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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종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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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종북' 아닌가" [인터뷰·上]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여권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역사를 한 가지로 가르쳐야 한다"는 '소신 발언'이 쏟아져 나온다. '좌편향' 역사 교과서가 문제라 국정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들에게, 원로 역사학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일침을 놓았다.

"북한 학생들은 나라님을 칭송하는 앵무새들과 같다. 그게 획일적 역사 교육의 결과다. 본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종북'이라며 때려대는데, 바로 그들이 하는 짓이 종북 아닌가."

따끔한 지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교수는 국정 교과서를 통해 '자학사관'을 바로잡자는 주장 속에 든 모순들을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부정하지만, 정작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것은 이승만이었음을, 국정론자들이 쓰는 자학사관이라는 말이 사실은 그들이 지금 비판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쓰던 용어임을 지적했다. 그는 묻는다. '정말 알고도 그러는 것이냐'고.

한국 사학사도 연구해 온 이 교수는 역사 교과서 발행 체제가 민족의 역량과도 관계 깊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검인정 교과서를 통해 다양성을 추구했으며, 그 가운데 길러진 국민 개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훗날 민주화의 자양분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개별 주체성을 억누르고 나아가 민족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은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용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김대중-김정일 사진은 있는데 이승만은 없으니 친북 교과서?"

프레시안 :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가 깊다. 차근차근 짚어보자. 역사 교과서 논쟁,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건가.

이만열 :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처음은 검인정(檢認定) 체제였다. 해방 이후 많은 혼란 속에서도 국정이 아닌 검인정을 택하면서 다양성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그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 이후 왜곡된 사관을 바로잡고 일관된 역사를 가르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정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다가 다시 역사 교과서 검정제 전환에 대한 고시를 내린 게 문민정부였다. 그때는 이미 1987년 6월 혁명의 여파로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다. 우리 교육에서, 교과서 발행 또한 검인정 체제로 바뀌는 것이 민주화의 방법이라고 봤다. 찬성 반대할 것 없이 그걸 하나의 추세로 받아들였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7차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뀌었다. 교과서 전체는 아니고 근·현대사 부분이 먼저 검정 체제로 바뀌었다. 이렇게 바뀌게 된 배경이 있었다. 국사와 근·현대사까지 일관되게 공부한다는 게 교육 일정상 어려운 때가 많았다.. 그래서 국사와 근·현대사를 분리하고, 국사는 필수, 근·현대사는 선택으로 하되 검인정 교과서로 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국사 과목에서는 근·현대사가 아예 빠지게 됨으로 근·현대사를 아예 못 배우는 학생이 생기기 때문에,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근·현대사를 조금 붙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독립된 근·현대사 교과목에 7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린 교과서가 금성출판사 판이었다.(당시 채택률이 54.4%로 가장 높았다.)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그 책이 학습 단위에 맞게 잘 짜인 덕분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뒷날 주일대사를 지낸 당시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이 교과서 좌편향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때 제가 마침 국사편찬위원장이라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권 의원이 흥분을 하면서 교과서가 친북 시각이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 "'친북 교과서' 논란, 교육위 국감 이틀째 파행")


다음 날 마치 짠 것처럼 보수 언론에서도 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 좌편향이라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기사와 사설을 쏟아냈다. 학부형들도 불만을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하고 악수하는 장면은 보이는데, 이승만의 사진은 안 보인다든지 그런 식으로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좌편향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헌법 전문을 보면,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한다는 내용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이 악수하는 그 장면만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지향을 보여주는 데 좋은 시각적 효과가 어디 있나.

그런데도 여론이 그런 식으로 가니까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심의위원회에 심의를 다시 맡겼다. 그런데 검토해 보니, 딱히 큰 문제가 없어 몇 부분만 손질하면 괜찮다고 하고 내놨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다시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서점에 꽂혀있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연합뉴스

"'김일성 금기' 깨고 업적 알린 뉴라이트 교과서"

프레시안 : '좌편향 교과서'에 대한 공격은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본격화됐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기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작업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뉴라이트 계열에서는 '교과서 포럼'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이하 대안 교과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만열 : <대안 교과서>를 보면 재밌는 부분이 많다. 이 책이 나올 즈음 전국역사교사모임 초청을 받아 한홍구, 서중석 교수 등과 함께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국 근·현대사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맡은 부분이 독립운동사였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대안 교과서>에서는 뭐라고 적었는지를 봤다. 금성출판사나 다른 검정 교과서보다 훨씬 더 비판적이고 시각이 굉장히 앞서 가 있었다.


이를테면, 일제시대 공산주의자들의 투옥 사실을 두고 <대안 교과서>는 "1926~1935년에 1만8000명가량의 한국인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그중 많은 수가 공산주의자였다. 일제는 공산주의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했으며, 그로 인해 민족독립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평판을 얻었다"고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상당히 공헌이 있는 것처럼 쓴 것이다. 공산주의자들한테 이런 칭찬이 어디 있나.

이승만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서술이 있다. 이승만은 뉴라이트 쪽에서 떠받드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이승만에 대해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갈등의 중심에는 이승만의 독립운동노선으로서 외교노선이 있었다"고 썼다. 외교 노선에 대한 설명이나 중간에 있는 삽입구를 빼면 처음부터 끝까지 결론이 이승만은 가는 곳마다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였다는 식이었다. 얼마나 웃긴가.

그다음 중요한 게 김일성에 관한 부분이다. 뉴라이트나 우파 진영에서 좌편향 교과서라 부르는 금성출판사 판에서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본문 속에는 안 나온다.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으니본문과 분리된 예제 등에서 잠깐 언급이 되는 정도인데, <대안 교과서>에서는 본문 속에서 김일성을 두 번 정도 언급한다. 김일성이 승리로 이끌었다고 알려진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도 무척 자세히 쓰면서 김일성이 항일 운동에서 아주 큰 두각을 나타낸 것처럼 묘사했다. 제가 한 번 비교를 해봤다.

<대안 교과서>는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이 이끄는 소규모 유격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에 침투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의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민족의 사기를 높였으며, 김일성이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썼고,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항일 유격대는 조국 광복회 국내 조직의 지원을 받아 국내 진공 작전을 여러 차례 단행하였다. 일제의 공세가 강화되자, 유격대는 소부대로 나누어 지하로 들어가거나 소련령으로 퇴각하여 그곳에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군사 훈련을 하였다"고 했다.

만약 금성츨판사 교과서 본문에 김일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항일 운동에 큰 공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으면, 우파 인사들이 얼마나 난리를 쳤을까.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수구 언론들이 얼마나 물고 늘어졌을까. 그런데 누구도 <대안 교과서> 기술에 대해선 토 달지 않았다. 좌편향 교과서라느니, 친북 교과서라느니 하는 공격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승만은 임시정부 법통 계승한다는데 이승만 추종자들은 왜…"

프레시안 : 교과서 논쟁은 왜 일어나는 건가.

이만열 :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저마다 다르다. 그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건국절 논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 67주년'이라고 해서 또 논란이 되지 않았나. 물론 상해 임시정부 가서는 대한민국의 법통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시작됐다고 한 걸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개념이 애초에 제대로 잡힌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어쨌든 박근혜나 이명박을 떠받치는 세력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 역사를 바라본다.

건국절 논란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을 세웠는데, 그것을 운용하는 정부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한반도 안에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외에 세운 게 임시정부였다. 원래 임시정부는 한성(한성정부)과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대한 국민의회) 세 곳에 있다가 나중에 통합했다. 사람들은 세 곳 중 한성정부가 전국 각 도 대표자로 조직돼 있어 더 정통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되, 위치를 상하이에 두는 형태로 임시 정부를 통합하면서 통합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후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한 건 해방 이후인 1948년이었다. 당시 총선거에서 이긴 이승만이 제헌 국회가 개원될 때, 앞으로 만들 대한민국은 한성정부를 통한 상해 임시정부의 후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부 수립 선포식 때도 현수막에 대한민국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해 9월 1일 관보 1호를 내는데, 연호가 '민국 30년'이었다. 1919년이 대한민국 첫해인 거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고. 1948년에 세워진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해선 안 된다. 이승만은, 우리가 만약에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한다면, 이건 정말 창피한 짓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대한민국은 연합국이 해방시켜 주어서 그 덕분에 세워진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남의 덕분에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창피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그렇게 세워진 것이 아니고 일제의 포악한 식민 정책 아래서 그들과 싸워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건국이 떳떳하다고 했던 것이다. 이승만을 떠 받드는 사람들은 이같은 이승만의 역사의식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게 바로 독립운동의 전통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방식이다.

사실 3.1 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더 이전으로 따지자면 홍경래의 난 이후 일어난 각지의 농민운동과 연결된다. 민중이 자기 권리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 과정이었다. 1919년까지 전에 일어난 독립운동의 대부분이 왕조회복운동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백성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거대한 물결이 바로 3.1 운동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3.1 운동 지도자들이 독립 선언 후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을 때 일제 재판관들이 이들에게 너희들이 독립을 선언했으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무슨 나라를 세우려고 했느냐고 물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라고 답했다. 바로 이게 1919년 3.1운동 후 바로 그해 4월 11일에 상해에서 세워진 대한민국이다.

나는 역사란 인간의 주체성이 확대돼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내 개인적인 의견만이 아니라, 1960년대 이후 국사학이 발전하면서 역사의 발전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모인 답변도 바로 이것이었다. 만약 동학 운동이 발전해 독립협회 운동이라든지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했다면 나라를 안 뺏겼을 것이다. 그러니 일본이 보기에 이 나라는 핵심 인물 몇 명만 조종하면 다 넘어오겠단 걸 알았던 거다. 그렇게 대한제국이 망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깨닫고 개개인이 주체적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이승만도 이런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임시정부를 계승한 건데, 이승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왜 이승만의 이런 역사 인식을 따르지 않고 식민지 근대화론만 찾는 건지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좌편향이라는 공격 전에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서어리)

"'자학사관' 일본 우파 용어 김무성, 알고도 쓰는 건가"


프레시안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검인정 제도는 국민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라고 했다. 김 대표를 비롯해 여당에서는 교과서 논쟁이 이념 논쟁으로 번지는 걸 막고 국민 통합을 위해서 역사를 한 가지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만열 : 지금까지 분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그들 아닌가. 국민들로 하여금 교과서 논쟁에 대해 진저리나도록 유도해왔다. 사람들이 '차라리 그럴 바에야 국정으로 하자'라고 생각하게끔 말이다.

이 사람들이 국민 통합이란 말은 분단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 해방 이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검인정을 통해 다양성을 추구해왔다. 그게 바로 민주화고, 나는 그러한 민주화의 역량이 4.19혁명으로 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요새 많은 이들이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 발전했다고 하는데, 나는 꼭 '민주화와 산업화'라고 한다. 민주화가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얘기다. 민주화는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인정한다. 산업이 발전한 것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덕분이다. 산업화가 있고 난 뒤 민주화됐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1960년대 말까지는 북한 경제가 우리보다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나올 때가 경제 수준이 비슷한 시점이라고 한다. 분단 초기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좋았던 이유는 혁명적 열정으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1972년 전후로 일당 독재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때 북한 역사 연구 책을 보면, 무슨 내용이든 앞에 김일성 동지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교시하셨다는 얘기를 쓴 다음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더라. 지금 국정 교과서를 쓰는 몇 안 되는 곳 중 또 필리핀이 있다. 필리핀도 1950년대에는 우리보다 생활 수준이 나았다. 그러나 독재 정권 몇 번을 거치고 푹 가라앉았다.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일 아닌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김 대표는 현재 검인정 교과서가 이른바 '자학사관'에 입각해 쓰였다고 말한다.

이만열 : 자학사관이라는 말은 그리 써선 안 된다. 자학사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의 극우세력에게서 나온 말이다. 김무성 대표가 그걸 알고나 쓰는 건지 모르겠다.

1990년대 일본에서는 사회당이 집권했다. 당시 무라야마 수상은 국가 안의 평등을 강조하고, 국가가 잘못이 있으면 반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1995년에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해서 정권을 뺏긴 자민당 계통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본의 앞길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든다. 그 중심에 지금의 아베 총리가 있었다. 국회에서는 아베가 중심이 되고, 국회 바깥에서는 교수 몇몇이 모였다. 그런 모임을 하면서 사회당 등의 과거사 반성을 두고 '자학사관'이라고 했다. 그래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후쇼사> 교과서를 만든다.

우리 역사에서 처절했던 과거를 알리는 걸 두고 역사를 학대하는 사관이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리고 설령 비판을 하더라도 어떻게 일본의 우파가 쓴 용어를 가져다 쓸 수 있나 싶다. 더욱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서 아베의 역사관이나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 않나. 참 서글픈 일이다.

"유신 시대식 획일적 교육, 창조 경제 가능할까"

프레시안 : 국정 교과서로 전환됐을 때 가장 우려되는 게 무엇인가.

이만열 :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다.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이 사라지게 되는 그런 상황이 올까 봐 두렵다.

누차 강조하듯, 민주주의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국정 교과서는 자율성, 역사에 대한 비판 의식이 사라진 교육을 낳을 것이다. 북한 학생들은 나라님을 칭송하는 앵무새들과 같다. 그게 획일적 역사 교육의 결과다. 한국 극우세력들은 걸핏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종북'이라며 때려대는데, 바로 그들이 하는 짓이 종북 아닌가.

아랫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윗사람 비판하는 건 어렵다. 유신 시대 국정 교과서도 결국 정권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 오류가 나오더라도 시정이 안 됐다. 예를 들어 박정희가 5.16 혁명 공약 6조를 바꿔치기했다. 원래는 '쿠데타가 성공하면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복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교과서에는 '국가의 토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고 써놨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비판의식을 키워야 하는데, 오히려 사고를 폐쇄적으로 막아버린다면, 역사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과거 사실만을 달달 외우면서 '우리 수령님이 어쨌다'는 식의 북한식 공부는 역사 공부가 아니다. 결국 국정화로 하겠다는 것은 어떤 좋은 미끼를 던지더라도, 결국 유신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비판 없던 그런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율성과 창의성이 사라지면 그만큼 우리 민족의 역량도 줄어들 것이다. 대통령은 아직도 '창조 경제'를 말한다. 그런데 창조 경제를 하려고 해도 국민이 창의성이 없을 테니, 과연 창조 경제가 가능할까 싶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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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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