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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맥도날드에 와퍼가? '무서운 소녀'가 빚은 '거짓말'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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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태원 맥도날드에 와퍼가? '무서운 소녀'가 빚은 '거짓말'의 정체! ['세계'와 '세상'의 차이] 김사과의 <천국에서>
1.

객관식 문제를 하나 풀어보도록 하자.

문: 다음은 김사과의 <천국에서>(창비 펴냄)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이들 가운데, 지문에서 거론된 사실관계의 진위 여부를 가장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을 고르시오.

① 모든 것이 생각 이상으로 간단했다. 그는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하고 장학금을 신청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뉴욕은 70년대에 시작된 금융업 황금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따르던 교수의 추천으로 월스트리트에 있는 투자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기대 이상으로 유능했고, 곧 성과 이상의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21쪽)

② 써머는 어려서는 뉴저지에 있는 대안학교에 다니며 급진적인 자연주의 교육의 세례를 받았다. 언뜻 보면 복잡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설립이념을 자랑하는 그 학교는 하지만 사실상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백치처럼 머리를 비우고 강아지처럼 잘 뛰어놀면 그만이었다. (25쪽)

③ 재영은 케이의 어릴 적[1997년 외환위기 발발 전] '잠실 친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재영의 어머니는 공립중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녔다. 주말이면 근처의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특별한 날에는 롯데월드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삶을 사는 전형적인 잠실의 중산층 가족이었다. (126쪽)

④ 하지만 그의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능한 모든 정보를 동원하여 [2001년 말 기준] 강남은 아니지만 강남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며 교육환경이 나쁘지 않은 동시에 저렴한, 한마디로 완벽한 주거지역을 찾아 헤맨 끝에 상수동 부근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발견했다. (139쪽)

⑤ 케이가 멀뚱히 선 채 그 무리를 뚫고 들어가 인사를 해야 하나,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가 고민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재현이 나타났다. 그는 갈 데가 있다며 케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곧 케이는 재현과 이태원 맥도날드에 있었다. 새벽 네 시 이십 분. 재현이 와퍼를 먹으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였다. 케이는 바닥에 놓인 자신의 가방에서 글렌피딕을 발견했다. (156쪽)


정답은 5번이다. 맥도날드에서는 와퍼를 팔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를 쓴 김사과, 그에 대해 서평을 쓰는 본인,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 모두가 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문에 등장하는 사실관계의 진위 여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을 고르라는 문제의 답은 5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천국에서>(김사과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반면 ①, ②, ③, ④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가령 ①의 경우, 미국의 금융업이 황금기를 맞이한 것은 1999년 그램-리치-블라일리 법(Gramm Leach Bliley Act)이 통과되면서,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all Act)이 사실상 무력화된 이후의 일이 아니냐는 이의 제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가 모르는 사실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정답이 될 수는 없다.

②를 읽은 사람 중 1997년에 데뷔한 밴드 핸슨(Hanson)과 그들의 유일한 히트곡인 '음밥(Mmmbop)'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세 형제가 모두 홈스쿨링을 통해 교육을 받았다는 것도 떠올릴 테고, 미국에서는 공교육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홈스쿨링을 하면 했지 "대안학교"를 가지는 않는 것 아니냐고 출제자 혹은 저자에게 따져 물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해당 사항의 진위를 구체적으로 따지는 것은 이 서평의 목적이 아니므로,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건 정답은 아니다.

③도 그렇다. 필자는 서울 강남 지역에 (특히 1997년 이전에) 거주해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집 앞에서 사시사철 문을 열고 있는 놀이동산이 있을 경우, 특별한 날에는 가지 않을 것 같다. 당시 잠실 인근에 대형마트가 있었는지 여부도 미지수이다. 그 무렵만 해도 지금처럼 전국 곳곳에 대형마트가 깔려있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지문에 제시된 내용만으로 그것이 평범한 '잠실 중산층'의 삶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③은 비교적 까다로운 함정 지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면서 상수동 인근의 대중교통이 갑자기 편리해진 것은 2001년 초의 일이다. 즉 ④에서 "교통이 편리하며"라는 구절은 다소 애매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지난 시절에 비해 교통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하철 6호선은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강남과 가깝고"라는 말에 주관적 잣대가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 경우에도 '가장 확실히 사실관계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항목은 아니므로 부담 없이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풀고 정답 및 오답풀이도 했으므로, 이제 본격적인 서평에 들어가 보자.

2.

김사과를 두고 '문제적인 작가', '도발적인 문체', '파격적인 소재' 등을 언급하는 것만큼 쉽고 게으른 비평의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천국에서> 이전의 작품들을 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의 등단작 '영이'는 한 소녀의 어머니가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삽자루로 때려 죽이는 이야기이다. 첫 장편소설 <미나>(창비 펴냄)는 10대 소년 소녀들 사이의 질투와 격정적인 감정, 방황,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다. 그 다음 작품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펴냄)는 20대 남녀의 목적 없는 삶과 방황, 그리고 절망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테러의 시>(민음사 펴냄)는 그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자극적인 소재들, 가령 친족 간의 성폭력, 납치, 강압에 의한 성매매, 마약 중독, 세속화된 종교, 방화와 살인 등 신문 사회면에서 가장 '화끈'하게 등장할법한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 <영이 02>(김사과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그 내용들이 전달되는 방식 또한, 상투적인 표현을 다시 쓰자면, '기존'의 문법과는 많이 다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일부러 띄어쓰기를 무시한다거나, 청소년 혹은 젊은이들의 거친 언어를 고스란히 지면에 옮겨 담았다거나, 정형화된 서사 구조를 파괴하고 역동적인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김사과에 대한 일종의 정설처럼 통용되고 있다. 그의 첫 작품집에 딸려온 해설을 보면, 김사과는 분열증적 방식으로 공포와 분노를 쏟아내는 "앙팡 스키조"다.

반면 <천국에서>는 기존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뜨거운' 분노를 덜어내고, 대신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그 속에서 부유하는 청년들에 대한 '차가운' 분석을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뉴욕에서 이른바 '힙스터' 생활을 풍성하게 즐기다가 서울에 돌아온 '케이'가 뉴욕을 그리워하며, 뉴욕에 대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남자를 만나다가, 자신이 부정하고자 했던 인천 남동공단 시절의 친구를 만나 새롭게 사랑에 빠지고 그것을 이어나간다는, 어찌 보면 심지어 긍정적이기까지 한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소재만 놓고 보면 <천국에서>는 다른 김사과의 소설들과 이질적이다. 물론 마약이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뉴욕에서 벌어진 일이다. 케이의 아버지가 IMF 구제금융 위기로 경제적 궁지에 몰렸을 때 그와 가족들은 인천 남동공단의 공장 사무실에서 살았다. 그때 만났던 케이의 친구 지원의 아버지는 훗날 노조를 감시하기 위해 사측의 '쁘락치' 역할을 하다 발각되어 "거대한 아치"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하던 중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데, 그 장면은 어디까지나 케이의 스마트폰 속에 저장된 동영상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예전의 '앙팡 스키조', '독을 품은 사과' 김사과였다면 그 위로 초대형 롤러차를 보내 지원의 아버지를 쥐포처럼 깔아뭉갰을지도 모를 일이다.

잔인하고 파괴적인 묘사가 빠진 자리에는 그러나, 다시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통상적'인 소설의 내용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김사과는 오늘날 혹은 2000년대까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자본주의의 법칙과, 그 자본주의적 세계 속에서 비누거품처럼 떠다니던 젊은이들이 즐기는 문화 현상들을 채워 넣었다.

서사를 진행시킬 때의 화자와 그러한 내용을 설명할 때의 화자는 말투부터 사뭇 다르다. 김사과의 장편 중 <풀이 눕는다>를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이른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는데, 그 '전지적 작가' 중 <천국에서>를 서술하고 있는 김사과는 다른 김사과보다 훨씬 더 '전지적 작가'인 것이다. 이미 다른 언론 서평에서도 많이 인용된 대목을 다시 꺼내보자.

그 여름 케이가 뉴욕에서 경험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확산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서양과 일부 아시아 국가의 중산층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나간 삶의 양식으로, 전후 부흥기가 남긴 마지막 한조각의 케이크였다. 즉, 케이를 포함한 이 젊은이들은 20세기에 대량생산된 중산층의 마지막 세대, 혹은 몰락하는 중산층의 가장 첫 번째 세대였다. (90쪽)

여기서 작가는 소설의 서사가 진행되는 '세상'을 넘어서, 그 '세상'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케이라는 등장인물이 뉴욕에서 느꼈던 것은,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지금의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으며 사라져가는 신기루와도 같다는 것을, 그는 신문 사회면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언어를 동원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김사과가 한국 소설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색하게 평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꿈만 같고 행복했던 '천국'에 살다 온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을 두고, 마치 유리 상자 속 개미를 바라보듯 이렇게 서술하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케이는 저항하지 않고 그 근사함에 몸을 맡겼다. 커피는 너무 달았고, 너무 달아서 그 외의 맛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에게 뉴욕의 나날들은 그 커피의 맛과 비슷했다. 너무나도 달았고, 하지만 쓴맛은 그 단맛에 감추어져 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달콤한 나날들을 지탱하는, 20세기에 발명된 멋진 삶의 양식은 결정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좋은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몰락하는 중이었고, 케이는 바로 그 안에 속해 있었다. (97쪽)

3.

▲ <미나>(김사과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바로 이 지점이 <천국에서>를 김사과의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더 '문제적'으로 만든다. 그것이 왜 문제적인지, 우리는 앞서 객관식 문제를 하나 풀면서 살펴본 바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천국에서> 이전의 김사과는 본인의 내면 상태(거나 작가의 내면이라고 타인이 믿게끔 하고 싶은 무언가)를 반영하는, 마치 카메라 렌즈에 핏방울이 튀어서 또렷한 영상이 보이지 않는 듯한 '세상'의 모습을 주로 제시해왔다. <테러의 시>에서 주인공인 제니의 고향이 어디인지 독자들은 책 속의 정보를 통해 절대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저 "모래"일 뿐이기 때문이다(많은 독자들은 제니가 조선족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믿어야 할 이유도 그리 뚜렷하지 않다).

그의 데뷔작 '영이'부터 그것은 일관된 경향이었다. 김사과는 끝없이 분노와 증오와 공포와 기타 등등 감정을 '표현'하지만, 그 표현의 강도가 지나치게 강해서, 혹은 그가 지닌 서사의 기술이 썩 훌륭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중 화자 및 등장인물이 분노하고 증오하고 공포에 떠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지는 못한다. 김사과는, 혹은 김사과가 쓰는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흐리멍덩한 세상 속에서 불분명한 대상을 향해 소리 지르고 저주하고 칼로 찌르고 불을 지른다.

<천국에서>는 바로 그 '세상'을 향한 과격한 표현들 대신, '세계'에 대한 차가운 기술을 담고 있다고 앞서 우리는 확인한 바 있다. 그 자체는 새로운 서사적 모험으로 평가받을 여지가 있다고도 우리는 합의를 했다. 하지만 이 경우,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은 김사과의 이전 소설보다 훨씬 더 엄격한 평가의 잣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김사과의 내면에서야 어떤 불분명한 시공간에서 무슨 살인과 폭력과 강간이 벌어지건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이나, 소설가 김사과와 그 외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아무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나>에서 주인공 미나와 그의 친구이자 또 다른 주인공인 수정, 그리고 미나의 오빠인 민호는 학원에 가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주말인지 평일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시간에 미나의 집에 모여서 피자를 시켜먹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지만 부모의 제지를 받지 않는다. 작가는 미나의 아버지가 3년 전 복권에 당첨되어, 그 전까지는 가난한 글쟁이였던 그가 큼지막한 빌라를 구입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면'을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긴다는 상호합의가 존재하는 한, <미나>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에 가깝다. 중요한 건 언제나 고고하고 남을 내려다보는 듯하며 결핍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나를 수정이 사랑하고, 질투하고, 그리하여 결국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살해한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그럴 수 없다.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미나 아버지의 빌라와 달리, 케이의 어머니가 발품을 팔아 산 아파트는 가격이 2001년에서 2008년 사이 두 배로 뛰어올랐으며, 2001년 당시 '저평가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교통이 편리하며 강남으로의 접근성이 좋고 교육 환경도 나쁘지 않은 상수동, 즉 '프레시안 books'의 독자들이 종종 혹은 자주 커피와 술을 마시고 문화생활을 즐기러 가는 바로 그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므로 김사과가 '내가 염두에 둔 아파트는 무슨무슨 아파트의 몇 동 몇 호다'라는 식으로 해명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 혹은 그의 소설 속 세계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이, 과연 이게 맞는 말인가 아닌가 궁금해서 페이지를 덮고 구글 검색을 하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IMF 이전의 잠실 사람들이 정말 주말이 되면 가까운 마트에 쇼핑을 가고 특별한 날이면 롯데월드에서 사진을 찍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강남'의 다른 지역의 이름을 대면 독자들이 지나친 위화감을 느낄 것 같아서, 적당히 부유하지만 또 적당히 '만만'해 보이는 지명을 하나 골라잡은 것은 아닐까?

소설 속 세계가 굳이 리얼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소설이 일부러 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천국에서>는 소설 속의 '세상'을 소설 밖의 '세계'와 링크시킨 것을 그 장점이자 특징으로 삼고 있는데, 정작 독자인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속에 등장하는 사건과 지명과 사례와 만남과 부딪힘이 얼마큼의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다.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라고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가령 <천국에서>는 포스트모던한 서사 실험을 하는 작품인데, 무슨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처럼 '팩트'를 따지냐고 말이다. 어느 정도 현실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 정보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등장인물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진실'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소설로서는 성공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할 것 같다. 요컨대 소설을 다큐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식의 방어 논리 말이다.

자, 다시 한 번 앞서 제시된 객관식 문제로 돌아가 보자. 확실히 '잘못된' 정보임을 그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던 ⑤번은, 맥도날드에서는 와퍼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내용은 주인공인 케이의 꿈속에서 등장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김사과는 독자들이 그 부분을 읽으며 '아, 이건 꿈인가보다'라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기 위해, 누가 봐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잘못된 내용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이것이 등장인물 혹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사실관계가 혼동되어 있다는 식으로 옹호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 본인이 현실의 팩트 오류를 통해 등장인물의 꿈과 현실을 구분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꿈이 꿈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너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관계의 오류를 제공한다. 하지만 김사과가 과연 현실이 현실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충실한 사실관계, 혹은 '세계'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4.

▲ <풀이 눕는다>(김사과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천국에서>의 '세계'를 설명하는 김사과는, 마치 그의 전작들에 등장하는 서슴없는 (하지만 역시 구체성을 보여주지는 못하던) 살인과 파괴와 일탈의 모습들처럼 패기가 넘친다. 그런데 정작 그 '세계' 속의 '세상'을 구현해내는 김사과는 도통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가령 미국의 백인 부유층의 딸인 써머는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서 입고 갔다가, "윌리엄스버그에서 작은 갤러리 겸 부띠끄를 경영하고 있는 여자"(30쪽)에게 그 티셔츠를 몇 장 팔았다. 그리고 자신감을 얻어 "홈페이지를 만들어 직접 온라인으로 티셔츠를 주문받기 시작했다. 그건 써머에게 꽤 좋은 용돈 벌이가 되어주었다."(같은 곳)

미술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상식적으로, 윌리엄스버그의 갤러리 겸 부띠끄를 통해 티셔츠가 판매되고 있다면, 그것을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기 이름을 걸고 파는 것은 오히려 손해 아닐까? 갤러리 겸 부띠끄에 와서 기꺼이 비싼 가격을 지불하는 고객층과 홈페이지에서 누군가 대충 그림을 그려 파는 티셔츠를 사는 가난한 젊은이는 전혀 다른 소비자군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김사과는 그저 얼버무린다. "윌리엄스버그"라는 지명을 말해야 한다는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돌아온 케이는 친한 인디 밴드의 공연을 따라 광주에 난생 처음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한때 운동권이었고 문화계의 기획자로 활동하려 했다가 낙향하여 치킨집을 하는 어떤 아저씨를 만난다. 그곳에서 밴드의 일원인 최윤수가 치킨집 주인 아저씨와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는 장면의 서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케이 일행은 자리를 잡고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요란한 인상은 없으나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선반에 쌓여 있는 잡지를 훑어보던 최윤수가 입을 열었다.

"우와, 저 잡지들 어떻게 구하셨어요? 구하기 힘든 것들인데요. 혹시 잡지 쪽 일 하세요?"

"아아, 그거. 옛날에 좀 관심이 있었죠. 유학 갔다 오면서 들고 온 것도 있고. 근데 그쪽이야말로 신기하네. 저 잡지들을 알아요? 그쪽이야말로 저쪽 일을 하나?"

"아뇨, 저도 옛날에 관심이 있었죠. 흐흐……" (169쪽)


대체 그놈의 "저 잡지"가 뭘까? 잡지계에 일하는 사람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딱 봐도 첫눈에 취향을 알아볼 수 있는 '그 잡지'는 무엇일까? 아마존과 이베이로 어지간한 것들은 지구 어디에서도 구할 수 있는 오늘날까지도 구하기 힘든 '그 잡지'가 무엇인지, 저 부분을 쓰고 있는 순간 김사과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과연 구체적인 '어떤 잡지'였을까, 아니면 '그냥 그 좀 멋진 잡지' 같은 것일까?

독자인 우리가 속단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식으로 긍정적인 판단을 해야 할 뚜렷한 근거가 작품 내에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데, <천국에서>를 읽는 우리에게는 과연 그 제목처럼 악마가 숨어있는 디테일들이 다소 멀게 느껴진다.

이런 비판이 다소 치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세상'을 소설 밖의 '세계'에 정위치시키겠다는 발상은 김사과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 한 것도 아니요, 그가 가장 잘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령 올해 초 서점가를 휩쓸었던 <레미제라블>을 살펴보자. 빅토르 위고는 심지어 작품을 집필할 당시 망명자의 신세가 되어 파리 시내의 모습을 그저 기억과 지도에 의존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그 모습을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려 애쓴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내가 지금 파리를 떠나온 지 너무 오래 되어서 길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 독자는 이해해 달라'는 양해의 말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지 19세기 프랑스 소설가의 공간 지각력과 기억력이 탁월했다는 그런 차원에서 머무르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빅토르 위고는 난데없이 장발장이 수감되기 전의 성냥과, 그가 19년간 수감 생활을 한 후 돌아온 세상에서 만난 성냥의 차이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한다. 그동안 얼마나 기술이 발달했는지, 그리하여 우리의 주인공이 위기를 어떤 식으로 이겨낼 수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작가를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는 빅토르 위고가 살았던 프랑스 혁명과 근대라는 시대가 온 몸에 착 감겨오는 것이다.

모든 소설이 이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세계'와 '세상'을 동기화하고자 한다면, '세계'에 대한 서술은 정확해야 한다. 작가 스스로가 꼭 필요하다면 자신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고자 하는 용기를 보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자는 작가가 전달하는 '세계'를 의심하게 되고, 그 회의적인 시선은 소설 내에서 자족적으로 구성될 수도 있었던 '세상'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5.

<천국에서>의 주인공은 작품 내내 작가에 의해 '케이'라고 호칭되며, 그의 아버지는 한진규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따라서 케이의 성은 한 씨인데, 그렇다고 해서 2008년 무렵 대학생인 젊은 여성의 주민등록증에 '한케이' 따위의 이름이 쓰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예명 혹은 영어식 별명이며 케이에게는 원래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 <테러의 시>(김사과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소설이 시작되면 케이는 뉴욕에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케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뉴욕에서의 생활이 끝난 다음이다. 멀쩡히 서울로 돌아왔건만, 그 누구도 그의 본명을 불러주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작가가 일부러 택한 서술 기법이겠지만, 그래서 곱씹어보고 있노라면 더욱 의아해질 따름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감추는 것, 그것이 드러나게 하는 것은 모두 중요한 서사의 기법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사과의 <테러의 시>를 펼쳐보자. 처음 등장하는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단지 괄호 "( )"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그를 납치하러 온 남자에게 강간당할 때, 바로 그 강간범에 의해 발견되거나 명명된다. 제니. 그 이후로는 모두가 제니를 제니라고 부른다. 제니라는 이름에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성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착취당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주인공을 향한 세상의 폭력이 묻어 있는 것이다.

작중에서 호명된 어떤 이름이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는 것은 그러므로 결코 간단하게 볼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리고 사실, 어떤 이름이 다른 무언가로 반드시 대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풀이 눕는다>에서 주인공인 '나'는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공고 출신의 아마추어 화가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의 이름을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상대방을 '풀'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에게도 풀을 '풀'이라고만 소개할 뿐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풀의 본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풀이 눕는다>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 작품은, <테러의 시>와 마찬가지로, 작중인물 혹은 작가의 '내면'을 그저 '표현'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다르다. 구체적인 뉴욕에 다녀온 구체적인 잠실 출신에 인천 남동공단 생활을 한 케이는, 한국에 돌아오면 또 한국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이름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로서는 기껏 공들여 '세계'를 소설 속에 도입한 보람이 없다. 그런데 케이는 서울에 와서도 케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친구와 새로 사귄 남자친구조차 2인칭 대명사만을 이용해 케이와 대화한다.

그래서 나는 '아, 작가는 아예 케이의 본명을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인가보다'라고 납득하고 있었는데, 케이가 광주에 내려가자, 그때까지는 등장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닌 최윤수에 의해, "야, 케이도 그렇다잖아. 케이 눈썰미 있는 거 너네도 알지?"(171쪽)라는 대사를 통해 케이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케이'로 통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경마장 가는 길>(하일지 지음, 민음사 펴냄)을 읽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케이'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케이'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사회의 상식을 뛰어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름이 '노정태'인 내가, 2013년 11월 1일 이후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나를 '제이티'라고 소개한다고 쳐보자. 웃기는 상황이지만, 다행히도 내가 그 이후 만나는 이들은 모두 이해심이 깊고 포용력이 넓은 사람들이어서 기꺼이 나를 '제이티'라고 불러준다. 그렇다면 나를 '노정태'로 소개받은 사람과, '제이티'로 소개받은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거나 하면, 더 웃기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 웃기는 상황이야말로, 멀쩡한 제 이름을 두고 스스로를 영어식으로 칭하고 다니는 누군가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작가가 케이라고 부르는 주인공이, 작중의 다른 인물에게 '케이'라고 불리는 상황, 그리고 그가 독자들도 모르던 본명을 누군가에게 호명되는 상황 등은, 어쩌면 김사과가 이렇게 저렇게 주워섬기는 다양한 '힙'한 사람과 노래와 지역들의 이름보다 훨씬 더, '힙스터'라고 불리는 이들의 내면을 그럴싸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사과는 첫 번째 기회를, 적어도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허공에 날려버리고, 케이의 원래 이름인 '한경희'를 부를 수 있는 기회는, 인천 남동공단에서 살 때 친구로 지냈던 이지원에게 넘겨준다. 마치 공장에서 '공돌이' 생활을 하며 아직까지 가난하게 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케이가 한국식 이름으로 호명되고 그를 만나고 사귀고 다투고 다시 화해하면서, '힙스터'라는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듯이.

이것은 말하자면, 김사과가 일종의 전도된 '처녀 판타지'를 <천국에서>에 불어넣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상당한 혹평일 것이다. 하지만 지원이 케이, 혹은 경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을 이끌어내기 위한 그 어떤 체계적인 구상과 접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해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우리가 단락 5에서 길게 이야기한 것 같은 서사 기법으로서의 호명을 거의, 혹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사람 이름을 불러야겠다 싶을 때 되는대로 적당히 썼다고 생각해버리는, 쉽고도 간단한 길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원고가 원고지 기준 70매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에 그런 유혹에 굴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6.

정리해보면 이렇다. <천국에서>를 쓰기 전까지 김사과는, 작가 본인 혹은 작가 본인과 다른 이들의 내면을 투영한 등장인물들의 황량하고 폭력적이며 외롭고 도시적이며 젊은 감성이 드러나는 전복적인 세상을, 마찬가지의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언어를 이용해 '표현'해 왔다. 그러나 <천국에서>를 쓸 때 그는 폭력과 섹스와 욕설을 버리고, 대신 '세계'에 대한 길고도 복잡한 분석의 언어를 집어넣었는데,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 내용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작가가 '나도 잘 알고 당신들도 잘 아니까 우리 서로 일부러 틀리게 쓰거나 대충 쓰자'는 제스처를 취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천국에서>의 김사과는, '세상'을 벗어나 '세계'로 나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더불어 그 속에서 우리는, 작품의 내적 전개 역시 그리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동원된 것은 단 한 가지, 즉 누가 언제 어떻게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느냐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서사 구조와 기법 대신 세계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퍼붓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자 했던 김사과의 시도가 의도한 만큼의 결과를 낳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국에서>는 '세계'를 보여주는 일에도, '세상'을 온전히 구현하는 일에도,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작품이다.

그 원인은 두 방향에서 따져볼 수 있다. 우선 작품 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김사과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그는 애초부터 서사의 기법과 정교함으로 세상을 구현해내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또 그만큼 그에 필요한 숙련도를 쌓지도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평단은, 그리고 어쩌면 독자들도, 처음 문단에 등장할 때부터 '무서운 아이'나 '충격적인 반항아'로 불리고 있던 그에게, 이야기를 담은 읽을거리로서 제 기능을 하는 '소설'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사과는, 그게 얼마나 끓어오른 것이건 간에, '내면'을 쏟아내면 그만이었다. 인간과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외면'의 세계는, 독자와 비평가들이 알아서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가며 읽고 감탄해주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작품 외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자. 김사과는 자신의 작품을 내려놓을 '세계'의 확고한 상을 장악하고 있지 못했고, 그리하여 그것은 빠진 돌쩌귀와 경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리의 시선을 어지럽게만 할 뿐이다. 몇몇 대목에서는 김사과가 어떤 텍스트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었는지 대략 짐작이 갈 정도이다. 가령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케이의 어머니가 자신과 가족들의 경제적 불안감을 곱씹는 장면을, '전지적 작가'가 바라보는 이 대목은 어떨까. 숱한 경제 지표들, 개인의 삶의 방식을 은유하는 대상으로서의 수학, 산수, 혹은 수식.

케이의 어머니는 매일 밤 거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가계부를 들여다보며 남편의 월급과 자신의 월급, 아파트 대출금과 케이와 동생에게 들어가는 돈, 앞으로 더 들어갈 돈, 예상되는 퇴직금과 질병, 남편의 퇴직 시기와 자신의 노동 가능 기간, 한국인의 평균 수명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수식을 머릿속에 그리며 삶의 전략을 세우고 수정하고 뒤엎고 변형한 뒤 발전시켰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중얼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 당연하다. 거기 답이 있을 리 없다. 시작부터 잘못된 수식이니까. 케이의 어머니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내 인생에서 답이 나오는 멀쩡한 수식이 가능했던 적이 있던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도 안 되게 극복하며 살아왔지 않은가. (129쪽)

이 문단의 '레퍼런스'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문제는 주관식인데, 작가에게 물어본다 한들 정답을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각자의 양심껏 오픈북으로 채점하기로 하고, 본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이 기나긴 서평의 결말을 짓도록 해보자.

7.

작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단 소설 뿐 아니라 이른바 논픽션에 속하는 글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작가의 자의식이 개입해있는 한, 작품으로 만들어진 글은 넓은 의미에서의 거짓말에 속한다. 작가는 글을 통해 세상에 없는 것, 가령 믿음, 희망, 사랑 같은 것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건 증명하기 때문이다. 설령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할지라도, 작가는 침을 뱉음으로써 그 모욕의 자리에 위치해야 할 인간의 존엄을 소환해낸다. 우리 모두는 실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거짓의 힘으로 가까스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완전한 사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실로 야만적이며 자기파괴적인 짓이다. 단순한 재미를 위해서건, 생존을 위해서건, 더 나은 삶을 어떻게든 이루어보기 위해서건, 우리 인류는 꾸준히 스스로를 속여야만 하는데, 바로 그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작가라고 나는 믿는다. 또한 작가는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사람이며,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이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만큼이나, 우리가 서로의 어리석음과 지혜롭지 못함을 관용할 수 있을 때,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게 될 인류에게 최소한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전까지는 '앙팡 스키조' 같은 수식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젊은 작가, '젊은이의 내면'을 보여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독자와 '문단 어른'들을 위해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폭력과 섹스와 증오의 언어를 조심스레 선별해야 했을 젊은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를 세계의 좌표축 내에 정렬하려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로 인해 그는, 성공한다면, 단지 내면의 '세상'을 넘어 우리 모두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김사과의 <천국에서>는 바로 그 점에서 깊은 아쉬움을 남기는 책이다. 소설의 외적 지향과 내적 구조 모두, 흡족할 만큼 잘 구현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힙스터'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고는 하나, 방금 듣고 원고지에 옮겨 담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고유명사들의 나열은, 작가가 자기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는, 좀 더 단단한 글쓰기의 토대 위에, 좀 더 명징하고 정직한 탐구의 시간을 거쳐, 우리가 인간답게 거짓말을 하며 진실된 삶을 추구하는 한,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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