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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앞 '알몸 시위'가 불편한 '진보'는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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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탱크 앞 '알몸 시위'가 불편한 '진보'는 보라" [정희준의 어퍼컷] 운동, 좀 튀면 안 되는가?
며칠 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강의석이 벌인 알몸 퍼포먼스를 놓고 진보적 운동 단체들 안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반박과 재반박이 오갔다. 재미있는 것은 군대 폐지라는 진보적 주제를 탱크 앞에서 알몸 시위를 해 쟁점화시키려던 강의석을 다른 진보적 활동가들이 공격한다는 점이다. 일종의 블랙코미디 아닐까.

이들의 주장은 강의석이 '언론 노출증'에 중독된 '미디어 스타'이고 강의석이 '자행'한 그 불쾌함이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평화운동이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말없이 묵묵하게 일하는 평화운동가까지 상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이들이 강의석으로 인해 불쾌감을 느끼게 됐고 결국은 열심히 뛰고 있는 사회운동가들이 때 아닌 욕을 먹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 중엔 강의석의 '진정성'이다. (사실 나는 이제 운동권 용어가 되어버린 듯한 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쉬운 말 어렵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진정성'은 보통 남 흠 잡을 때 많이 등장한다.) '진정성 없는 알몸이 보기에 민망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나는 군대폐지라는 진보적 주제를 가지고 시위한 것을 두고 다름 아닌 평화운동 활동가가 비난하는 형국이 더 민망하다.

또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증거가 좀 그렇다. 우선은 강의석의 심한 노출증이 문제인데 그 노출도 '제대로 된 사회운동'으로 노출된 게 아니라 신변잡기식, 즉 서울대 입학 이후 권투선수, 택시기사, 호스트바 취업, 박태환에게 보낸 편지 등으로 미디어에 '오르락 내리락' 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제 표현의 자유 뿐 아니라 취미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까지 문제 삼는 형국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회운동'은 도대체 어떤 사회운동을 뜻하는가.

많이 알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이나 만 명에게 알리는 것보다 한 명의 지지자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나는 많이 알리는 것이 더, 아니라면 똑 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첨 재미있는 비교도 등장했다. 그의 알몸 노출을 몇 년 전 TV생방송 음악프로에서 바지를 벗어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킨 카우치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때 몰상식한 카우치 덕분에 홍대앞의 죄없는 인디밴드들이 수난을 겪은 것처럼 사회운동가들도 욕을 먹는다면서 말이다.

강의석과 카우치? 김인규는?
▲ 지난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강의석 씨가 벌인 군대 폐지 알몸 퍼포먼스는 운동사회 내부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강의석

정말 카우치와 비교가 될까. 카우치는 그냥 '생각 없이' 벗었다. 그랬기 때문에 경찰서에 가서도 다른 강도, 절도범과 마찬가지로 고개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사실 나는 그 성기 노출 소식을 접했을 당시에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하는 그들을 보고 실망한 바 있다. 그러나 강의석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표를 향해 행동했기에 당당한 것이다. 물론 이 당당함마저도 그들은 뻔뻔스럽다는 듯이 비난하지만.

강의석 비판자들은 '역풍'과 '반감'을 유난히 강조하며 강의석을 나무라는데 카우치보다 더 큰 역풍을 불러온 다른 예를 찾아보자. 강의석의 그 불편한 행위를 비난하는 이들은 2001년 미술교사 김인규 씨가 자신과 아내의 알몸 사진을 자기 홈페이지에 올려 촉발됐던 표현의 자유 논란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이를 본 청소년과 학부모 중엔 분명 '불편'하고 '민망'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보수 언론은 신이 나서 열심히 기사를 써댔다. '확실한 역풍'이었다. 그럼 지금 강의석의 알몸을 비난하는 이들은 알몸을 드러내 역풍을 초래한 김인규 교사도 비난하는가. 설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강의석에 대한 비판은 참 이상한 검열이란 생각이 든다. 또 자기검열도 아닌 타자에 대한 검열은 더더욱 동의하기 힘들다.

이번 논쟁은 군대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 대안으로 대체 복무를 위해 일하는 이들과 군대 자체를 거부하는 강의석 간의 노선 차이 또는 운동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듯하다. 느낀 바대로 솔직히 말하자면 군대를 인정하는 대체 복무 운동가들이 갑자기 군대 폐지를 외치며 등장해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한(?) 강의석으로 인해 당혹감에 빠지면서 벌어진 일인 듯 하다. 이들 사이엔 뭔가 구원(舊怨)이 있는 것도 같다. 문제는 많은 이들에게 (본인들이 강하게 부정하겠지만) '내가 하는 일 방해되니 너는 그 일 하지 마라'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제대로 벗었네!'

강의석의 알몸으로 인해 군대 폐지라는 논의는 사라지고 알몸만 남았다고 하지만 많은 이들은 군대 폐지도 봤고 알몸도 보았다. 군대 폐지를 보지 않고 강의석만 보는 강의석 비판자들이야말로 문제 아닌가. 또 강의석의 퍼포먼스는 실패한 것이라는 (조롱하는 듯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건'의 전말을 잘 몰랐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탱크 앞에서!? 제대로 벗었네. 난 또 강의석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혼자 막 뛰어다닌 줄 알았지."

운동권의 이런 '엄숙주의'와 자신의 방식만을 선으로 규정하고 다른 이들을 가르치려 드는 엘리트주의는 문제다. 자신들의 주장, 논의, 운동 방식만을 기준으로 삼고 자신들의 목표, 방법, 토론만이 진지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말이다. 설사 내가 하는 운동이 좀 헷갈리게(?) 됐다 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운동을 공개적으로 인신공격까지 섞어가며 비난하는 것은 옳은 운동인가.

항상 자기만 맞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민중의 적', '프락치', '사꾸라'로 매도했던 1970~80년대 운동권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미디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인데 미디어에 등장하는 걸 탓하는 그 논리구조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시계가 거꾸로 가는 듯하다.

왜 보수의 잣대를 내세우나
▲ "물론 군대 폐지는 이상이고 군대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다. 전쟁 없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지만 개혁은 항상 이상을 쫓아갔다." ⓒ강의석

'반전 엄마'로 유명해진 신디 시핸 역시 비슷한 논란에 빠진 적이 있다. 그의 투쟁이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이들 케이시가 아닌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는 백악관 앞이나 대통령 별장 등 주로 언론에 노출이 잘 되는 곳에서 시위를 했다. 강의석 비판자들이 강조하는 구체적 목표나 방법, 진지한 토론 같은 것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그냥 서있었다.

아, 그녀야말로 대안도 없이 '철군'만을 주장하지 않았나. 그 덕(?)에 지금 미군은 이라크에서 저렇게 꿈쩍도 않고 이라크인들을 억압하고 있다. 게다가 세계적인 스타(?)까지 됐다. 그렇다면 그녀도 미디어 노출증에 걸린 사람인가. 그래서 시핸은 반전운동의 장애인가.

그런데 시핸을 비난했던 이들은 당연히 보수 언론과 기관들이었다. 그러나 강의석은 엉뚱하게 진보 진영의 공격을 따발총으로 받고 있다. 나는 강의석 비판자들이 강의석에게 들이대는 잣대의 상당수가 보수집단이 애용하는 것이라는 점이 영 불편하다. 하나 더. 그들이 자꾸 '대안'의 유무를 가지고 강의석을 몰아붙이는 데 놀랐다. 대안은 원래 공무원들이 급조된 정책 내놓고는 시민단체가 반대하면 꺼내드는 비장의 무기다.

물론 군대 폐지는 이상이고 군대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다. 전쟁 없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지만 개혁은 항상 이상을 쫓아갔다. 노예제가 폐지될 줄 알았나. 여성이 투표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었나. 1930년대 시골 농부는 해방이 올 줄 알았을까. 우리 어머니들은 호주제라는 게 철폐될 줄 알았을까. '호주제'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강의석은 일종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그 유명세에 힘을 얻기도 할 것이고 기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이점을 맹렬하게 활용한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왕따도 아니고 이지메 하듯 공격하는 것은, 아예 싹을 자르려 하는 것은 보기에 안쓰럽다. 그의 나이 몇 살인가. 너무 튀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비난할 게 있다면 그의 '행동 방식'이지 '운동 방식'은 아닌 듯하다.

강의석도 '행동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 그가 경청해야할 문제다. 내가 아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 이게 더 정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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