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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버리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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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버리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⑤

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⑤
백성은 어리석은 듯, 신령스럽다 - 함경도를 다녀온 기록

예송(禮訟)이 지나간 뒤, 다시 조선은 평온해졌다. 아니, 정중동(靜中動), 평온한 가운데 조정은 일상의 리듬과 개혁의 박동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앞서 살펴본 적이 있는 양반호포 징수 논의와 대동법의 확대 실시가 논의되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함경도 시험관으로

문곡 김수항의 행보 중에 눈에 띠는 것은 함경도에 다녀온 일이다. 문곡은 북도(北道), 즉 함경도의 시험을 주관하라는 명을 받고 갔던 길에 백성들의 폐해를 여기저기서 듣고 이를 조목별로 정리하여 현종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제안하였다. 현종 5년(1664) 7월 3일, 문곡이 사직하면서 시폐를 논하는 가운데, 서북(西北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백성들이 극히 곤궁하니 가까운 신하를 보내 사정을 알아보라고 상소했는데 현종이 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함경도 시험관에 제수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함경도에 내려간 뒤, 문곡은 먼저 현종 5년 10월 19일에 서계로 함경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것이 '북도에서 시험을 주관했을 때 백성의 폐해에 대해 올린 서계[北道掌試時民瘼書啓]'이다. 이 서계의 각 조항 끝에는 현종이 처리 방향을 명한 비답이 황색 찌지로 붙어 있었다.

이어 문곡은 함경도에 있던 중에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이조판서를 사양하면서 앞서 서계에서 빠트린 사항을 다시 정리하여 상소하였다. 이것이 '이조 판서를 사직하면서 겸하여 북로의 폐막을 진달하는 상소[辭吏曹判書兼陳北路弊瘼疏]'이고, 앞의 서계를 올리고 약 한 달 뒤인 현종 5년 11월 25일에 올렸다. 문곡의 서계와 상소를 바탕으로 그가 어떤 방향에서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전국 인구, 함경도 인구

<현종실록> 1672년(현종13) 10월 30일 기사에 실린 바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인구를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

한성(한양) : 호수 2만 4800 호. 남자는 9만 8713 명, 여자 9만 3441 명
경기 : 호수 10만 7186 호, 인구 46만 9331 명
관동(강원) : 호수 4만 6145 호, 인구 21만 7400 명
해서(황해) : 호수 9만 6049 호, 인구 38만 6685 명
관북(함경) : 호수 6만 8493 호, 인구 29만 6014 명
호서(충청) : 호수 17만 8444 호, 인구 65만 2800 명
영남(경상) : 호수 26만 5800 호, 인구 96만 60명
호남(전라) : 호수 23만 6963 호, 인구 84만 9944 명
관서(평안) : 호수 15만 4264 호, 인구 68만 2371 명
제주 : 호수 8천 4090 호, 인구 남자가 1만 2557 명, 여자 1만 7021 명

도합
호수 117만 6917 호
인구 469만 5611 명(남자 254만 1552 명, 여자 215만 4059 명)

이 기사 끝에, "대체로 우리나라는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데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매우 많다. 신해년의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백성이 즐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잇따랐다. 그런데 이것은 호적에 들어 있는 숫자만 의거해서 기록한 것이다"라고 단서를 달았다.

사관의 말처럼 조선 전래로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많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여자뿐 아니라 어린 아이, 즉 15세 이하 아이들도 누락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위 통계에 곱하기2를 한 값이 전체 인구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면 조선의 인구가 약 1천만 명 정도 된다.

이 말에서 주목할 것은 신해년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은 신해년, 위의 인구조사가 있기 한 해 전인 현종 12년(1671)의 대기근은 그 전 해인 현종 11년(경술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두 해를 합쳐 '경신'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기근이 심하면 먹는 것이 부실해지므로 신체 면역력이 떨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질병이 급속히 번져 없던 전염병도 생긴다. 2년 동안 계속된 기근과 전염병으로 200만 명 가까운 백성이 죽거나 노동 불능 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위의 통계는 경신 대기근이라는 자연재해로 인구가 격감한 뒤의 자료라는 말이다. 경신 대기근은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 조선시대 함경도 지도. ⓒ네이버 지식백과

척박한 함경도

제주 인구를 따로 파악한 것은 흥미로운데, 이유는 모르겠다. 역시 농경지가 많은 삼남(三南)의 인구가 많고, 한양은 예나 지금이나 복작복작하다. 평안도는 생각보다 인구가 많다. 산간 지역인 강원도와 함경도의 인구가 현격히 적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함경도 상황을 보자.

조정에서 함경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왕조가 발원했던 지역 아니던가? 그러나 멀면 소홀해진다. 세종(世宗)은 김종서(金宗瑞)를 등용하여 6진(六鎭)을 설치했고, 남쪽 지방 민호(民戶)를 이주시켰다. 또한 관찰사나 곤수(閫帥 지역 사령관)는 명망이 있는 문무(文武) 관원을 선택하여 중임을 맡겼고, 자주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순시하고 사찰했다. 이를테면 선조(宣祖) 때 정언신(鄭彥信) 같은 경우는 순변사가 되어 7년 동안이나 북도에 머물며 진무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함경도 관찰사 자리는 문신들이 한가로이 쉬는 자리가 되어 오직 잔치를 벌여 노래와 춤을 즐기기만 일삼고, 곤수는 무관들이 자신을 살찌우는 자리가 되어 오직 백성들을 침탈하는 것만 능사로 삼아 놀면서 허송세월하고 게으름만 피우고 있다는 것이 문곡의 진단이었다. 변란에 대비해야할 지역에 조금도 믿을만한 형세가 없었다. 변란이 생기면 토붕와해(土崩瓦解), 흙더미가 무너지듯 기와가 흘러내리듯 속수무책일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멀었다. 6진의 여러 고을이 함흥(咸興)과 거리가 멀면 보름 갈 거리이고 가까워도 10여일 거리였다. 그 사이에 삼태령(三大嶺)이 있어서 몹시 추운 겨울에 눈이라도 쌓이면 왕왕 길이 막혀 며칠 몇 달을 다니지 못하고 두절되었다. 그러다 보니 관찰사가 6진을 순시하러 오는 것은 한 해에 한 차례에 불과했다. 결국 변방의 정세와 백성들의 폐막에 대해 알 수 없게 되고, 탐관오리들이 틈을 타서 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현실을 고치지 못하였다. 곤수인 북병사(北兵使)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여겨 백성들의 고생을 소가 닭 보듯 하고 있었다. 관료주의는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시스템이 문제

문곡은 이를 개인적인 도덕성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원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상당한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방심하고 제 몸 편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게 마련이었다. 변방 장수나 수령들이 모두 탐욕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지역이 한 구석에 치우쳐 있어 누가 관리하는 사람도 없으면 자연 마음이 풀어지고 못하는 짓이 없어지는 게 사람이라는 것이다. 관찰사는 멀리 떨어져있고 어사의 염찰은 오랫동안 끊어졌으니 감찰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변방 장수가 백성들을 침해하는 습속은 커넥션이 있었다. 자기 욕심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거두어 대부분 권문세가에 바칠 뇌물로 돌아갔다. 권문세가에서는 편지를 보내 징색을 요구하였다. 그러면 장수는 각 보(堡)에 분정하여 피해가 토졸(土卒)들에게 미쳤다. 군졸들은 '살이 벗겨지고 골수를 파내도' 구휼할 겨를이 없어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이 이어졌다. 더구나 군사들은 '앉아, 일어서'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의 군기(軍紀)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곡은 이런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말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함경도 사람들의 생활 형편은 의복과 음식이 다 어렵지만 의복을 얻을 길이 더 어려웠다. 삼[麻]을 담가 베[布]를 짜서 모두 관청에 내고 나면 일 년 내내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오직 가죽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죽도 구하기 어려워 변방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얼어 죽기가 다반사였다.

반면 신역(身役)이 힘들다보니 불균등이 만연했다. 역리(驛吏)의 신역이 가장 헐하고 편하기 때문에 주인을 배반하고 신역을 회피한 무리들이 여기로 몸을 숨기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역(驛)에 등록된 자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이방(吏房)의 직임을 지낸 자는 종신토록 한가롭게 하는 일 없이 지낸다. 고공(雇工)을 지급받은 뒤에 또 솔정(率丁)을 지급받고도 그 전호(田戶)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한 몸에 여러 신역을 겸하고 궁핍하여 살 길이 없는 자와 비교하면 너무도 차이가 컸다. 문곡은 묻는다. "같은 한 도 백성인데 어찌 이처럼 불균등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환곡을 탕감하라

문곡은 함경도 환자(還上 환곡) 수량이 많은 폐단을 백성을 병들게 하는 첫 번째 폐단으로 꼽았다. 환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후에 되돌려 받는 곡식을 말한다. 그러나 함경도는 장부에 있는 원곡(元穀) 외에 각종 명목으로 끼워 넣은 곡식이 다른 도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데, 해마다 증가하여 모곡(耗穀 창고에 쌓아둔 곡식 중 축날 곡식을 고려하여 가을에 받을 때 일정량을 더 받는 곡식)이 모곡을 낳아 매년 호(戶)를 계산하여 분급하면 1호가 받는 것이 많게는 7, 80석에 이르고 적어도 3, 40석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함경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한 사람이 농사를 지어 1년에 거두는 양이 수십 석 되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을이 되어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 가진 것을 다 털어도 그 반을 채울 수 없어 재산을 다 쏟고 파산하여 마침내 유망(流亡)에 이른 뒤에야 끝나는 판국이었다. 유망자의 포흠(逋欠 상환하지 못한 결손)은 또 이웃이나 친족에게 징수하였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인징(隣徵), 족징(族徵)이 그것이다. 전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이런 폐단을 고쳐달라고 했으나, 조정에서는 군량미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문곡은 환곡을 강제로 분급하는 폐단을 없애고, 상평청(常平廳)과 감영(監營), 병영(兵營) 곡물의 경우도 원곡 외의 각종 명목으로 추가된 곡식은 빼고 백성들이 유망(流亡)하여 호(戶)가 끊어져 받아낼 길이 없는 경우는 본도에서 조사해내어 탕척(蕩滌 탕감)하게 한다면 백성들의 원망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했다. 다행히 현종은 비변사에 의논하여 강제 분급을 없애고, 받을 수 없는 환곡은 탕감했다. 정말 윗자리가 중요하다. 문제의식을 가진 이조판서가 제안하는 정책은 백성들의 고충을 당장 덜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식을 버리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문곡은 함경도=북도 사람들이 자식을 기르지 않는 폐해를 거론하였다. 북로(北路)에 들어가 더 상세히 물어 보았더니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들 백성들이 어리석고 무식하며 한심해보이지만 그 이유를 알아보면 실정이 역시 딱하였다.

대개 북도 사람들은 생업이 가장 힘들고 신역(身役)이 가장 무거워 한 집안에 부자(父子) 등 여러 사람이 아울러 군역에 응해야하는 경우가 있어서 머슴살이를 하고 토지와 집을 팔고도 부족하니, 처자식까지 팔고 끝내는 자기 몸까지 스스로 팔기에 이르렀다. 함경도에는 민정(民丁 역을 질 수 있는 성인 남자)이 적어서 역(役)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매년 한정(閒丁 아직 역을 지지 않은 민정)을 세초(歲抄 6월과 12월 군적을 정리하여 군역을 면제하거나 보충하는 것)할 때면 각 읍에서 그 숫자를 채울 수 없어서 '징징 울어대는 어린아이도 모두 샅샅이 색출하여' 그 나이를 늘려서 가포(價布)를 징수하였다. 황구첨정(黃口添丁)!

이 때문에 자식 하나를 낳으면 축하하기는커녕 이웃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부부가 울면서 아이를 길에 버린다고 하였다. 백성들의 삶이 부모-자식의 보전조차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왕인들 필요가 없다. 현종은 "자식을 낳은 뒤 먹을 것을 지급하고, 자식을 버리는 자는 엄하게 금단하며, 한정을 세초하는 것도 반으로 줄이라."고 지시했다.

어리석으나 신령한 백성

아직 함경도는 대동법이 실시되지 않아 특산물을 납부하고 있었다. 사재감(司宰監)에 납부하는 함경도의 특산물로는 황대구(黃大口)와 백대구(白大口)가 있었다. 그러나 토산으로 잡혀 있지만 해산물이 점점 예전 같지 않아 용도에 적합한 물고기를 얻기 어려웠다. 하지만 관청에서는 장부에 적힌 대로 점퇴(點退 합당한 물품인지 검사함)하였다. 물건도 없고, 그나마 구해도 좋지 못하기 때문에 퇴짜를 맡기 일쑤였다. 이러면 뇌물이 성행한다.

▲ 1900년대, 캐나다 세인트존에서 인부들이 황대구를 말리는 모습. (출처 : www.vintag.es)


더구나 황대구의 경우 제대로 말리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원래 반드시 겨울 동안에 미리 준비했다가 봄, 여름이 되어 상납하는데, 관청에서 국용(國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음 해에 납부해야할 수량의 반을 제하고 당겨서 납부하게 하였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1년 공물을 두 차례로 나누어 상납하니 왕래하며 짐을 싣는 비용, 인정과 작지(作紙 수수료)에 드는 비용이 전보다 배가 되었다. 문곡은 해당 관청의 관리들이 저지르는 점퇴의 폐단을 통렬히 금지하고 별도의 방안을 강구하여 당겨쓰는 행위가 없도록 하라고 요청했다. 현종은 "부족한 수량은 당겨 납부하게 하지 말고 호조에서 방안을 강구하여 사서 쓰며, 두 차례로 나누어 상납하는 규정은 중지하라."고 조치했다.

이외에도, 함경도 경성(鏡城)이나 길주(吉州) 등지의 유생들을 위한 문과 초시의 개선, 흉년이 든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무과 출신(出身)의 6진 부방(赴防) 유예, 민생을 괴롭히는 경성(鏡城) 황무지 국둔전(國屯田)의 폐지, 내수사에 빼앗긴 고원군(高原郡) 양천사(梁泉寺)의 위전(位田) 반환 등, 문곡의 제안으로 개선, 개혁된 조치는 여럿이었다.

그 핵심은 "오직 의복과 음식이 나오는 생업을 튼튼하게 하고 가렴주구의 길을 끊으며,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의 고충을 대할 때, 항상 불구덩이에서 구해내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이 한다면, 백성들은 은혜와 믿음에 두루 젖고 교화의 소문이 점차 물들 것이라고 문곡은 보았다. 덕을 입어야 인정이 감격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어리석은 듯 신령한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은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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