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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징거림'과 '조리돌림'의 세계, 대한민국에서 '성장'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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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징징거림'과 '조리돌림'의 세계, 대한민국에서 '성장'은 가능한가?

['단속사회' 이후의 '사회'] 고통을 듣는 감수성, 말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안타까운 세월호 침몰 사고,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보도와 개입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이곳은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재난을 통해 뒤늦게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은 사회의 단위들이 기본적인 기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 배에 누적되어 온 사회 구조적 문제, 사고 현장에서 책임 있는 자들의 무책임한 이탈, 사고 직후 정부기관의 대응과 언론 보도의 양상까지 사고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한국 사회' 그 자체로 확장 연상되며 사회적 트라우마가 되어가고 있다.

기능을 상실해버린 단위들의 사회 아닌 사회, 그러니 사회의 상흔을 앞서 채집하는 책의 세계에서 몇 해 전부터 'OO사회'라는 작명이 유행처럼 번진 것은 아이러니하다. 지난 3월 출간된 <단속사회>(창비 펴냄)의 저자 엄기호는 그것이 역설임을 알지만 결국엔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 단속이 '사회 아님'을 뜻한다면 그 뒤에 붙은 '사회'라는 말은 그럼에도 여전히 이 '사회'를 부를 다른 말은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역설적으로 붙인 말이다."

그가 나타내려 했던 우리의 현 상황인 '단속'이란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으려 하면서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는 단속(斷續)이자 그 차단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수습하는 단속(團束)이다. 그가 평생의 화두라 말하는 '인간의 성장'이란 낯선 것과의 만남과 소통, 그 불가능해 보이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가 아닌", 즉 '단속'의 한국 사회에서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조차 박탈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단위의 소실과 동질성에 기반을 둔 '편'에만 의존하는 관계, 이것은 그가 주로 참여 관찰한 학교라는 현장과 몇몇 인터뷰이, SNS의 사정만은 아닐 것이다. 그 자신이 소통의 조건이라 말하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가며 그는 절망적인 시대 보편적인 감수성의 생태 지도를 그려낸다.

무엇보다 <단속사회>를 경청하게 하는 것은 저자가 가장 전망이 어려워 보이는 자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태도로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력함에 짓눌려 견디기 힘든 시기를 건너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 엄기호가 "사회가 아닌 사회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이후를 넘기 위한 나의 출발점"이라 말하는 <단속사회>의 출간 기념 강연(4월 11일 저녁,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진행)의 주요 내용을 옮겨 싣는다. <편집자>

우리 시대의 말하기 방식은 무엇인가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지금 이 시대가 이전에 겪었던 시대와 다르다는 진단에서 가능한 선언입니다. 그 말대로,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5년, 10년 전과는 다르다는 당혹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나요?

한병철의 선언을 여러 가지로 변주해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대마다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면, 시대마다 고유한 주요 감정도 있지 않을까요. 얼마 전 김찬호 선생의 <모멸감>(문학과지성사 펴냄)이 발간되어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데요. 이 제목의 모멸감, 그리고 하나 추가하자면 '억울함'이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을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변주하여,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말하기'의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로 하여금 <단속사회>를 쓰게 만든 핵심 질문입니다.

▲ <단속사회> 저자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프레시안(최형락)

질문할 수 없는 이유

저는 오랫동안 말하기의 문제에 천착해 왔습니다.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말하며 누가 어떻게 어디에서 듣는가, 이것이 지금까지 제가 공부하고 관찰하고 연구해 온 주제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 펴냄)에서 '말의 민주주의'라는 챕터로 다룬 부분도 이와 맞닿아 있고요.

말하기는 왜 중요할까요.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해 누구도 문제시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다 정당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굳이 말해지지 않습니다. 즉 말할 가치나 필요가 있다고 인식되어야 말을 하게 된다는 거죠.

이와 관련해서 학교 현장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교사이신 분들이 계시다면 잘 아시겠지만, 요즘 강단에 서면 질문하는 학생들이 정말 없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질문 좀 하라"고 다그치는 교사들조차 질문을 두려워하죠. 제가 교사들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 나가보면 그들도 절대 손 안 들거든요. (웃음)
거기에 대해서 여러 이유를 말하는데, 가장 자주 들은 대답은 잘못 질문했다가 '쪽팔릴까봐서'입니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그것도 모르느냐'라는 핀잔에서부터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라는 조롱까지 감수해야 겨우 질문을 꺼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든 고등학교에서든 다들 한 번씩은 이런 망신을 당한 경험이 있고, 결국 학교에서는 '모르면 질문하면 안 되는구나'라는 교훈을 갖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언제 질문을 할까요? "질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면" 한답니다. 학창시절에 공부 잘 하는 애들이 질문할 때 보면 그 애 얼굴엔 '이 질문이 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한다'는 확신이 드러나 있었노라고 하더군요. 질문은 몰라서 하는 건데, 우리는 질문을 하는 그 순간에조차 '질문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라는 단 하나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질문은 정말 몰랐을 때 하는 겁니다. 질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요. 어떤 질문이 그런 질문이겠어요? "쌤,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이겁니다. 이게 바로 가장 아름다운 질문, 질문의 원형을 담고 있는 질문, 질문을 왜 하는가를 드러내는 질문이지요. 저는 그런 질문에 "지금부터 네가 모른다는 그 하나를 찾아보자"고 대답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해서 환대받은 경험이 있나요? 원래 교육은 무지한 사람이 환대받아야 하는 행위인데, 한국의 학교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어요. 아는 자는 환대받고 모르는 자는 핍박받고 모욕당하는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질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존재를 드러낼 방법이 없다. 이들에게 허용된 말이라고는 배시시 웃는 것 말고는 없다.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영선은 이들을 '영혼 없는 신체'라고 불렀다." (<단속사회> 151쪽)

사회적 존재감

사람들은 말을 함으로써 돌려받고 싶어 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정당하다는 것에 대한 인정입니다. 즉 "네 말은 들을만한 가치가 있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야 해, 사회가 지금까지 이 문제를 몰랐지만, 너무 중요해서 토론을 해봐야 할 것 같다"라는 대응입니다. 나의 사적인 경험이 사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것, 그때 생기는 것이 오늘의 열쇳말인 '사회적 존재감'입니다.

'힐링'이라는 화두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시되고 있지만 저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사회적 존재감인데, 힐링 담론에서는 '사회적'을 빼버리거든요. 스스로 자존감을 가져라, 모든 문제의 해법은 네 안에 있는 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속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가운데서만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세속인에게, 자기 안에서만 의미를 찾으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요구라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이 시대만큼 우리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기 극히 어려운 시대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청년들의 경우,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기까지 하지요. 잉여라는 말 자체가 '쓸모 없다'는 뜻, 즉 존재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미잖아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나는 잉여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거기에서 발생하는 의미는 그 말이 사회적으로 들리기를 바라는 욕구인 겁니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 '들렸을 때' 내 존재 가치가 생기는 거니까요.

잠시 이야기를 돌려봅시다. 저는 지난주부터 저희 아버지를 인터뷰하고 있어요. 다음에 작업하려고 미리 정해놓은 주제 중 하나가 "우리 아버지는 박근혜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거든요. 여든이 넘으신 아버지는 아들이 녹음기를 켜놓고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니 매우 기뻐하시더라고요. 첫 질문으로 작업의 주제인 "아버지는 왜 그렇게 박근혜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더니, 30분 넘게 끊임없이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물 마시러 일어나니 따라오실 정도로요. (웃음)

그런데 들으면서 흥미로운 걸 하나 발견했어요. 아버지는 옛날에 가난하게 사셨고 학력도 무학에 가까운 분인데요. 박근혜를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박정희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풀어내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있더라고요. "나는 군대를 다녀왔거든"이라는 어구였습니다.

5~60년대 병역 거부자들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는 한 친구한테 물어보니, 저희 아버지 나이 대의 사람들, 특히 저소득층에게 있어서 병역이라는 것은 그 생애에서 유일하게 시민·국민으로 인정받은 경험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하더군요. "군대를 갔다왔기 때문에 나는 국가에 대해, 국민의 자격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된다고요. 이게 바로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적 존재감이었던 겁니다.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데

국제인권운동에서 중요한 문제제기 중 하나가 "인권 피해자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인권 피해자 본인이 자기가 받은 고통에 대해서 스스로 말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그에 따라 인권 활동가나 법률가의 역할도 정립됩니다. 그들이 직접 말할 수 없다면, 활동가들은 대변인의 역할을 맡아야 하겠지요.

이 분야에서 절 가르쳐주신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소리만 지를 수 있을 뿐이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우리는 말과 소리를 구분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 구도에서 말은 다른 동물들은 못 하고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즉 인간의 조건이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말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은 감정이나 비참함의 정도가 아니라 '정확한 의미'여야 한다는 전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침표를 찍지 않거나, 감정에 복받쳐 횡설수설을 하면 의미 전달이 안 되죠. 우리는 그걸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분하게, 조리 있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만이 말인 것입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학교라는 공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말과 말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역할입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얻는 교육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배가 아파 조퇴하고 싶은 학생이 "선생님~~~ 제가요~~~ 어저께요~~~ 아 몰라요~~~" 하는 걸 떠올려 보세요. 그럼 선생님은 확 짜증을 내며 이렇게 말하죠. "말을 하란 말이다!!" 이 친구가 지금까지 했던 말은 말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학교에서는 조리를 갖추어 차분하게 전달하는 것만을 말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전쟁이나 강간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그렇게 차분하게, 시간의 여유를 두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수 있을까요? 울고 소리 지르고 흐느끼거나 멍하니 있는 것 혹은 침묵하는 것까지, 소리를 내건 내지 않건 어쨌든 말이 아니라 '소리'로만 자신의 고통을 전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은 말할 수 없다'라는 명제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게 외국에서 국제연대활동을 하는 동안 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외국 생활을 마치고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이런저런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이 문제와 관련해 큰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너무 잘 했기 때문이었어요.

나의 고통을 징징거리며 말하기

▲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엄기호 지음, 따비 펴냄). ⓒ따비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와 <단속사회>의 토대가 된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해야 했어요. 처음엔 걱정됐습니다. 인터뷰이들이 틀림없이 횡설수설, 중언부언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말을 정말 잘 하시더라고요. 교사들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 다음에 청소년들을 만나서 보니까 그들도 잘 해요. 강의하면서 만난 대학생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을 잘 하게 되는 특정 주제가 있습니다. 가령 교육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자기주장을 잘 펼치지 못하는데, '네가 받은 고통'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면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집니다. 제 철학적 기반에 따르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건데, 그들은 희열에 차서 고통을 얘기하고 있었던 겁니다.(웃음) 대체 무슨 일인가, 굉장히 당황했어요.

어느 날 우연히 TV를 봤는데 조금은 알겠더군요.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출연자들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내용이었어요. <힐링 캠프>나 여타 토크쇼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세요. 막말이나 사생활 폭로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슬픈 음악이 깔리면서 자기가 얼마나 고난을 겪었는지 이야기합니다. 셀러브리티들이 시청자들을 향해 신세 한탄을 하는 거지요.

또한 우리가 그렇게 유려하게 잘 말하는 '내용'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그걸 말하는 '방식'의 특징은 바로 징징거림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는 주된 방식(사회과학적인 언어로 말하면 '주체화의 형식')이 '내 고통을 징징거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내가 내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날이 서로서로를 고조시키죠. "내가 더 고통 받았다", "내가 더 힘들다"라고요.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누군가 나한테 고통을 줬기 때문'으로 서사화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대단히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을 효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겁니다. 스스로 어떻게 고통 받았는지를 이야기해야만 그나마 누군가 들어주고, 그런 방식으로 사회에 어필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 마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해서 마트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쇼핑하던 사람들이 카트를 밀며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에게는 데모할 권리가 있지만 우리에겐 쇼핑할 권리가 있다!" 언뜻 스스로를 권리의 주체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것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에만, '피해자'로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거죠. 요즘 시민들이 '소비자-시민'일 때에만 자신을 드러낸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것도 소비자로서'만'이 아니라 '피해자로서의 소비자'로서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내가 왕인데 상처 받았다"는 거지요.

퇴화되는 기관, 고통의 '소리'를 듣는 귀

우리 사회의 주된 말하기 방식이 이렇게 피해자라는 포지션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것에 그친다면 여러 층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먼저 방금 말한 것처럼 가해자가 사라지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를 한다 해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또한 반대 방향에서는, 냉소주의와 말의 정당성을 무화시켜버리려는 시도들이 나타납니다. 고통을 이야기하는 순간, "나도 힘들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어? 네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야"라는 반응이 올 까봐 두려워해 본 일 있으신가요? 누군가의 고통을 통해 더한 고통을 발견하거나 그 고통의 사회적 의미를 찾아내려는 작업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의 정당성을 '디스'하는 과정만이 반복된다는 것이지요.

그것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고통에 차 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어떤 고통의 목소리는 아예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말의 세계에서 추방이 되어 진입조차 못 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에 찬 사람들은 그 고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을 때 결국에 죽음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렇게 죽음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지 그랬니, 말했으면 우리가 들어줬을 텐데." 빈곤에 허덕이던 세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하자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소득층을 위한 구제책을 제대로 알았으면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이 제대로 몰랐으니 앞으로 더 홍보를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요.

이 얘길 듣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면 우리도 대통령하고 똑같아요. 누군가 왕따나 학내 폭력의 피해를 입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교사들이나 언론은 뒤늦게 "왜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대통령과 학교, 층위는 달라도 똑같지 않나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나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니, 원래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겁니다.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소리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겠죠. 울부짖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내짖는 소리… 그리고 표정으로만 드러나는 침묵의 소리일 수도 있어요. 의미가 완결된 형태로서 전달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를 듣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가 무능력해지고 있어요.

세 모녀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처럼, 한국에서 고통 받는 사람이 약간의 도움이나마 얻으려면 국가의 언어, 관공서의 언어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를 일일이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국가의 언어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대단한 능력 아닌가요? 한국에서는 능력자만이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국가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요? 만일 그들이 국가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 증명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 무능력'입니다. 그 과정은 엄청난 모멸과 수치심을 동반해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엄함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은 모멸감을 견디는 대가로 약간의 도움을 받기보다 차라리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던 게 아니었을까요.

ⓒ서울지방경찰청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와 있었던 것처럼 세 모녀는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고 마지막까지 분투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처럼 자신의 존엄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갖기 힘들고, 그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나의 무능력과 비굴함을 드러내야만 하는 사회, 그게 한국입니다.

우리에겐 소리로만 전달되는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고요. 그런데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하면서, 말 아닌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고통의 목소리마저 독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고통의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비교 가능해요.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고통은 열심히 듣지만 다른 누군가의 고통은 아니라는 겁니다. 가령 선생님들은 입시와 관련해 누구의 고통이 제일 진지하게 다가오나요? 공부 못 하는 아이들보다 모범생들의 고통이 더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정부의 사교육 방지책도 상위 몇 퍼센트 학생들의 고통을 어떻게 경감시킬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사 분들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한국의 학교는 이미 망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과감하게 '말의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도 올라올 수 있는 무대(그것은 공적인 무대여야 합니다)를 만들어주고, 그 무대에 낯선 말들이 올라왔을 때 늘 말의 주인공이었던 모범생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서 다시 질문을 이끌어나가는 거예요. 모범생들도 자기 말만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을 기회를 얻어야 하는 거죠.

주변의 활동가나 교사 분들께 종종 "내가 정말 민주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고 말씀드리곤 해요.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 저는 민주주의가 이 사회에서 몫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 몫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몫을 차지한 사람들끼리 한두 자리 나눠 갖는 데 몰두하지 말고 우리 교실과 학교, 사회에서 누가 몫을 갖지 못했는지를 생각해야 해요. 지금 누가 고통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는가를 먼저 관찰하고 찾아내서 그 소리와 말을 공적인 무대에 세우는 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하고,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프레시안 자료 사진

편의 생태계 : SNS와 몰이꾼들

'누구와' '어디에서' 말하는가를 살펴보아도 우리의 말하기 방식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일단 우리는 문제가 벌어진 그곳에서 당사자들하고는 절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지만, 고통스러우니까요. "내가 이 시간까지 저 사람과 또 얼굴을 봐야 해? 안 하고 말지"라며 체념해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어디로 가시나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접속합니다.

얼마 전에 기가 막힌 걸 봤습니다. 어느 단체 내부에서 문제가 벌어졌고,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해결을 해야 했는데,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되어서 SNS에 그 문제가 뜨더군요. 이러면 문제 해결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고통을 떠들고만 싶어 하지, 고통을 해결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통의 해결을 위해서는 단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어려움 중 하나가 이 단위의 소멸입니다. 회사든 아파트 단지든 정치 조직이든, 문제 해결을 가능케 하는 정치 공동체들이 소멸되어 버렸지요. 그 대신, 안에서 터진 일을 바깥으로 폭로해서 도덕적으로 매장시켜버리는 방식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 폭로라는 방식이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권력을 겨냥했다면, 지금의 폭로는 폭로되는 사람이 얼마나 '개새끼'인지를 드러내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고요.

그러면 어떤 일에 연루된 사람들은 그냥 입을 닫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자기도 폭로당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위험을 감수하겠습니까. 특히 공적인 공간일수록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가급적 숨어 있으려고 합니다. "침묵만이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고 침묵을 통해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되는 것, 바로 '단속'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SNS에서 그냥 숨어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열심히 구경하거나, 때로는 살살 부채질하고 있지요. 사냥꾼과 사냥감 말고 그 중간에 있는 다른 존재, 즉 '몰이꾼'이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어떤 식으로 몰이꾼 노릇을 하죠? '리트윗'을 하거나 '좋아요'를 누릅니다.

트위터를 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사실과 상관없는 비아냥이나 조롱은 월등한 인기를 얻습니다. 사냥꾼 노릇은 안 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충실하게 몰이꾼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나 자신은 드러내지 않되 흥미진진한 구경은 놓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사냥꾼의 사회'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겁니다.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명백히 "편의 세계"입니다. 여기에서 선택지는 '내 편이냐'와 '네 편이냐'의 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토론이 아니라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일 뿐이죠. 그런데 편을 들어주지 않고 '침착해라' '생각해 봐라'라고 말하면 골치가 아파집니다. '그럼 내가 정당하지 않다는 거야?'라고 억울해 하며 반박합니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에요.

'내가 기분 나쁘다'는 것과 '당신이 틀렸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하지만 편의 세계에서 '내가 기분 나쁜 것'은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고 부정당했다는 뜻으로 치환됩니다. 그래서 내가 기분 나쁠 때, '내 편'에 있는 사람들이 "저 새끼는 무조건 나쁜 새끼"라고 이야기해주어야만 우리는 만족합니다.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 관계가 깨져버리는 거고요.

이런 구도에서는 위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받고, 정치는 말 그대로 '닥치고 정치'가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자기검열하며 침묵하거나 찬반의 목소리 뒤로 숨게 됩니다.
곁의 시장화 : 힐링 마스터의 등장

ⓒ프레시안(최형락)
우리가 고통을 이야기하는 공간은 SNS 말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범람한 힐링 산업의 공간, 멘토들의 앞이지요.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놀라울 만큼 금세 답을 줍니다. 한 사람의 삶이 걸린 문제를 상담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게 듣고 답할 수 있을까요. 그 담대함이 저로선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즉문즉답식의 관계는 엄청난 신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고, 불교에서는 목숨을 걸 때에만 가능하다고까지 얘기해요.

힐링과 멘토의 유행을 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혼나는 것, 야단맞는 것을 좋아할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나요? 전 그게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들려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야단도 애정도 있으니까 친다고 하잖아요. 일상에서 영위하는 "예의바른 관계"에서 오가는 말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영혼이 없다"고 보는 거지요.
저는 이것을 '곁의 시장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곁이라고 부르는 세계는 편의 세계처럼 옳다/그르다로 양분되어 서로 편 들어주는 세계가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때로는 헛소리로 들리는 것이나 나의 의견과 상반되는 이야기도 들어주면서 참을성 있게 만들어 가야 하는 세계입니다.

그 작업이 힘이 드니까 우리는 힐링 시장에서 돈을 주고 곁을 삽니다. 시장에 가면 깔끔하거든요. 돈을 받은 사람들은 헛소리나 징징거림도 끝까지 들어주지요.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언과 충고도 곁들여줍니다. 너무나 매끈하지 않나요? 이렇게 곁이 시장화되고 나면, 구태여 노력해 가면서 꺼끌꺼끌한 곁,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곁을 만들 이유가 사라집니다.

실제로 곁이 해줘야 하는 일들은 어디엔가 돈을 내면서 충족시키고, 내 주변의 관계들은 적당히 유지하면 되는 "예의바른" 관계들로 채워나갑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건네는 "괜찮아?"라는 안부 인사를 생각해 보세요. 그건 대개 "응, 괜찮아"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던지는 인사입니다. "안 괜찮다"라는 답이 돌아오면 오히려 당혹스러워합니다.

레비나스는 안부 물음이 존재를 환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저 사람을 나의 세계로 초대하고 내가 저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요.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의 "괜찮아?"는, 내 세계는 내 세계에서 끝나고 네 세계는 네 세계에서 끝나는 상태로 돌아서자는 인사입니다. 그게 책에서 비판한 '예의바름'이고요. 이런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개입하거나 다가설 여지가 사라집니다.

"환대는 친한 사람을 적당히 대접해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환대는 낯선 이를 친구로 만드는 적극적인 과정이다. (…) 반면 이 시대의 예의바름이란 낯선 이를 친구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낯선 이가 내 삶에 다가서지 말고 낯선 이로 물러나 있을 것을 요구한다." (77쪽)

쉴 새 없는 접속, 상처를 거부하는 단속

저는 SNS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기능을 한 적이 많았어요. 특히 자신이 소수인 줄 알았지만 의외로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엔 SNS 만한 매체가 없습니다. 2010년 '아랍의 봄' 같은 일들이 대표적인 예죠. 어두운 독재 치하에서 이런 목소리를 가진 건 나뿐일 줄 알았는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우리'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순식간에, 덜 위험한 방식으로 확인시켜주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듣고 그 차이를 확인하는 데엔 가장 안 좋은 매체입니다. SNS의 시간은 그야말로 실시간이지요. 실시간 속에서는 즉각적으로 판단되는 "내가 기분 나쁘냐 아니냐"의 문제밖에 부각되지 않습니다. 그게 제가 아무도 팔로우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누군가를 팔로우하면 제 타임라인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바로 날아오잖아요. 그러면 실시간 안에 갇히게 되는 거고요.

차이와 다름, 낯섦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단속사회>의 부제,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와 결부시켜 말하자면, 나와 같은 것과 접속할 때는 그다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실시간으로(쉴 새 없이)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나와 다른 것, 내가 모르는 것, 내게 낯선 것과 만나고 소통할 때는 반드시 일정한 길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쭉 들어봐야 하고, 시간을 두고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정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낯선 존재와 소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매일같이 경험하실 겁니다. 부모님이나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재미없는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거북목이 되어버리잖아요.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남인 이상, 내 귀엔 말 같지도 않은 말이나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을 줄 알아야 그 다음 말이 이어질 수 있겠지만, 우리는 거기에 공을 들일 에너지를 허용하지 않아요. 재미없는 소리가 시작되면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수그려버리고, 고개를 수그릴 필요가 없는 SNS로 도피합니다.

"고통이나 상처 등은 이제 주변의 신뢰할 만한 사람과 나누는 내밀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가장 훌륭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SNS와 문화산업의 이 같은 단면은 상처와 고통, 그에 따른 힐링의 대유행의 이면을 드러내준다. 즉, 우리 사회는 말이 억압된 공간이라기보다 특정한 시공간에서 끊임없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과잉연결(over-connected)되어 쉴 새 없이 상처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공간이 되었다." (69쪽)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가운데 "불편합니다"라는 말이 있어요. 과거에 이 말은, 사적인 불편함을 공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문제제기의 씨앗이 되기도 했어요. '이건 학생으로서의 불편함' 혹은 '이건 여자로서의 불편함'이니까 우리 공통의 목소리를 결집시켜야 한다고 사회 의제화하기 위한 노력이었지요. 지금은 다릅니다. "너하고 말하기 싫거든? 물러나 줄래"와 동의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불편합니다'라는 말이 너무도 불편합니다.(웃음)

그리고 학생들이 "불편합니다"보다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 받았어요"라는 말이에요. 이 말도 과거엔 나를 앉혀놓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누군가에게 저항하기 위한 언어였다면, 지금은 누군가를 차단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윽박지르는 말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상처 받았다고 말할 때마다, 전 어떻게 인간이 상처 없이 성장할 수 있느냐고 대답해요.

이 말을 했더니 학생 하나가 우리 모두 '쿠크다스' 같다며 사진을 보내왔어요. 여러분 이 과자 아시죠? 얘는 안 부스러뜨리고 먹을 방법이 없어요.(웃음) 손만 대면 바스러지는 앤데, 이게 바로 관계 아니냐는 얘기였지요. 관계 맺기란 기본적으로 손을 대야 이루어지는 건데, 우리는 손을 대지 않는 관계나 부스러지지 않는 관계를 몽상합니다. 그런 몽상 속에선 "예의바른" 관계밖에는 안 남겠죠. 그리고 그 관계를 위해 스스로를 단속해야만 하고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단속하면서는 절대 곁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곁이 사라진 사회를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제가 갖고 있는 가장 궁극적인 의문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사회 아님'의 사회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국가, 시장, 사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장은 즉각적인 등가 교환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떠받쳐지는 교환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국가는 권력의 공간이지요. 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억압과 통제, 착취와 동원이 작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력이나 교환으로 돌아가지 않는 부분이 사회입니다. 이 세계는 상호 호혜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볼게요. 여러분은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선물하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5만 원 짜리 파란색 볼펜을 선물로 받았다면 상대방에게 똑같이 5만 원 짜리 파란색 볼펜을 사 주면 절대로 안 되겠죠. 아마 모독이라고 느낄 겁니다. 그렇다고 20만 원 짜리 선물을 돌려줘도 이상하고, 반대로 만 원 짜리 선물을 줘도 그럴 거고요.

선물하기에서 값어치를 맞추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절대 같아서도 안 되고 너무 싸거나 너무 비싸도 안 되죠. 그리고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선물을 받자마자 돌려주면 안 되겠죠. 그렇다면 3일 후에 줘야 할지, 열흘 후에 줘야 할지, 아니면 아예 주지 말아야 할지 헷갈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어떤 것을 좋아할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이 모든 노력의 연속이 선물이며, 앞서 말씀드린 "상호 호혜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관계 맺기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선물은 가면 와야 하는 것, 받으면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 연쇄를 통해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 원리이자 요소가 되지요. 인류학에서 선물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와 의미가 여기에 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은 조언과 충고라고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의미와 가치, 지혜를 전해주는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곁의 세계'란 다른 말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 우정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조언은 상대방에게 정말 쓸모가 있고 유용해야 합니다. 주식투자 정보 같은 이(利)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쓸모라는 의미의 용(用)입니다. 내 삶으로부터 길어온 지혜가 다른 누군가에게 쓸모가 될 때, 그때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존재감'입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조언과 충고의 역할은 대부분 힐링 마스터나 멘토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곁이 시장화되고, 사람들은 서로서로 적당히 편 들어주다가 꺼끌꺼끌해지는 순간 '바이바이'하는 쓸모없는 관계로 진입해버렸지요.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삶의 지혜를 주기 위해 구가하던 모든 노력들이 시장 영역에 휩쓸려버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대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단속사회>(엄기호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저는 이런 건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래는 <단속사회>라는 제목에서도 '사회'를 빼야 한다는 게 제 의견이었어요. '투명사회' 등 'OO사회' 같은 것들이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있고 그 속성이 무엇이라는 전제 위에 세워진 작명이라면, 저는 이 사회의 속성을 '단속'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기보다 '단속' 그 자체가 사회가 사라진 상황 위의 우리 모습을 말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 뒤의 '사회'는 그럼에도 여전히 이 '사회'를 부를 다른 말은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역설적으로 따라붙은 말이 되고요.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과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 버리고 편만 강요하는 '사회'.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는 '사회'.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지난 십여년간 이 문제를 들여다보며 나는 '단속(斷續)'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 같이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외면하며 이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하며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차 끊어져버린 상태, 이것을 나는 '단속'이라고 이름붙이고자 한다." (9~10쪽)

'개인화'에 대한 이의

지금 우리가 사회가 아닌 상태이며 '곁'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다보면 오해받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미 한국은 서로가 서로의 개인적 영역을 지나치게 침범하며 과도하게 끈적끈적한 상황 아니냐고요. 이 사회가 사회가 아니라기보다 오히려 그 속의 개인들이 개인이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제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지랖' 부리라는 게 아닙니다.

한국 사회는 정말 분열적인 상황이에요.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렇게 파편화되었나 싶을 정도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렇게 전근대적인가 싶을 정도로 집단주의를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우리 사회를 설명할 때 '개인화되었다'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 책 쓴 동기 중 하나가 소위 개인화론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고요. 왜냐하면 개인으로 파편화된 게 아니거든요.

파편의 정체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너도 똑같아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이상한 집단들입니다. 동질적이지 않은 바깥의 것들에 대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집단 내에서는 동질성을 강요하는 사람들, 집단 밖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금지시키고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그런 집단들이요. '신 부족주의', '신 종족주의'라 불러야 할까요?

그러니까 "개인도 없고 사회도 없다", 이게 한국의 현 상황을 함축하는 문장입니다. 개인화되어 있다면 차라리 나은 상황인 거죠. 그 개인으로부터 출발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금지되어 있어요. 결국 우리는 개인이 될 자유도 없고 정치공동체를 만들 자유도 없는 겁니다.

일본의 한 아동정신분석학자는 차라리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들이 가망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깨닫고, 그래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도망친 것이니까요. 그들에게 있어 의사소통이란 원래 불안정하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원래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강제할 필요 없이 언젠가 방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정말 구제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오히려 어떤 집단 안에 있으면서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정신분석학자는 하라주쿠나 신주쿠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청소년들을 예로 들었지만, 저는 가스통 메고 거리로 나오는 할아버지들부터 SNS에서 동질성에 갇혀 있는 우리들까지 모두 어느 정도는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이기에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의사소통할 용기가 없는 상태인 겁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가 잘 안 되어서 고통스러운 분들에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모자식 관계, 친구 관계, 동료 관계 등등 관계와 소통 문제에 있어 고통을 토로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과 "연애"를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관계 맺고 소통하라는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이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전인격적 결합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러분, 연애는 애인이랑 하는 것, 그것도 (능력이 있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한 명이랑 하는 겁니다. 연인이 아닌 사람과의 관계에서 연인하고의 그것처럼 전인격적 합일을 기대하면 당연히 고통스럽겠죠.

거의 모든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우리는 남입니다. 그리고 소통이란 것은 히키코모리가 깨달은 것처럼 원래 "불가능함"을 감수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겁니다. 원래 그런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강조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거니까요.

ⓒ프레시안(최형락)

'참조 그룹'을 만드는 혁명

저는 가끔 신문이나 책 등을 보면서 "이렇게 용감하다니"라고 생각되는 글들을 만나곤 해요. 필자가 이렇게 무식하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라, 이런 걸 써도 주변에 말리는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놀라운 겁니다. 그런 글을 발견하면 친구들에게 보내요. "내가 만약 이런 글을 쓰면 날 잡아 죽여라"라고 말하죠.(웃음)

저도 신문에 칼럼을 쓰지만, 다행히도 제 주변엔 조언과 충고의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저 자신을 잘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나면 친구들에게 보내서 허락을 받아요. 그들은 "이 글은 제발 보내지 마라", "이건 좀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같은 의견을 보내옵니다. 저는 이들을 '참조 그룹(Reference Group)'이라고 불러요.
자기 주변에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내가 겪지 못한 세계를 경험한 낯선 존재들, 서로 잘 모르는 관계라 하더라도 '다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이들이 있고 그들로부터 조언과 충고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조 그룹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잘나고 똑똑한 건 별로 소용없어요. 이런 참조 그룹, 즉 '곁'의 존재만이 인간을 현명하게 만들고 성장하게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모든 책의 주제는 하나입니다. 제 평생의 화두, '인간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라는 물음이에요. 그 물음 앞에서 제가 유일하게 발견했던 것은, 낯선 존재, 모르는 존재, 두려운 존재, 즉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인간의 성장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정성입니다. 이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곁'을 만들어냈을 때에만, 이 망해버린 세상을 그나마 저버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그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혁명이자 실천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그 시스템을 짜는 건 제 소관이 아니겠지만, 불가능 속에서도 약간이나마 가능한 것들을 보여주자고 북돋고 싶습니다.

실시간 속에서 동일성에만 접속하며 힐링하기보다는, 낯선 것을 만나길 바라며 성장을 도모하는 한 분, 한 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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