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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쾌감 100%, 황홀한 '기계=소설'과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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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쾌감 100%, 황홀한 '기계=소설'과의 조우 [2013 올해의 책]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
'프레시안 books'는 개편 작업을 준비하며 예년보다 1주 일찍 송년호를 꾸렸습니다. 이번 송년호(170호)에서는 '프레시안 books'의 기자, 기획위원, 연재 필자 열두 명이 각자가 꼽은 '올해의 책'을 이야기합니다. 판매 순위나 화제성보다는 책과의 만남의 밀도, 이 사회에 던지는 화두를 중심으로 꼽은 '올해의 책'과 함께 2013년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프레시안 books' 다음 호는 사이트의 전면적인 디자인 개편 작업이 끝난 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저녁에 발행됩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끊임없는 축소와 확대의 반복이다. 글자-단어-문단-장-전문이라는 물리적인 구조의 철길을 따라서, 독자는 철로의 표면을 세심하게 만져 나아가는 동시에 철길 전체의 양상과 주변 정경과 지도를 파악해야 한다. 그 작업이 끝나야 비로소 소설 한 편을 완전히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소설은 다양하다. 어떤 소설은 그런 작업에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그저 의식의 기차에 몸을 맡기면 된다.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반면에 어떤 소설은 그 작업이 고되고, 길고, 육체 노동의 몇 배에 달하는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처럼 피로하고 재미도 없는 소설을 만나면 서두에서 적절히 감을 잡고 집어던지게 된다.

하지만 막대한 독서 노동이 예견되면서도 문장 하나, 인물의 대사 한 줄이 때로는 영화 한 편, 또는 웬만한 책 한 권에 해당하는 잽과 어퍼컷을 날리는 소설을 발견한다면 어떨까. 그 때 독서라는 이름의 두뇌퍼즐은 쾌감이 되고, 청량음료가 되고, 자양강장제가 되고, 음악이 되고, 즐거운 암호풀이가 된다.

내가 토머스 핀천이라는 이름을 꼭 붙들게 된 건 그의 장편 를 읽은 다음부터였다. 는 간단히 말하면 세계 속에 숨어있는 'V'를 찾기 위한 노정을 그린다. V는 화산일 수도 있고, 환자를 간호하는 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V는 그 모든 것이다. 는 굳이 소속을 정하자면 포스트모던 계열의 소설이다. 포스트모던 작품들은 전통적인 구조를 와해시키고 그 파편 속에 구조를 숨기는 경우가 많은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나는 그런 작업을 토머스 핀천보다 압축적으로, 완벽하게 해내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라면 '예술'이라는 단어를 분류가 아니라 감탄사로 사용해도 좋다. 이 작가라면 예술가라고 불러도 좋겠다. 나는 를 두 번째 완독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에 감명 받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도 핀천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다녔고, 발견하는 족족 읽었다. 그리고 적잖이 실망했다. 그 느낌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자면… 아마도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명반 <… And Justice for All> 에 감동한 다음 개성이 급변한 앨범에 실망했던 순간과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는, 토머스 핀천의 대표작이라는 <중력의 무지개>를 반드시 읽자는 아련한 목표가 생겼다. 나는 그 목표를 이루려고 <중력의 무지개> 원서에 도전했고, 보다 강렬한 쾌감의 첫 맛을 느꼈으며, 약 4분의 1 지점에서 독해에서 오는 육체적인 피로 때문에 멈춰야 했다.

긴 시간이 흘러….

▲ <중력의 무지개>(토머스 핀천 지음, 이상국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중력의 무지개> 번역서(이상국 옮김, 새물결 펴냄)가 나왔다. 그동안 나는 변했다. 독서 쾌감을 느끼는 뇌 속의 감각기관도 변했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도 변했다. 아마도 내부 의식의 서랍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 또한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출간 소식을 듣자 (아주 작은 주저를 무릅쓰고) 곧장 구입해 읽었다. 그리고 철길 탐색의 짜릿한 쾌감은 달라진 나에게 곧장 되돌아왔다.

가 2차원 지면에 놓인 복잡한 철로라면 <중력의 무지개>는 3차원 공간을 종횡무진으로 가로지른다. <중력의 무지개>에서 중심인물인 타이론은 거처를 옮기며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데, 독일의 V2로켓과 그 파편들이 정확히 그 지점들에 떨어지면서 일종의 포와송 분포를 그린다. 이처럼 기묘한 현상을 시발점으로 삼으면서 <중력의 무지개>는 정신세계, 수학, 사회상, 역사, 전쟁, 권위해체 등 수많은 개념을 논하고 그려 나간다.

핀천의 구성 스타일에 다시 적응하기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이 작품은 그런 난관의 몇 배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내 두뇌에 공급해 주었다. 문자로 이뤄진 프랙탈 속에 빈틈없이 배치된 서술과 은유, 낭비를 찾아보기 힘든 묘사, 능청맞은 현실과 비현실의 결합,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조뿐 아니라 내용에 완벽하게 녹아있는 수학, 공학적 개념들. 내가 지적인 존재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중력의 무지개>가 내게 주는 것은 분명히 지적 쾌감이다. 나는 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핀천이 편집증적으로 숨겨놓은 퍼즐과 미로를 뒤집고 향유하면서 간만에 '진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비유와 찬사만 늘어놓은 소설 추천이라니, 꽤 무성의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중력의 무지개> 작품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고 공감을 얻으려면 '올해의 책'이라는 좁은 지면이 아니라 본격적인 분석을 행해야 하며, 독자로서가 아니라 비평가, 또는 소설이라는 기계를 설계하는 공학자의 입장에서 달려들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가히 포스트모던이라는 장르를 홀로 시작하고 완성한 다음 마무리지어버리는 '올해의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Penguin Press
제임스 조이스 (특히 <율리시즈>), 박상륭, 토머스 핀천. 이 세 사람의 소설가는 내 독서사에 잊을 수 없는 궤적을 남겼고, <중력의 무지개>는 그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토머스 핀천은 올해 신작 를 발표했는데, 나는 지금 번역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게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때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이라는 것도 가끔은 좋지 않을까.

재미있는 사실을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1973년에 SF와 판타지를 대상으로 하는 네뷸라 어워드에서 장편 부문에 후보로 올라간 바 있다. (그리고 그 해의 수상작은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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