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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까워진 소련, 소치에서 멀어진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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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까워진 소련, 소치에서 멀어진 러시아 [프레시안 스포츠] 브라질 월드컵 첫 상대는 러시아
소치 동계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에는 강한 임팩트를 남긴 대회였다. 한국에서 귀화해 3관왕에 오른 러시아의 영웅 빅토르 안이 몰고 온 파장도 컸고,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 은메달도 숱한 얘깃거리를 남겼다. 한 마디로 올림픽에서 러시아와의 악연이 시작된 느낌이다.

NBC 보도가 촉발시킨 88 올림픽의 '반미주의’

소치 동계 올림픽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유사했다. 권위주의 정권이 적극적으로 올림픽을 국내정치에 활용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올림픽을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과 국민적 에너지를 아낌없이 쓴 '올림픽 올인 정책'에서만이 아니라 메달 지상주의의 극치를 드러냈다. 한국은 1988년 올림픽에서 4위, 러시아는 1위를 했다. 하지만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올림픽으로 풀어보면 두 대회는 정반대 편에 서 있다.

88 올림픽은 한국 사회의 반미주의가 최초로 스포츠를 통해 강하게 표출된 대회였다.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묵인했던 미국에 대한 불만감이 1980년대 중반부터 젊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생겨났고, 이런 분위기가 88 올림픽 반미주의의 기저를 형성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올림픽 반미주의는 미국의 방송사 <엔비씨(NBC)>의 보도로부터 촉발됐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NBC는 올림픽 개막 이전부터 한국의 보신탕 문화, 성매매 실태와 빈민들이 거주하는 판자촌 등의 영상을 담은 방송을 내보냈다. 올림픽 개최를 앞둔 한국이 감추고 싶은 면을 들췄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편치 않았다.

한국인들의 눈에 미국은 오만한 국가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4억 달러의 중계권료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낸 NBC는 비교적 좋은 시간 대에 올림픽 주요 결승 경기를 내보내기 위해 한국을 압박했다. 이게 우리가 일광시간절약제(일명 서머타임)를 어쩔 수 없이 채택해야 했던 이유였다. 이외에도 칼 루이스를 비롯한 미국 선수들의 오만불손한 태도, 미국 선수의 절도행각 등은 미국에 대한 국민적 감정을 악화시켰다.

결정적으로 NBC는 변정일의 링 점거 사태에 대한 집중보도를 통해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에 상처를 냈다. 웰터급 우승후보인 변정일은 석연찮은 판정으로 흐리스토프(불가리아)에 패하자 링에 앉아 항의를 했고, 코치들과 관중들은 의자를 던지고 링으로 뛰어 올라왔다. LA 올림픽 때도 한국 선수에게 석연치 않은 판정을 내렸던 뉴질랜드 심판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뉴질랜드 심판과 불가리아 코치 간의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이 순간 NBC는 "정의는 어디에 있나요? 왜 선수를 데리고 나오지 않을까요? 어떻게 이런 상황이 계속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있나요?"와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무려 1시간 가량 이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국내 언론은 양비론적 입장을 보였다. 심판폭행 등 한국의 판정시비에 대한 과잉대응이 문제였다는 점을 거론하면서도 NBC의 보도 역시 지나쳤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국민들은 초강대국 미국에 분개하면서 미국 선수들에게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반미주의'의 반작용으로 가까워진 소련

반대로 한국인들의 소련에 대한 감정은 해빙무드였다. 북한의 보이콧 간청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했으며 올림픽 개막 전에 볼쇼이 발레단과 모스크바 필하모니 등의 내한공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소련에 호감을 가질만한 요소였다. 무엇보다 개혁정책을 위해 한국과의 경제교류가 필요했던 소련과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개선이 필요했던 한국 정부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졌다.

이 와중에 생겨난 반미정서는 소련과의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여자 농구 준결승에서 미국에 야유를 보냈고 소련을 응원했다.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웠던 소련 감독이 물끄러미 관중석을 몇 번이나 쳐다봤다는 당시 신문 보도까지 있었다. 반대로 미국의 TV 시청자들은 한국 팬들의 행동을 일종의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다 자유분방한 미국 선수들의 올림픽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한 소련 선수들과 큰 대비를 이뤘다. 모스크바 시 체육위원장이 KAL기 격추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이 분위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소련 스포츠 역사 연구의 권위자인 로버트 에델만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인들이 그들의 주인행세를 했던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한 것이며, 매너 있는 소련 선수들과 그렇지 못했던 미국 선수들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평가했다.

▲ 2014 소치 올림픽 폐막식에서 이석래 평창군수가 올림픽기를 넘겨 받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 국가주의의 결정체인 소트니코바의 금메달

'빅토르 안 현상'이 국내에 몰고 온 파벌문제를 차치하고, 그의 화려한 부활은 사실 금메달을 통해 러시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정책으로부터 나왔다고 봐야 한다. 금메달을 돈 주고 샀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그가 따낸 금메달 3개는 러시아가 소치 동계 올림픽 종합 1위에 오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아래 심화된 메달 지상주의는 소트니코바의 금메달로 다시 한번 나타났다. 대부분의 세계 유력 언론은 러시아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편성된 심판 진 구성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비판했고 국내에서는 자연스레 '김연아가 금메달을 도둑맞았다'는 여론이 폭발했다.

러시아의 금메달에 대한 과도한 탐욕이 만들어낸 불상사라는 지적이 제기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동계 올림픽 유치과정에서부터 올림픽 메달을 통해 러시아의 부조리와 푸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일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투영됐기 때문이었다.

소트니코바의 수치스런 금메달과 비교해 봤을 때 김연아의 은메달은 한 마디로 '영웅적 패배'였다. 김연아가 '경기 결과에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는 아마추어리즘의 기본 정신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 아마추어리즘을 상업주의에 팔아 먹은 IOC나 금메달에 눈이 먼 러시아를 생각하면 빛나는 부분이다. 굳이 그녀의 은메달을 우리가 나서서 '억울한 패배'로 만들 필요가 없는 이유다.

2014년은 2002년의 데자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한국의 반미정서는 치솟았다. 김동성이 실격처리된 사실에 분노했던 한국인들의 심정은 같은 해 펼쳐진 월드컵에서 표출됐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나온 안정환 주연, 이천수 조연의 오노 패러디 골 세리머니는 그런 면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북한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언론들도 이 골 세리머니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이후 더 불거진 한국의 민족주의와 반미 정서는 2002년 대선까지 영향을 미쳤다.

흥미로운 건 2014년은 2002년의 데자뷔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과 첫 경기에서 격돌한다. 내심 8강을 목표로 하고 있는 홍명보 호의 운명을 가를 경기다. 첫 경기를 패할 경우엔 사실상 16강 진출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2002년 미국 경기보다 훨씬 중요한 경기다.

12년 전 한국은 월드컵 조별 예선 2차전에서 미국과 비겨 16강 진출에 먹구름을 드리웠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4강 신화의 교두보를 놓았다. 그렇다면 브라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하나는 당연히 경기 결과다. 나머지 하나는 한국이 골을 넣었을 때 펼쳐질 골 세리머니다.

물론 한국의 승리를 바라지만 2002년과 같은 뉘앙스의 골 세리머니를 보고 싶지는 않다. 단순히 FIFA(국제축구연맹)의 제재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메달 강박증을 초월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올림픽이 기록하는 것은 메달일지 모르지만 역사가 평가하는 것은 때로는 아름다운 패자다. 개최국 선수를 위한 특혜성 심판 판정 의혹과 관련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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