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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피해자가 왜 얼굴 내놓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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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피해자가 왜 얼굴 내놓느냐고요?" [인터뷰] 삼성전기 직원 이은의 씨
고생은 사람을 소모시킬까, 아니면 단련시킬까. 어떤 이들은 너무 쉽게 답을 고른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게다. 그러나 따뜻한 아랫목에 뉘었던 몸을 찬 공기 속으로 일으킨 뒤에도 이런 답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진짜 고생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게 현실이다.

비록 옳은 방향이라도, 혹독한 시련이 뻔히 예상되는 길을 권하기 힘든 것은 그래서다. 끝내 목적지에 도착한들, 그 사이에 사람이 다 망가져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다. 갈림길에서 돌아서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붙잡아 세울 수 없었던 것 역시 이런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서성이는 어깨를 잡은 손에 조금은 더 힘을 줄 수 있게 됐다. 긴 시련을 거치고 나서, "옛날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즐겁다"고 말하는 이를 소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못 만났을 좋은 사람들 때문에 이젠 괜찮다"라고 말한다.

바로 삼성전기 직원 이은의 씨다. 이 씨는 2003년 6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상사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했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서 피해 사실을 알린 결과는, 집단 따돌림과 인사 불이익이었다. 우울증과 실어증을 앓았고, 얼굴에 붕대를 감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화농성 여드름이 생겼다. 심각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그는 갈림길에 섰다. 옆으로 꺾어진 길은 '퇴사'다. 하지만 그는 '직진'을 택했다. 회사와 싸우기로 한 것이다. 그게 옳은 방향이니까. 먼저 찾아간 곳은 국가인권위원회였다. 그리고 언론을 만났다. 이어 삼성전기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 삼성전기 직원 이은의 씨. 그는 실명과 얼굴 사진을 언론에 공개했다. 가해자는 얼굴을 들고 웃으며 다니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얼굴을 숙이고 다녀서야 되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프레시안

'직진', 그 결과는 '정면충돌'. 그래서 그는 다쳤을까. 천만에. 먼지를 털고 일어선 그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가 이기고, 삼성이 졌다. 그가 전한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확인한 인권위는 회사 측에 성희롱 방지 대책을 권고했다. 삼성전기는 권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인권위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인권위의 손을 들어줬다. 그 사이 <프레시안>과 <한겨레>에 이 씨의 사연이 소개됐고, 오랫동안 외톨이였던 이 씨의 친구가 되겠다는 이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지난 15일, 이 씨는 삼성전기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비록 1심 판결이고 삼성전기 측의 항소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 씨의 피해 사실과 회사 측의 배상 책임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환한 미소가 얼굴 가득 일렁이는 그를 지난 26일 서울 강남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후배의 문자 "우리 차장님이 대리님이랑 엮이지 말래요"

▲ 후배 사원이 보낸 문자 메시지. "대리님, 우리 차장님이 지난번 일로 자꾸 나한테 대리님이랑 엮이지 말래요"라는 내용이 담겼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15일 재판 결과에 대해 회사 측 반응은 어떤가.

이은의: 친한 동료들에게서 축하 메시지가 왔다. 하지만 내가 속한 부서에서는 이 재판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다. 회사 경영진의 공식적인 입장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내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리라고 본다.

후배 사원이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런 내용이다. "대리님, 우리 차장님이 지난번 일로 자꾸 나한테 대리님이랑 엮이지 말래요." 회사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인 셈이다.

나는 내 메일과 휴대전화 통화 내용 역시 회사가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거가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팩트(사실)'가 아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왜 내 메일과 휴대전화가 감시당한다고 믿게 됐을까. 처음부터 이렇게 믿었던 것은 아닌데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품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게 회사였다.

프레시안: 메일과 휴대전화가 감시당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 근거가 궁금하다.

이은의: 요즘 같은 때, 그러니까 언론의 주목을 받을 때가 되면 유독 휴대전화가 이상해진다. 전화 통화나 문자 전송이 잘 안 될 때가 많다. 그리고 메일 내용을 회사가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물론 내 불안감이 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회사가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회사를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같은 때는 회사 메일을 쓰지 않는다. 휴대전화도 다른 것을 들고 다닌다.

"故 박지연 씨, 만나서 꼭 안아주고 싶었는데…"

프레시안: 성희롱 피해 사실을 회사에 알린 게 2005년이니까, 약 5년 동안 싸움을 벌인 셈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기륭전자와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힘든 시간을 거치면서, 예전에는 관심 갖지 않았던 이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게 됐다고 했다.

이은의: 내 블로그에는 "1차 레이싱이 얼추 막을 내렸다"라고 적었다. 곧 새로운 막이 열릴 게다. 나는 원래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많이 위축돼 있었다. 싸움이 일단락된 지금, 나는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 다시 밝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잃어버렸다 되찾은 자신감 외에, 새로 얻은 것도 있다. 소송 때문에 법원을 드나들면서, 법원 문 앞에서 시위를 하던 용산 참사 유가족들을 만나게 됐다. 나와 떨어진 곳에 있는 분들이지만, 그 분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된 것, 함부로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은 내게 소중한 자산이다.

후회스러운 점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故) 박지연 씨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 분이 병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꼭 안아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늦어버렸다. 승소 소식을 박 씨에게 전해줬다면, 조금이나마 힘이 됐을 텐데….

"'동병상련'은 싫다"…"피해자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보여주겠다"

프레시안: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낸 사실이 알려진 뒤, 회사 안에서도 드러나지 않게 격려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 이은의 씨가 최근 여행 도중 찍은 사진. 이 씨는 성희롱 피해자도 밝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이은의
이은의:
많은 분들이 격려 말씀을 해주시고, 도와주셨다. 그 가운데는 나와 비슷한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고, 회사의 비리나 불합리한 결정에 맞서다 불이익을 겪은 분도 있다. 그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도 곁들이고 싶다. 회사와 싸우는 분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 너무 초췌해보여서였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오히려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는데, 그렇게 어둡고 초라해진다면 슬픈 일 아닌가. 그게 내 미래라면, 내가 계속 싸워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겠나. 또 나와 비슷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잘못에 맞서라고 권할 수 있겠나.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동병상련' 때문에 사람을 만나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잘못에 맞서 싸우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점을 입증하고 싶었다. 피해자가 싸움에 이기고, 결국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회 운동하는 분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사'나 '투사'가 되길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 한 진보 성향 주간지가 삼성에 노조가 필요하다는 기사에서 내 사진을 실었는데, 불만이 있다. 내가 너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나. 가해자는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웃고 있는데, 피해자가 고개 숙이고 우울해해서야 되겠나. 말도 안 된다. 가해자가 두려워하고, 피해자가 당당해야 한다. 잘못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오히려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 <프레시안>에 실리는 사진은 좀 밝았으면 좋겠다.

"나는 싸웠기 때문에, 안전하다"

프레시안: 어떤 이들은 승소 판결에 대해서도 불안해한다. 상대가 삼성인 탓이다.

이은의: 우리 가족이 그렇다. 어머니는 재판에서 진 삼성이 어떻게든 나를 해코지 하지 않을까하고 불안해한다. 아마 대기업의 음모를 다룬 소설이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신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싸웠기 때문에, 안전하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말이다. 회사 측이 나를 부당하게 보복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또 소송을 치러야 한다. 비판적인 언론 보도 역시 나올 게다. 그게 지난 세월을 통해 입증됐다. 그걸 뻔히 아는데 회사가 왜 무리수를 두겠나. 나와 비슷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나처럼 싸우라고 권하는 한 이유다. 힘 있는 자들은 잘못에 맞서 싸우는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 잘못을 외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한다. 이번 일을 겪으며,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프레시안: 삼성 안팎에서 비슷한 피해를 겪은 이들에게 할 말이 많을 듯하다.

이은의: 실제로 그런 분들을 여러 차례 만났다. 그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들 "한국이 그렇지 뭐"라고 냉소한다. 잘못을 지적해 봤자 오히려 손해만 본다는 게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좋은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그 분들이 있기에 나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분들을 만나서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나 역시 옛날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경험.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싸움에 이기고 지고를 떠나 이런 경험이 더 소중하다고 본다.

물론, 싸움에는 물질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비용이 든다. 그러나 그 비용을 너무 크게 예상할 필요는 없다. 일 년에 1000~2000만 원쯤 정도 각오해야 한다. 적은 비용이 아니지만, 직장인이라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금액도 아니다. 직장인 입장에선 '해고' 역시 두려운 일이지만, 회사 역시 해고가 쉽지는 않다. 특히 소송 상대방이라면 더욱 그렇다.

"'회사에 남아서 권리를 위해 싸운 사례'가 절실하다"

프레시안: 회사의 잘못에 대해 혼자 힘으로 싸워온 셈인데,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이은의: 우선 바로잡고 싶은 게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과 손잡고 걸어온 시간이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있으나마나 한 노조라면, 굳이 있어야하나 싶다. 노조가 있는 회사에서 성희롱 피해를 입은 사람은 만난 적이 있다. 남성 중심적인 노조 문화에선 노조가 오히려 가해자 편을 들기도 한다.

물론, 노조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 예컨대 소송비용 등을 노조가 지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노조보다 개인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 나처럼 싸운 사람이 회사 안에 셋만 있다면, 어지간한 노조보다 훨씬 낫지 않겠는가. 지금도 회사에서 피해를 입은 분들이 나를 찾아온다. 그들에게 나는 '1인 노조'다. 내 경험에서 그들이 용기를 얻고, 도움을 구한다. 삼성 계열사마다 '1인 노조'가 있다면, 삼성도 많이 바뀔 게다. '삼성에는 노조가 없으니까'라면서 움츠러드느니, 우선 작은 잘못이라도 싸워서 고치는 게 중요하다. '회사를 떠나지 않고 싸워서, 권리를 실현한 사례'가 많이 나와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둘러싼 해프닝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얼마 전, 회사가 이 책에 대해 내부 전산망에서 공식적인 해명을 했다. 김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담긴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해명에 달린 댓글이 묘했다. 회사 입장을 무조건 지지하던 여느 때와 달리,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나"하는 반응이 제법 있었다. 대략 30퍼센트 정도였다. 특이한 것은, 누군가 한 명이 이런 댓글을 달면 동조하는 댓글이 잇따른다는 점이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대신 먼저 나서주는 사람을 기다렸던 게다. 맨 처음 이런 댓글을 단 사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한 사람의 힘이 보잘 것 없는 듯해도, 의외로 큰 변화를 낳을 수 있다.

"삼성, 옛 애인의 찌질한 모습 본 느낌이다"

프레시안: 직급이 계속 대리다. 회사 인사 정책이 답답해 보인다.

이은의: 8년째 대리다. 성희롱 사실을 알린 뒤부터 인사고과는 늘 'C-'였다. 내가 속한 부서(총무보안그룹 사회봉사단)가 큰 성과를 거뒀지만, 변한 건 없다. 진급이 안 돼서 안타깝다기보다, 부당한 조치가 바로잡히지 않는 게 답답하다. 다행히 나와 친한 이들은 다들 무사히 진급 했다. 나와 어울린다는 이유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겪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회사에 대해서는, 이런 느낌이다. 헤어진 애인의 '찌질한' 모습을 본 느낌이랄까. 한때 나는 삼성 직원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다. 동료들과 뜨겁게 우정을 나눴고, 맡은 일에 열정을 쏟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했던 회사가, 알고보니 이렇게 찌질한 곳이었다니…. 솔직히 참담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회사가 미안하다고만 했어도, 아마 좀 달랐을 것 같다. 그러나 회사는 거짓말로만 일관했다. 성희롱, 왕따 모두에 대해 딱 잡아떼기만 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내가 진급이나 부서 변경 등을 노리고 성희롱 당했다고 주장했다는 게다.

"'증거 있나' 윽박지르기 전에, 자문하라. '왜 사람들은 삼성을 못 믿을까?'"

이런 비난 앞에서 사실 관계를 놓고 다투다보면, 한없이 비참해졌다. 삼성 경영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삼성 바깥에서 삼성을 어떻게 보는지 한번 돌아보라고 말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에 대해서도 삼성 경영진은 "사실이 아니다. 증거가 없지 않느냐"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럼 끝난 건가. 아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삼성이 비리를 부인했고 특검 수사 역시 끝났지만, 사람들은 김용철 변호사의 말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심지어 김 변호사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도 그렇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삼성이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걸핏하면 "증거 있나"라고 따지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왜 삼성을 믿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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