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전공한 시인이자 번역가 전대호가 전남대학교에 재직중인 철학자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대한 장문의 반론을 '프레시안 books' 편집부로 보내왔습니다. '프레시안 books'는 일반적으로 신간을 중심에 놓고 서평 섹션을 꾸려가고 있습니다만, 한국 철학계에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하려는 도전적인 이 글이 가지는 가치를 좀 더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기사 지면에 배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논쟁에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편집자>
1.
철학에서 주체는 얼마나 중요할까? 다른 견해도 있겠지만, 적어도 칸트에서 헤겔까지 이어지는 독일 고전철학을 자기 생각의 바탕에 깐 사람이라면, 주체란 철학 전체가 응축된 블랙홀과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헤겔은 참된 것을 주체로 파악하고 진술하는 일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했다. 대체 주체가 무엇이기에 철학의 전부라 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일까? 비유를 들자면, 철학에서 주체는 기독교에서 구원, 불교에서 불성만큼 중요하다.
2.
김상봉은 서양 철학이 이야기해온 “홀로주체”를 비판하면서 그와 대비되는 “서로주체”를 참된 주체로 옹호한다. 홀로주체란 무엇일까? 우선 그것의 상징은 나르시스다.
“너 없는 나르시스의 정신세계를 가리켜 우리는 홀로주체성이라 부른다.”(135쪽)
오로지 자기만을 바라보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전설 속 나르시스처럼, 홀로주체는 “타자적 주체 없는 세계에 홀로 군림하는 주체”(166쪽)다. 더 깊이 분석해서 홀로주체의 근본 구조와 특징을 밝혀내면 “홀로주체성은 (…) 자기관계와 자기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 (…)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234쪽)이다. 김상봉은 이런 홀로주체가 서양 철학의 역사 전반에 스며들어있다고 본다. 근대를 넘어 니체의 철학에서도 발견되는 서양 철학의 변함없는 근본 특징은 “이제나저제나 자기만을 욕구하는 아집 (…) 집요한 홀로주체성”(133쪽)이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자아가 홀로주체성 속에서 자기의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하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161쪽)
“요컨대 철학의 체계 자체를 철두철미하게 만남의 이념 위에 세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170쪽)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보듯이, 김상봉의 의도는 기존 주체 이론의 보완이 아니라 혁신이다. “서양적 주체성은 지양되고 극복되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33쪽) 그는 서양적 주체성, 곧 홀로주체성을 밀쳐내고 “새로운 주체성의 이념”(233쪽)을 확립하고자 한다. 홀로주체성은 아예 틀렸거나 결함이 있는 개념이라는 뜻일까? 그렇다. 최소한 결함이 있다. 그래서 그는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의식”(267쪽)을 이야기하고 “온전히 내가 된다”(248쪽)는 것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이처럼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서양적 홀로주체를 비판하고 한국적 서로주체를 새롭고 온전한 주체로 옹호하는, 일종의 편 가르기 구도를 기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편 가르기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개념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상실”(203쪽 등)이다. 김상봉이 보기에 한국인은 역사에서 진정한 ‘자기상실’을 겪어본 반면, 서양인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선구적으로 시도하는 한국인의 주체 이론은 오만한 서양인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한국인의 주체 이론은, 자기상실을 겪어본 사람들의 이론답게, 주체성과 자기상실을 뗄 수 없게 연결해야 한다. 서양인의 주체 이론에서도 “자기거리”(203쪽 등), “자기분열”(204쪽 등), “자기부정성”(203쪽 등) 등의 부정적 측면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이 서양적 개념들은 진정한 자기상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자기상실’은 김상봉이 강조하는 ‘만남’의 의미를 알려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가 “주체성은 그 자체로서 만남”(248쪽)이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기상실을 동반한 만남’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자기를 상실할 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자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만남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린 민족이라 하여 슬퍼할 필요는 없다.”(289쪽) 이런 의미에서,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이론은 “자기상실 속에서의 자기실현”(233쪽)에 관한 이론이다. 그는 ‘자기상실을 동반한 만남’을 서양 철학의 혁신을 위한 열쇠요, 한국 고유의 철학을 위한 주춧돌이요, 이 겨레가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기 위한 돌파구로 내놓는 것이다. 이 정도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해야 할 이 만남의 성격을 알려주는 다른 표현들은 “하나 됨”(248쪽), “일치”(248쪽), “결속”(299쪽), “모심”(295쪽 등), “섬김”(295쪽 등), “배움”(296쪽 등), “매혹”(230쪽 등) 등이다. 그리고 만남의 결과는 공동체다. 김상봉이 말하는 만남은 “더불어 고통받고 더불어 세계를 형성하는 능동적 주체들의 공동체”(18쪽), “모두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모든 타자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생성되는 공동체”(300쪽)를 낳는다. 이로써 체계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저자는 그런 공동체의 실현을 꿈꾸며 책을 마무리한다. 여기까지가 <서로주체성의 이념>에서 내가 주목하는 주요 내용이다. 이제 간단히 내 소감을 밝히겠다. 나는 “주체성은 그 자체로서 만남”(248쪽)이라는 김상봉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 그러나 어떤 ‘만남’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느냐 하는 점에서 김상봉과 나는 퍽 다르다. 김상봉의 “만남”이 “결속”으로 특징지어진다면, 내가 생각하는 ‘만남’의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으로는 “결속”보다는 차라리 ‘싸움’이 더 적합하다. 나는 이를테면 노조 대표와 경영자의 만남, 저자와 서평자의 만남을 나름의 주체 이론의 핵으로 삼는다. 또한 나는 ‘주체성 그 자체인 만남’이 “자기상실”을 동반한다는 김상봉의 생각에도 동의할 수 있다. 단, 그가 “자기상실”을 나와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고 전제할 때만 그렇다. 그런데 내가 해석하기에 김상봉은 “자기상실”을 나와는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듯하다. 아마도 이 문제가 이 글 전체의 핵심일 것이다. 이제 김상봉의 야심찬 주체 이론에 대해서 크게 네 가지 의문을 제기하겠다. 위에 열거한 그의 과제 네 가지와 연계된 나의 질문들은 이러하다. 1)왜 서양을 굳이 밀쳐내는가? 2)서양적 홀로주체성에는 없고 한국적 서로주체성에는 있다는 “자기상실”은 정확히 무엇인가? 3)왜 시종일관 지배/예속의 구도에 집착하는가? 4)철학자 김상봉은 주체 아닌 자를 주체로 만들 생각인가? 저자가 설정한 과제 하나하나에 의문을 제기하는 셈이니, 결코 만만한 서평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처구니없는 우려를 표하고자 한다. 저자가 말하는 서로주체성이 현실적인 공동체에 의존한다면, 그 서로주체성은 각 개인이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상충할 위험이 있다. 물론 김상봉의 정치적 발언과 활동을 감안하면, 이 우려는 정말 어처구니없다고 일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오해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래서 그 자신도 문득 “너희들[노예적 정신들]에게 한 말이 아니야!”(239쪽)라고 쏘아붙일 필요를 느낀다면, 차근차근 풀어헤쳐 약점이 될 만한 자리들을 드러내고 점검해야 한다.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우려를 정말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올바른 길이다. 본격적인 해체 작업에 앞서 예비 작업이 필요하다. 다루려는 과제가 워낙 크고 밀도가 높아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난해하기 마련인지, 주체도 예외가 아니어서, 주체를 논하는 것은 무한히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길을 잃기 십상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앞뒤가 다른 말을 하다가 끝내 말을 잃게 되는 불상사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꼼꼼히 살펴보면, 중요하고 난해한 대목들에서 김상봉도 스텝이 꼬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거리” 혹은 “자기부정성”(203쪽 등)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수동성”(176쪽 등)이 나쁜 것이었다가 좋은 것으로 바뀌고 또 거꾸로 바뀌면서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사실 주체라는 논제 자체가 그렇게 꼬이고 얽힌 논의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측면이 확실히 있다. 오죽하면 헤겔은 주체의 구조를 “모순”이라고까지 불렀겠는가! 그러므로 전설 속의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에 의지하듯이, 일단 나의 주체 이론을 정리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갈 필요가 있다. 서평자로서 부적절한 짓일 수도 있겠으나, 어쩔 도리가 없다. 주체라는 미로에 들어가면 거의 누구나(아마 헤겔조차도!) 헤맬 뿐더러, 둘이 들어가면 두 배로, 셋이 들어가면 세 배로 헤매기 마련이어서 그렇다.
내가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으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나의 주체 이론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헤겔의 주체 이론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이, 김상봉은 보기 드물게도 헤겔의 주체 이론에 매우 우호적이다. 그가 아는 한, “서양의 철학자들 가운데서 이런 서로주체성의 통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이가 바로 헤겔이다.”(249쪽) 물론 나는 이 말에 곧이곧대로 동의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헤겔을 어떻게 해석하고, 누구의 해석이 맞느냐가 아니다. 김상봉이 자신의 주체 이론을 내놓은 것처럼 나도 나의 주체 이론을 내놓고 대화하는 것이 옳다. 내가 굳이 헤겔을 언급하는 것은 그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체 이론이 김상봉의 것과 번지수가 전혀 다르지는 않음을 미리 말해두기 위해서다.
다음 절에서 펼칠 알쏭달쏭한 철학적 논의를 우회하고 싶은 독자를 위해 나의 주체 이론을 요약해서 제시하겠다. 나에게 주체의 본질은 ‘시스템 안의 <나>와 시스템 밖의 <나>가 나누는 대화’다. 그러므로 주체 안에는 반드시 깊은 ‘균열’(시스템 안과 시스템 밖을 가르는 균열)이 내재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면에서 그 균열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대화하며 산다. 바꿔 말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체다. 이 말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심이 있다는 말,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 불성을 품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다음 절은 이 내용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대목이므로 매우 중요하지만, 부득이하다면 이 내용을 마음에 담아두고 4절로 건너뛰어도 좋다.
3.
주체 혹은 ‘나’란 자기를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다. 벌써 이 정의에서 주체의 본질이 자기관계(‘나’라고 부르는 ‘나’와 ‘나’라고 불리는 ‘나’ 사이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자기관계일까? 이 정의는 자기관계를 ‘부름/불림 관계’로 특정한다. 그러나 굳이 따지려 들면, 어떤 식으로든 이미 자기관계가 맺어져 있으니까 ‘자기 부름’이 유효하고 정당하지 않겠는가?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원한다면 ‘자기의식’, 곧 ‘부름/불림 관계’에 선행하는 ‘의식함/의식됨 관계’를 더 근본적인 자기관계로 상정할 수 있겠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한다. 김상봉도 마찬가지다.
“주체성이란 다른 무엇보다 자기의식에 존립한다.”(180쪽)
하지만 ‘나’라는 자기관계를 ‘자기의식’으로 대표하는 것은, 무릇 새를 참새로 대표하거나 무릇 나무를 소나무로 대표하는 것처럼, 특정한 맥락을 전제하지 않는 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물론 그 맥락은 철학의 최후 정초(모든 철학적 주장을 떠받치는 마지막 기둥을 밝혀내는 일)와 얽혀있어서 대단히 중요하지만, 김상봉의 이론은 이 맥락을 대체로 언급하지 않고, 나 역시 이 글에서 굳이 철학의 정초 문제를 끌어들여 자기의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요컨대 자기의식, 곧 ‘내가 나를 알아챔’은 자기관계의 한 유형이며, 나는 이 유형을 기본으로 삼는 입장을 수용한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나’라는 자기관계의 유형이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점이다. 세상에 오만가지 자기관계가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예컨대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아마 일부 독자는 대번에 ‘이것은 자기관계가 아니잖아!’라고 반발할 것이다. 그런 독자에게 이렇게 반문하겠다. ‘작가/작품 관계’가 자기관계가 아니라면, ‘의식하는 나/의식되는 나 관계’는 자기관계가 맞는가? 이 둘째 관계에도 뚜렷한 균열이, 절대로 건널 수 없는 심연 같은 균열이 내재한다(이 균열을 김상봉은 “자기거리”라는 멋진 표현으로 부른다). 자기관계가 지극히 오묘한 것은 그 균열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균열 덕분에 성립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자기관계를 완벽하게 같은 ‘나’와 ‘나’ 사이의 관계로 상정한다면, 삼천대천세계에 자기관계는 없다. 알다시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자기관계도 ‘아버지(성부)/아들(성자) 관계’다. 불교에서는 아마 “보살/중생 관계”가 이와 유사할 것 같다. ‘작가/작품 관계’가 자기관계의 한 유형이라는 것에 여전히 의문이 드는 독자는 주변의 작가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작가에게 작품은 ‘세상에 내놓은 나’다. 그래서 ‘작가/작품 관계’는 자기관계가 맞다. ‘내 목숨처럼 소중한 작품’, ‘내 몸과도 같은 작품’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과장은 있을지언정 비논리적인 헛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작가/작품 관계’를 해명하지 못하는 논리가 틀려먹은 것이다. 물론 작품에 작가가 오롯이 담기는 경우는 당연히 없다. 작품을 내놓는 순간, 작가는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한다. 즉, 작가와 작품 사이에 ‘자기거리’가 발생한다. 그렇다, 무릇 자기관계는 자기거리를 품기 마련이다. 김상봉의 말마따나 “자기의식은 언제나 자기거리의 의식”(203쪽)이다. 그 자기거리에 여러 감정이 끼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개의 작가는 자기 작품이 한편 자랑스러우면서도 몹시 부끄럽다. 자랑스러움은 순간이고, 부끄러움은 오래 간다. 하지만 길게 보면 자랑스러움도 부끄러움도 덧없다. 남는 것은 세상에 나와 있는 작품과 그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물러선 작가가 맺은 자기관계뿐이다. 또 다른 예로 ‘나’와 ‘나의 행동’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아마 이번에는 많은 독자가 이 관계를 자기관계로 인정하지 싶다. ‘나’가 누구인지를 ‘나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할 만하니까 말이다. ‘나’는 곧 ‘나의 행동’이다. 그런데 이 자기관계, 곧 ‘나/나의 행동 관계’에도 자기거리가 내재할까? 지금 거론되는 것이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라면, 이 자기관계에도 당연히 자기거리가 내재한다. 도덕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이 자기거리는 ‘나’와 ‘나의 행동’을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나’와 ‘이렇게 행동하는 나’로 고쳐 쓰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둘 사이에 분명히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 거리가 있을 때만, ‘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나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나의 행동’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참고로 ‘나’가 뇌병변 장애인이라면, ‘나의 얼굴 찡그림행동’은 도덕과 무관한 자연현상일 뿐이다. 이 경우에 ‘나/나의 행동 관계’는 도덕적 자기관계와 무관한 또 다른 유형의 자기관계로 보아야 한다. ‘나’와 ‘나의 행동’ 사이에 ‘자유’라는 이름의 자기거리가 있을 때만 ‘나’가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실은 법체계와 일상의 상식이다. 다르게 행동할 수 있으므로 ‘나’는 ‘나의 행동’과 다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행동’을 ‘나’로 (요컨대 자기관계를)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헤겔이 즐기는 축약표현을 흉내 내자면, ‘나’는 ‘나의 행동’을 떼어놓음과 동시에 거둔다(aufheben).
“이처럼 생각이 모든 생각되는 대상과[,] 주체와 객체로서 분리되고 나면 우리는 객관적 대상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얻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린다.”(113쪽)
뽕짝만큼 자주 들어 익숙하지만 실은 애매하기 그지없는 이 말 속에 근대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도사리고 있다. 한없이 복잡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 요점만 말하겠다.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은 분리인 동시에 연결인 묘한 관계가 도처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앎과 관련해서 거론되는 주객관계도 그런 묘한 관계의 한 예다. 위 인용문에서 “생각”이 ‘대상에 대한 생각’이고 “생각되는 대상”이 ‘그 대상 자체’라면(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위 인용문은 요령부득이다!), 이 두 항 사이에서도 분리와 연결의 이중주가 일어난다. 바꿔 말해 ‘생각된 대상’(=‘대상에 대한 생각’)과 ‘있는 그대로의 대상’ 사이에서 분리와 연결의 운동이 일어난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쉽게 설명할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생각된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하곤 한다. 거꾸로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다시 ‘생각된 대상’으로 재조명되기도 한다. 근대철학이란 주체(‘생각된 대상’)와 객체(‘있는 그대로의 대상’) 사이의 이런 넘나듦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사상이다. 어떻게(혹은 무슨 권리로) 주체가 객체의 노릇을 하고, 또 거꾸로 객체가 주체의 노릇을 하는가? 이것이 근대철학의 화두다. 근대철학이 보는 주객관계는 기본적으로 이런 넘나듦 관계다. 근대철학이 주체의 객체 노릇이나 객체의 주체 노릇을 원천 봉쇄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다. 따라서 근대철학이 상식적인 진리 개념인 주객일치를 원천 봉쇄한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오해다. 하지만 김상봉이 주객관계를 밀쳐내는 더 큰 이유는 그가 이 관계에서 지배/예속을 연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주객관계는 기본적으로 불평등관계다.“인간은 (…)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172쪽)
김상봉에게 객체 되기는 “전락”이다. 다음 대목은 주객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더 상세히 보여준다.
“주체는 (…)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235쪽)
“활동의 능동적 주체”(261쪽)와 “그 활동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객체”(261쪽)라는 표현에서는 김상봉의 주객관계가 능동/수동 관계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는 자기관계를 주객관계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나의 의식 속에서 내 앞에 마주 선 나를 하필 대상과 객체로서 간주하는 것은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타성에 지나지 않는다.”(267쪽)
요컨대 김상봉은 주객관계를 일종의 주종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둘러보면 김상봉뿐만이 아니다. 근대를 비판하겠다고 나서는 지식인들이 주객관계를 이야기한다면서 주종관계를 이야기하는 경우를 흔히 접할 수 있다. 대체 어떤 주체와 어떤 객체를 염두에 두고 있기에 이런 어법을 구사하는 것일까? 이번에도 복잡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 내 생각을 제시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객체는 ‘나’의 작품, 바둑을 두는 ‘나’가 두는 한 수, ‘나는 번역가다’에서 ‘번역가’다. ‘나’는 ‘나의 작품’을 지배하고, ‘나의 작품’은 ‘나’의 지배를 받는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분도 있겠지만, 이번에도 주변의 작가에게 물어보라. 오히려 ‘나의 작품’이 ‘나’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작가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에는 ‘나’가 ‘나의 작품’을 지배한다는 말이 부분적으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나의 작품’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황, 즉 ‘나의 작품’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진정한 주객관계는 ‘나’와 ‘나의 작품’이 분리되었을 때 성립한다. 이 상황에서 ‘나의 작품’이 ‘나’의 지배를 받는가? 예컨대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김상봉의 지배를 받는가? 천만에! 이 작품은 김상봉의 손을 떠나 세상에 나와 있은 지 오래고, 김상봉은 오히려 이 작품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처지다. 보라, 나처럼 개뿔도 없는 놈이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물어뜯을 때,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새까맣게 몰려들어 이 역작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김상봉은 속수무책이다. 설령 그가 예컨대 이 글의 주요 논점들은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진의’와 무관하다고 맞받아치면서 자신의 순수한 ‘주체’를 야수의 이빨로부터 보호하더라도, 세상에 나와 있는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이런 식으로 갈가리 찢기면서 나름의 삶을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그가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세상에 내놓은 것 자체가 이런 능욕을 감수하겠다는 선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객체화’의 전형이며 그 결과로 나오는 ‘객체’는 ‘세상에 내놓은 나’다. ‘나의 한 수’도 마찬가지다. 바둑돌을 내려놓자마자,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그 한 수가 기사를 지배한다. ‘나는 번역가다’에서 ‘번역가’가 ‘나’의 지배를 받는가? ‘나’가 번역 일을 할 때, ‘번역가로서의 나’가 ‘나’의 지배를 받는가? 그럴 때 ‘나’는 능동적이고, ‘번역가’는 수동적인가? 억지스러움을 무릅쓰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대답할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진실은 ‘나’가 ‘번역가’로서 활동한다는 것이며, 이때 ‘나’와 ‘번역가’가 맺은 주객관계는 지배/예속, 능동/수동, 적극/소극과 무관하다. 김상봉이 “나를 의식하되 오직 사물화되지 않는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을 추구하고 “나의 의식 속에서 내 앞에 마주 선 나를 하필 대상과 객체로서 간주하는 것은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타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를 주객관계의 전형으로 보기 때문인 듯하다. 만일 그가 자신과 <서로주체성의 이념> 사이의 관계를 주객관계의 전형으로 보았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주객관계로서 자기관계의 전형은 ‘나를 세상에 내놓는 나’와 ‘세상에 나와 있는 나’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일컬어 ‘자기 객체화’라고 하며, 이는 ‘자기실현’과 동의어다. 시를 써서 세상에 내놓지 않는 시인은 시인이 아닌 것처럼, 자기 객체화를 하지 않는 ‘나’, 자기를 세상에 내놓지 않는 ‘나’는 ‘나’이기는커녕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관계가 주객관계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 둘째, 자기관계를 맺은 두 항을 ‘보편적인 나’와 ‘특수한 나’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 규정에 잘 부합하는 예로 앞서 언급한 ‘나는 번역가다’에서 ‘나’와 ‘번역가’ 사이의 관계를 다시 들 수 있다. 번역가이지만 또한 그 이상인 ‘나’가 보편이라면, 번역가로서의 ‘나’는 특수다. 그러므로 ‘나/번역가 관계’는 ‘보편/특수 관계’다. 그렇다면 이 예는 주객관계로도 규정되고 ‘보편/특수 관계’로도 규정된 셈인데, 이런 중복은 모든 자기관계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세상에 나와 있는 나’는 ‘특수한 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나(위에서 ‘나를 세상에 내놓는 나’라고 부른 나-주체)는 ‘보편적인 나’로서 ‘특수한 나’와 분리되고 연결된다. 저 앞에서 ‘생각’과 ‘대화’를 논하면서 나는 이미 ‘보편적인 나’를 언급한 바 있다. 도덕적 자유를 논하는 대목에서도 ‘보편적인 나’가 사실상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특수한 나’의 행동을 제어하고 책임지는 ‘나’에게는 ‘보편적인 나’라는 명칭이 잘 어울린다. ‘개인 안에서 이런 <보편적인 나>와 <특수한 나>가 늘 대화한다’라는 사태를, 철학에서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불성’이라는 개념으로,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상식에서는 ‘양심’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고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들의 언어 사용에서 ‘주객관계’가 상당히 오염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이라는 개념도 때가 잔뜩 끼어 ‘억압’의 냄새를 풍기곤 한다. 김상봉도 서양철학을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나로부터 소외된 초자아”(122쪽), “이름만 ‘나’일뿐, 나와 상관없는 어떤 초월적인 초자아”(122쪽), “자아로부터 분리되어 자립적인 초자아”(123)를 언급한다. 나는 “개인으로서의 나”로부터 분리된 ‘보편적인 나’를 과연 어떤 서양 철학자가 이야기했는지 묻고 싶다. 김상봉은 칸트와 독일 관념론자들이 이야기했다고 해석하는 모양인데, 나는 이런 해석을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서는 꽤 많이 들었으나 적어도 칸트와 헤겔을 이렇게 해석할 길은 정녕 없다고 단언한다. ‘나’는 ‘특수한 나’와 ‘보편적인 나’ 사이의 자기관계다. 이 관계를 벗어난 ‘특수한 나’는 아예 ‘나’가 아니다. 이 관계를 벗어난 ‘보편적인 나’도 마찬가지다. 자기관계에서 이탈한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아’라는 표현을 걸칠 자격이 없으므로 그냥 ‘권력자’나 ‘억압자’라고 불러야지 ‘초자아’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나’를 높이면서 ‘특수한 나’를 낮추고 나-주체를 주목하면서 나-객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워낙 강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나는 더 중립적인 개념 쌍을 대안으로 내놓겠다. 그것은 ‘시스템 밖의 나’와 ‘시스템 안의 나’다. ‘시스템 밖의 나’는 ‘나-주체’ 혹은 ‘보편적인 나’에 해당하며 가치중립적이다. ‘시스템 안의 나’는 ‘나-객체’, ‘특수한 나’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꽤 장황하게 개관한 나의 주체 이론을 요약할 수 있다. 나에게 주체란 ‘시스템 밖의 나’와 ‘시스템 안의 나’ 사이의 자기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 밖의 나와 시스템 안의 나가 나누는 대화’다. 모든 각자가 이런 주체라는 것은 민주공화국의 근본 전제일 뿐더러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기도 하다. 모든 각자가 주체라는 것은, 각자가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것, 각자 안에 항상 이미 불성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김상봉은 <홀로주체성의 이념>에서 “홀로주체”와 “서로주체”를 구분하고 전자를 비판하면서 후자를 옹호했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의 논리에 설득당하지 않았다. 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시스템 안에 있든지 또한 그 시스템 밖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시스템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져 항상 내적으로 대화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내가 헤겔을 비롯한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깨쳐 도달한 믿음이며, 우리가 이미 속한 민주공화국의 근본 전제다. 굳이 “홀로”와 “서로”를 넣어서 표현하자면, 나의 주체는 항상 이미 서로이며 홀로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특수한 너와 만나든 말든, 공동체에 속하든 말든, 나의 주체는 김상봉이 추구하는 “서로주체”의 자격을 항상 이미 갖췄다. 나의 주체는 현실적인 공동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서 어떤 공동체 안에 있든지 또한 그 공동체 밖에 있기 때문에, 나의 주체는 보편적인 인권, 인간 존엄, 불성, 양심을 가진 놈, 구원받은 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결코 벗을 수 없는 놈이다. 이제부터 내가 김상봉의 주체 이론에 대해서 제기한 네 가지 질문을 짚어가면서 구체적인 비판을 시작하려 한다. 비판의 근간은 이미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남은 일은 되도록 쉬운 말로 조목조목 따지는 것뿐이다.4.
1)왜 서양을 굳이 밀쳐내는가? 김상봉은 매우 솔직한 저자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라.
“그런[자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선생들 아래서 남이 그린 자화상을 학습했을 뿐 자기의 얼굴을 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자기를 그리기 위해서는 자기와 남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가 선행적 과제였다.”(20쪽)
요컨대 그의 서양 밀쳐내기는 그가 개인적 경험에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여 스스로 짊어진 과제다. 그에게 이 과제가 얼마나 절실할지 능히 짐작한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제를 공유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나는 “그런 선생들”이 가르쳐준 남의 자화상이 가짜일 수 있다고 느꼈다. 실은 많은 선생들이 가짜 서양철학을 가르쳐왔다고 느꼈다. 내가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면, 서양이 동양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고, 헤겔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기독교의 구원이 불교의 불성과 다르지 않고 심지어 내가 철학 따위 공부하지 않아도 늘 느끼는 나의 양심과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고 느꼈다. 나도 김상봉처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땅의 철학 선생들이 의도적이거나 본의 아닌 사기꾼일 수 있다는 경계심을 일찌감치 품었다. 그래서 나는 서양을 밀쳐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진리가 진짜 진리라면 이미 내 안에도 스며들어 있다고, 내가 이미 진리를 품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남이 말하는 진리에 혹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밀쳐내지도 않는다. 진리가 어찌 둘이겠는가!“우리는 독일 관념론이 주체의 자기거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마치 우리의 자기상실과 자기분열의 아픔을 대신 말해주는 철학이라는 환각에 빠지게 된다.”(204쪽)
나는 김상봉이 자꾸 “아픔”이나 “고통”(18쪽 등) 같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의 “자기상실”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감정은 제쳐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냉정하게 보면, 이런 의미의 “자기상실”은 ‘내가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뜻하는 듯하다. 그런데 김상봉은 이런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서양적 주체성에서 박탈한다. 이는 그가 서양적 주체성의 ‘자기거리’를 사실상 ‘거리 없음’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옳은 해석일까?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요컨대 “자기상실”을 ‘대단히 심각한 균열’로 이해하면, 김상봉의 서양적 주체 비판과 한국적 주체 옹호는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지 않은 주체’ 비판과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은 주체’ 옹호로 귀착한다. 바꿔 말하면 ‘자기상실과 무관한 주체’ 비판과 ‘자기상실과 뗄 수 없게 얽힌 주체’ 옹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한 나의 응답을 새삼 요약하면 이렇다.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지 않은 주체’는 아예 ‘주체’가 아니며, 서양사상은 대체로 이런 주체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은 주체’가 서양철학 주류의 탐구 과제였다. 특히 헤겔이 일관되게 이야기한 ‘주체’는 확실히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은 주체’다. 대관절 왜 김상봉은 서양적 주체의 ‘자기거리’를 ‘거리 없음’으로 해석하는 것일까? 그의 자상한 설명을 들어보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서양 근대 철학이 주체의 자기거리와 자기의식의 타자성을 문제 삼을 때, 그들이 알고 관심을 갖는 타자는 오직 주체 내적 타자, 즉 반성 속에서 정립되고 반성 속에서 지양되는 타자적 자기라는 사실이다.”(210쪽)
나는 “지양”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또 다른 설명에도 이 단어가 나온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들 철학자들[서양 근대 철학자들]이 ‘…아닌-나가 나와 같다’고 말할 때, 아닌-나란 주체가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 스스로 정립한 타자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처럼 타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주체 자신 속에서 지양될 수 있다.”(211쪽)
김상봉의 “지양”은 철학계의 통상적인 어법에 따라 헤겔의 “아우프헤벤(Aufheben)”을 옮긴 번역어일 텐데, 놀랍게도 그는 헤겔의 “아우프헤벤”과는 사뭇 다른 뜻으로 “지양”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지양”은 간단히 ‘없앤다’는 뜻으로 읽힌다. 둘러보면 이것은 현학적인 한국어 사용자들이 두루 쓰는 어법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경우에 무언가를 ‘지양해야 한다’는 말은 그것을 없애거나, 밀쳐 내거나, 그치거나 하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헤겔은 “아우프헤벤”이 이런 뜻이 아니라고, 이 단어가 가리키는 활동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다 가졌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앞에서 나는 아무 설명 없이 ‘거두다’라는 표현을 몇 번 썼다. 새삼 설명하자면, ‘거두다’는 내가 ‘아우프헤벤’의 번역어로 선택한 멋진 우리말이다. 안중근이 이토의 목숨을 거둘 때, ‘거두다’는 부정적인 색채가 짙다. 반면에 구호단체가 고아들을 거둘 때, ‘거두다’는 긍정적인 색채가 짙다. 나는 헤겔의 “아우프헤벤”에 분명히 들어있는 이 두 번째 긍정적 의미를 간과하지 않는 것이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거두다’라는 번역어가 ‘지양하다’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헤겔이 관심을 가지는 타자가 “오직 주체 내적 타자”라는 김상봉의 말은 지당하다. 그 타자가 “지양되는(거둬지는)” 타자라는 말도 대체로 옳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지양(거둠)”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주체 내적 타자’는 주체가 항상 이미 거둬 품고 있는 타자다. 구호단체가 거둔 고아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듯이, 주체가 거둔 타자도 끊임없이 주체와 대화하며 잘 산다. 우리가 ‘시스템 안의 나’를 출발점으로 삼아 논의를 펼친다면, 그 ‘나’가 거둔 ‘주체 내적 타자’는 ‘시스템 밖의 나’다. 즉, ‘나’의 보편적인 측면, 가능적인 측면, 불성, 양심 등이다. 거꾸로 ‘시스템 밖의 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그 ‘나’가 거둔 타자는 ‘시스템 안의 나’다. ‘나’의 특수한 측면, 현실적인 측면, 중생심 등이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나’가 모든 각자 안에 ‘거둬져 있음’이라는 형식으로 들어앉아 끊임없이 대화한다는 것이 내가 헤겔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깨친 주체 이론의 요체다. 김상봉의 “자기상실”이 ‘내가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뜻한다면, “자기상실”은 한국적 주체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특징, 모든 주체의 근본구조다. 그러므로 김상봉이 “자기상실”을 한국인만의 몫으로 규정한 것에 나는 반대하는데, 혹시 그가 말하는 “자기상실”의 의미를 내가 오해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무슨 말이냐면, 김상봉의 “자기상실”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때때로 일상에서 접하는 어법대로, “예속과 수동성”(176쪽)을 뜻하는 듯도 하다.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런 의미의 “자기상실”은 “수난”과도 잘 어울린다.“주체성의 상실은 언제나 수동적 당함 곧 수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177쪽)
만약에 김상봉의 “자기상실”이 정말로 이런 의미라면, 나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예컨대 이런 문장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철학이 할 일은 정신이 예속의 상태를 벗어나 자기를 찾고 주체성을 회복하도록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다.”(28쪽) 물론 일상 언어에서는 납득할 만한 문장이지만, ‘주체’의 본질을 ‘자기관계’(혹은 “자기의식”)로 전제하고 펼치는 김상봉의 철학적 논의에서는 이런 문장이 적잖은 혼란을 일으킨다. ‘지배/예속 관계’에서 ‘지배자’, 또는 ‘능동/수동 관계’에서 ‘능동자’는 철학적 의미에서의 ‘주체’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김상봉이 한편으로 밀쳐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계속 참조하는 헤겔과 더불어 내가 말하는 주체는 ‘지배/예속 관계에서 지배자이더라도 또한 그 관계 바깥에 있는 놈’이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지배/예속 관계에서 예속자이더라도 또한 그 관계 바깥에 있는 놈’이 주체다. 지배자냐, 예속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특수한 나’일 뿐이고, 주체란 그런 ‘특수한 나’로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나’와 대화하는 놈이다. 수동자든, 능동자든, ‘능동/수동 관계’ 전체를 성찰할 줄 아는 놈이 주체라는 얘기다. 김상봉 자신도 잘 알듯이, 주체는 근본적으로 자기관계다. ‘특수한 나’가 예속자가 되는 것과 ‘특수한 나/보편적 나 관계’가 존립하는 것은 일단 별개의 사안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질문이 제기된다. 3)왜 시종일관 지배/예속의 구도에 집착하는가? 김상봉은 서양을 지배자로, 한국을 예속자로 보는 듯하다. 실제로 그가 말하는 “자기상실”은 일반적인 ‘예속됨’ 중에서도 특히 ‘서양에 예속됨’을 뜻하는 경향이 강하다.“쉽게 말해 보편화된 서양 정신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자기 본래의 세계관을 버리고 서구적 주체성을 내면화한다. 그리고 이전의 자기를 서양적 눈으로 객체화하고 타자화한다. 이것이 타자적 정신 속에서의 자기상실이다.”(214쪽)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자는 개인이든 민족이든 먼저 자기의 철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181쪽)
민족을 걱정하며 철학의 중요성을 외치는 그를 보노라면, 어이없게도 모세가 떠오른다. 예속된 민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다는 모세처럼 그도 주체로서 서지 못한 우리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것일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어린 싱클레어는 동네 깡패한테 약점을 잡혀 ‘빵셔틀’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예속”이다. 꿈속에서도 그 깡패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시로 경기를 할 만큼 “수난”을 당한다. 그런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누군가를 무서워한다면, 그건 네가 그 사람에게 너 자신을 지배할 힘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야.” 만일 싱클레어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는 말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데미안의 말은 너의 “수난”은 너 스스로 선택한 바라는 뜻이다. 위로는커녕, 숫제 싱클레어의 상처를 후벼 판다. 그러나 나는 이 냉혹한 말에 ‘너는 항상 이미 주체야. 주체답게 살아’라는 ‘좋은 소식’이 담겼다고 이해한다. 모든 각자의 책임을 일깨우는 이 말을 ‘기뻐하세요,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라는, 혹은 ‘자네가 부처일세’라는 복음으로 이해한다. 김상봉은 책의 결론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대답은 열어놓는다.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모든 구성원이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참여하게 해주는 지평이나 기제가 무엇인가[?]”(312쪽) 나는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런 보편적 주체적 참여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각자가 서로를 아무 조건 없이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시스템 안에 있든지 또한 그 시스템 바깥의 허공을 품고 그 허공과 대화한다는 것, 그렇게 이미 대화하는 자기관계로서 타인과 만나 더 크고 현실적인 차원의 대화하는 자기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값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어렵게 말했지만, 모든 각자의 양심을, 인간 존엄을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는 쉬운 말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고맙게도 지금 여기는 이미 민주공화국, 인간 존엄에 대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인정을 주춧돌로 삼은 공동체다. 이것이 내가 <서로주체성의 이념>의 부름을 듣고 내놓는 응답이다.나는 철학이 도처에 스며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김상봉은 진정한 한국 철학의 부재를 한탄하지만, 나는 한국어 사용자들의 삶 자체가 이미 한국 철학이라고 본다. 철학이 꼭 따로 있어야 하나? 이 질문은 진리가 어딘가에 따로 있어야 하느냐는 물음과 맥이 닿는다. 헤겔의 말마따나 진리는 전체다. 철학자의 역할은 도처에서 항상 이미 작동하는 진리, 철학, 곧 삶을 읽어내는 것뿐이다. 물론 이 역할이 거대한 자기관계의 완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는 역시 모세보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다. 나는 철학자로 국한될 수 없는 김상봉의 정치적 활동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지지한다. 나 역시 철학자로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5.
김상봉은 책의 머리말 위에 김남주의 시구 두 행을 따다 붙였다.
오 자유여
봉기의 창끝에서 빛나는 별이여
항상 이미 모든 각자가 짊어진 허공의 무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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