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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치·군사보다 민간교류 활성화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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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치·군사보다 민간교류 활성화시켜야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중국-대만 관계를 통해 생각해보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
지난 2월 11일 중국과 대만 사이에 최초로 장관급 대화가 시작되자 ‘차이완 (Chiwan) 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중국 (China)’과 ‘대만 (Taiwan)’이 밀월 관계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중국이 대외적으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차이메리카 (Chimerica) 시대’를 이미 열었다면, 대내적으로는 대만과 통일에 한 발짝 다가서는 ‘차이완 시대’를 머지않아 열게 될까? 1949년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한 뒤 중국과 대만이 당국 간 고위급 회담을 가진 것은 처음이지만, 양쪽의 민간기구들은 1993년부터 만나기 시작해 민간교류와 경제협력을 증진시켜왔다. 2008년 마잉주 (馬英九) 대만 총통이 취임하면서 중국과 전면적 ‘통상’, ‘통항’, ‘통신’이라는 이른바 ‘삼통 (三通接头)’을 내세우며, 2010년 양쪽이 ‘경제협력기본협정’을 맺었고 서로 관광사무소도 열었다. 2012년엔 해저 통신케이블로 양쪽을 이었다. 2013년엔 중국-대만 교역액이 거의 2,000억 달러로 2008년에 비해 두 배로 늘었다. 양쪽을 오가는 항공편이 1주에 800회가 넘었고, 1년간 오간 사람은 800만을 넘었다. 그리고 중국에 진출한 대만인 사업가가 100만 명 안팎으로, 대만은 국내총생산의 40%를 중국에 의존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지금까지 중국-대만 사이에 정치 교류는 없었지만 경제 교류는 매우 활발했던 것이다. 민간 차원에서는 ‘차이완 시대’가 이미 전개돼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제로 정치를 누르면서 (以經制政), 먼저 양보하고 뒤에 요구한다 (先讓後要)”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의 대만 정책이 불러온 결과다. 남북한 관계가 정치나 군사 문제로 꽉 막힌 상황에서 우리가 본받을만한 ‘정치와 경제의 분리 (政經分離)’ 정책이기도 하다.

▲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장즈쥔(張志軍) 주임과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왕위치(王郁琦) 주임위원은 11일(현지시간)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 자금산장(紫金山莊) 호텔에서 장관급 회담 전에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런 터에 중국-대만 간 정치적 대화도 시작된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양안 (兩岸)’ 교류를 위한 사무소를 설치하고, 언론 매체들의 상주를 허용하며, 지역 경제공동체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며, 당국 간에 언제든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에 시진핑(習近平) 현 주석의 임기 안에 중국과 대만이 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물론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느라 대만과의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이 대만과 평화적으로 통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냉철한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다. 단 1%의 가능성도 실현될 수 있고, 99%의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터라, 몇 년 뒤의 일을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시진핑 임기 안에 중국과 대만이 통일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참고로, 대만에 관한 문제는 1940년대부터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가장 껄끄러운 핵심 주제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1949년 12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소련을 방문하자, 미국은 중국이 소련과 동맹을 맺는 것을 막기 위해 장제스 (蔣介石)의 대만을 버리고 마오쩌둥의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1950년 1월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국공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대만으로 물러간 국민당 군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주일 뒤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방어선이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과 류큐 열도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지며, 대만과 한반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세워졌어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부가 소련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걷는 것처럼, 소련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면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고 점령해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참고로, 이 ‘에치슨 선언’은 나중에 한국전쟁에 관해 연구해온 학자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술책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이는 중국공산당을 유혹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전신을 보내고, 1950년 2월 소련과 중국이 동맹조약을 체결하자, 미국의 대외정책은 급변했다. 미국은 중국을 승인하고 소련을 봉쇄하려던 구상을 폐기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동맹을 추진하여 소련 및 중국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는 한편, 대만과 남한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구상을 채택한 것이다. 게다가 1950년 6월 북한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자, 미국은 남한을 방어하기로 결정하면서 이 정책을 더욱 굳혔다. 그러다 미국과 중국은 1972년 2월 ‘상하이 공동코뮤니케’를 통해 “중국은 오직 하나”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데 합의했다. 1978년 12월엔 ‘외교관계 확립에 관한 공동코뮤니케’에서 이를 재확인하며, 미국은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대만에서 병력과 군사 시설을 철수하는 대신 중국은 미국인들이 대만인들과 비공식 접촉을 지속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봄 미국 의회는 미국 정부가 대만 방위를 위해 대만에 지속적으로 무기를 공급하도록 요구하는 ‘대만 관계법’을 통과시켰다. 미국이 대만에 무기 수출을 늘리자 1981년 중국이 반발하면서 협상을 벌여 1982년 8월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판매에 관한 공동코뮤니케’를 내놓게 되었다. 미국은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수준을 점차적으로 낮추는 대신 중국은 대만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대만을 안심시키기 위해 대만에 무기 판매를 계속하고 ‘대만 관계법’의 내용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라고 은밀하게 약속했다. 2004년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만에 미사일방어망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대만에서는 천수이볜 (陳水扁) 민주진보당 정권이 대만 독립을 강하게 추진하자, 중국은 이에 맞서 2005년 3월 ‘반분열 (反裂变) 국가법’을 제정했다. 대만과의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되 만약 대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독립을 추진하면 무력으로 이를 저지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렇듯 중국과 대만 사이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오랫동안 갈등과 긴장이 그치지 않았지만, 앞에서 얘기했듯 2008년부터 경제적 교류 협력은 활발했고, 이젠 당국 간 상시 대화 창구가 마련됨으로써 전반적으로 관계가 진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국의 통일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통일정책은 ‘일국양제 (一國兩制)’다. ‘한 나라에 두 제도’라는 뜻으로, 중국 사회주의와 대만 자본주의가 공존하자는 것이다. 대만과 통일하더라도 대만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도록 보장한다는 취지로, 1997년 영국에서 돌려받은 홍콩과 1999년 포르투갈로부터 되찾은 마카오에 여전히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 대만은 2002년부터 ‘일변일국 (一邊一國)’을 주장해왔다. 해협을 가운데 두고 ‘한쪽에 한 국가’씩 존재한다는 뜻으로, 대만은 통일을 원치 않고 독립을 추구하겠다는 말이다. 참고로 ‘일변’이란 말과 관련해, 중국과 대만을 일컬을 때 ‘양국’이란 말 대신 흔히 ‘양안 (兩岸: 양쪽 해안)’ 또는 ‘양변 (兩邊: 양쪽 해변)’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을 독립국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해협을 사이에 둔 관계’라는 뜻의 ‘cross-straight relations’라고 표기하는 이유다. 1970년대부터 한국,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을 ‘신흥공업국 (NICs: 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이라고 부르다가 1980년대 말부터 이들을 ‘신흥공업경제체 (NIEs: Newly Industrializing Economies)’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도 대만이나 홍콩이 독립국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지금도 대만 사람들의 과반수가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하는데, 1949년 장제스 군대와 함께 본토에서 쫓겨 간 한족 (漢族)은 통일을 원하지만, 대만 원주민들은 통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2012년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이 약 3만 8000달러로 중국의 9000달러보다 4배가 넘지만, 중국이 2020년까지 대외적으로 미국의 국내총생산 (GDP)을 앞질러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이 되고, 대내적으로 온 국민이 잘살게 되는 소강사회(新时代社會)를 실현해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만 달러에 이르게 되면, 대만인들도 중국과의 통일에 더욱 긍정적이 되지 않을까. 미국의 견제와 방해가 심해지더라도, 시진핑 현 주석의 임기가 끝나는 2023년까지 중국이 대만과 ‘일국양제’로 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에 내가 줄을 서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중국의 ‘일국양제’ 통일방안과 비슷한 게 북한이 주장해온 연방제 통일방안이다. 남한은 체제경쟁이 끝났다며 자본주의로의 통일만 고집하고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라며 사회주의를 지키겠다고 하는 한 체제 통일을 이룰 수 없으니, 남쪽 지방정부의 자본주의 체제와 북쪽 지방정부의 사회주의 체제가 공존하는 연방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중국의 일국양제와 북한의 연방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당장 하나로 합치기 어렵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 두 체제를 공존시키자는 배경이 같다.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만들고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다듬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박근혜 정부까지 계승하고 있는 남한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중간 단계인 국가연합도 이와 똑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의 일국양제에서는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이 중국본토와 동등한 지위가 아니라 중국의 중앙정부에 종속적인 자치정부지만, 북한의 연방제에서는 남한과 북한이 동등한 지위의 자치정부를 유지한다는 점이요, 북한의 연방제는 대외적으로 하나의 국가지만, 남한의 국가연합은 대외적으로 두 개의 국가라는 점이다. 중국과 남북한의 통일방안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남북한도 중국-대만처럼 금세 합의하기 어려운 정치·군사 문제나 제도적 통일은 미뤄두고 쉽게 이룰 수 있는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고 경제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전쟁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남쪽 사람들이 평양이나 백두산을 수시로 다녀올 수 있고 북녘 사람들이 서울이나 한라산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그게 실질적 통일 아닌가. 특히 나라 밖으로는 울타리가 낮아지거나 무너지는 세계화가 진행되고 안으로는 권력이 분산되는 지방화가 추진되는 마당에, 굳이 체제를 하나로 합치지 않더라도 남북 정부가 서로 싸우지 않고 주민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상태만 되더라도 내가 꿈꿔온 ‘21세기형 통일’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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