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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상지대 민주화 일기 ②] "상지대는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아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래전에 세르반테스가 말했고 시오노 나나미는 이 말을 그녀의 책 <로마인 이야기> 제1권의 제목으로 차용했다.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말했고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말은 로마의 멸망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을 포함한다. 이 거대한 제목을 상지대 상황에 빗대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지만 상지대 사태의 두 측면, 즉 민주화와 좌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는 유용할 것 같다. 상지대 정이사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무너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대결이 본격화되던 2007년 5월 17일. 대법원은 사학을 둘러싼 20년간의 논란을 일거에 잠재워버릴 역사적인 판결을 선고했다. 이미 원심인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그전 해인 2006년 2월 14일에 선고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대 반 실망 반의 상태로 지켜보고 있기는 했지만 결국 일말의 기대는 사라지고 실망은 배가되었다. 대법원이 상지대 정이사 체제를 부정하여 붕괴시키는 확정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김문기로 대표되는 종전이사는 이사회 결의의 효력을 다투는 소의 이익이 있다. 그러므로 이 소송을 제기할 권한, 즉 원고적격성을 갖는다. 둘째, 임시이사가 정이사를 선임할 권한은 없다. 그러므로 상지대 정이사를 선임한 2003년 12월의 이사회 결의는 무효이다. 이 판결은 퇴임한 이사는 원고의 자격이 없다는 판례와 민법상 임시이사는 정이사와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는 판례 등 기존의 대법원 판례를 수정하고 새로운 판례를 수립한 것이었다. 대법원의 결정은 다음 두 인용문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학교법인에게 인정되는 헌법상의 사학의 자유는 순차로 선임되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연결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이사들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것이고, 그 중 종전이사는 보통 학교법인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임무와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는 자라 할 수 있으므로... 종전이사들은 위와 같은 이사회의 결의에 대하여 법률상의 이해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그 무효 확인을 구할 소의 이익이 있다."

"임시이사는 이사의 결원으로 인하여 학교법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거나 손해가 생길 염려가 있는 경우에 임시적으로 그 운영을 담당하는 위기관리자로서, 민법상의 임시이사와는 달리 일반적인 학교법인의 운영에 관한 행위에 한하여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제한적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고, 따라서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은 없다."

이 역사적인 판결은 재판장인 대법원장 이용훈과 대법관 고현철, 김용담, 김영란, 양승태, 김황식, 박시환, 김지형, 이홍훈, 박일환, 김능환, 전수안, 안대희 등 모든 대법관이 참여한 전원합의부에 의해 내려진 결정이었다. 주심은 김황식 대법관이 맡았다. 그러나 전원합의부의 결정이라고 대법관 전원이 찬성한 결정은 아니었다. 대법관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이홍훈, 전수안 등 5명은 다수의견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종전이사에게 소의 이익을 인정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적절하지 않으며 임시이사의 권한을 제약하는 법률적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결국 대법관 13명이 8 대 5의 비율로 다수의견을 채택한 것이다.

ⓒ연합뉴스

대법원 판결로 무너진 상지대 정이사 체제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에서 김황식과 박일환은 다수의견이 "학교법인을 단순히 설립자나 그 이사들의 사유재산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다"라는 점을 애써 강조하면서 이것이 상지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학에 임시이사가 파견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정황론을 개진했다. 그러나 다수의견에 대한 또 다른 보충의견에서 양승태는 임시이사의 정이사 선임은 국가권력에 의한 '재산권 침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수의견이 외형상 사학의 자율성과 정체성을 내세우지만 그 본질은 재산권이라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다수의견, 다수의견에 대한 반대의견,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반대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등을 통해 치열한 법리논쟁의 속살을 드러냈다. 사학 문제를 둘러싼 갈등구조가 대법원에 반영된 것이다. 이 논쟁에는 사학의 자율성과 공공성의 관계, 임시이사 제도의 성격, 이사 제도의 본질 등 사학을 관통하는 주요 논점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특히 이사 제도의 본질이 중요한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다수의견이 먼저 이사 제도의 인적 연속성론을 근거로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학교법인의 설립목적은... 이사들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므로, 설립자가 최초의 이사들을, 그 다음에는 그 이사들이 후임이사들을, 또 그 다음에는 그 후임이사들이 자신의 후임이사들을 선임하는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이사를 선임함으로써 학교법인의 설립목적이 영속성 있게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학교법인의 이사 제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대법관 이홍훈은 반대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에서 사학의 설립주체를 학교법인으로 한정하고 정관을 두는 이유는 교육에 대한 사적 지배나 인적 지배를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5명의 대법관과 함께 이사 제도의 인적 연속성론을 비판하고 설립정신이 화체화된 정관에 의한 연속성론을 강조했다. 참고로 이 논점은 대법원 판결 6년 후 헌법재판소 판결로 다시 부각된다. 헌법재판소는 대법원 다수의견의 인적 연속성론을 부정하고 정관에 의한 연속성론을 다시 살려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대법원 판결의 법리 문제를 문외한인 정치학자가 법률적으로 길게 설명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이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다만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사학비리를 저질렀든 말았든 쫓겨난 비리 주범 김문기에게는 원고 자격이 있다는 것이고, 임시이사는 정이사를 선임할 권한이 없으므로 정이사를 선임한 상지학원 이사회의 결의는 무효라는 것이다. 결국 이 판결로 김문기는 사학비리로 퇴출된 지 14년 만에 법률적 이해관계자의 지위를 확보했고 대학 민주화의 상징적 성과로 간주되었던 상지대 정이사 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판결 이후 가중된 혼란들

겉으로는 김문기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실상은 쫓겨난 모든 비리재단을 포함해서 사학재단 전체의 손을 들어준 이 소송은 상지대 정이사 체제가 출범한 직후인 2004년 1월 8일에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서 시작되었다(2004가합52). 김문기와 그의 처 김옥희 등 5명을 원고로 하고 법무법인 태평양과 송백이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한 이 소송은 3개월 만에 원고적격 문제로 각하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시작된 항소심(2004나30776)에서는 법무법인 앞 순위에 오르내리는 태평양과 바른이 참여했고 2년 만인 2006년 2월 14일에 김문기에게 회심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상고심은 2006년 3월 20일에 시작되어 다음 해인 2007년 5월 17일에 끝났고 결과는 항소심과 같았다. 김문기가 승리한 것이다. 대법원 상고심에서 김문기는 광장, 바른, 서울, 로고스 등 내노라 하는 법무법인을 총동원했다. 이런 점에서 이 재판은 김문기와 상지대만의 싸움이 아니라 사학을 둘러싼 재단과 구성원의 싸움이자 사학의 자율성과 공공성을 둘러싼 싸움인 동시에 유력 법무법인들 사이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대법원 판결은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야기했다. 사학을 사유재산으로 간주한 판결이라는 비판에서부터 사학재단과 비리재단을 옹호하는 판결이라는 비난까지 쏟아졌다. 이 재판의 주심은 김황식 대법관이 맡았는데 김황식은 동신대학교를 운영하는 김필식 총장의 동생으로서 사학재단에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더구나 이 판결 이후 발족한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대법원 판결은 물론 특히 김황식과 박일환 대법관의 보충의견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비리로 쫓겨난 구재단을 복귀시키는 근거로 사용하였다. 실제로 상지대 정상화는 이 왜곡된 해석에 근거하여 2010년 8월에 김문기 구재단이 복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다음 달에 김황식은 국무총리 후보로 내정되었다. 마침 상지대 정상화 문제로 사회적 쟁점이 뜨겁게 형성되어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국회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9월 28일자 <머니투데이> 기사는 당시 청문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황식 국무총리 후보자가 대법관 재직 시절 사학재단을 운영하는 친누나의 영향을 받아 상지대 사건 판결을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회 국무총리인사청문특별위원회 소속 정범구 민주당 의원은 28일 보도자료를 내고 "김 후보자의 상지대 사건 판결을 분석한 결과 2006년 누나인 김필식 동신대 총장이 이사인 한국대학법인협의회의 의견서를 제출 받았더라”며 "의견서 내용은 상지대 재단을 옹호하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정 의원에 따르면 한국사학법연합회는 2006년 11월 상지대 사건을 두고 대법원에 사학재단의 입장을 전하면서 한국대학법인협의회의 의견서도 첨부했다. 의견서에는 "임시이사를 정이사로 전환할 경우 설립자의 추천에 의해 정이사를 선임하도록 해 설립자의 경영권을 인정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정 의원은 "한국대학법인협의회가 상지대 사건 판결이 나오기 전에 이 같은 의견서를 제출한 점, 장녀와 아들의 유학비용, 장녀의 결혼비용을 누나에게서 지원받은 점을 고려하면 김 후보자는 평소 교류가 깊었던 누나의 입장을 반영해 상지대 판결을 했다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상지대 대법원 판결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김황식 대법관이 누나 김필식 총장과 어떻게 협력했는지, 사학재단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사학재단의 주장이 어떻게 전달되고 반영되었는지는 당장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이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2006년에 한국사학법인연합회(4월 26일), 강원도사립중고등학교장회(11월 6일), 한국사립초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11월 15일), 한국전문대학법인협의회장(11월 15일),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11월 20일) 등 사학재단의 탄원서와 의견서가 대법원에 무더기로 접수되었다.

혼란에 빠진 상지대, 고통은 고스란히 내부 구성원들에게로

아무튼 대법원 판결로 상지대 정이사 체제는 붕괴되었고 임시이사는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게 되었다. 상지대 정이사는 예외로 치더라도 한국외국어대나 한성대 등과 같이 임시이사 체제 하에서 교육부 주관 하에 정이사로 전환한 사례도 있었지만 이것 또한 불가능하게 되었다. 임시이사에서 정이사로 건너가는 길목이 철통같이 봉쇄된 것이다. 사학재단 입장에서는 20년을 넘어 장기화되고 있는 임시이사 체제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결국 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 대목에서 사립학교법 개정과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로 약칭)가 해법으로 등장했다. 상지대 대법원 판결로 정이사 체제가 붕괴된 지 두 달 후인 2007년 7월 27일 국회는 사분위를 신설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사분위는 임시이사가 정이사를 선임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교육부가 임시이사 체제를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을 감당하기도 어렵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하고 임시이사 체제가 계속 장기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학재단의 요구를 반영하여 임시이사 체제의 정상화를 담당할 특수임무를 수행할 특별기구로 발족되었다. 이 방안은 애초 한나라당의 제안을 토대로 한 것이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다가 로스쿨의 도입을 추진한 참여정부의 요구를 한나라당이 수용하는 조건으로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수용함으로써 실현 가능하게 되었다. 정치적 거래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거래가 철저하지 못했다. 임기말 상황에 직면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로스쿨에 집착한 나머지 한나라당의 사분위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사분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어떤 역할을 수행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김진표 열린우리당 정책위 의장의 주도로 한나라당과 협의하여 교육위와 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의장 직권상정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때문에 정작 개정안의 소관 위원회인 교육위원회 소속 열린우리당 교육위원들은 이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도 개정안의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대학평의회의 권한으로 입법되었던 개방이사 추천에 이사회의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개방이사 제도 역시 무력화되었다. 충격이 클수록 충격에 대한 실감은 늦게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는 정이사 체제를 붕괴시킨 상지대 대법원 판결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크게 실망했지만 우리가 받은 충격은 곧 다가올 거대한 쓰나미의 작은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우리는 상지대 대법원 판결 두 달만에 사분위가 신설된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분위가 무소불위의 난폭한 괴물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하물며 80년대 이후의 민주화 국면에서 교육 민주화의 결과로 등장한 모든 임시이사 체제가 비리재단의 예외없는 복귀로 거대한 체제붕괴를 겪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은 때때로 상상 없이도 다가오는 법. 상지대는 곧 미증유의 혼란으로 빠져들었고 그 상황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대법원 판결로부터 7년 후 모든 상황을 남김없이 모질게 겪은 다음에 우리는 김문기 씨가 상지대 총장이 되어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꿈같은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나는 즉시 교수직에서 파면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고소·고발과 탄압에 노출되었다. 2014년 하반기와 2015년을 뜨겁게 달군 그 유명한 상지대 사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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