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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이 판타지라고? 아니, '불가능한' 성장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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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이 판타지라고? 아니, '불가능한' 성장 소설!

[이렇게 읽었다] 윤태호의 <미생>

(이 글은 <안과밖> 35호 (2013)에 실렸습니다.-편집자)


1. 들어가며 :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텍스트


웹툰 <미생(未生)>(윤태호 글·그림, 위즈덤하우스 펴냄, 이 글에서는 '단행본' <미생>보다 '웹툰' <미생>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음을 밝힙니다. - 편집자) 을 향한 관심이 뜨겁다. 아직까지 진지한 비평적 고찰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누적 조회 수 6억, 국민 웹툰 <미생>"이라는 선전 문구가 보여주듯이,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호응은 최근 몇 년간 유통되어 온 문화 콘텐츠 중 단연 눈에 띤다. 12만개의 댓글을 만들어낸 이 웹툰에 쏠린 관심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져 현재 단행본 누적판매 부수가 30만부에 이른다.

어느새 '우리 시대의 만화'가 된 웹툰 <미생>을 향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우선 웹툰이라 불리는 이 특수한 '한국적' 대중문화 장르의 문제를 논해볼 수 있다. 이제 웹툰은 한국 대중문화와 그것을 소비하는 일상의 맥락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 웹툰이 일상의 리듬에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무수히 많은데, 최근 한 20대 여대생에게서 들은 가장 인상적인 언급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로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웹툰을 보곤 해요. 눈치가 보여 책을 꺼내놓을 수는 없지만 웹툰은 일하면서도 볼 수 있거든요. 게다가 공짜잖아요."

그녀는 책도 사보고 싶지만 비싸기도 하고 여유 시간도 없다고 덧붙였다.

▲ <미생>(윤태호 글·그림,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그런데 웹툰 작가 윤태호가 갖는 의미는 그 중에서도 각별하다. 1969년생인 그는 한국만화계의 적자(嫡子)로서, 만화시장의 플랫폼이 출판에서 포털로 넘어오는 과정을 말 그대로 '통과'해온 인물이다. 만화가로서의 그의 위상은 웹툰에 국한되지 않는, 한국 만화계 전체의 대표성을 띤다. <미생>은 웹툰의 독자층을 40~50대 장년층까지 끌어올린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해당하며, 적어도 <미생>의 경우엔 국민 웹툰이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수사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다르게 말해, 적어도 이 작품 이후로는 웹툰 매체의 주변성이나 '세대론적' 독자성을 말하기 어려워졌다.(웹툰의 세대론적 함의에 관해서는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구미정·연규홍 외 지음, 이파르 펴냄)에 실린 김수환의 글 '너희가 병맛을 아느냐?―웰컴 투 더 <이말년 월드>'를 참조할 것.)

또 한 가지, 작품 자체의 매체적 완성도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분량의 독백체 대사로 이루어진 이 만화는, 스크롤을 내려 읽는 웹툰 매체 특유의 미학적 잠재력을 그 최대치까지 보여준 작품으로 기억될 만하다. 웹툰은 지면 만화에 비해 자유로운 칸(프레임)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컷 내부의 시점과 배치 뿐 아니라 컷의 모양과 크기, 컷과 컷 사이의 길이(여백), 프레임 안과 밖의 대사 연결 등 매체 고유의 형식적 완성도 면에서 거의 웹툰의 '문법'을 완성했다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물론 여기에다 차세대 문화콘텐츠로서 웹툰이 갖는 '산업적' 가치에 대한 분석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웹툰 <미생>을 비평적 대상으로 삼는 이 글에서 내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이 텍스트를 그것을 만든 사회적 현실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정념과 무의식이 응축된 일종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때 해당 텍스트에 대한 탐색은 사회에 대한 성찰과 다르지 않으며, 텍스트 '안쪽'에 대한 판단은 텍스트의 '바깥'을 보는 관점과 분리될 수 없다.

요컨대,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도대체 이 텍스트의 어떤 점이 그토록 새로운가? 정확하게 텍스트의 어떤 측면이 대중의 (무)의식과 공명했으며, 그 공명의 양상은 어떠한가? 이런 물음들은 일차적으로 텍스트의 내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텍스트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 시대의 문제적 지점들을 가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대기업 회사원들의 일상'을 그린 <미생>이 얼마만큼 현실에 '부합'하는지에 있지 않다(가령, "내가 아는 대기업은 저렇지 않아"와 같은 반응들). 나의 관심은 <미생>이 실제로 '말해주고 있는' 것들을 넘어 그것을 통해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을 향해 있다. 한마디로 나는 <미생>이라는 텍스트를 해답이 아닌 질문, 교본이 아닌 사례집처럼 읽어보려 한다.

당연히 이런 시도는 <미생>이라는 텍스트에 담겨진 의미를 '해명'하는 것에서 종결될 수 없다. 그 의미는 그것을 낳은 사회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 만일 <미생>에서 모종의 새로움이 발견될 수 있다면, 그 새로움은 그 뒤에 도사린 우리 시대 자체의 '곤궁'을 재사유하기 위한 계기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것만이 화제작 <미생>을 '우리 시대의 (공공적) 텍스트'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2. 노동과 의미: 보이지 않는 중간적 주체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무엇이 새로운가? 가장 손쉬운 대답은 그것이 이제까지 본격 조명된 바 없는 특정 부류의 삶을 전면적으로 무대화했다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 그 중에서도 대기업 종합상사 회사원의 삶이 그것이다.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삶을 그리겠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겠다는 것은 작가 윤태호의 핵심적인 집필 의도이다.

"윗사람들이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멋있게 악수하며 계약서에 사인할 때, 이 장면을 위해 사무실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벌인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분들이 이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죠." (<한국경제신문>의 월요인터뷰 )

왜 하필 '대기업 회사원'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왜 대기업인가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일하고 있으니까. 한국의 대중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 아닌가. '이렇게 많은 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오랜 시간 드물게 다뤄왔다니 신기하다. (…) 당신들만큼 여기 이 사람들도 중요하다는 것, 그 '여러 명'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프레시안>의 윤태호 인터뷰 ☞바로 가기 "삼성맨이 모두 '오너'는 아니잖아!")

이 말은 물론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다. '넥타이 부대'라 불리는 이런 체제의 '톱니바퀴'들은 '중동에서 모래바람 맞으며 악수하는' 몇몇에 비한다면 '보이지 않는 여러 명'에 해당하겠지만, 한국 사회 전체를 두고 말하자면 결코 "가장 많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다. 간단한 통계자료만 봐도 그러한데, 2013년 현재 한국의 전체 사업체에서 중소기업 종사자 비율이 50.3%에 달하며 이 비율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기업 회사원의 일상이 우리 시대의 보편적 삶의 형태로 간주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대기업 직원이 아닌 나머지 대다수는 어째서 이들의 일상에 자신의 삶을 투사하는가?

▲ <미생>(윤태호 글·그림,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간단히 말해, 이들의 삶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건 직종의 형식적 규정성이 아니라 그들 삶의 구체적인 '양태'다. 즉 '무엇으로서'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본질인 것이다. '그들의 삶 역시 내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삶의 양태의 보편성. 그 보편적 양태란 '노동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삶,' 한마디로 '일이 전부인 삶'이다.

직장 업무를 제외한 사건 및 디테일의 전면적 삭제는 <미생>을 기존의 직장인 서사와 구별하는 눈에 띄는 특징이다. 그것은 사무실을 '배경으로' 연애하고 배신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중들은 이제 비로소 '진짜가 나타났다'며 열광했고 그 '실제'가 지속되길 원했다. 많은 네티즌이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반대했던 이유도 매체의 속성이 이 리얼함을 변질시킬 것을 우려해서다(리얼함의 감각을 위한 윤태호의 시각적 전략은 놀랄 만큼 치밀하다. 사무실 내부 풍경 뿐 아니라 회사 주변 거리(종로, 무교동, 시청 뒤편)와 식당(찌개집, 곱창집) 등이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그대로 옮겨놓았는데, 그 공간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인들로서는 자신들의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재현된 모습에서 강력한 '실재감'과 함께 애증의 감정이 공존하는 '친숙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리얼함이 편안하게 보고 즐길만한 대상인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살아가기도 팍팍해 죽겠는 판에 웹툰 보면서까지 일의 압박을 느껴야하느냐는 불평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과로사회>(김영선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작품 속 오 차장의 '붉게 충혈된 눈'은 우리 시대 노동하는 삶을 축약하는 핵심적인 메타포다. 그 눈을 '에너지 음료' 시장의 급성장으로 대변되는 "과로사회"(<과로사회>, 김영선 지음, 이매진 펴냄)의 결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자기착취'의 메커니즘을 통해 구동되는 "피로사회"(<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의 결과로 볼 것인지는 물론 각자의 입장과 판단에 달려있다. 분명한 것은 이 충혈된 눈이 우리 사회를 분할하는 직종과 계급의 온갖 차이를 넘어서는(혹은 편리하게 무화하는) 보편적 모티프라는 점이다(에너지 음료의 필요성은 고등학생부터 대기업 부장에까지 차별 없이 평등하다).

한편, 이와 같은 삶의 양태의 배후에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구조적 사회변동과, 그에 따른 생활세계의 리듬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포스트' 세계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일반화된 전형적 패턴인 노동과 여가, 공장과 집의 엄격한 구분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포스트 자본주의의 체제는 '어디에서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아무 곳에서나 일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만들어낸다.

<미생>이 그리는 세계가 성과주의와 노동중독 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결여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긍정적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지적은 충분히 가능하다.(<미디어 오늘> 기사 ) 혹은 약간 각도를 바꿔서, <미생>을 이른바 "기업 사회" 혹은 "기업가적 주체"의 한 버전이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사 생활'을 '삶 그 자체'의 축소판(환유)로 그려내는 <미생>이 그와 같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그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결코 '자기계발'이나 '경쟁'의 논리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기업의 논리를 그것 바깥의 삶 속으로 가져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바깥의 논리(가령, 바둑)를 기업 속으로 투사하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이 경우엔 진짜 절대 다수)가 그와 같은 '외부 없는' 노동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 자체는 결코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미생적 세계'의 보편성과 관련한 극히 중요한 '또 다른 지점'을 곧장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중들이 <미생>에서 그려진 리얼한 노동세계에 열렬히 반응했다고 썼다. 그러나 과연 <미생>을 향한 그와 같은 반응의 원인을 노동하는(혹은 노동뿐인) 삶의 전면적 조명에 국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게 전부였다면 <미생>은 '잔혹 서사'의 미덕(예컨대, 현실을 되비치는 뼈아픈 거울의 의미)은 지닐지언정, 결코 '공감 서사'의 경지에는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의 적나라한 묘사를 공감으로 끌어올리는 포인트는 따로 있다. 그건 <미생>의 인물들이 이런 출구 없는 노동 사회의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가능한 의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핵심은 노동사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 피로 자체가 아니라 그 피로의 '의미'에 놓여 있다.

사실상 두 번째 주인공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작품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오 차장에게 주어진 다음의 두 대사는 이런 사정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첫 번째는 작품 속 안영이가 말하는 오 차장의 캐릭터다.

"마치 메소드 배우같이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분 같아요."(53수)

메소드 배우란 "작중의 인물이 되기 위해 자신을 지우고 극 중 인물이 되어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물"을 말한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종종 우울증에 걸리거나, 작품이 끝난 후에도 그 극 중 인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53수) <미생>은 우리 시대의 일중독자인 이 '스타니슬랍스키적 주체'가 결국 완벽한 동일시에 실패하여 조직을 나오게 되는 이야기다(스타니슬라프스키는 '메소드 연기'를 창안한 러시아의 연극 연출가이자 이론가로서, 배우가 극중 역할에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켜 사실상 그 역할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연기방식을 제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에 너무 진지하게 임한 나머지 조직 내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 오 차장은, 장그래 앞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138수)

분명히 말하건대, 여기서 방점은 오 차장의 '실패'가 아니라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의 '의지'에 찍혀야 한다. 윤태호가 그리는 세계는 한 일중독자의 실패가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의지의 분투를 향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묻고 있는 질문은 '당신은 왜 일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당신은 과연 제대로 살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내가 보기에, <미생>의 핵심적 질문을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가 말하는 다수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다수의 존재란 삶의 거의 전부를 잠식하고 있는 노동의 일상 안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기를 원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윤태호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머지'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의 나머지인가? 먼저 노동에 의해 아예 삶 전체가 송두리째 '집어 삼켜진' 사람들(다만 죽지 않기 위해 일해야 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그 다음엔 노동을 '거부'하거나 그 노동의 체계 바깥으로 '탈출'한 사람들, 혹은 애초부터 노동 바깥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나서 얻게 되는 나머지다. 비유하자면, '호모 사케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틀비'나 '개츠비'도 아닌 사람들, 이도 저도 아닌 중간지대의 '무표화' 된 인간들이다.

그들은 노동의 무대와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여전히 그에 '붙들려' 살아간다. 혹은 다르게 말해, 그들은 '마냥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바깥을 상상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날 결단은 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미생>이 말을 건네는 대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며, <미생>의 호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 역시 바로 그들이다. <미생>의 새로움, 혹은 보편성의 지점은 바로 이 '중간적 주체'에 걸려있다.

3. 일상의 미학: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

<미생>이 겨냥하는 말 건넴의 대상을 이렇게 규정하고 나면, 그 세계가 제기하는 물음의 범주들이 훨씬 더 선명해진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우리는 일상의 노동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오늘날 노동이 조직되는 대표적인 체제라 할 회사는 그런 의미화를 허용하는 장소인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이 되어야 하는가? 만일 '안쪽'에서의 의미 찾기가 불가능하다면, 그걸 가능케 하는 '바깥'은 어떻게 찾아질 수 있을까? 아니 '안'과 '밖'이라는 위상학적 이분법을 제외한 다른 선택지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가? 등등. 다시 말하건대 핵심은 윤태호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기 위한 토포스를 직장이라는 체제의 '안쪽'으로 상정했으며, 그 물음의 주체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간적' 존재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간적 주체'의 삶을 그려냄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일상'을 대하는 특정한 태도이다. 윤태호의 <미생>은 '하찮고 평범한 것 속에 깃든 진실'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일상 미학의 분명한 계보를 잇고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예술과 철학이 진정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은 특별하고 비범한 '시적' 순간이 아니라 '산문적' 일상 자체이다. 일상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삶의 중대한 '변화'와 '결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진정한 삶이 '체험'되고 현실의 '윤리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은 거대한 외적 변화의 상황이 아니다. 극적인 위기의 순간, 커다란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소는 오히려 윤리적 선택에서 개인의 '책임'을 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일상 속의 사소하고 평범한 선택과 결정의 순간들에서 비로소 '책임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한편, 일상에 대한 이런 입장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직접 연결된다. 아마도 이 관점은 <미생>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아포리즘이라 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20화)라는 구절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하청 업체와의 관계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문제를 일으키게 된 박 대리 에피소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윤태호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 장면이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언급한 바 있다.

"나 역시 조직 생활을 해 본 적이 없기에, 결국 장그래의 안목이 성장하는 건 내 안목이 성장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걸 확 느낀 신기한 경험이 있었다. 늘 거래 파트너를 봐주기만 하던 소심한 박 대리 이야기를 그리면서다. (…) 박 대리가 아무리 소심해 보여도 장그래보다 회사 경험도 많고 대기업에 들어와 대리까지 단 사람인데 '설마 이 사람의 생각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입고 있던 낡은 옷을 벗어버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 박 대리가 옷을 벗는 신은 이렇게 나왔다. 이거 그릴 때 스스로 장그래처럼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프레시안>의 윤태호 인터뷰 ☞바로 가기 : "삼성맨이 모두 '오너'는 아니잖아!")

▲ <미생>의 박대리 에피소드. ⓒ위즈덤하우스

윤태호는 이 장면을 그리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 전까지의 불안감을 극복하고 작화(作話)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밝혔다. 애초에 장그래의 통찰력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동원되었을 뿐인 인물 박 대리가 작가의 본래 구상을 벗어나 '자기 말을 하는 주체'로서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작품 전체에서 중대한 '전환점'의 역할을 하게 된다(이 에피소드에서 댓글 수가 갑자기 1000개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른바 '체호프적 순간'이라 부를 만한 이 중요한 장면을 통해 "모두가 저마다의 바둑을 두고 있는 세계"라는 <미생>의 세계관은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삶의 하찮고 사소한 것들(Trifle of Life)을 그리는 작가 체호프는 바로 그 사소함 속에 인생의 정수가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소위 '행동하지 않는 드라마'에 해당하는 체호프의 희곡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모든 등장인물들의 '평형상태'이다). 생활세계 속에서 각각의 개인이 그려 보이는 구체적인 풍경들에 주목하는 그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구조' 속에서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발견되어야만 하며, 그 일상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의미 없는 돌은 없다."(33수) 조직(시스템) 속 개인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지점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기 자리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고" 그 "자기 자리를 '충실하게' 지켜나가는" 개인들은 분명 존재하며, 바로 "그런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들이 존중받아야 한다"(<프레시안>의 윤태호 인터뷰 ☞바로 가기 : "삼성맨이 모두 '오너'는 아니잖아!")고 그는 생각한다.

이런 관점과 태도가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해 버리는 나이브한 사고의 소산이 아니라는 점은 지적될 필요가 있다. 윤태호는 <야후>(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이끼>(한국데이타하우스 펴냄) 등의 전작에서 이른바 '구조화된 악'의 문제를 누구보다 예리하고 강렬하게 제기해 온 인물이다. 가령 웹툰 <이끼>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집약해 보여주는데, 윤태호는 작품의 마지막 쇼트에서 위성사진으로 찍은 서울의 경복궁을 보여줌으로써 '한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이 결국 대한민국의 '구조적 중심'과 직결되어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그랬던 그의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와 별개로, 그것이 오랜 창작 경험을 통해 축적된 나름의 '세계관'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세계관이 체제 내부의 모든 구성원에게 말 그대로 '평등하게' 적용될 때 그것은 모종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와 더불어 <미생>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아포리즘은 "오늘도 한 수 배우고 갑니다"라는 구절이다. 일차적으로 이 구절은 직접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상대방의 수준을 알 수 없다는 것, 겉으로는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각자는 '자기만의 비수'를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은 높은 급수의 상대는 하수가 알기 힘든 자기만의 '내공'을 품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미생>에서 이런 입장은 주로 부장(55수)이나 전무(139수) 같은 고위직 임원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데, 윤태호는 이들의 숨은 의중이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행보를 '뒤늦게' 밝혀주는 방식을 통해 대단히 능란하게 독자들을 설득한다. "역시 그 자리에 그냥 올라간 게 아니었네요"라는 식의 반응(139수 댓글)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실제로 윤태호는 "임원의 품격"을 보여주는 것이 <미생>의 집필 의도 중 하나라고 밝힌 적이 있다.(한겨레> 김두식의 고백 사실 이런 측면은 '시스템'의 논리를 바라보는 입장에 직결돼 있다. 시스템의 논리가 갖는 나름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한 은근한 강조는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가령 박 대리 사건 이후 그에게 '개인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회사의 처리방식을 두고 김 대리는 말한다. "종합상사의 특징이지. 우리 일이란 게 기본적으로 리스크가 다양할 수밖에 없어. 아무리 예측하고 대비해도 빵빵 사고는 터지지. 그때마다 직원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끝도 없는 일이 될 거야. 상사에선 보통 이 일을 계기로 '개선 방향을 찾자'라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지."(21수))

시 자기 식의 바둑을 두었으나 누구의 잘못이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이유로 퇴출되기에 이른 전무는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한 장그래의 이야기를 듣자 이렇게 말한다. "허허, 나와 똑같은 계약직이군!" 누구에게나 그 나름의 근거와 정당성이 주어지는 세계에서, 피아의 구분은 무뎌지고 판단의 기준은 모호해진다. 계약직 신입사원과 전무의 삶 사이에 가로놓인 엄연한 거리가 '계약직'으로 표현되는 <미생>의 논리 하에서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위즈덤하우스

'삶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우리 모두는 미생에 불과하다'는 이런 인식은 '단단했던 모든 것이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오늘날의 세계감각에 적절히 호응한다. 이른바 '불안정성의 시대,' 안전하고 확고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시대에, "어깨를 짓누르고, 입을 틀어막으며 땅 끝 무저갱으로 이끄는 삶의 짐"(3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와 같은 '미생의 논리'는 부사장 승진을 앞둔 전무에게도,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일다운 일을 해보려 했던 오 차장에게도, 어떻게든 '미생'(계약직)의 상황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장그래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미생>의 세계를 '적대'가 사라진 균질적 세계에 관한 보수주의적 멜랑콜리로 읽어야 할까? 그건 구조와의 정면대결을 우회하는 생활세계의 옹호, 현실을 담보로 한 '바둑판(체제)의 인정'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이 대목에서 필요한 것은 <미생>의 서사를 바라보는 '두 겹의 시선'이다. 오 차장과 장그래의 도전과 실패는 서사의 외적인 틀을 이루는 뼈대에 해당하지만, 실은 내부를 채우고 있는 '진짜 이야기'(즉 내부서사)는 따로 있다. 내가 보기에 <미생>의 진정한 서사적 핵심에 해당하는 그것은 바로 '팀'이라고 표현되는 '공동체'의 문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시스템'과 '의미'라는 두드러진 두 항목을 '매개'하는 표면화되지 않는 진짜 핵심은 다름 아닌 '공동체'인 것이다. '체제 안에서의 의미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그러므로 이제 달리 물어질 필요가 있다. 회사라 불리는 일상적 노동의 공간 안에서, 그 삭막한 전쟁터에서 과연 공동체는 가능할까?

4. 공동체와 회사: 노동과 활동 사이에서

<미생>은 바둑 실력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한 청년이 종합상사의 화이트칼라 노동 세계를 배우는 이야기다. 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바, 그것은 고졸 학력이 전부인 한 젊은이가 명실상부한 '팀'의 일원으로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은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시스템 속의 또 다른 시스템인데, 이 '내부 극'은 그것 바깥의 '외부 극'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생존의 "전쟁터"로 그려지는 외부 극의 서사와 "돌 4개가 모여 하나의 집을 이루는" 내부 극의 서사는 나란히 진행되면서 서로를 보충한다.

"영업 3팀"이 대변하는 공동체의 논리는 냉철한 승부의 세계인 바둑과 회사를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작품 초반 장그래는 이렇게 말했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싸움이고 전쟁이다. 승자와 패자가 분명한 세계다. 그 세계에서 10년 넘게 살았었다. 승부사로 길러진 사람이다."(11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수 김 대리를 집에 데려온 장그래는 회사 생활을 "하수도 다면기를 둬야하는" 세계라고 표현한다. 다면기는 고수 한 명이 여러 명과 동시에 치루는 바둑 경기를 말한다. 이 말은 장그래가 여전히 회사 생활을 개인적 승부의 연장으로, 모든 사람과 1대1로 치루는 싸움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에 김 대리는 "잠깐, 아까 바둑은 1대1 싸움인데, 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했지? 당연하지! 우리 회사는 팀제니까. 우린 하나로 묶여지는 거야. 혼자가 아냐"(47수)라고 응수한다.

팀 내부의 상호작용을 그리는 이 내부서사를 향한 대중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이야말로 판타지의 절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오 차장 같은 팀장, 김 대리 같은 사수는 결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판타지가 제외된 <미생>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게 없다면, 그건 더 이상 <미생>이 아닌 것이다.

▲ <미생>에서 PT를 전투적으로 준비하는 영업3팀. ⓒ위즈덤하우스

요컨대, 회사 생활의 외연을 그리는 외적 서사의 깜짝 놀랄만한 '리얼리티'는 팀을 중심으로 한 내적 서사의 '판타지'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즉 외적 리얼리티의 핍진성이 있기에 내적서사가 일방적 판타지로 전락하지 않으며, 독자들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판타지적 내부서사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외적 리얼리티가 건조한 현실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이 두 축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전개된다는 점, 이는 분명 <미생>이 가지는 호소력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영업 3팀은 어떤 종류의 공동체인가? 이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볼 게 있다. 오늘날 직장이라는 노동의 공간을 '공동체'라는 화두를 통해 사유하게 될 때 즉각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몇 가지 불편한 난제들이 그것이다. 생계의 수단인 일터를 일종의 '운명 공동체'로서 정체화하려는 시도는,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 노동력 착취의 일반적 전략이다. '회사를 가족처럼'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냉소적 반응은, 분명 유머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분위기 가족 같은 회사>는 <분위기가 족같은 회사!>"

하지만 여기서 간파해야 할 것은 이런 허울뿐인 슬로건의 공허함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냉소적 반응 뒤에 담긴 물음 자체의 무게를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과연 우리에게 직장이란 단순한 밥벌이에 불과한가? 우리는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가?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노동의 의미를 겨냥하고 있는 이런 물음들은, 우리 시대 노동의 현장과, 그 속에서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직결돼 있다.

여기서 이 물음들에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고 싶은 욕구, 밥벌이를 넘어서는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영업 3팀 이야기에 울고 웃는 대중의 반응을 그저 '달콤한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봉합해버리는'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노동의 의미가 그러했듯이, 공동체의 불가능성은 주어진 조건일 뿐 당위의 명제가 아니다.

노동과 공동체의 분리라는 이 문제를 이론적 차원에서 확대 고찰하는 작업은, 물론 가능할 것이다. 가령 공동체의 두 가지 형태를 구분하고 한쪽에 배타적인 가치를 부여했던 사람은 한나 아렌트였다. 그녀에 따르면, 유일하게 의미 있는 공동체라 할 '폴리스'는 '오이코스'라 불리는 생존의 영역, 즉 밥벌이와 가정경제로부터 자유로운 연합의 형식이다. 폴리스와 오이코스, 조에(헐벗은 삶)와 비오스(정치적 삶)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있는 바, 이들은 애초부터 서로를 배제함으로써만 각자의 정의를 얻는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생존과 비오스의 영역인 노동의 현장(직장)에서 공동체를 바란다는 상황 자체가 (이른바 '사회'의 등장과 함께 대두된) "노동의 승리," 다시 말해 문명적 퇴행의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노동과 구별되는 폴리스의 일, 어떤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의 형태를 (노동labor과 구별되는) '활동(혹은 행위action)'이라 불렀다. 노동은 결코 활동이 될 수 없으며, 활동은 반드시 노동 바깥에서 찾아져야만 한다.(노동 개념과 관련해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개념에 담긴 이분법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글로, 황정아의 '생존과 자유 사이의 심연 - 한나 아렌트의 정치개념'(<안과 밖>제 34호, 영미문학연구회 엮음, 창비 펴냄, 2013년, 216~237쪽) 참조.)

▲ <문자와 국가>(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한편, 가라타니 고진은 '공동체'와 '연합'의 차이점을 논하면서, 진정한 연합이란 "국가나 교회 같은 집단에서 벗어난 개인들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문자와 국가>(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2011년), 79쪽). 그에 따르면, 진정한 우애나 자유로운 연합은 한번 공동체와 절연되어본 경험을 지닌 개인들, "그 어떤 장소나 소속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고진에게서도 진정한 연합의 형식은 삶의 일상적 무대 '바깥'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볼 수 있다. 오늘날 노동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노동의 바깥에는 (아렌트가 노동과 함께 묶었던) '가정'이 존재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 그 바깥에는 오직 '가정밖에' 없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잘 보여주듯이,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하는 주체들이 바라는 노동의 외부란 사실상 가정(에서의 시간)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생>의 독자들로부터 가장 열렬한 호응을 얻은 에피소드 중 하나는 가정생활(육아)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선차장의 이야기였다(21~22수). 소위 '직장맘'이 겪고 있는 애환과 고충을 리얼하게 그려낸 이 에피소드는, 성별과 연령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가 보여준 것은 가정과 회사 사이의 균형 잡기의 어려움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의도치 않게 그것은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건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직장과 가정 이외의 제 3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 삶이 직장과 가정이라는 이원적 폐쇄 고리 바깥을 전혀 상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평균적인 대중의 삶에서 회사와 가정 이외의 또 다른 '바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바깥이 없다면, 그렇다면 노동 이상의 그 무엇을 '안쪽'에서 실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가? 이 질문과 관련된 직접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보기로 하자. 올해 초 한국의 한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동체 VS 회사"라는 구절로 집약될 수 있는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이 출판사의 주체들은 이제껏 자신들의 조직이 '회사'라기보다는 '공동체'이며, 자신들의 일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러던 차에 해고되는 동료를 보며 노조의 필요성을 느낀 직원들이 노조를 설립하고 사측을 '경영진'이나 '자본가'로 규정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사측은 그렇다면 '앞으로 회사처럼 해 주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운동의 대의(공동체의 논리)와 노동의 권리(회사의 논리)가 정면충돌한 이 유감스런 사태를 두고 한 평자는 "사실 우리 사회 진보의 진짜 문제는 대의를 천명하는 공동체만 있을 뿐 원칙을 지키는 회사가 없다는 것이다" 임재성의 '공동체와 회사'(<시사인> 기사 )라고 논평했다. 한편,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는 '활동에서 노동으로 돌아갑니다'라는 글을 통해 "일과 놀이와 공부가 분리되지 않았던 곳"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일반적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제 친구들만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딱 일하고, 나머지는 너의 여가로 보내는 게 좋지 않냐고 했지만, 제게 그런 분리된 삶은 맞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는 맞는 것 이전에 그렇게 살기가 싫었습니다. 기왕에 일을 해서 먹고산다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런 삶을 누리는 제가 행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렇기에 저에게는 모든 일들이 '노동'이기보다는 '활동'이었고, 제 자신이 확장되는 무엇이었습니다. 근대적인 교환관계인 노동으로 살기보다는 노동을 최대한 활동으로 바꾸는 삶, 그것이 저와 지금은 떠난 동료들이 함께 꿈꾸었던 것이었습니다." ()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생각의나무
노동을 활동으로 바꾸는 삶, 회사를 공동체로 만들려는 시도의 이와 같은 실패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시대 노동과 의미의 단절상황을 둘러싼 모종의 교착상태이다. '회사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식의 편리한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작동되지 않지만 그것을 대체할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매뉴얼은 합의되지 않았다. 합의 가능한 새로운 원칙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대의로 뭉친 공동체는 종종 회사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외려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제공될 수 있는 대안이란 기껏해야 노동시간의 단축, 그 옛날 앙드레 고르가 주장했던 '이중사회론' 같은 것들이다. 인간성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공간에서 쓰는 시간을 가급적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주장.(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이런 견해는 결국 노동 그 자체 안에서 일궈내는 의미는 포기하고, 그 '바깥'의 다른 시공간을 살리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또다시 시스템의 안쪽과 바깥쪽의 문제, 삶의 준거와 바탕을 어디에 둘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여기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 그것을 정답으로 제시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차피 시스템의 논리란 젊음의 순수한 "열정"마저도 새로운 착취의 전략으로 변질시켜 이용하기 마련이라고 비판하거나,(<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진짜 자유란 오직 과감하고 결정적인 '거절'의 결단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고가 그러하다.

▲ <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그런 찢김의 상태를 어떻게든 견디며 꿈틀대려는 시도, 시인 심보선의 말을 빌자면 "적어도 그렇게는 아니다"에 해당하는 몸짓이다. 그는 비판에 관한 푸코의 정의인 "그렇게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기술(예술)"을 인용하며, 이를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통치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역량으로 풀이한다. 그에 따르면, 바로 그와 같은 "가까스로"의 몸짓이 동물화, 속물화, 노예화에 저항하는 인간적 장소를 제공해준다. "다만 살고 싶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잘,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라는 고백, 삶의 한가운데서 추구되는 이런 소박하고 생생한 꿈을 발견하고 지지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그을린 예술>(심보선 지음, 민음사 펴냄), 14쪽)

그렇다면 이런 "가까스로"의 몸짓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최소한 우리는 그런 몸짓의 시도를 <미생>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5. (불)가능한 공동체: 협력의 기술과 리듬

앞서 지적했듯이,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새롭게 배워가는 가장 큰 항목은 이른바 "협력의 기술"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 팀의 일원으로서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은 바둑세계가 가르쳐주지 않은 새로운 체험이다. 이 공동체의 문법이 일반적인 회사 생활의 그것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가끔씩 열리는 "영업 3팀"의 부서 회식은 '인간적 친목'을 빌미로 한 '일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요한 대국 이후에 행하는 집단적 "복기"에 더 가깝다.

윤태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며,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진짜 프로들의 팀을 그리려 한다. 그 세계의 슬로건은 한마디로 "일만 잘하자, 그리고 월급 받자!"이다. 그것은 가족 같은 공동체는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의로 뭉친 '연대'의 공동체인 것도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속내를 터놓고 생활을 공유하는 솔직하고 끈끈한 어떤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인들의 공동체, 즉 '작업장'의 모델에 더 가깝다.

소위 '작업장'의 모델을 '투게더'가 실종된 현대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한 이는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다. 그의 제안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가 협력을 위한 조건을 솔직하고 투명한 자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협력을 위한 효과적인 '가면 쓰기'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자기방어를 위한 은폐용 가면과 더불어 "더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 속하는 또 다른 종류의 가면이 있다."(<투게더>(리처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386쪽)

▲ <투게더>(리처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그가 "중성적neutral 특징을 지닌" 가면이라 부르는 그것은, "남자든 여자든, 키가 크건 작건, 뚱뚱하건 말랐건 모두 똑같은 가면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인격적"이며, 인격의 처소인 얼굴을 가림으로써 그의 행동의 미세하고 생생한 표현들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신체적"이다. 세넷에 따르면, 이런 "가면"을 쓴 채로 함께 일할 때(즉 그가 말하는 "일상에서의 외교"를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거나 성격 규정을 하는데 집중"하는 대신에 "공동의 사회적 공간을 표현력이 풍부한 내용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투게더>, 390쪽)

그것은 "타자에 대한 단순한 공감sympathy이 아니라, 거리를 둔, 지성적인 감정이입empathy에 기초하며, 타자들과의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조절과 이해에 기초한다."(<투게더> 12쪽) 그것은 노동도 활동도 아닌, 아렌트가 말한 "작업"의 힘에 뿌리내리고 있다.

세넷이 말하는 (장인적) 협력의 기술은 결국 작업장의 "리듬과 의례를 배운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기술 발달을 지배하는 것은 습관을 각인시킨 결과로서의 '리듬'이며, 반복 연습을 통해 '몸'에 익혀진 그 리듬은 '의례'가 된다. 어떤 점에서 <미생>이 보여준 가장 커다란 성취 중 하나는 사무직 노동자의 일상적 노동에 깃든 이런 리듬과 의례를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 박진감 넘치는 리얼함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미생>에서 그려지는 대기업 사무직 일상에 관한 꼼꼼하고 세밀한 묘사는, 주지하다시피 많은 이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독자들은 작가가 회사 생활을 전혀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사무직 노동의 대표적 의례라 할 수 있는 기획서/보고서 문제를 몇 회에 걸쳐 구체적으로 다루는가 하면(39, 58수), 전체 임원진을 대상으로 하는 PT 장면을 마치 생중계하듯이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86수에서 임원진 대상 프레젠테이션 준비과정의 묘사는 "발표자의 복장"과 "회사 로고의 위치"에서부터, "펜 색깔의 배치 순서, 음료의 취향, 사탕의 당도" 따위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회사 생활의 각종 형식적 의례들 한 가운데에 놓인 인물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 '작업장의 노련한 숙련공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작품 속에 몇 차례 등장하는 "뭐 그리 대단한 일들을 한다고…일일 뿐인데…"라는 대사와 더불어 묘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이들의 일상 묘사를 '거대조직의 무의미한 톱니바퀴'가 아니라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두고 있는 처절하고 숭고한 바둑'("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일상의 리듬과 의례들에 부여된 무게감이다.

세넷에 따르면, 기술을 쌓아나가는 리듬이 결과를 내기까지는 대략 '1만 시간'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는 대략 하루 네 시간씩 5~6년을 수련해야 한다는 뜻이다(이는 중세의 길드에서 도제가 일을 배우는데 걸리는 시간에 해당한다).

"여러 장인들은 '작업장의 의례'라는 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처럼 별일 아닌 듯이 들리는 말 뒤에는 이런 리듬이 있는 것 같다."(<투게더>, 323쪽)

윤태호는 이 리듬과 의례의 한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세넷이 말하는 "격식 없는 사회적 삼각구도")를 어쨌든 '가능한 것'으로서 그려 보인다. "영업 3팀"이라는 그 가능세계를 '판타지'라 말하는 대중의 반응을, 현실과 허구를 분별할 줄 아는 냉철한 판단의 미덕이라 부르는 대신에 바로 그런 세계를 원하고 꿈꾸는 대중의 깊은 '열망'으로 바꿔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미생>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 텍스트'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리듬분석>(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하지만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리듬을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일 것이다. 가령, 일상의 노동, 그 무미건조한 '반복' 속에 깃들어 있는 '리듬'을 포착하고 그것의 미세한 '변화'와 '떨림'을 읽어낼 수 있는 더욱 섬세한 분석적 시선, 이 어려운 작업을 르페브르는 언젠가 "리듬분석"이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는 리듬분석가의 과제는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차이, 그러니까 일상의 틀에 박힌 의례, 규칙, 관례의 반복적 수행 사이로 '틈입'하는 새로움의 차이를 감지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리듬분석>(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

물론 이 과제를 뒷받침하는 기본 전제는 심지어 '부동인 것처럼 보이는 사물들조차 각자의 리듬을 품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그 리듬을 사는 인간들은 권력과 체제의 단순하고 수동적인 꼭두각시가 아니라 일상 속의 전유appropriation 능력을 갖춘 행동하는 작인agency으로 재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생>에서 우리는 이런 리듬 속의 미세한 떨림이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 최소한 이렇게 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미생>은 '자기만의 (일의) 리듬'을 갖고 사는 인간이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공식적' 리듬(예컨대, '사내정치'의 정해진 논리)과 부딪혔을 때 생겨나는 모종의 '균열'과 '마찰'을 보여준다. 사내비리를 밝혀내 주목받게 된 오 팀장은 자기 식의 리듬을 이렇게 표현했다.

"눈에 띄지 않는 일이라도 맡겨진 일은 제대로 끝내려 했다. 승진을 위해 누구의 뒤에 서 본 적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뒷덜미를 잡아 쓰러뜨렸다. 회사의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 매우 어려우나, 자아가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아의 실현이 된다."(131수)

하지만 이 리듬은 전무로부터 부여된 외적 리듬과 미묘한 불협화음을 일으켰고, 결국 오 차장은 퇴사하게 된다. 자기 나름의 리듬, 일에 대한 자신만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벌어진 결과(그는 회사 내에서 '고립'된다)를 두고 그는 말한다.

"나는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138수)

한편 입사 이후 어떻게든 일의 리듬과 의례를 몸에 익혀, 한 사람의 어엿한 팀원이 되고자 고군분투했던 장그래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이 되지 못한다. 리듬과 의례로 이루어진 작업장의 논리는 '계약직은 계약직일 뿐'이라는 체제의 법칙을 넘어서지 못한다. 결국 두 주인공은 모두 외견상 실패했다. 둘 다 "안은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고 표현되는 세계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시스템의 바깥으로 다시 내던져졌다(오 차장이 과거 회사 동료들과 새로 만든 사업체를 과연 시스템의 바깥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은 물론 충분히 제기될 만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대기업 시스템이 제공하는 각종 혜택과 여건을 고려할 때, 극중 김대리가 말한 것처럼 이 선택이 "인생 초기화(reset)"의 성격을 띤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실패인가? 그렇다면 그 실패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오 차장이 새로운 일터를 꾸리고, 체제의 외부자가 된 장그래 뿐 아니라 내부자인 김 대리마저 그곳에 합류하는 결말은, 분명 <미생>의 서사가 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그들의 실패가 남긴, 혹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유일한 대안은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 단 하나뿐이다. 어떤 가능성인가? 각자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공동의 협력 속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공동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이다.

다시 말하건대, 그 공동체는 일(노동)의 외부에서 자기 내면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그에 '충실'할 것을 결단하는, 그런 종류의 '바깥'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나'가 아니라 '(실재하는) 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공동체, 나의 일상적 일(노동)속에서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어갈 수' 있게 하는 공동체, 타인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그 속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다. <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이도 저도 아닌 우리 시대의 '중간적 주체들'에게 묻고 있다. 21세기 한국에서 지금 이 순간, 그런 공동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과연 어떤 모습을 띄고 있겠느냐고.

6. 나가며 : 불가능한 성장소설과 새로운 주체

▲ <허기사회>(주창윤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우리 시대의 일터는 '의미'와의 결속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위상도 잃어버렸다. 우리 삶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동의 시공간은 이제 다만 견뎌야 할 삶의 무게이거나, 혹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일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되자 노동의 시공간으로부터 또 한 가지 중요한 본질이 빠져버렸다. 그것은 '성장'의 가능성이다. 노동은 더 이상 의미와 공동체의 장소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성장 역시 불가능해졌다.

노동(일)이 다만 밥벌이로 전락하는 동안, 그것이 채우지 못한 빈자리는 맹렬하게 다른 것들로 메워져 갔다. '교육'과 '훈련'을 '위로'와 '힐링'이 대체하고, '협력'과 '성장'을 달콤한 '공감'과 고독한 '내면탐구'가 대신한다. 그러니까 몸을 소진시키는 "과로사회"의 반대편에는 마음이 고픈 "허기사회"가 있다.(<허기사회>(주창윤 지음, 글항아리 펴냄)) 밥벌이로 미처 다 채우지 못한 거대한 허기의 구멍을 우리는 게걸스럽게 다른 것들로 메우며 살아간다. 과연 우리 시대 노동의 자리를 그냥 이렇게 내버려둬도 좋은 것일까?

"우리가 어린 시절과 죽을 때 사이의 성인기에 내내 종사하는 것이 노동입니다. 민주주의가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면, 삶의 큰 몫을 차지하는 노동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가 저절로 주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상점, 공장, 사무실 등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의 모든 민주적 권리와 책임을 포기하고 맙니다." (<일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류동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91쪽)

<일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에서 인용되는 미국 경제학자의 말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노동의 보람이나 의미로 바꿔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실체적 의미에서의 노동의 언어"를 찾아가려는 시도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정치적 입장, 거창하게는 계급적 입장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일'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어떤 새로운 의미를 찾아나가야 할 것인지 등을 살펴보는 데서부터 '노동의 언어'는 구축되어야 한다. 때로는 관계를 벗어나기보다 관계를 규정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노동'을 정의하고 한계를 지우며 종종 아예 노동을 무시하는 언어의 틀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일하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 276~277쪽)

▲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류동민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윤태호의 <미생>은 노동을 한계 짓고 그것을 무시하는 오늘날의 지배적 경향에 맞서, 노동의 언어를 새롭게 틀 지우려 시도한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 콘텐츠이다. <미생>이 진정 새로운 노동의 언어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는지의 문제와 별개로, 그것이 근래에 우리가 만난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인 노동의 풍경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대중문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언제나 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념과 무의식을 '투영'하기 마련이다. 사회적 의미를 갖는 모든 대중문화는 바로 그 점에서 '징후'이자 '단서'가 된다. 나는 이 글에서 <미생>이 '말하고 있는 것'과 함께 '그것을 통해 말해질 수 있는 것들,' 그 안에 담긴 '현실'과 더불어 그 현실을 대하는 대중의 '열망'을 함께 읽어 보고자 했다.

우리 시대의 '노동'과 '공동체'의 자리를 되묻는 사회적 텍스트 <미생>을 '우리 시대의 성장소설(Bildungsroman)'로 간주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일반적 의미에서의 성장소설과 다를 것이다. 바흐친은 성장소설의 마지막 유형인 '리얼리즘적' 성장소설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했다.

"[거기서] 인간의 성장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성장은 더 이상 인간의 사적인 일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와 함께 성장하고, 자신 속에 세계 자체의 역사적 성장을 반영한다. 그는 이미 시대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시대의 경계에,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건너가는 지점에 존재한다. 이 이동은 인간 속에서,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며, 인간은 아직까지 존재해본 적이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인간의 생성이다." (<말의 미학>(미하일 바흐찐 지음, 김희숙 · 박종소 옮김, 길 펴냄), 305쪽)

<미생>은 더 이상 성장의 자리와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절박하게 그 가능성을 찾고 있는 텍스트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과 세계 자체의 변화가 더 이상 한 인간의 성장서사 안에서 통일되지 못하는 시대, 포스트 리얼리즘 시대의 이 '불가능한' 성장소설은, 그러므로 '두 세계의 문지방'에 자리한 새로운 인간형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와 같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 무대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이 물음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시선을 또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세계와의 연결을 갈망하지만 그것과의 근원적 접점을 그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근거 없는 존재들", 노동 내부에서의 소외가 아니라 아예 노동 자체로부터 소외되어 버린 내던져진 존재들이 존재하며, 스스로를 그렇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피로사회"와 "허기사회" 건너편에 자리하는 마지막 꼭짓점, 즉 "잉여사회"의 문제에 해당할 것이다.(<잉여사회>(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잉여사회는 기존의 프레임으로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그래서 '유령'이나 '좀비'로서만 현상하는 (노동 바깥의) 잉여적 실존의 문제를, 21세기 한국사회가 만든 새로운 '주체성'의 모델로서 파악하고 그것이 갖는 함의와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포함한 더 다양한 분석으로는 <논문선 1: 속물과 잉여>(김상민 외 지음, 지식공작소 펴냄)을 참조)

하지만 그건 <미생>과는 전혀 다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런 다른 무대와 주체를 보여주는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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