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과학에 의해 알려진 바로는 '진화'란 인위적이거나 고의적인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다. 진화는 오랜 시간에 걸친 변이의 누적이며, 생물의 복잡성은 환경이라는 요소 때문에 선택될 뿐이다(유전자의 이기성/이타성 논쟁은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런 진화가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전반을 지배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시각을 상상과 빚어내는 SF에서 '진화'를 주된 소재나 주제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작가 고마츠 사쿄의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1966 한국어판 2012, 이동진 옮김, 폴라북스 펴냄) 역시 핵심 주제가 진화와 직결되는 SF다.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있는지 밝히면 곧바로 작품의 전체 내용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 서평에서는 도입부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얼핏 시간 여행을 암시하는 프롤로그를 뒤로 하고 이야기는 현대로 넘어온다. 이론물리연구소 조교수인 노노무라는 주임교수를 통해 사학자인 반쇼야 교수를 알게 된다. 반쇼야는 노노무라의 눈앞에 이상한 모래시계를 내놓는다. 이 모래시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달리 똑바로 세워 모래를 떨어뜨려도 위쪽에 쌓여있던 모래가 줄어들지 않는다. 흘러내린 모래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알 길이 없다. 노노무라는 이 시계가 4차원이나 무언가 다른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그 시계가 백악기 시대의 지층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모래시계처럼 시대와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물건은 하나가 아니었다. 세계 곳곳, 여러 고대 지층이나 유물에서 설명이 불가능한 물건이 연이어 발견되는 상황이었다. 노노무라는 반쇼야와 함께 그런 장소 중 하나인 고분으로 향하지만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듯 보이는 인물의 습격을 받는다.
그리고 노노무라의 주임교수, 반쇼야 교수, 노노무라를 비롯해 문제의 모래시계 및 고분과 관련이 있었던 인물들은 모두 실종되거나 사망한다.
이야기는 곧장 300년 뒤로 가속한다. 이 시대에는 전자두뇌가 인류의 모든 기록과 정보를 보관하고 사용할 수 있다. 21세기부터 갑자기 빈번해진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사물에 관한 기록 역시 전자두뇌들이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텔레파시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면서 그 기록들을 파괴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또 새로운 사건이 등장한다. 태양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는 시기가 도래하면서 인류는 소수의 생존자들만을 지구 밖으로 내보낸다. 모두가 지구의 최후를 기다리는 순간,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난다. 외계인들은 지구인을 보존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피한 인간들을 어딘가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모호하다. 이처럼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는 각 장마다 간극이 큰 시대의 특정 사건을 별 연관성 없이 보여준다. 적어도 작품을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목차에서 어느 정도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에필로그가 둘인데, 순서상으로 먼저 등장하는 에필로그는 2장과 3장의 사이에 있으며 '에필로그(두 번째)'라고 표시되어 있다. 작품의 맨 마지막에 선보이는 에필로그는 '에필로그(첫 번째)'이다. 각 에필로그의 내용과 순서에 프롤로그에서 발견하게 되는 암시를 더하면 이 작품이 적어도 한 번은 순환하는 시간여행(또는 시간개입)의 고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야기 구조의 복잡성은 사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평행우주'나 '다중우주'같은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여러 가능성으로 중첩되어 있다가 분기하는 우주까지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다소 뜬금없이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로 논쟁을 한다. 특히 의식과 진화와 우주 전체에 관해서. 마지막 쪽을 덮으면 그 논쟁이 거시적인 주제 때문에 필요한 요소였다는 점을 깨닫게 되지만, 읽는 동안에는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동한다. 작가는 독자가 그런 어려움을 겪으리라 짐작하고 빠른 전개와 꽤 숨 막히는 추격전을 통해 효과적인 추진력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뒤엉키면서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떨어지는 맛이 있으며, 거칠고 투박하다는 감상이 남게 된다. 그러면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는 그런 불친절함과 단점을 감수하고 읽을 만한 SF일까? 필자가 내린 답은 긍정이다. 인류의 다음 모습을 그린 최신 SF들은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이라는 가상의 시점을 제시하면서 기계와 한 몸이 된 인간, 우주로 뻗어나간 인간을 설득력 있게 그린다. 또한 현대 과학이 열심히 캐내고 있는 뇌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마음껏 활용하고 정보이론까지 동원해서 의식의 물리성을 펼쳐 나아간다. 하지만 그런 세밀함과 명징성은 SF가 비교적 최근에 다다른 경지다. 80년대 까지, 특히 사이버펑크 조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의 SF들은 인류의 다음 세대나 의식의 다음 단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비유나 유추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술이 발달하면 인간의 의식이 무한히 확장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우주에 내재하는 신경구조의 말단이다'라는 표현은 어떤가? 몇몇 걸작을 제외하면 인류 진화를 다루는 옛 SF들은 대부분 그런 한계에 머물렀다. 1966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도 그 점은 별로 다르지 않다 (인간이 우주 신경 구조의 말단이라는 예시도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에서 인용했다). 대신 마지막까지 머뭇거리지 않는 속도감, 얼버무리는 대신 작가가 알고 있는 과학지식으로부터 유추한 이론을 통해 최대한 전달해보려는 노력은 박수를 쳐줄 만한 쾌감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발표 연대를 감안하면 바로 그 점이 인류의 미래를 다룬 영미권 고전 SF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장점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작품을 읽어볼 예정이신 독자께 염두에 두십사 부탁하고픈 점이 있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는 진화와 '초인'이라는 주제를 직결시켜놓고 있음에도 초인에 대한 고찰은 크게 부족한 편이다. 이 역시 다른 초인 관련 SF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올라프 스태플든의 고전 <이상한 존>(김창규 옮김, 오멜라스 펴냄)과 비교해 봐도 좋을 것이다. 초인을 다루는 작품들은 보통 초인과 일반인의 대립, 초인의 고뇌 정도를 보여주고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예로는 전투 능력과 사고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으로 각종 소품을 빚어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 노벨들이 있다(혹시 스즈키 고지의 <링>이 마지막 권으로 치달으면서 SF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심지어 이 작품도 진화나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다른 한 편으로 '초인'은 우리 모두에게 거북한 주제이기도 하다. 자칫 우생학이나 엘리트주의나 계급차별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종 미디어에 등장하는 초인은 흔히 단순화한 오락거리이거나 무조건적인 배척의 대상이다. 하지만 조금 숨을 고르고 생각해보자.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하며 지금보다 전체적인 조감과 통찰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를 초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뇌나 사이버네틱스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이 시점에야말로 정말로 인간의 다음 모습은 어떨 것인지, 현실과 SF 양자에서 조금 더 진중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본서를 비롯해서 초인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는 다수의 작품들 때문에 너무 심한 선입견을 갖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세대를 넘어) 미래를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현대인의 본능이며, 다음 인류를 공정하고 깊이 있게 제시하는 작품들 또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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