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법의 정체와 노림수는 더 자세히 말할 겨를이 없다. 이 정권이 저지른 '문화 융성'과 '창조 경제'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으니, 그 허무함은 지난 '서리풀 논평'을 참고하기 바란다. (☞관련 기사 : 짝퉁 '민생'의 부도덕, 주술이 된 서비스 산업과 경제 성장)
유감스럽지만, 이런 공청회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온갖 규제를 풀고 사회의 공공성을 훼손할 수 있는 법률 조치, 영리 의료를 촉진할 중요한 의제는 완전히 파묻혔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나라의 운명이 달린 사태 앞에서 이 정도는 사소(?)하다.
이 사태가 걱정이지만, 이번 주 '서리풀 논평'도 일상을 다루기는 어렵겠다. 아니, 모든 이가 대통령을 말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 새로운 일상, 정치적 일상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니 더 절박하다. 다시 공공성과 민주주의라는 (묵묵히 해야 하는) '본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일상이 아닌 일상을 말해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 모든 이의 관심은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제도 권력을 해체 또는 변경하는 일에 모여 있다. 돌이킬 수 없다. 현 정권은 시간이 지나가면, 지지율이 회복되면,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권의 정치적 권력은 회복하기 어렵다.
대중의 집단적 정치 지성이 그렇다. 주말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광화문을 메웠다. 다른 지역 곳곳에서도 대통령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집회가 수도 없었다. 모인 이들은 한 목소리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탄핵되었고, 정권은 정지 상태다.
그 정도로도 정권이 정당하다고 믿는다면, 여론 조사를 참고하시라. 현직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5%는 '민주공화국'의 역사에서 처음이다. 어떤 지역과 일부 연령층에서는 여론 조사에서 가능하지 않은 응답, 지지도 0%도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더 의견이 일치되어야 국민의 '여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 정권이 권력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적 권력은 크게 약해졌지만, 형식적인 제도 권력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 총리와 비서실장을 임명하고 장관과 각 부처를 지휘하고 있지 않은가. 이 와중에도 일본과 '군사 정보 협정'을 추진하는 것이 바로 제도 권력의 힘이다. (☞관련 기사 : )
박근혜 정권은 바로 이 제도 권력을 끝까지 부여잡고 정치적 권력을 회복하려 할 것이다. 방법은 아마도 제도 권력의 핵심인 검찰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일 터. 누구나 아는 시나리오에 따라 검찰 수사가 면죄부를 주면, 정치권력까지 (어느 정도까지는) 회복할지 모른다.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대통령을 그만 두어야 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마무리한다면?
요컨대 정권은 형식적 제도 권력을 발판으로 삼아 정치권력을 회복하는 전형적인 경로를 밟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물리력'이 아닌 한 권력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점. 일부 여론과 구호, 소셜 미디어의 댓글만으로 권력은 '하야'하거나 '퇴진'하지 않는다. 끝까지 버틸 것이 명약관화, 자칫 교착 상태가 지속할 수도 있다.
새로운 권력 균형을 만들어 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금으로는 시민의 직접 행동 이외에는 답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바, 관건은 힘의 크기다. 시민이 가진 힘이 정치권력을 넘어 제도 권력을 압도할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버틸 것이다.
예상컨대, 오는 주말 집회는 지난 주말보다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아직도 여론을 읽지 못하는 대통령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도 더 많은 사람이 모이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운동에 버금가는 규모가 아니면, 또는 그보다 더 커도, 그들은 (지금까지의 비민주적 행태로 보면) 눈도 끔쩍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치권력, 특히 현 정권은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무력함을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중은 곧 지칠 것이고 고단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윤리와 공적 가치, 심지어는 정치 공동체의 앞날도 그들의 일차 관심사가 아닌 바에야, 권력을 경쟁해서 이길 수밖에 없다.
더 큰 힘으로, 새로운 힘으로, 정치권력과 제도 권력에 직접 들이닥치는 방법이 유일하다. 사태가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민주적 요구 그 최소한이 평화롭게 수용되기 위해서도, 시민 권력은 모이고 표출되며 다른 권력으로 진화하여 이겨내야 한다. 그런 순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도 다른 공간과 통로가 더 필요하다.
우리는 대통령 탄핵소추가 바로 그 새로운 공간과 통로라고 주장한다. 오늘 시민이 실천하는 '거리 민주주의'는 국가권력 내부의 정치적 공간(탄핵소추)과 결합해야 살아나고 자라날 것이다. 민주주의의 시너지 또는 시민 권력의 부분적 제도화라고 부르자.
탄핵소추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제도 정당과 국회의원들을 정치화하여 시민(또는 유권자) 곁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발의와 의결 과정에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하며, 시민은 다양한 경로로(예를 들어 지역 정치, 항의나 촉구, 공식/비공식 압력) 개입하고 압박할 수 있다. 생각하면, 특별한 과정도 유별난 실천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일 뿐.
시작은 오래 머뭇거리는 제도 정치를 압박하는 것이다. 거리 민주주의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여당과 야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해 탄핵소추를 조직해야 한다.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책임 총리인지를 가리느라 시간을 보낼 일이 아니라, 탄핵소추에 나서라고 요구하자.
우리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의 힘, 시민 권력이 아무런 성과 없이 제도 정치로 흡수되는 것을 걱정한다. 기껏해야 정당끼리 적당히 타협해 총리를 정하고 국정 질서를 회복했다고 자위할까 두렵다. 탄핵소추는 시민이 제도 정치를 감시하고 긴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 될 것이다.
물론, 탄핵소추에만 의존할 수 없다. 제도화된 국가권력이 시민의 모든 열망을 빨아들이도록 두어서는 곤란하다.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의 틈과 모순, 긴장은 여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따로 또 같이 합해서 더 넓게 가야 한다.
그 때문에라도 한 가지 더, 시민의 권력을 더 크게 만들어내야 한다. 힘과 그것을 드러내는 것 자체로 물리적이며, 제도 정치와 국가권력을 움직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미 만발하고 만개한 집회와 집단적 의사 표시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보태서, 우리는 또 다른 실천 방법으로 '정치 총파업'을 제안하고자 한다.
당장은 아니다. 여론이 무력해지면, 그리고 제도 정치가 시민을 배제하면, 더 강한 직접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전국적인 정치 총파업은 직접 민주주의를 표현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방법이자 정치적 공간이 될 것이다.
비정상이 일상을 지배할 때, 실무와 기술로는 가치를 성취할 수 없을 때, 학교와 직장, 지역이 '본업'을 쉬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직접 가 닿는 동시에 제도 정치를 압박하는 힘. 왜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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