다>에서 이와 관련해 "아직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몇몇 사람들이 없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조작된 채로 은폐될 뻔했던 것이다"고 쓴 바 있다. 그 '몇몇 사람들' 가운데 이제 비로소 '한재동' 한 사람의 이름만 공개됐을 뿐이다.

'아직 공직에 있어서' 혹은 '본인이 자신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 나머지 '몇몇 사람들'의 실명과 그 역할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름보다 그들이 당시 이름 없이 했던 역할일지도 모른다.

다소 긴 글이긴 하지만, 20년 전의 엄혹했던 시절을 되짚어보며 그 가운데 보석처럼 점점이 박힌 '무명인'들의 역할을 곱씹어보기에 아주 적절한 글이라고 판단돼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편집자>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1987년 5월18일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서는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 미사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하여 특별하게 준비된 미사였다. 사제단은 이 미사를 통하여, 뒷날 역사적인 문건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 성명은 당시 정국의 흐름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폭풍이 된다.

이 날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을 통하여 "그러기에 우리는 그 날(1980년 5월 18일)을 슬픔과 분노의 느낌 없이 기릴 수가 없습니다. (…) 광주의 한(恨), 그것은 민족의 한이요, 역사의 한입니다. (…) 민족의 가슴에 칼을 찔러 깊은 상처를 내고 피를 흐르게 한 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민족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 길만이 한을 덜고, 우리 겨레로 하여금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 그들 자신을 구하는 길이요,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이처럼 하느님 앞에 함께 서서 억울하게 숨져간 영혼과 허망하게 앗겨버린 젊음을 추모하는 것은 그 같이 엄청난 일이 우리 안에 있었는데도 눈 감고, 귀 먹고, 외면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도록 빌고, 아울러 우리 마음에 진실을 추구하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원수 갚음이 아니요, 용서와 화해임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빌기 위해서 입니다"고 80년 광주의 아픔과 그것을 막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 그리고 얼마 전 고문 끝에 숨져간 박종철 군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 날, 전국 62개 대학에서는 2만2000여 명(경찰 추산)이 추모 집회를 갖거나 시위를 했다. 87년 들어 가장 많은 숫자가 시위에 참가한 것이다. 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범인 문부식이 법정에서 밝혔듯이, '광주 민주화운동'은 학생들의 잠자는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단초가 되었다. 학생들에게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일은 결코 그냥 넘길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이 날 명동성당의 미사에는 2000여 명의 신자와 민주인사들이 참석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과 미사 예절이 끝나고 제2부 행사가 시작되었다. 김승훈 신부가 제단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손에 들었던 원고를 차근차근히 읽어 나갔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그 제목을 읽을 때부터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듣는 사람들도 놀라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제단에 올라가 십자가 앞에 절을 할 때는 그 모습이 얼마나 경건, 엄숙했던지 제의가 젖혀져 머리를 덮을 지경이었다.
▲ 올해 1월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식 및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 선포식' 때 이 건물 외벽에 걸린 박종철의 대형 얼굴 그림.ⓒ 연합뉴스

김승훈 신부는 5월 17일 저녁, 함세웅 신부로부터 5월 18일에 있을 미사에서 이 성명을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며칠 전부터, 함세웅 신부가 찾아와 무엇인가 간절한 눈빛으로 둘이 만나기를 원했지만, 그 때마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어머니가 김 신부의 곁을 맴돌며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날은 어머니가 어제 저녁에 좋은 꿈을 꾸었다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테니 하고 가라며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어, 비로소 어려운 부탁을 정식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혹시 김승훈 신부가 성명을 발표하는 일을 맡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주 교구의 문정현 신부에게 연락, 여차하면 문정현 신부가 발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김승훈 신부는 함세웅 신부로부터 이 성명을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정식으로 받기 얼마 전부터, 그것이 어떤 내용이며, 그 성명을 발표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필경은 자신이 떠맡아 질 수밖에 없는 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일을 맡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잘 해주실 거야"라고 자신을 위안하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 일로 바로 구속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마음속으로 준비까지 해놓고 있었다. 함세웅 신부로부터 그 성명 초안을 넘겨받아 몇 번인가를 읽고 또 읽었다. 성명은 모두 3120자로 되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이 성명의 발표는 신중히 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심하던 이 성명이 이 날 드디어 발표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사제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기획, 연출자는 사제단에서 흔히 그래 왔듯이 함세웅 신부였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1.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박종철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으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 계류 중에 있는 전 치안본부 대공 수사 2단 5과 2계 학원분과 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사는 진짜 하수인이 아니다.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은 학원분과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경장 반금곤의 誤記 - 편집자), 경장 이정오(이정호의 誤記 - 편집자)로서 이들 진범들은 현재도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문 범인은 결코 두 명일 수 없다. 최초로 고문실에 들어간 외부 의사 오연상 씨의 증언에 의하여도 고문실에는 7, 8명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종래 있었던 고문사례가 그렇고, 이와 관련된 당시의 신민당 진상조사보고서, 동아일보 1월 26일자 사설도 이와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조한경 경위는 반장으로서 박종철 군에 대한 신문을 담당한 3명(위 황정웅, 방근곤, 이정오)에게 "말 안하면 혼내 주라"는 말만 하고서 고문실을 나와 박종철군의 옆방 하숙생으로 서울대 대학원생인 하종문 군에 대한 연행과 신문 등의 일을 지휘하다가 한 시간쯤 뒤에 박종철 군을 신문하는 방에 들어갔고,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박종철 군은 늘어져 있었다. 인공호흡 등을 했으나 허사였다. 조한경 경위에게는 이처럼 반장으로서의 지휘 책임이 있을 뿐인데, 직접적인 고문 살인의 주범으로 조작된 것이다.
-강진규 경사는 1반 반원이 아니며, 강진규 경사가 소속된 반에서 찾고 있는 학생에 대해 박종철 군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 방에 갔었을 뿐이다.


2.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하여 짜여지고 또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경찰은 당초 박종철군이 쇼크에 의한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사건을 조작,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 조한경 경위에게만 지휘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치려 했다. 그러나 여론의 빗발치는 진상조사 요구에 의해 고문치사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범인만은 계속 조작,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에게 덮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범인 조작은 1월 17일 이후 두 경찰관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서 최초로 이루어지고 같은 상황 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조경위 등은 17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된 치안본부 특수 수사대에서의 신문과정에서도 쇼크사라는 계속 같은 입장이었으나 18일 새벽 경찰 고위간부가 직접 찾아가 전체 경찰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부인해도 국민이 믿지 않는다고 가까스로 설득해 고문에 대한 진술을 들을 수 있었다.] (조선일보 1월 22일자)는 당시의 보도는 사실상 이 때 경찰 고위간부에 의해 범인조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사건의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고문치사사건 직후 직위해제 되었다가 4월 8일 버젓이 복직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장 전석린 경무관,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과 역시 간부 홍승상 경감 등이다. 특히 5과장 유정방 경정은 박종철 군 사건 진상 은폐와 사후 처리를 지휘한 장본인이며, 지금까지도 이 각본의 집행을 지휘 담당하고 있다.

4. 검찰은 위와 같은 사건 조작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밝히지 않고 있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수사 2부 안상수 검사는 1월 15일의 박종철군 시체 부검에 입회했을 때 마땅히 고문 수사 경찰관에 대한 신병 확보를 했다면, 범인 조작은 막을 수 있었다.
-검찰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송치 전후의 검찰 수사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으며, 사건의 조작에 협력, 동조하여 경찰 발표대로의 범인을 그대로 인정, 구속 기소함으로써 범인 조작을 은폐, 방조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이 경찰에 의한 범인조작의 실상을 알고 있다는 믿을 만한 증거와 정보가 있다.

5. 이 사건 및 범인의 조작 책임은 현 정권 전체에 있다.

-당초의 검찰 수사 방침을 경찰의 자체 수사 방침으로 바꾸게 한 1월 17일의 결정은 진상 은폐와 사건 조작을 위한 것이었거나, 적어도 경찰로 하여금 사건과 범인 조작을 결과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얼굴 없는 사건수사, 범인 없는 현장검증, 이유 없는 재판지연 등은 모두가 범인이 조작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거나, 사건 조작을 완벽하게 이루어내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이다.
-정부는 '뼈를 깎는 반성과 분발'이라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놓고 한 국민과의 약속과 다짐을 사건조작과 진상은폐로 시작해서 범인조작으로 끝내려 하고 있다.

6.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은 처음부터 그 진상이 다시 규명되어야 하며, 진상조사 활동에 방해나 탄압이 없어야 한다. 특히 구속되어 있는 두 경찰관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이 없어야 함은 물론 자유스런 접근이 보장되어야 한다. 진상조사 활동을 방해하고 탄압하는 경우, 그것은 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조작이 명백히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구속된 조 경위와 강 경사에 대한 격리와 차단, 변호인과 가족 접견의 제한과 감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건과 범인의 조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박종철 군을 고문치사케 한 범인이 조작된 이상 이제까지 당국에 의해 발표된 의문투성이의 진상은 모두 허구요, 거짓임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국회에서의 국정조사권 발동은 물론 공개적으로 재조사되어야 한다.

7.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에 대한 재판은 공개되어야 하며, 추호라도 각본에 의한 재판이라는 인상을 주는 일이 없이 모든 의문점이 철저히 밝혀지고, 그 두 사람에 대한 신변의 위험과 보복이 없어야 한다.
"첫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시인, 다음 공판에서 선고하는 식으로 싱겁게 끝나버릴 가능성이 커요. 또 법정 주변에는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 경찰 병력이 대량 동원돼 철저한 경비를 펴고, 조 경위 등이 사진기자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위장작전을 하리라는 예상이 큽니다"(동아일보 1월 26일자)는 보도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당국자가 져야 마땅하다.
-두 경찰관에 대한 변론은 치안본부 또는 그 관계자에 의하여 주선된 변호인에 맡겨질 것이 아니라, 본인들과 가족의 희망과 자유의사에 따라 선임되거나, 변호사회 또는 종교계에 의해 선임되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8. 이 사건 조작에 개입한 모든 사람은 처벌되어야 한다.
-강민창 전 치안 본부장은 사건은폐 및 범인조작에 개입한 흔적이 확실하며, 전-현직 내무부장관, 현 치안본부장의 개입 또는 묵인 여부가 밝혀져야 하며, 검찰 관계자의 개입 또는 묵인도 규명되어야 한다. 또한 해당기관 담당자와 책임자의 직무 유기에 대해서도 응분의 책임이 추궁되어야 한다.

9.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살인 행위의 범죄와 범인이 조작되어 어떠한 사람이 억울하게 천추의 한을 안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도덕적 책임 또는 지휘 책임은 직접적 고문살인 범죄의 책임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고문살인 누명은 부모에게는 불효가 되고(조 경위위 부친이 충격으로 몸져 누워 있다) 역사적으로는 만고의 죄인이 되며, 자식과 그 가족에게는 천추에 원한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10. 박종철 군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하며 그 진실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지난 4월 23일 죽은 지 100일이 된 날 박종철 군의 어머니는 "철저히 조사해서 진실을 밝히겠다더니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살아남아 있는 우리 모두가 진상을 규명해야 할 공동의 책임이 있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박종철군의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의 곁에 맴돌고 있는 가운데 고문 경찰의 핵심들은 복직되었고, 고문 살인자들은 이 땅에 버젓이 폭력 경찰로 군림하고 있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박종철군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고문 범인들은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박종철 군의 어머니의 호소가 계속되고 있다.
"아들의 죽음은 결코 우연한 사고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아직껏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져 풀리지 않는 것은 종철이가 무슨 이유로 연행됐고, 또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게까지 됐는지, 좀 더 확실한 진상이 밝혀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11.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군의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축소조작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1986년 11월부터 나는 5.3인천사태와 관련하여 수배 중이던 이부영을 숨겨주고 그에게 도피자금을 마련해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는 혐의로 수배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지하철역을 지나다가, 내 사진이 들어 있는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음식점에도 그 벽보는 붙어 있었고, 어떤 때는 내가 찾아들어간 이발소에도 걸려 있었다. 수배중인 다른 사람들의 수발은 많이 들어주었지만, 정작 내 자신이 수배자가 되고 보니 막막하고 힘들었다. 처음에 나는 이미 수배중이던 전병용과 함께 전직 교도관 출신인 최양호의 상일동 연립주택에 함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정신적으로도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나로 인하여 고령의 이돈명 변호사가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5.3인천 사태가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수배되었다. 나는 그 때 이 사람은 이리로, 저 사람은 저리로 은신처를 알선했다. 이부영은 고영구 변호사에게 부탁했다. 고영구 변호사는, "내가 직접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할망정, 그런 분들을 보살피는 일이야 기꺼이 맡겠다"고 하였다. 이부영은 고영구 변호사 집에서 잘 지냈다. 가끔씩 밖에 나가 동지들을 만나서 향후 대책을 마련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 때 고영구 변호사의 집은 역촌동에 있었는데 들어가는 길에 나를 만나고 갈 때도 있었다.

이부영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말하길 "고영구 변호사에게는 80 노모가 계시고, 부인은 신경성 위경련을 앓고 있다. 갑자기 내가 만약 이 집에 있었던 것이 밝혀지면, 이 집은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않겠느냐. 어디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해 놓을 수 없겠느냐. 그럴 경우가 연상되어 그 가족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죄송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틈이 났을 때 이돈명 변호사에게 "이부영을 제가 어디다 숨겨 놓고 있는데, 만약 검거된다면, 그 때까지 선생님 댁에 있는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하고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다. 이돈명 변호사도 "그렇게 하지, 뭐."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셨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이라는 가정이 있었고, 또 이돈명 변호사는 당시 65세 가까운 고령이었기 때문에, 설마 이돈명 변호사까지 건드릴 수 있으랴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 얼마 뒤, 이부영은 나를 만나러 왔다가 검거되었고, 우리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했던 일은 사실이 되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이부영의 진술을 듣자마자 이돈명 변호사를 연행, 그날로 구속했다. 연행된 날은 마침 유현석 변호사의 아들 결혼식 날이었는데, 나는 그 날 저녁 이돈명 변호사 댁에서 그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저녁 9시 뉴스에 이돈명 변호사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저녁 이돈명 변호사 댁의 전화가 도청되었는지, 종로 경찰서에서 일단의 검거단이 내습,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나는 그 집 안방에 달린 화장실에 숨었다. 안방에 화장실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던지 그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나는 그 이튿날 새벽, 새벽 미사에 가는 그 사모님과 함께 집을 나왔다.

고영구 변호사는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차라리 자신이 처벌을 받겠다고 나섰다.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변호사와 함께 만났을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렇게 되면 괜한 희생자만 더 늘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실을 얘기한다고 해서, 이돈명 변호사를 내 줄 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 어떠한 명목으로든 구속 상태는 풀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거짓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된 이돈명 변호사 문제를 논의하다가 고영구 변호사는 물론 그날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도 하나같이 울거나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나는 사건의 경위, 그 자초지종을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로 전했고, 황인철 변호사는, 당시 이돈명 변호사가 그 회장 직을 맡고 있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의 총재였던 윤공회 대주교에게 그 전말을 보고했다. 어쨌든 내 탓으로 하여 고령의 이돈명 변호사가 구속되었으니 나로서는 그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었고, 무엇보다 이돈명 변호사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마음은 언제나 불안하고 불편했다.

아마도 3월 중순경이었을 것이다. 그 날은 미국에 이민 갔다가 조국을 찾아온 이영철(6.3사태 때 연세대 주역)을 만나 강남의 유원 호텔에서 함께 자고, 아침에 나는 전병용에게 연락을 했다. 전병용은 나의 전화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전병용 역시 장기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수배 중 이었다. 그 전병용이 나에게 달려왔고, 그는 나에게 이미 오래 전에 내게 보내져 온 3통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것은 감옥의 이부영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당시 이부영은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아마도 그 때가 5공 하에서도 가장 많은 정치범이 양산되어 있을 때였을 것이다. 감옥마다 정치범으로 넘쳐 났다. 정치범들을 적절히 분산 배치하는 것이 독재 권력의 수법이었다. 이부영이 들어간 영등포 교도소에는 지난 날 서울 구치소에서 정치범들을 돕던 교도관 한재동이 있었다. 이부영이 쓴 편지가 한재동을 거쳐 전병용에게, 그리고 최종 수신자인 나에게 전달된 것이다. 전병용은 그 편지를 내게 전달하고 난 이틀 뒤엔가 검거되었다. 내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편지에는 정말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읽어 가면서 나는 아무리 군사독재권력이라지만,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놀라고 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짓을 서슴치 않는 정권이라면 정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정권이라는 분노가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이 세상이, 이 나라 이 국민이 결코 전두환 정권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편지에는 그 해 1월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범인이 축소 조작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차를 두고 쓰여진 3통의 편지는 그 동안의 경과를 시간대 별로 말해주고 있었다. 2월 중순께까지 이부영이 그 안에서 들은 바를 정리한 것이었다.

1987년 1월 18일, 영등포 교도소 격리 사동에 갇혀 있던 이부영은 간밤에 들어온 두 명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관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부영은 당시 0.72평짜리 작은 방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 고문 경찰관은 멀찌감치 떨어진, 4평이 넘는 큰 방에 따로 따로 수감되었다. 그들 방 옆에는 별도의 교도관이 배치되어 특별 감시를 했다.

교도소의 겨울밤은 참으로 춥고도 길다. 밤 깊은 시각, 두 경찰관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40세를 넘긴 조한경 경위는 찬송가를 부르거나 소리 내어 성경을 읽었고, 30대의 강진규 경사는 간혹 소리 내어 흐느꼈다. 신분이 알려지면서 그들은 일반 재소자뿐만 아니라 교도관들로부터도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교도관들을 통해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 그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했으며, 특히 강진규 경사는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칠순의 아버지에게 불효자식을 용서하라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그들의 가족 면회가 금지되었으며, 곧 이어 대공수사단의 간부진들이 찾아와 그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는 얘기가 속속 전해져 왔다.

내용인 즉 이들 두 사람 말고도 고문 경찰관이 세 명이 더 있으며, 조직의 보호를 위해 두 사람만이 희생양이 되어 '고문살인 경관'이라는 오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대공수사단 간부들은 두 경찰관에게 '일년만 참아라' '곧 꺼내주겠다' '가족의 생계를 돌봐 주겠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 통장을 넘겨 주겠다'면서 1억 원짜리 은행 통장을 보여주고 회유했으며, 또한 침묵하지 않으면 밖에 나와서 제대로 살 수 없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부영은 교도관들을 통하여 이 같은 사실을 취재하는 한편으로 2월 7일, 추모행사를 맞이하여 20일간의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을 하는 동안 쇠창살을 통해 두 경찰관에게 소리쳤다. "두 분도 박종철군의 영혼 앞에 참회하고 그 넋을 위로하시오, 나는 두 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박종철 군이 그렇듯이 두 분도 전두환 군사독재의 희생자들입니다." 이를 계기로 이부영과 이들 두 사람은 주전자에 김치를 넣고 끓인 라면을 서로 나누어 먹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이부영에게 두 고문 경찰관의 동태, 그들로부터 들은 고문치사과정의 진실, 검찰의 태도, 경찰의 회유내용들을 전달한 것은 교도관들이었고, 특히 한재동이 그 중심적 역할을 했다. 한재동은 자신들이 전한 내용을 이부영으로 하여금 정리하여 내게 편지로 쓸 수 있도록 필기도구를 제공하였고, 그렇게 쓴 편지를 한재동은 밖에 있는 전병용에게 전달한 것이다. 상당기간, 한재동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사건 후에도 상당기간 교도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부영의 편지를 받고, 1월 14일 이후의 신문을 모조리 뒤져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래, 2.7 국민추도회, 3.3. 49재 등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진영의 대응과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했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언론에 보도된 기사 가운데도 눈여겨 볼 것도 많았고 참고할만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박종철과 관련된 기사란 기사는 모두 다 스크랩했다. 수배중이라 행동이 부자유했기 때문에 사실을 직접 확인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얻은 정보와 이부영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하나의 정리된 문건을 정리하는 일이 내게 남은 일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고 보고 이른바 4.13 호헌조치란 것을 발표했다. 이렇게 하여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은 정치적 쟁점에 밀려서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이 엄청난 사실을 세상에, 국민 앞에 알리는가 하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 무렵 소집된 임시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본회의 대정부 질의를 통해 공개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실제로 그 때 연락이 닿던 야당의원을 통해 대정부 질의자로 선정된 의원들의 의사를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거꾸로 사정해 왔다. 그 때는 그만큼 분위기가 살벌했기 때문에, 그들이 몸조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그들을 탓하거나 비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뒷날 야당의 정파 간에, 이 사건의 축소, 조작, 은폐 사실을 알고도 야당의 지도부가 무력해서 발표하지 못했다는 등의 공방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로서는 어떻게 이와 같은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경위를 야당에 밝힐 수가 없었다. 그 과정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야당은 더더욱 발표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그 비밀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도, 발표에 못지않게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시간은 흘러 5.18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는 사제단에 기대를 걸었다. 사제단은 나에게는 물론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에도 언제나 보호막이었다. 그리고 사건 때마다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사제단, 특히 함세웅 신부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사제단에게 이 무겁고 힘든 짐을 맡기지 않았으면 했다. 언제나 사제단은 시대가 요구하는 짐, 위험한 일은 떠맡아져 왔다. 나는 항상 그것이 미안했다. 또 짐을 지운다는 것이 그렇게 괴롭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해 낼 수 있는 곳은 사제단뿐이었다.
▲ (왼쪽부터 순서대로) 1987년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의 진실을 영등포교도소 안에서 취재해 이를 편지 글로 바깥세상에 내보낸 이부영 열린우리당 전 의원, 이 편지를 교도소 밖으로 전달한 한재동 씨, 편지 내용을 토대로 '조작은폐'의 진실을 정리한 김정남 전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정의구현사제단 폭로 과정을 주도한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최종적으로 이 성명을 사제단 집회에서 발표한 고(故) 김승훈 신부. ⓒ프레시안

그 때 나는 고영구 변호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함세웅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가는 편지도 썼다. 그것을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 황국자 여사와 딸 고은영(당시 이화여대 4년 재학 중) 양으로 하여금 전하게 했다. 그 때 함세웅 신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일요일이면 구파발 성당에 가서 미사를 집전했다.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구파발 성당까지 가서 미사 드리면서 내 편지를 전했다. 그들 모녀는 편지 나르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사제단의 발표가 있기까지는 이들 두 모녀의 수도 없는 발걸음이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최악의 경우 "축소, 조작 사실을 사실로 확인하고 사제단에게 제보한 사람이 수배중의 김정남"이라고 밝혀도 좋다면서, 어떻게든 발표만 해 달라고 졸랐다. 내 편지를 통해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던 김수환 추기경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워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그것을 발표하는 일은 구속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고심 끝에 사제단은 '5.18 광주 민주항쟁 7주기 미사'를 봉헌하기로 하고, 거기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사제단은 그 성명의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군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번에 고문치사사건의 축소·조작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만 하면,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려 마침내 국민의 힘에 의한 민주화의 도정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당시로서 5공 정치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옛사람들의 말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는 것이 있다. 백 척이나 되는 낭떠러지에서 눈 딱 감고 한 발짝 더 나아가라는 말이다. 이 성명을 발표하는 사제단과 김승훈 신부의 심경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고, 벼랑에서 한 발짝 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제단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의 핵심은 물로 박종철에 대한 물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외에 3명의 고문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데 있다. 당국의 축소조작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3명의 경관은 경위 황정웅, 경사 반금곤, 경장 이정호 라고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밝혔다. 그들은 다 같은 고문 경관인데도 여전히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의 발표에서 반금곤이 방근곤으로, 이정호가 이정오로 되어있는 것은 의도적인 오류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듣고 그렇게 적었던 탓이다. 교도관들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로부터 이들 고문 경관들의 이름을 들을 때부터, 귀로 들은 대로 이부영에게 그렇게 전했던 것이다. 사실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또 다시 한번 들은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발음상 '반금'은 '방근'으로, '호'는 '오'로 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한때 경찰 내부에서 사제단이 경찰의 대응을 알아보기 위하여 의도적인 오기를 했다는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또 하나, 사제단의 발표는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증언과 진술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역할은 애써 축소하거나 경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두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들이 생짜로 억울하게 차출되어 구속 기소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뒷날 최종적으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조한경은 물고문을 지시, 지휘하였고, 강진규 역시 물고문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났다. 그들은 "왜 우리만이 고문치사의 범인으로 희생되어야 하느냐"에 당황하고 있었으며, 가족들이 "네가 정말 죽였느냐.그렇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고 다그치자 그에 변명하는 입장이다 보니, 자신들의 역할을 축소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제단의 성명을 읽으면, 그것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진술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있다. 아마도 경찰도 그것을 이내 눈치 챘을 것 이다. 그것이 경찰로 하여금 사제단의 성명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중요한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사제단은 이 성명에서 1월 17일에 있었던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경찰이 자체조사토록 한 것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범인의 축소조작을 가져오게 했다는 점, 축소 조작 은폐에 가담한 실무자들의 구체적인 명단과 역할, 검찰이 사실상 축소 조작은폐를 묵인해 왔다는 사실, 그리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개입의혹 등을 날카롭게 적시 또는 지적하고 있다. 이런 사제단 성명의 구체성이 경찰로 하여금 더 이상 진실을 은폐할 수 없도록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버틴다는 것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말씀은 폭풍이 되어

사제단의 발표가 있고 나서, 초조한 하루 이틀이 지나고, 5월 21일 오후 6시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고문살인의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그 3일간은 사제단에게는 물론이요 나에게도 숨 막히는 기간이었다. 우리는 과연 권력 당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거꾸로 사제단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고 덮어씌울 수도 있는 정권이기에 그 기간은 길고 초조했다.

검찰은 5월 20일, 재수사를 시작하였다. 이날 밤 경찰은 스스로 범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해 검찰에 데려왔다. 21일 오후 4시, 3명의 추가범인에 대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5월 29일에는 검찰이 축소 조작을 주도한 대공 수사 2단 단장 박처원, 5과장 유정방, 5과 2계장 박원택을 범인도피죄로 구속 수감했다. 그러나 사제단이 강력히 의혹을 제기한 축소,조작, 은폐의 최고 책임자라 할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이번 재수사에서도 제외되었다.
▲ 박종철군 고문치사은폐조작 관련 여부에 대한 재조사를 받기 위해 1988년 1월14일 검찰에 출두하는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 그는 결국 그 다음날 구속됐다. ⓒ 연합뉴스

강민창은 박종철이 죽고 나서 꼭 1년만인 1988년 1월 15일, 부검의 황적준 박사의 일기장이 근거가 되어, 그가 황박사로 하여금 허위감정의견을 제출하도록 한 직권남용과 사인을 은폐한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제단의 발표와 강력한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5공 정권은 그 때까지도 여전히 조작과 은폐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은 축소조작사건을 5공 정권이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가, 6월 22일 '진실이 밝혀지기보다는 은폐되고 있다'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한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1차 성명에 못지않게, 이 성명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까지 박종철사건의 진실을 축소조작하고 은폐하려는 5공 정권의 안간힘을 이 성명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모는 5공 정권에 의하여 여전히 은폐되고 있었고, 어쩌면 오늘까지도 당시의 내무장관 등 축소·조작·은폐의 책임과 진실은 영원한 미궁으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사제단의 5.18성명에도 불구하고 5공 정권과 검찰은 여전히 미봉과 봉합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전모와 그 이후의 진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성명을 꼭 읽을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어 자료로 별첨하고자 한다. 이 성명 역시 그 초안은 아직도 수배상태에 있던 내가 작성하고, 사제단의 검토를 거쳐 발표되었다.

한편 그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전두환 정권은 5월 26일,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노신영 총리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이한기 감사원장이, 장세동 안기부장이 퇴진하고 안무혁 국세청장이 그 자리에 들어왔다. 연쇄적으로 내무, 법무 장관과 검찰총장, 치안본부장이 바뀌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축소조작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두환 정권의 권력 지형이 바뀐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제2인자, 후계자로 거명되던 노신영, 장세동이 몰락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죽은 박종철이 살아 있는 노신영, 장세동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정국도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제단의 발표를 계기로 수세에 있던 재야 민주화 진영과 야당은 일거에 생기를 회복했다. 4.13호헌조치 이후 신당 창당과정에서 5공 정권의 물리적 탄압으로 계속 수세에 몰리던 민주당은 사제단 발표를 계기로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5월 23일, 민주당은 박 군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각 총사퇴와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였고, 25일에는 박 군 사건에 책임을 지고 전두환 정권이 퇴진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재야 민주화 진영은 5월 23일, 이제까지 2.7 국민 추도회와 3.3. 49재 행사를 주도해 왔던 '박종철군 국민추도 위원회'를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로 확대 발족했다. 5월 27일에는 재야와 민주당이 연합하여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를 발기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제단의 발표가 4.13 호헌조치 이후 소극적, 분산적으로 전개되던 민주개헌운동을 범국민적 차원의 적극적, 통합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국내 언론은 연일 박종철 사건의 추이를 대서특필로 보도하였고, 국민의 공분은 날로 끓어올랐다. 이러한 분노의 국민적 분위기는 6월의 민주화 투쟁으로 점화된다. 그것이 조직적, 대대적으로 분출되어 나타난 것이 '6.10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국민대회'였다. 그것이 명동성당 농성투쟁, 6.18 최루탄추방행사, 그리고 6월 26일의 민주화 대행진을 거치면서, 나라의 민주화라는 장엄한 승리를 이끌어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제단 발표의 위력과 파장은 그렇게 컸다.

다른 한편으로, 사제단의 발표는 이미 권력의 앞잡이로 전락하여 정권의 안보와 그 유지를 위해 고문 등 무소불위의 국민 탄압과 인권 유린을 자행하던 대공 경찰의 궤멸을 가져 왔다. 그것은 그들의 자업자득이었다. 전두환 정권 들어 그들은 서울에서 학림사건, 전민노련사건, 부산에서 부림사건, 대전에서 한울회, 아람회 사건, 공주의 금강회 사건, 전주의 오송회 사건을 조작했다. 그 대공 경찰의 위세가 사제단의 폭로로 여지없이 꺾이고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대공 경찰의 대부 박처원의 구속은 정권안보에 편승하던 대공 경찰의 말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제단의 발표는 이 나라 민주화의 진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사제단 성명의 5항에는 이들이 어떻게 용공조작사건을 만들어내는지 그 일련의 프로세스를 그대로 밝혀놓고 있다. 그들은 용공조작과 그것을 위한 고문을 밥 먹듯이 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제2차 성명 : 진실이 밝혀지기보다는 은폐되고 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오 10.26-27)

우리는 우리 신앙의 양심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난 5월 18일, 박종철군 고문살인사건의 조작은폐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국민의 과분하고도 충정어린 성원과 격려, 그리고 진실을 갈구하는 국민 내부의 열망과 언론의 몸부림이 하나 되어 마침내 어둠속에 갇혔던 진실이 일단이나마 밝혀질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5.18 성명과 관계없이 그 이전부터 검찰이 박종철군 고문살인 사건의 조작은폐 사실을 알고, 철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는 검찰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를 우리가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박종철군의 고문살인의 진상은 물론 조작과 은폐의 과정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요연하게 검찰에 의하여 조사, 발표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5월 29일의 발표는 전후좌우의 모순과 허점으로 점철되어 있어, 진실의 규명보다는 오히려 사건의 종결과 호도에만 급급한 인상의 그것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검찰의 발표가 진실인 것으로 확인되기 위해서는 객관적 제 3자의 검증이 필요한데도, 우리가 조사를 신뢰하고 있는 대한 변협의 공정한 조사활동을 검찰이 오히려 봉쇄, 차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은폐, 조작되고 있다는 의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발표로 어떤 사람이 보복이나 불이익을 강요당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불찰이요 아픔일수밖에 없는데,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몹시 공포에 떠는 모습으로 진술과 변호인 선임을 번복하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실은 검찰 차원에서 밝혀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검찰 자체가 이 사건의 조작과 은폐에 개입한 정황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검찰이 진실을 밝혀 낼 수 있으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살인과 사건조작 은폐의 전 과정에 걸친 실체적 진실은 물론 이 나라 정치권력 자체의 양심의 마비상태, 즉 고문으로 한 젊은이를 죽게 하고, 그 사실마저 조작 은폐하는 그런 도덕적 기반위에 서 있는 정치권력의 의식 세계와 그에서 비롯되는 공권력의 원초적 부도덕성과 부정직성이 밝혀지고 청산되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국정조사권의 발동과 변협 조사활동의 자유가 먼저 보장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확신을 거듭 내외에 천명하면서 이러한 조사활동이나 재판절차를 통하여 마땅히 밝혀져야 할 문제점들을 다음에 제시하는 바입니다.

1.고문치사 과정의 진실
가) 박종철군이 연행될 당시의 신분은 오직 박종운군에 대한 참고인 자격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나) 연행시간과 연행된 장소가 명백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렌즈 소독기가 든 손가방과 학교 성적표가 없고, 전날 신고 나갔던 부츠와 하숙집 동료로부터 빌린 상아색 털목도리가 없는 점에 비추어 하숙집이 아닌 장소에서 발표와는 다른 시간에 연행되었다는 가족과 그 주변의 주장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이 있어야 합니다.
다) 물고문 이외에도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박군 몸의 얼룩진 반점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이 없는 점과 연행 시간 등의 의혹에 비추어 치안본부 대공 수사 2단 5층 9호실이 아닌 장소(신문실)에서 제 1차 고문이 선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사체부검 사진의 공개와 함께 다른 고문의 의혹이 밝혀져야 합니다.
라) 강진규 경사가 다른 반 반원으로서 박종철군 조사에 참여하게 된 이유와 역할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5월 30일 이상수 변호사가 접견했을 때 공포에 질린 표정과 언동이었던 점 등에 비추어, 조, 강 두 경관에 대한 신변의 안전이 지켜진 가운데 변협 조사단과의 자유로운 면담에 협조해 줄 것을 관계당국에 간곡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2. 경찰
가) 박종철군의 죽음이 고문치사로 밝혀진 뒤 당시의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처음 상황 보고를 정확히 하지 않은 사람을 감찰 조사 하겠다"고 하였으나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았고, 신길동 치안본부 특수 수사 2대에서 처음 조사할 때부터 "상부로부터 조한경 경위 등 2명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수사반의 진술 등에 비추어 조작은폐 사실을 치안본부장이 알고 있거나 지시 또는 그에 개입했음이 확실하다 할 것입니다.
나) 검찰은 박처원 치안감 등 경찰 간부 3명을 범인도피혐의로 구속하면서 이들이 두 경찰관을 교도소로 찾아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 또는 관련자 5명을 쏴 죽이겠다고 말하는 등의 협박에 대해서 진상조사는 물론 납득할 만한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와 같은 공갈과 협박이 교도소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리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다)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의 형사처벌 등을 결코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건 발생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단장이었다가 직위해제 끝에 4월 8일 보직 발령된 전석린 경무관,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줄곧 박종철군의 가족을 동행, 감시하고 고문살인사건의 조작 은폐를 위한 가족의 회유와 금품제공 등에 가담한 홍승상 경감, 그리고 1차 보고서를 작성하고 가족 면회 때마다 입회 감시한 이태훈, 여건주 경위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조치나 문책 또는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라) 우리는 박처원 치안감이 서울신탁은행 이촌동 지점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명의로 예치한 개발신탁 장기예금 4개 구좌 2억원의 정체와 행방, 그리고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수사비가 비록 정권 유지자금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이 방만하게 쓰여져도 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으며, 한사람의 치안감이 쓸 수 있는 재량권이 그렇듯 큰 데 대해 국민이 느낄 수밖에 없는 배신감과 허탈감을 어떻게 위로, 보상할 것인지 밝힐 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바입니다.
마) 우리는 또한 사건 직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조, 강 두 경관 가족에게 준 각 3백 만원과 2월 24일 이영창 치안 본부장이 준 각 1천만원 돈의 출처와 자금의 성격을 밝혀 줄 것을 요구합니다. 경찰관이 결코 재벌이 아닐진대,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치안본부와 서울 시경 대공팀 소속 경찰관이 한 사람당 10만원, 경사 15만원, 경위와 경감 20만원, 경정 30만원, 총경 50만원, 경무관 이상 100만원씩 갹출했다는 발표를 쉽게 납득할 수 없습니다.
바)우리는 추가 구속된 3명의 고문 경관이 사건 후 같은 날, 전보 발령된 점에 비추어 인사권자인 당시 치안본부장은 고문 조작은폐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명백하다고 믿는데 이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검찰
가) 정구영 전 서울 지검장은 5월 21일 발표에 이르기까지 그 때마다 거짓 발표와 기자와의 기만적 일문일답을 하여왔음이 5월 29일의 검찰 발표로도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서울 지검 안상수 검사는 2월 27일 조, 강 두 경관으로부터 3명의 고문 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청취하고서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인지 잘 판단하라"면서 계속적인 은폐를 획책, 종용하고 이 같은 사실을 상부에 보고, 2월 28일 김성기 법무부장관이 영등포 교도소를 방문, 새로운 사실이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단속을 지시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두 경관에 대한 3월 7일의 이감조치는 경찰로 하여금 두 경관에 대해 마음 놓고 회유와 설득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음이 명백합니다. 3월 9일 가족 면회 때 조한경 경위는 동생에게 "검사에게 조작 사실을 폭로한 뒤 경찰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을 당하고 있다. 빨리 변호사를 대라"고 한 사실에서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 같은 정황에 비추어볼 때 적어도 2월 27일 이후 검찰은 조, 강 두 경관의 심경의 변화를 경찰에 알려 합동으로 조작 사실을 은폐 무마하려 했음이 확실합니다.
나)조, 강 두 구속 경관에 대한 가족 면회가 토요일 오후에 특별면회로만 허용된 점, 또 조한경 경위에게는 이태훈 경위가, 강진규 경사에게는 여건주 경위가 입회한 상태에서만 면회가 이루어진 점, 3월 말경부터 검사의 지시라며 3주간 면회가 금지된 점 등에 비추어 검찰은 2월 28일 이전에 이미 조작은폐 사실을 알고, 경찰과 교도소 당국과 연계하여 합동으로 조작 사실의 은폐를 공모, 혹은 적어도 묵인했음이 명백합니다.
다) 공정한 법 운용의 표상이 되고 공익의 대표여야 할 검찰이 이 사건에서 위와 같이 수사 지휘권을 포기하고 직무를 유기하며, 나아가 은폐조작을 방조 묵인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경찰이 자체 조사를 빙자하여 박종철군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을 조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검찰 역시 자체조사와 발표를 통하여 자신의 은폐조작 방조의 범죄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는 검찰에 의한 제 2의 은폐조작으로써 검찰권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스스로 자초하는 것인 바, 검찰이 그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진실을 더 이상 감추지 말기를 진심으로 호소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4. 법원
가) 공소제기 후 4개월이 지나도록 재판이 열리지 않았던 이례적인 상황을 재판부는 3,4,5월이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간대를 피하려 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이 사건 재판이 경찰의 차단과 봉쇄 속에 단 1회에 결심, 그 다음 기일에 선고하는 요식적 절차로 끝나리라는 근거 있는 소문이 일반화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결과적으로 검찰과 경찰의 조작 은폐를 방조하고 기다려준 것에 다름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나) 우리는 이 사건 재판의 결과와 관련하여 경찰에서 이미 1심에서는 10년 구형에 7년 선고, 2심에서는 7년 구형에 5년 선고, 그리고 3년 정도 살면 나오게 된다는 각본이 짜여졌던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청와대 비서관 출신이라는 재판장의 전력에 비추어 담합의 의혹도 전혀 배제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다) 재판은 공개되어야 하고, 또한 모든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는 법정이 되어야 하며, 법관은 선입견이나 예단 없이 이 사건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맡은 재판부 재판장이 조한경 경위 지휘 책임의 법적 문제와 관련한 논평을 통하여 "서울 강남 서진 룸살롱 폭력배 집단살해사건 재판에서 장진석 피고인도 지시만 하고 살인행위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중형을 선고받았다"고 함으로써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사전에 예단을 가지고 있었음이 명백한 바 이 재판부에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요 불안입니다.

5. 용공 조작과 고문
가) 언제부터인가 '남영동'으로 통칭되는 치안본부 대공 수사 2단은 학생과 노동 운동가를 비롯, 유신시대 이래 민주, 민중, 민족 운동에 헌신해 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 공포는 용공조작에 대한 것과 그것을 위한 정신적, 육체적 고문에 대한 것이며 학생 운동 단체 및 재야 민주, 민중 운동 단체의 용공조작 사건의 대부분이 여기서 조사, 조작, 발표되어 왔습니다. 그 과정 또한 지극히 도식적이어서 연행 또는 수배와 동시에 가택을 수색하여 이른바 문제 서적이나 유인물은 먼저 확보하고, 혐의 사실로 용공조작하기 위하여는 김근태씨의 경우처럼 야만적 고문을 감행하고, 그것으로도 안 되면 이미 확보한 책자나 유인물을 가지고 용공좌경으로 채색, 발표하는 것입니다.
책자나 사상에 대한 감정은 처음부터 정체불명의 내외문제 연구소라는 곳에 맡겨지는데, 대개의 경우 홍성문(홍지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다섯 가지 가명을 쓰고 있음)이라는 수석 연구위원이 천편일률적으로 허위감정 또는 법정에서 모략 증언함으로써 재판을 통해 용공좌경의 너울을 씌우는 것을 하나의 확립된 절차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대공 수사단에 의하여 용공좌경으로 채색되어 재판을 통하여 처단되는 공정(公廷)이 이러하거니와 우리는 대공 수사단이 민주화 운동, 민중 운동 관련자에 대해 용공좌경이라는 도식적 틀에 맞추는 수사를 함으로써 고문이 이루어지고 또 국사범과 민주, 애국인사 사이에 혼동이 일어나게 하는 오래된 관행을 안타까워합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역시 정치권력의 요구와 비위에 맞추기 위해 무리한 수사를 감행하다가 발생한 정치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터지자 용공조작을 요구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정치권력이 그 책임을 오직 고문경찰관과 대공 수사 간부에게만 전가한 측면을 도외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용공 조작은 국민 분열을 획책하는 민족자해행위로써 그에 대한 반대와 거부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거니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시국과 관련한 사건 수사를 대공 수사단이나 그 요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우리의 간곡한 충고를 현 정권 당국에 전하는 바입니다.

6. 1월 17일의 정부대책회의
박종철군 고문살인사건에 대한 조작은 1월 17일의 관계부처 장관과 유관기관 책임자가 참가한 정부 대책회의에서 경찰 자체조사를 결정함으로써 비롯되어 조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보도에 의하면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의 로비에 의해 그와 같은 결정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들이 필사적으로 경찰 자체조사를 관철한 뒷면에는 조작 은폐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음 또한 자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사상식에 반하는 이런 주장이 관철되어 그와 같은 결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은 조작은폐를 목적으로 하거나 그 사실을 알고 경찰 자체조사를 고집했을 것임이 명백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당시의 언행(대공 수사요원의 사기 운운)이 또한 이를 밑받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월 17일의 정부대책회의의 전 과정과 내용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책임도 규명되어져야 마땅하다고 거듭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이 사건의 진실은 결코 밝혀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7. 정치권력의 도덕성
가)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전 법무부 장관은 박종철군 고문살인사건의 조작은폐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월8일의 임시 국회 본회의 답변에서 "두 사람 이외에 다른 경찰관은 가담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로서는 철저하고 면밀한 수사를 하여 그 진상을 그대로 규명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처벌했으므로 재수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한다"고 위증하였으며 내무부장관은 5.26 개각발표 후 조작 은폐 사실이 밝혀진 데 대한 화풀이로 언론에 화살을 돌림으로써 현 정권의 도덕적 파산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현 정부의 경직되고 도식적인 지휘, 명령체계에 비추어 볼 때 관계 장관은 물론 국무총리, 나아가서는 대통령도 조작은폐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나)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후 가진 1월 22일의 기자회견에서 '고문치사'란 말을 단 한마디도 쓰지 않으면서 '박종철군 사망사건'이라고만 썼습니다. 진상을 진상 그대로 보거나 표현하지 않으려 하는 가운데서는 양심적 반성도, 도덕성의 회복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박종철군의 고문 살인사건의 조작 은폐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민정당은 오직 체육관선출 대통령 후보 선출이라는 예정된 각본대로의 정치일정만을 우려했을 뿐, 진실한 반성이나 고뇌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2.7 추모집회, 3.3 국민대행진 등 행사와 관련, 그 때마다 여러 차례 있어 온 당정 회의를 통하여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을 비롯한 당직자들이 법무부장관 등으로부터 은폐조작 사실을 보고 받았을 개연성 또한 우리는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8.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인책 개편을 단행하면서도 대통령은 고문 근절 선언이나 국민에 대해 정중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및 사건 조작 은폐의 진상 규명과 고문 근절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게 표명되지 않는 속에서는 진상이 있는 그대로 밝혀질 수 없고, 고문 또한 근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도 고문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후 구성된 정부의 인권특별위원회에서는 의문의 변사사건에 대한 조사나 고문, 성고문에 대한 진상 규명보다는 법관의 영장 없는 임의 동행 요구를 법제화할 움직임까지 보이는 등, 현 정부는 어떻게 하면 법과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탄압, 유린할 수 있는가 만을 연구, 획책하고 있습니다.
다)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는 5월 30일의 담화를 통하여 "이 사건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지고 그에 따른 정치적, 법적 조치가 충분히 취해졌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 사건의 진상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며, 법적으로 뿐 아니라 도의적, 행정적 책임이나 조치는 미흡하거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6월 10일의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고문살인과 조작 은폐의 당사자인 경찰과 검찰이 염치없게도 원천 봉쇄하고 다수의 민주 애국인사를 구속한 것은 이미 도덕성이 파탄난 공권력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현 정권이 국민대회를 오히려 폭군적 압제의 빌미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광주 사태에서 박종철 군 고문살인과 조작 은폐'를 거쳐 그 마지막 비극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는 불안한 예감을 국민으로 하여금 갖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민주화된 나라에서 모든 이웃 형제와 '더불어 함께',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나라의 민주화와 사회정의, 그리고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요구하는 것이 용공 좌경일 수 없고, 그것으로 고문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누구가 처벌되고 처벌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또한 고문해 죽여 놓고 징계 정도의 처벌을 예상하는 공권력의 의식 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속을 각오하면서 발표한 '5.18성명'의 그 마지막 구절을 오늘 인용하는 것으로 우리 모두의 기도와도 같은 호소를 다시 한 번 전하고자 합니다.
"이 사건 범인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고문살인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결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87.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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