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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동형 없는 기사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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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피동형 없는 기사를 읽고 싶다!" [프레시안 books] 김지영의 <피동형 기자들>
기자와 어울리는 덕목은 발로 뛰는 적극성과 사실 확인, 냉정한 판단과 객관적인 서술이다. 소신과 책임, 양심이 뒤따른다. 피동이나 수동, 곧 마지못함은 그런 점에서 악덕이다. 덕목도 악덕도 글로 드러난다. 글에서 악덕이 드러나는 주요 지표로 꼽을 만한 것이 외래글자, 어려운 용어와 문장, 피동형, 번역투, 이름 숨기기(익명 표기) 등이다.

정신과 물질 등 여러 면에서 우리는 난세와 다를 바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중심에서 줏대를 다잡아야 할 책임이 무거운 언론이, 그 소임을 비켜가는 기사를 쓰고 내보내며, 자신과 독자를 속이고, 사실 왜곡을 일삼는다. 언론 난세의 징표들이다. 언론이 스스로 난세를 조장하는 셈이다. 때마침 <피동형 기자들>(김지영 지음, 효형출판 펴냄)이란 책이 나왔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김지영이 우리 언론의 난맥상 두 가지를 콕 짚어 고발하는 내용이다. 신문윤리위원회라면 신문 기사를 엄정히 살피는 일을 하는 곳인 줄 아는데, 오죽 걱정스럽고 애달팠으면 이런 고발을 했을까 싶어 눈물이 난다. 갈래로는 언론 문장론에 해당하는 이론서이면서도 고발장 형식을 빌렸다. 신문 기사에서 피동문과 익명이라면 나 역시 같은 물에 놀면서 나날이 부닥치고 싸우다 진력이 난 문제였다. 이제 이를 쉽게 풀고 주변 문제까지 두루 짚어주니 오랜 체증이 뚫리고 새날이 밝아오는 느낌을 준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 <피동형 기자들>(김지영 지음, 효형출판 펴냄). ⓒ효형출판
책을 읽어가면서 걱정스러운 게, 과연 불특정 다수인 '피동형 기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부제를 "객관 보도의 적, 피동형과 익명 표현을 고발한다"로 달아놨지만, 역시 그 주체는 기사를 쓰는 기자들인 까닭이다. 대부분 일류 기자, 글쟁이임을 자처하는 자존심 높은 이들 아닌가. 아무래도 기사를 쓰면서 무슨 명예 훼손에 걸리는 걸 무척 조심하는 이들일 터인데, 이 책으로 된 고발로 자신들의 낯이 심각하게 깎인바, 이제 어디든 대고 맞고소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아니면 정당성이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말글과 언론 언어의 앞날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을 돌이켜 스스로 피동형 문장이나 익명 표현을 줄여갈 터인즉, 이는 지은이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바라는 바다.

사실 피동형 남발 풍조는 우리 말글의 병리 현상을 다룬 숱한 책, 기사 문장론이나 번역투 문제 등의 저서에서 외래 용어와 함께 주된 지적거리로 다뤄온 문제긴 하다. 그러나 문장 차원을 벗어나 사람, 권력 체제, 의식까지 뭉뚱그려 그 병리 현상을 파헤친 연구 사례는 드물었다. 피동형과 관련해 우리 신문 기사 역사 100년을 훑었고, 그 가까운 빌미로 1980년대 군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검열 과정을 들췄으며, 그로써 잘못 굳어지고 새끼를 친 사생아라는 점을 짚은 부분이 흥미롭다.

지은이가 고백하듯, 기자 초년생일 때 몸으로 겪고 체험한 바를 가다듬은 대목이어서 믿음이 더 간다. 그것이 보도 기사 문장에 걸맞은 양식이 아닐뿐더러 우리말글 본연의 자연스러움(순순한 능동 서술)에서 어긋난다는 점, 이로써 일반인의 말글조차 온통 변형되어 우리말글의 앞날이 크게 걱정된다는 점을 들추며 책임 있는 집단의 대책을 촉구한다. 피동형의 본산이라 할 영어권과 일본 쪽 사례들도 이 책의 논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피동형 표현은 80년대 초 군부 독재 시절 기자들이 정치권력을 미화할 때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다. 그러나 독재 권력이 사라진 지금, 기자들은 그때보다 더 피동형을 남발하고 있다. 해설·사설 같은 의견 기사는 물론, 사실을 위주로 작성해야 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에도 피동형이 넘쳐난다.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수행한 조사 결과, 피동형(수동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일본의 일간지와 거의 비슷한 빈도로 피동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도 신문과 다를 바 없다."

지은이는 머리말 "피동형 저널리즘을 고발한다"에서 이렇게 언급하면서 "정치권력은 문체를 바꾸고"(1장) "피동의 시대 피동의 문체"(2장) "피동과 익명의 문장"(3장) "피동형의 정체"(4장) "한국 일간지 피동형과 익명 남용 실태"(5장) '미디어 격변기, 공공 언어를 다시 생각한다"(나가며)로 이어가며 책을 마무리한다. (장 구별은 편의로 붙였다.)

이 고발장 하나면 우리가 당면한 큰 문젯거리 하나를 해결할 수 있겠다. 문제는, 피동형 칠갑인 기사 문체를 고발거리로 삼은 것은 알겠는데, 누구에게 고발하느냐가 좀 아리송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올드미디어, 뉴미디어 할 것 없이 대폭 늘어나는 미디어 격변기에 처했다. 문제는 정부와 의회의 관심이 주로 미디어 운영 체계 등에만 쏠려있다는 점이다. 미디어 콘텐츠의 필수 기본 요소인 국어 사용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고 있다. 정부와 의회는 공공 언어에 얼마나,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할지 심각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때다. (…) 우리 언론계와 정부, 학계는 따로 또 함께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언론계와 정부, 학계에 던진 고발임을 알겠다. 하지만 어쩌랴. 그들이 먼저 고발당해야 할 당사자들인 것을….

지은이의 말마따나 날이 갈수록 피동형 인간이 늘어난다. 학자도 정치인도 기자도 일반인도 예외가 드물다. 그것이 발전하는 모습일까? 지은이는 제4장 "피동형의 정체"에서 원칙론자와 너그러운 이(관용론자)들의 좀 상반된 견해를 소개하면서 모든 피동형을 다 버릴 것은 아니지만 그 남발만큼은 큰 문제라는 데까지 물러서기도 하는 조심스러움을 보인다.

피동형의 문제점을 짚으면서 자연스런 우리말의 입음꼴(피동형)까지 건드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관용론자들의 개똥 허세라니…. 낱낱의 개인으로 보면 그냥 덜된 글 버릇에 지나지 않지만 크게 보면 저 해일 같이 밀려오는 나쁜 풍조 앞에서 한갓 허세로 노닥거릴 판세가 아닌 것 아닌가. 앞에서 난세란 말을 썼지만 이런 풍조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하는 모습임이 분명하다.

무엇에든지 거리를 두고자 하고, 에둘러 말하고, 자신 없어 하고, 책임에서 비켜서거나 멀어지려 하고, 자기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하고, 그러면서 눈치보고 공생하려 하는, 이런 태도가 더부살이나 붙살이, 기생충의 그것과 무에 다를까? 언론 말글을 비롯하여 우리 말글이 이런 지경에 이른 데는 지나친 외국어 우대와 공부(특히 영어), 잘못된 입시 풍토, 덜된 국어 교육에 근본 원인이 있을 터이다.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에서 관용(慣用)으로 삼는 방식 하나가 사람 이름이나 단체 이름 숨기기다. 기사에서, 어린이나 극히 보호해야 할 대상을 빼고는 취재원의 이름을 밝히는 게 마땅하여 이를 기사쓰기의 원칙으로 삼는다. 그런데, 예외가 최소한에 그치지 아니하고 늘어나다 보면 마침내 뒤집혀 원칙이 예외가 될 때가 있다. 요즘 기사의 익명 남발 풍조가 그런 지경에 가까워 보인다. 지은이는 애써 조사한 "한국 일간지 피동형과 익명 남용 실태"에서 피동형과 익명 남발이 같이 가고 있음을 분석해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네 군데 일간지 두루 수치나 정도에서 대차가 없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드러나고, 그런 언론사 종사자나 종사했던 이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든다.

"보도 문장의 형식상 스트레이트 기사는 '사실+사실+사실…'로 구성하는 이른바 '사실 기사'다. 오늘날 이러한 사실 기사를 의견으로 '오염'시키는 일은 일상화한 실정이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보도 문장은 당연히 객관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보도 문장이 일상화한 사회는 곧 저널리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사회다. 소통에 큰 결함이 있는 사회다. 기자들이 추측성 보도나 경향성이 짙은 보도를 할 때, '사실'을 '의견'으로 오염시키기 쉽다. 의견으로 오염된 기사는 객관성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지은이는 객관 보도를 해치는 주범으로 몇 가지 서술어들과 숱한 보기 글들을 적시한다. '~인 것으로 판단된다' '~로 이해된다' '알려졌다' '전해졌다' '평가다' '지적이다' '전망이다'…. 이들은 기자의 판단과 주관이 실린 서술어들이면서도 주체가 없는 문장을 만든다. 이런 주관성 서술어들은 기사의 객관성을 떨어뜨리는 요인들로서 주관성 분석의 지표로 삼는 정도다.

객관적 서술을 방해하는 저런 주관성 서술어들이 의견, 주장성 기사 문장에서는 적절히 쓰일 법한데, 과연 그럴까? 역시 아니올씨다다. 분명하고 명쾌한 문장을 이끌지 못하도록 골병을 들인 까닭이다. 결국 사실 기사에도 논평 기사에도 어울리지 않는 저런 문체와 서술어라면 생명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인용한 말에서처럼 지은이는 사실 기사를 의견으로 오염시키는 걸 무척 걱정한다. 그렇다고 하여 사실 전달과 분석, 의견을 아우른 기사까지 쓰지 말라는 말은 아닐 터이다. 언론사나 뜻있는 기자들마다 새로운 기사 체나 기사 양식을 두고 고민하는 줄로 안다. 그런 모색 중의 하나로 이른바 통합기사가 이따금 지면을 장식한다. 이런 기사는 복잡한 사안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데 적절한 기사 체로 시도해 볼 만한 양식이 아닌가 한다. 물론 지은이가 지적하는 폐단을 고려하여 연조가 깊고 문장 훈련이 잘된 중견 기자들이 맡아 제대로 쓴다면 유익하고 읽히는 기사가 나올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덜된 피동문과 익명으로 범벅하지 않은 기사를 읽고 싶다.

사족이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 지은이는 에둘러 말하기(완곡어법)나 피동형 말법을 쓰는 데서 정치인에게는 좀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독자인 필자가 보기에 피동형 말투를 자주 쓰는 정치인 역시 좋게 보이지 않는다. 비겁하고 자신 없어 보이고 이땅 사람 아닌 인상을 주고,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해도 되나 하는 헛헛함을 느낄 때가 많다. 그들의 말투 역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나쁜 버릇은 고치기 어렵고 나쁜 말투는 쉽게 유행한다. 정치인과 정치 언어의 책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언론 역시 그들의 발언을 많이 따서 쓴다. 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정치인의 말에 얼마나 엉터리가 많은가. 학문 언어는 어떤가. 이른바 완곡어법을 쓴 문장들로 구역질이 날 때가 많다. 자신 없고 비겁하고 간지러운 말투들이다. 이들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뭐란 말인가. 관공서, 기업체, 각종 단체들의 보도 자료 문투들도 그렇다. 기사를 빼닮아 피동문에 로마자, 외래어투성이다. 이 역시 언론계가 조장한 면이 있다. 지은이 책에서도 '~에 따르면'으로 출처를 밝히면서 시작하는 상투문이 좀 거슬린다. 옥에 티라고나 할밖에.

그럼에도 이 책은 말글로 먹고사는 많은 이들에게 고발과 매서운 매질을 거듭하면서 큰 깨우침을 준다. 이로써 머잖아 적어도 피동문 없는 신문, 피동형 말투를 쓰지 않는 방송임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언론사가 나와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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