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목차
프롤로그 – 매력과 이견
Ⅰ. 목차로 본 <역사의 역사>의 특징
Ⅱ. 오류 또는 이상한 부분
1. 기록이란 무엇인가?
* 참고
2. 기전체의 특징
3. 역사가와 역사학자
4. 역사와 문학
* 연습
5. 춘추필법에 대한 억측
Ⅲ. 인용된 역사서에 대한 코멘트
1. 제1장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2. 제2장 사마천
1) 궁형의 영향
2) 개인 편찬?
3. 제3장 이븐 할둔
4. 제4장 랑케
5. 제5장 마르크스
1) 기계적 유물론
2) 마르크스와 역사학
3) 역사종말론
6. 제6장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1) 당대사
2) 김부식
7. 제7장 에드워드 카아
8. 제8장 슈펭글러 토인비 헌팅턴
9. 제9장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Ⅳ. 사실이란 무엇인가
에필로그 : 서평의 숙명
프롤로그 – 매력과 이견
유시민이 쓴 책의 제목 ‘역사의 역사’를 역사학과에서는 통상 ‘사학사(史學史)’라고 부른다. 역사학의 전공 필수 과목 중 하나이다. 역사학의 시대별 흐름을 살펴 그때그때의 특징과 일반적 성격을 배우는 것이다.
아무래도 역사학 공부를 위해 과거 역사학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 성과는 뭔지를 알아야 하는 과목이다 보니 양도 많고, 외울 것도 많다. 원래 전공 훈련은 쉽지 않은 법이다. 유시민은 이 재미없는 과목=주제를 가지고 많은 독자에게 읽히는 책을 썼다. 이유는 전공강의와 독후감의 차이이다. <역사의 역사>라는 독후감은 역사학과의 사학사 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공자가 볼 때도 유시민의 논의의 수준이 높다. 주요 역사책이 포함되어 있고, 그 역사책에 대한 연구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역사공부가 ‘흥미로운 역사의 사실을 아는 즐거움’에 더하여, “저자들이 역사의 사실과 논리적 해석에 덧입혀 둔 희망, 놀라움, 기쁨, 슬픔, 분노, 원망, 절망감 같은 인간적 도덕적 감성이었다.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데 있음을 거듭 절감했다”고 하였다.(16~17p) 나 역시 동감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의 기록과 전승’이라는 단조롭고 지루할 수 있는 노력과 과정이 없이는 유시민이 느낀 매력은 애당초 생길 수 없다. 동시에 이 책에는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나 의견도 있다. 그래서 ‘서평’의 형식으로 논의하는 게 이미 읽은 독자나 앞으로 읽을 독자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서평을 쓰는 두 번째 이유이다.
다행히 <역사의 역사>에 나오는 역사책들은 내가 강의, 세미나, 레포트 또는 심심풀이 등의 이유로 손때를 묻히고 익히 보아서 어느 정도 아는 책들이었다. 정규 역사학과의 사학사에서 다루지는 않겠다 싶은 책들도 있다.(<공산당선언> <문명의 충돌> <총, 균, 쇠> <사피엔스>) 하지만 이런 책을 포함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학사 커리큘럼은 너무 경직되어 있다. 그렇다고 유시민의 이해와 감상을 다 다룰 이유도 없고, 그게 가능하지도 않다. 약간의 제한이 필요하다.
먼저 곳곳에서 언급한 그의 역사에 대한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이 점은 중요하다. 역사와 사실, 사실과 해석, 문학과 역사, 역사가와 그의 태도 등 역사학의 오랜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다룬 역사책에 대하여, 그와 견해가 다르거나 오류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검토하겠다. 굳이 나도 동의하거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작하기 전에 다 아는 비밀 하나. <역사의 역사>에 등장한 역사책들이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처럼 재미있으리라 생각하면 안 된다.
다 아는 비밀 둘. 재미없는 책이라고 유익하지 않은 책이 아니다. “전문 역사학자는 사실과 정보를 압축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연구자가 아닌 독자는 문장을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125) 그렇지만 지루하고 고된 실험실의 보고서, 현장 답사가 있어야 <이기적 유전자>든, <판다의 엄지>든, <DNA>든 쓸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논문이 재미없을지 몰라도 그 전문성이 없는 재미는 사상누각이다. 그런 만큼 전문가는 독자들이 믿을 수 있는 전문성을 담보해주어야 한다.
쓸데없는 걱정 하나.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를 읽고 그 책들을 다 읽은 것처럼 생각하면 안타깝다.
Ⅰ. 목차로 본 <역사의 역사>의 특징
이 책은 서론과 프롤로그, 에필로그에 역사란 이런 것이다, 라는 필자의 견해를 밝힌 뒤, 9장에 걸쳐 필자가 읽은 역사책을 소개하고 독후감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먼저 <역사의 역사>에 나오는 목차를 통해 내용을 살펴보자.
제1장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 헤로도토스, <역사>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장 사마천이 그린 인간과 권력과 시대의 풍경화
- 사마천, <사기>
제3장 이븐 할둔,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 이븐 할둔, <성찰의 책> <역사서설>
제4장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
- 랑케,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 <강대세력들․정치 대담․자서전>
제5장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제6장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 박은식, <한국통사>
- 신채호, <조선상고사>
-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제7장 에드워드 H. 카의 역사가 된 역사 이론서
- 카아, <역사란 무엇인가>
제8장 문명의 역사, 슈펭글러.토인비.헌팅턴
-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
- 토인비, <역사의 연구>
- 헌팅턴, <문명의 충돌>
제9장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역사와 과학을 통합하다
- 다이아몬드, <총, 균, 쇠>
- 하라리, <사피엔스>
아마 역사 전공자였다면, 위의 역사책을 한 책에서 다 다룰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저서에 대해 책 한 권 이상의 할 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의 역사’를 쓰는 경우는 앞서 말한 대로 기초 지식 중심으로 서술된 ‘사학사’ 책 밖에 없다. 일례로 중국 역사학자이자 문학자인 치옌무(錢穆, 1895~1990)의 <사학명저강의(中國史學文学著作)>(이윤화 역, 신서원, 2006)를 소개한다. 그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상서>
2. <춘추>
3. <춘추3전>
4. <좌전>과 <국어>, 그리고 <전국책>
5. <사기> 상 / 6. <사기> 중 / 7. <사기> 하
8. <한서>
9. 범엽의 <후한서>와 진수의 <삼국지>
10. 후한으로부터 수에 이르는 시기의 사학발전
11. <고승전>, <수경주>, <세설신어>
12. 유지기의 <사통>
13. 두우의 <통전> 상 / 14. 두우의 <통전> 하
15. 오긍의 <정관정요>
16. 구양수의 <신오대사>와 <신당서>
17. 사마광의 <자치통감>
18. 주희의 <자치통감강목>과 원추의< 통감기사본말>
19. 정초의 <통지>
20. 마단림의 <문헌통고>
21. 황종희의 <명유학안>, 전조망의 <송원학안>
22. 황종희, 전조망의 <학안>으로부터 장학성의 <문사통의>까지
23. 장학성의 <문사통의>
사실 치옌무의 한 문장, 한 문장은 무게감이 상당하다. 때론 너무 압축적이고, 때론 너무 웅혼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치옌무의 사학사는 전공자가 아니라면 언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긴 이 중 제목이라도 아는 책이 얼마나 되겠는가. 허나 치옌무의 사학사에 등장한 이 책들의 영향력이나 무게감이 유시민의 사학사에 나오는 저서들과 비교할 때 전혀 뒤지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유시민의 사학사는 목차에서부터 읽을 마음이 생긴다. 저술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전공강의와 독후감의 차이는 여기서도 보인다.
Ⅱ. 오류 또는 이상한 부분
1. 기록이란 무엇인가?
유시민은 ‘인간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는 국어사전의 역사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면서,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사실로 엮어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없이 역사를 쓸 수도 없지만, 그저 사실을 기록하기만 한다고 해서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의 기록’은 역사 서술의 필요조건일 뿐이다.”라고 한다.(14p) 그는 또 “이 책에서 말하는 역사는, 다른 설명이 없는 한 언제나 ‘인간의 삶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이야기하는 문자 텍스트’(15p), 즉 역사서술을 가리킨다.
이처럼 그는 역사와 역사서술을 같이 본다. 나는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오해라고 생각한다. 이하에서 설명하겠지만 역사를 역사서술로 한정하니까 나타나는 혼선은 책 곳곳에서 나타난다. 첫째, 집합 개념으로 보면 ‘역사〉역사서술’일 수밖에 없다. 나는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표로 만든 적이 있다.(<호모 히스토리쿠스>, 개마고원, 2016, 2부 역사의 영역, 79~87p)
내가 김연아와 친한 친구라고 치자. 그럼 나는 연아에게 메시지, 이메일을 보내고, 일기장에 같이 스케이트 탄 얘기를 쓸 것이다.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은 메시지, 이메일, 일기에 남는다. 스케이트장에서 누군가 찍은 사진에도 남을 것이다. 이게 1범주이다.
나중에 폰이나 메일박스에서 메시지나 이메일, 일기는 지울 수도 남겨서 계속 보존할 수도 있다. 이게 2범주이다. 더 훗날, 김연아의 일대기를 쓰는 작가가, 또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내가 남긴 자료를 가지고 영화나 전기를 쓸 수도 있다. 이게 3범주이다.
요약하면, 인간은 역사-인간(=Homo Historicus)로서, 종이에든 돌에든 기억으로든 뭔가를 남기고, 그걸 전달하고(또는 폐기하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기록Recording-전달Archiving-이야기Historiagraphy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세 범주가 모두 ‘역사’에 들어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각의 범주, 단계마다 넓은 의미의 ‘기록’이 산출된다. 그리고 각 단계의 기록은 그 성격이 다르다. 내 일기와 국사교과서가 다르듯이, 촛불이 넘치는 광화문광장을 찍은 사진이 내가 쓴 실록에 대한 논문과 다르듯이 말이다. 뿐만 아니라, 세 범주 중 같은 ‘이야기’에 해당하는 기록(산출물)조차도 드라마와 교과서가 다르고, 영화와 논문이 다르다.
유시민은 이러한 기록의 다양한 성격을 간과한 듯 보인다. 유시민이 읽은 역사책은 내 구분에 의하면 주로 ‘이야기’ 영역에 속하는 저서였다. 역사를 역사서술로 정의하면서, 즉 기록을 역사서술로 제한하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논의는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굳이 유시민이 본 책들을 ‘이야기’의 범주로 제한하지 않았어도 책을 쓰는 데는 아무 문제없었을 것이다.
* 참고
나와는 달리, 기록을 저장기억과 기능기억으로 나누어 흥미롭게 관찰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채연숙․변학수 옮김, 그린비, 2011)도 추천한다. 마치 컴퓨터 활성창과 주기억장치처럼 역사는 기능기억과 저장기억의 모습으로 변주,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 쓰는 일기는 저장기억에 가깝다. 쓰고는 잊는다. 나중에 읽어보고는 ‘그런 일도 있었나!’ 하는 경험을 했다면, 일기와 기억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기전체의 특징
역사와 역사서술, 기록과 역사서술의 범주 차이를 무시하면서 유시민은 자신이 읽은 역사책을 모두 ‘역사서술’에 포함시켰다. 그럴까? 사마천의 <사기>를 예로 살펴보자. 본기나 열전에서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기>를 이야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책, 제도, 문물의 분야사인 8편의 서(書), 연표에 해당하는 10편의 표(表)는 별로 ‘이야기’하는 바가 없다. 유시민 자신이 표현하듯이 ‘르포르타주, 보고서, 학술논문을 뒤섞은 형식’처럼 보이는 ‘기록Recording-전달Archiving’, 아스만의 표현에 따르면 저장기억인 것이다. 이야기가 많은 듯 보이는 본기나 세가, 열전도 일차적으로 이런 성격을 띤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점은 동아시아 역사의 기전체(<사기>가 그 효시인) 형식의 역사책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특징이다. 왕조라고 부르든, 국가라고 부르든, 문명이라고 부르든, 기전체는 그 ‘덩어리’를 기록,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참고자료로 쓰려고 편찬했던 역사 형식이었다. 유시민도 사마천이 <사기>를 쓴 첫 번째 목적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63p) 내 표현대로 하면 ‘이야기’가 먼저가 아니라, 제1, 제2 범주인 ‘기록과 전달’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역사서술’이라는 표현에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역사서설>은 다른 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지만, 역시 ‘자료집’에 가깝다. 독자층-인쇄술이 없는 시대의 역사책이 과연 어떤 목적과 기능을 지녔을까? 아무래도 제3범주인 이야기 쪽보다는, 제1, 제2 범주인 ‘기록’과 ‘전달Archiving’에 우선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3. 역사가와 역사학자
나아가 유시민은 “역사학은 학문이고 역사서술은 예술”이라고 한다.(16p) 그래서 “역사학자는 분석하고 연구하고 비평하며, 역사가는 창작한다”고 한다.
그럼 역사학은 역사서술을 배제한다는 말인나? 역사학자는 분석, 연구, 비평만 하나? 역사학자인 오항녕은 역사서술을 안 하는가? 그렇지 않다. 역사학은 더 나은 역사서술을 위해 사실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비평하는 것이다. 통상 역사가란 역사학의 성과를 기반으로 높은 수준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람을 말한다. 역사학자와 역사가를 이렇게까지 구별해야 하는 이론적, 실제적 의미가 있는가? 그 역시 역사학자와 역사가를 명확하게 나누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굳이 나누는 것일까? 굳이 역사가와 역사학자를 나누지 않았어도 유시민이 이 책을 쓰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4. 역사와 문학
유시민이 굳이 역사가와 역사학자를 구분했던 이유를 짐작하자면 다음 말에 답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위대한 역사가는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로 엮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인간과 사회가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의 물결을 일으킨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 데서 출발해 과학을 껴안으며 예술로 완성된다.”
자신의 책에서 창조성, 예술성을 갖춘 역사가의 역사서술을 살펴보겠다는 의지가 그로 하여금 굳이 역사학자와 역사가를 구별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사와 문학에 대한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역사가 문학이라거나 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훌륭한 역사는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위대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16p) 위대한 역사가는 예술성, 창조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주 ‘창작’이라는 말을 쓰는 듯한데, 역사책을 읽으며 느끼는 감동의 창조성과, 역사의 ‘창작’은 전혀 다른 문제 아닐까? 다시 말해 다른 역사책이 주지 못했던 감동을 느꼈다는 사실이, 그 역사책에서 다룬 사실이 곧 ‘지어낸 창작물’이라는 말은 아니지 않나?
왜 이런 혼동이 생겼을까? 없는 사실을 지어내면 역사가 아니다. ‘서술하되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当]’는 공자의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학의 오랜 원칙이다. 너무 쉽게 이 원칙을 허무는 유시민의 논리는 무엇보다도 문학에 대해 그가 오해하는 데서 생겨나는 듯하다.
다음(DAUM) 국어사전에서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라고 하였다. 나는 언어로 된 인간의 자기 표현 형식이 문학의 첫 번째 성격이고, 이 표현이 창조성을 띨 수도 있고 상상=꾸밈을 수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는 문(文)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요즘의 문학(Literature)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일단 경(經)과 사(史)와 문(文)을 철학, 역사, 문학으로 부를 수 있다. 셋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철학에도 철학사가 있고, 역사에도 역사관이 있으며, 소설과 시에도 역사와 철학이 있고, 또 역사와 철학을 시로 쓸 수도 있다.
왜 그런가? 존재에 대한 질문도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며, 경험의 흔적이든 존재에 대한 질문이든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철학, 문학은 인간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오랜 양식이자 성과로, 나름의 영역이 있기 때문에 경은 경이라고, 사는 사라고, 문은 문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역사서술이 문학적으로 탁월한 창조성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를 창작, 꾸밈이라고 이해하면 문학이 뭔지, 역사가 뭔지 헷갈린다. 이 주제를 사마천의 <사기>를 가지고 풀어보자.
* 연습
사마천의 <사기>는 원체 그 문학성을 높이 평가받아온 업적이다. 그래서 종종 역사와 문학의 경계(人生境界)를 회의하게 만드는 사례로 언급되어왔다. 사마천이 “전해 내려오는 것을 간추려 정리하려 할 뿐, 창작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한 말조차, 유시민은 사실에 근거해 서술했다는 점을 강조한 말일 뿐 지어낸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지어낸 이야기가 <사기>에는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로 유시민은 괴통(蒯通)의 진술을 인용하였다.
괴통은 한신(韓信)에게 한 고조 유방에게서 독립할 것을 권했다가 잡혀왔다. 사마천의 서술에 따르면 그는 한신에게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고 설득하여 독자 세력을 형성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유시민은 “밀실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었으니 기록이 남았을 리 없다. ……소설가들이 쓰는 ‘전지적(全知的 작가시점’을 사용한 것이다.”라고 했다.(72~73p)
내 생각은 다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없는 사실을 소설가처럼 지어냈다면 사마천은 역사가일 수 없다. <사기>에도 나와 있지만 괴통은 잡혀 와서 심문을 받았고, 그 진술 가운데 위와 같은 ‘밀실의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요즘의 심문조서 같은 형식의 사료(史料)가 남아 있었다는 말이다. 마치 조선의 죄인 심문 기록인 추안(推案), 국안(鞫案)이 남아 있듯이.
사마천은 공무원, 그것도 최고 역사공무원이었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했을 때 클 태(太), 역사 사(史)가 그런 의미이다. 그 때문에 당연히 그 기록에 대한 접근권한이 있었고, 그걸 기초로 괴통의 말을 <사기>에 적었다고 보는 것이 실제에 가까울 것이다. 유시민의 생각처럼 사마천이 지어낸 상상이 아니라.
5. 춘추필법에 대한 억측
유시민은 “공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도덕규범에 따라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역사를 썼기 때문에 <춘추>의 내용에 대한 진위와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춘추필법(流年筆法)’ 그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였다.(65p) 또 사실을 다루는 역사가와 반대편에선 뺄 거 빼고 넣을 거 넣는 극단적 사례로 춘추필법이 소개되기도 하였다.(232p)
춘추필법은 논쟁이 되기도 한다. <춘추>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건조하고, 듬성듬성하고, 잎 떨어진 나무 같은 황량함이었다. 이게 <춘추>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아마 역사-기록 초기의 역사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직서(直書)를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속사비사(屬辭比事), 문구를 잇고 사안을 나열하는데, 한 문장, 한 사안으로는 크게 색다를 것이 없지만, 동류의 사건을 모으고 종합하면 포폄(褒貶)의 숨은 뜻이 드러난다는 것인데, 이는 더 연구할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유시민이 말하듯 ‘보탤 것은 보태는’ 식으로 서술된 결과가 <춘추>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춘추필법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19세기 서구 역사가들은 춘추필법을 거부했다. 사실을 무시하고 왜곡하면 역사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유시민은 이해했는데,(233p) 춘추필법은 사실을 무시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특히 사마천이 “나는 지난 일을 간추려 정리하려고 할 뿐 창작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것을 <춘추>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라고 한 말은 <춘추>를 배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기>를 <춘추>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겸손한 말이다. 유시민의 춘추필법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사마천의 말마저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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