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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게 고난인 재난물? 반만 참으면 빛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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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게 고난인 재난물? 반만 참으면 빛이 보인다! [김창규의 '기계 나비의 꿈'] 그렉 베어의 <신의 용광로>
'상상'은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상상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줄 것이다. 또는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상이 긍정적이어야 한다면, 그 다음 질문은 '긍정적이란 건 도대체 뭘 말하는가?'이다. 바보처럼 웃고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관제 언론의 방송 내용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는 게 긍정적인 삶일까? 꽃가루가 날리는 하늘 아래에서 분홍색 얼룩말과 까만 사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인생을 마냥 찬양하는 게 긍정적인 태도의 궁극일까? 모 시인의 말과 비슷하게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실지 핫초코를 마실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나 만족하면서 상상이란 반드시 이러저러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릴 수 있는 자신의 권위에 만족하는 것이 긍정적인 사람의 모습일까?

▲ <신의 용광로(The Forge of God)>.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지는 것은, 지금 소개하는 <신의 용광로>(그렉 베어 지음, 김지형 옮김, 미소 펴냄)가 재난 SF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죽음 본능이 논파되고 여러 가지로 곁가지를 친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건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또는 인류를 단숨에 소멸시키는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생산된다. 그리고 가끔씩 그처럼 진지하게 멸망을 펼쳐내는 행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는 거꾸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세상에는 주인공이 심할 정도로 고난을 겪는 이야기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들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재난 이야기는 인류가, 지구가 주인공이 되어 고난을 겪는 이야기이고 그 끝도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두 가지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신의 용광로>는 우울하지만 전혀 부정적이지 않은 지구 멸망을 그린 재난과 고난의 이야기이며, 그에 더해 '외계인 조우' SF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가 사라진다. 행성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현상은 두 가지를 암시한다. 자연(우주)의 급격한 변화, 또는 상당한 과학력을 갖춘 지적 존재의 등장. 그리고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 다음으로 미국과 호주에 각각 외계인의 우주선이 착륙한다. 미국에 착륙한 우주선에서 등장한 외계인은 지구가 '형벌'을 받을 것이며, 그 결과 파괴될 거라는 말을 전하고 죽는다. 반면 호주에 내려온 외계인의 로봇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파멸의 전조를 맞이하면서, 소설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준다. 이는 분명히 고전적이고 안전한 재난 이야기의 테크닉이다.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타워링> 등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의 용광로>는 방향성에 있어서도 그 두 영화와 비슷하다. 지구와 인류의 상황은 처음부터 절망적이다. 파멸의 메시지를 전한 존재들의 기술 수준을 볼 때, 만약 그들이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작중 지구의 기술 수준으로는 대적하거나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본 작품은 멸망을 전제로 한 재난 소설의 전형을 착실히 밟아나간다. 그리고……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볼 때, 이 작품은 균형을 잡는 데에 실패했다.

먼저 재난물에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너무 안일하게 그려져 있다. 미국 대통령이 재난 앞에서 멍청하게 행동하는 이야기야 얼마든지 있지만, '형벌'이라는 단어와 신이라는 개념 때문에 이 작품에서처럼 어이없이 무너지는 대통령은 보기 힘들다. 또한 그 부분을 묘사하는 데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당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중심인물이라고 해야 할 아더가 그 친구 해리와 이러저런 얘기를 나누고 슬퍼하는 부분이 지나칠 정도로 길다. 물론 이 작품이 작가의 아이디어를 너무 깊이 숨겨놓았고, 해리의 전언이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위기감이 최대의 목표인 재난물에서 그 앞에 깔아놓은 포석이 너무 평범하고 따분하다는 점은 이 작품 최고의 단점이다.

그렉 베어는 메이저급 SF 작가이다. 그의 초기작 <블러드 뮤직>은 나노머신이라는 개념을 독자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시켜주는 명작이다. 또한 다른 작품들 중에도 거시적인 시각과 과학적인 조망을 잘 버무리는 대작들이 많다. 그러니 아무 생각도 없이 작품의 절반을 도입부와 설명에 할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후반부에서 그 이유가 조금 드러나기는 한다. 이른바 독자의 눈을 대신하는 '인물의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파괴되는 것은 지구의 일부가 아니라 지구 그 자체이고, 그 정도의 멸망이라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인물을 다소 많이 배치하는 건 어찌 보면 재난물의 필수 중 하나다. 하지만 마침내 이야기가 끝으로 치닫고 중심화자 '아더'의 아들 마틴이 큰 역할을 맡으면서 진짜 이유가 드러난다. 마틴의 눈과 마틴의 기억은 어찌 보면 소설 내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중요성은 본서 안에서는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마틴의 생각은 곧장 후속작인 <신의 모루Anvil of God>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책을 덮고 나면 <신의 용광로>는 후속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던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렇게 '속편과 마틴의 의미'를 빼놓고 본다면 <신의 용광로>는 어떤 작품일까? 사실 그렉 베어가 독자에게 정말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두 외계 세력의 정체'에 대한 암시였던 걸로 보인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신의 용광로>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에서 제시되는 외계 세력의 정체와 그 의미는 이른바 페르미 역설과 직결된다. 페르미 역설이란, 우주에 지적 존재가 살 만한 행성이 그토록 많은데 왜 아직 우리와 만나지 못하느냐는 의문이다. <신의 용광로>는 그에 대한 대답 하나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요지가 작품 전체에 녹아있기 보다는 단 몇 페이지의 설명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들러리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이 서평에서 그 외계인의 정체와 의미를 구구절절 늘어놓지 '못'하는 것도, 그걸 설명해버리면 이 책에는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보실 분들에게 실용적인 조언을 하나 드릴까 한다. <신의 용광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좋을 것이다.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재난물의 전형, 그리고 전문 SF 작가가 제시하는 외계인 가설이라는 두 부분으로. 가시밭길처럼 괴로운 전자를 넘어서서 후자에 흥미를 갖게 되는 독자가 계시다면, 아마도 필자와 마찬가지로 (한 번 더 속는 셈 치고) 후속편을 볼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 첨언하자면, 이 작품이 영화화된다는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과연 영화는 원작보다 균형감을 갖추고 등장할지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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