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타이거-오바마네이션'의 탄생"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타이거-오바마네이션'의 탄생"

[정희준의 어퍼컷] 미국의 '원죄'가 만든 대통령

미국 사회에서 '흑인됨'이란 때론 모호하다. 인종적으로 혼란스러우면서도 때론 희미하게 묘사되는 흑인의 개념은 스파이크 리의 1989년 영화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가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 장면은 무키(스파이크 리가 연기한 흑인 피자 배달원)가 피노(이탈리안계 피자집 주인의 아들)가 가진 흑인에 대한 편협하고도 모순된 태도를 놓고 그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무키: 피노, 네가 좋아하는 농구 선수는 누구야?
피노: 매직 존슨.
무키: 네가 좋아하는 영화 배우는?
피노: 에디 머피.
무키: 네가 좋아하는 록스타는 누구야? 프린스, 맞아, 너 프린스 팬이지.
(…)
무키: 피노. 너는 맨날 말만 했다 하면 '이 깜둥이(nigger)', '저 깜둥이' 그러는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깜둥이'들이잖아.
피노: 이건 달라. 매직, 에디, 프린스는 '깜둥이'가 아니야. 내 얘긴, 그들은 흑인이 아니야. 내 말은, 내가 다시 설명할게. 그들은 완전히 흑인은 아니야. 내 얘긴, 그들은 흑인이야. 그렇지만 그들은 정말 흑인은 아니야. 그들은 흑인 이상이야. 이건 달라.
무키: 달라?
피노: 그래, 내겐 달라.


미국 사회의 인종적 잣대는 이렇듯 다중적이다. 또 노스이스턴대의 알란 클라인 교수는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 알렉스 로드리게즈 같은 유색인 슈퍼스타들이 사실 인종적으로는 중립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의 백인들은 흑인이 자신이 흑인임을 명백하게 선언하지 않고 백인의 취향과 생활 습관을 실천한다면 그를 받아들이고 '화이트 아메리카'에 편입되는 행운을 선사하는 것이다.

성공한 흑인의 전제 : 인종적 중립 / 백인 같은 흑인
▲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탄생으로 과연 흑인은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로이터=뉴시스

O J 심슨은 1994년 전처와 그의 남자 친구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형사 재판에선 무죄 판결을 받고 지금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처지이지만 NFL 역사상 최고의 러닝백이자 만능 엔터테이너로 일컬어졌던 적이 있다. 그의 선수 생활 중 벌어진 상황은 백인의 인종적 이중성을 명백히 드러낸다.

1970년대 후반 버펄로빌스 선수 시절, 흑인인 그는 두 명의 동료 흑인 선수와 함께 온통 백인뿐인 파티에 참석했다. 술에 취한 백인이 파티에 등장한 그들을 보고 내지른 말이 절묘하다. "저거 좀 봐! OJ잖아! 근데 쟤 지금 저 '깜둥이'들이랑 뭐하는 거야?" 유색인종 스포츠 스타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넘나들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흑인들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인종차별적이었다. 지저분하고 게으르고 위협적이고 폭력적이고 무절제하고 비이성적이며 비도덕적이라는 단정적 인식 외에도 관능적, 이국적, 호색적, 비정상적 과다성욕, 동물적인 운동 감각 등 흑인들의 인간성을 왜곡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미국인(백인)의 '동의'를 얻고 '선택'을 받아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종적 편견과 단절해야 했지만 그 편견이 워낙 뿌리 깊기에 결국 '흑인됨(being black)' 자체와의 단절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메리칸'이 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1945년 재키 로빈슨이 최초로 인종의 벽을 허물고 메이저리그 부룩클린 다저스에 입단한 이후 많은 흑인 선수들은 백인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재구성했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마이클 조던이었다. 당시 화목한 '미국적 가정(All-American Family)'의 가장으로서 친절하고 신사적인 모습만을 보여줬던 조던은 대다수 백인들의 우려나 불편함 없이 미국의 주류를 이루는 중산층 WASP(White-Anglo Saxon-Protestant)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흑인'이 아닌 '아메리칸'의 모습만을 보였던 그는 '백인 조던'으로서의 면모를 완성하면서 백인이 원하는 아이콘이 됐다. 그 덕에 그는 온갖 광고에 출연했는데 특히 어린이가 주 고객인 맥도날드와 휘티스시리얼 광고, 주부가 대상인 볼파크소시지 광고에까지 출연했고, 백인이 주고객일 뿐 아니라 광고 모델의 외모나 피부색에 꽤나 예민할 수밖에 없는 헤인즈 속옷 광고에도 출연할 수 있었다.

'미국의 아들' 타이거 우즈: 미국이 열광해야만 하는 이유

담론의 차원을 '흑인'에서 한 단계 높여 놓은 이가 타이거 우즈였다. 흑인 아버지와 태국인 어머니를 둔 그는 1996년 스탠포드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로 전향하자마자 골프계뿐 아니라 미국 사회를 강타했다. 그는 사실 미국 사회 영웅의 '성분'을 가지고 태어났다. '타이거 열풍'의 주성분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의 엄청난 경기력이 그의 인기의 전제다. 그러나 경기력만으론 골프 영웅은 될지언정 미국의 영웅은 될 수 없다.

열풍의 핵은 바로 혼란스러우리만치 복잡한 그의 인종적 계보다. 피가 많이 섞이면 섞일수록 미국인은 호들갑스럽게 열광해야만 한다. 미국인들의 '원죄' 때문이다. 이제 인종차별 없는 미국, 능력 사회 미국, 희망의 나라 미국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열광해야만 한다. 미국의 '영웅 만들기'가 제대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를 부자로 만들어줘야만 했다.

타이거 열풍으로 미국이 들썩이는 가운데 그의 첫 번째 TV 광고가 등장했다. 나이키의 '헬로, 월드' 광고였다. 여덟 살 때 70대타, 열두 살 때 60대타, 열다섯 살에 US주니어아마추어 우승, 역사상 유일한 US아마추어 3연패 등 경이적 경기력을 스스로 소개하곤 그는 갑자기 "미국엔 아직도 제 피부색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골프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외면적으로는 미국 사회에 대한 노골적 도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우즈가 5년간 4000만 달러라는 떼돈을 선물한 나이키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광고는 우즈의 분노를 오히려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가능한 미국, 다양성의 나라 미국, 진보와 평등으로 진군하는 미국임을 확인시키는 증거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미 엄청난 부자가 된 우즈가 당당하게 시청자를 응시하며 던지는 이 질문은 오히려 많은 미국인들을 자랑스럽게 했을 것이다. 이런 반응과 함께. "뭐! 아직도 그런 데가 있어?"

그러나 나이키가 유색인 우즈를 활용해 골프 시장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나이키는 골프 산업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백인 중산층 골프 애호가에게 어필할 방법을 찾게 되면서 결국 (중가 의류 브랜드인) '갭보다는 아르마니에 가까운' 고급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주력하게 된다.

이후 언론이나 광고에 등장하는 우즈의 모습에서 그 어떤 저항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필드에서도 보수적 옷차림을 유지했다. 완전히 백인 사회에 귀화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의 다인종, 다문화, 다원주의의 상징으로 활용됐다. 급기야 1997년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의 토크쇼에서 타이거 우즈를 옆에 앉혀 놓고 그가 미국 사회 인종적 다원주의의 살아있는 증거임을 강조하며 '미국의 아들(America's son)'이라고 선언한다.

윈프리 : 이제 정리해 볼까요?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하나요? 저는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가 반은 흑인, 4분의 1은 중국인, 나머지 4분의 1은 아메리칸 인디언이고, 당신의 어머니는 반은 태국인, 4분의 1은 중국인, 4분의 1은 백인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 그 때문에 미국의 아들인거죠.
우즈: 그렇습니다.
윈프리 : 당신은 미국의 아들이에요.


우즈는 그의 세 번째 나이키 광고에서 더욱 순종적이다 못해 굴복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층 더 경건하고 겸손해진 "나는 행운아입니다(I'm lucky)"광고에서 그는 "(벤) 호건도, (샘) 스니드도, 잭 (니컬러스)도 알고 있죠. 내가 행운아라는 사실을 (…)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골프 덕분에 얻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행운아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극도의 인종차별 시대에 귀족 스포츠였던 골프의 최고수 백인 골프 선수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우즈는 백인 사회로 '귀화'한 것이다. 2000년 나이키는 우즈에게 5년간 1억 달러의 재계약을 선물한다.

결국 잠재적으로 저항적 출신 배경을 보유했던 우즈도 이러한 방식으로 기업 자본주의의 힘에 의해 거세당하게 된다. 미국 대중매체의 상투적 조작을 통해 '미국의 아들'이 되었고 그의 업적은 자연스레 '미국의 업적'으로 연결된다. 인종차별의 현실이 나이키의 이미지 조작에 의해 인종을 초월한 능력 중심 사회 미국이라는 시각에 역설적 권위를 부여하는 데 이용된 것이다.

미국이 감동해야만(?) 하는 순간

흑인이 화이트 아메리카에 귀화하여 축복 받은 미국의 상징이 된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은 무하마드 알리의 올림픽 성화 점화였다. 1996년 인종차별의 본고장인 미국 남부 애틀랜타에서 열린 올림픽 개막식의 스타는 알리였다. 그는 30여 년 전 미국을 야만국가라 비난했고 무슬림으로 개종해 백인의 오만함에 맞서 베트남전 참전을 거부했던 인물로 백인 사회에 순응했던 조던이나 우즈와는 영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런 알리가 성화를 점화하는 순간 저 유명한 마틴 루터 킹의 1963년 사자후 연설 "I have a dream"이 울려 퍼졌다. 애틀랜타는 바로 킹 목사의 고향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순간을 "완벽한 감동"이라 평했고 어느 평론가는 "한 세대 전 킹이 꿈꾸었던 그 세계가 모든 관중의 눈앞에 되살아났다"고 썼다. 특히 흑인인 애틀랜타 전 시장 앤드류 영은 무하마드 알리가 성화를 점화하자 "알리의 존재야말로 힌두교도, 무슬림, 가톨릭교도, 유대교도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있다는 상징"이라고 감격스러워 했다.

이 타이밍은 미국인이 감동해야할 타이밍이다. 여기서 감동하지 않으면 미국 사람 아니다. 이런 감동은 알리가 한평생 저항한 흑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난 과거가 부끄러운 미국인들은 이제 노쇠하고 '안전한' 알리가 등장하면 열심히 박수를 쳐댄다. '원죄'가 생각나기에 더욱 열심히 쳐댄다. 유명한 흑인, 성공한 흑인은 미국의 자부심이자 상징이다. 올림픽 개막식을 가득 매웠던 백인들의 박수도 그래서 감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적 감동'이자 '정치적 박수'다.

미국의 '원죄' + '백인' 오바마 = 흑인 대통령
▲ 이번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탄생은 미국인의 '정치적 선택'과 오바마의 '화이트 아메리카'에 대한 충성이 낳은 결과물이다. ⓒ로이터=뉴시스

케냐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해 낳은 인도네시아인 동생은 둔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는 오바마의 가족을 '미니 유엔'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시민권도 없는 아버지를 둔 전무후무한 대통령 후보였고 과연 이 시점의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가능하겠냐는 의문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상황에서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는 대통령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미국의 '원죄' 때문이다.

그를 외면하고 매케인을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순간 미국은 또다시 화이트 아메리카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고 세계로부터 냉소와 질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미국인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는 지금 온 세계가 오바마를 선택한 미국을 칭찬하고 부러워한다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한편, 오바마 부부는 끊임없이 '화이트 아메리카'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아내 미셸의 '애국심 논란'이 있었지만 이도 얼마 가지 않았다. 일단 오바마의 어머니가 아주 하얀(?) 백인 미인이었다는 점과 오바마와 아내 미셸이 동부의 명문 사립대 컬럼비아, 하버드, 프린스턴을 나온 것은 꽤나 유효했던 '안전판'이었다. 일단 안전판을 확보한 오바마에게 그의 검은 피부색은 그가 대통령이 되는데 역설적으로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이번 미국 대선의 쟁점은 정서적으로는 이라크 전쟁이었고 현실적으로는 경제 위기였다. 그 덕에 다른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흔히 쟁점이 됐던 교육, 복지, 범죄 문제 등은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라크전이나 경제위기보다는 오바마의 피부색, 더 엄밀히는 과연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나올 것이냐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다른 정치, 경제, 사회적 쟁점들은 폭발력을 잃게 됐다. 특히 역대 선거마다 휘발성 강한 논쟁거리로 등장해 모든 대통령 후보들에게 비수처럼 날아들었던 낙태와 동성애 문제는 이번 선거에서 실종돼 버렸다. 오바마는 자신의 피부색이 쟁점화 되면서 이러한 예민한 검증 과정을 피해갈 수 있었다. 게다가 피부색이 논란이 되면 될수록 부각되는 것은 오바마였다. 또 그럴수록 미국은 오바마를 거부할 수 없었다. 70 넘은 백인 매케인은 처음부터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바마가 주장한 변화(Change)는 대세였다. 미국에는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흑인과 흑인비율을 이미 넘어선 14%의 히스패닉, 그리고 5%의 아시안들이 있다. 멕시코 음식인 나초를 찍어 먹는 살사소스가 프렌치프라이드 찍어 먹는 토마토케첩 판매량을 월등하게 누를 정도다.

우즈에 열광하고 알리에게 박수를 보낸 것처럼 미국인들의 선택은 다분히 '정치적' 선택이었다. 특히 이는 부시 8년간 이라크전이라는 골칫덩이 때문에 베트남전 이후 최대의 치욕을 경험한 백인들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역시 '백인의 동의'가 있었기에 '미국의 선택'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