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에 되새기는 동양평화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에 되새기는 동양평화론 [시민정치시평] 본회퍼와 안중근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 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뤼순(旅順) 감옥에는 봄비가 몹시 내렸다 한다. 조선 명주로 지은 순백의 저고리와 흑색 바지를 입은 안 의사의 마지막 순간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그날의 처연함을 더해 준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안 의사가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에게 윗글을 남겼다 한다. 변호사라고 말했음에도, 일제는 안 의사의 가족이 선임한 안병찬 변호사의 변론을 허용하지 않았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마나베 재판장은 러시아 지역 한인 동포들이 선임한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와 러시아인 변호사 미하일로프의 변론마저 거부하고 일본인 관선변호사 2인의 형식적 변론만을 허용했다. 안병찬은 일제의 일방적인 재판 진행을 법정에서 '방청인'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공판 시작 후 사형선고까지 7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얼마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라 했다. 아베 총리 개인의 말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공식 답변이다. 스즈키 다카코(鈴木貴子) 중의원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인지"를 물었고, 아베 내각이 내각회의를 거쳐 위와 같이 답한 것이다.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있었던 안 의사의 저격 사건 직후 이루어진 일본의 수사권 행사와 재판권 행사에 대해 적용 법률과 재판관할권의 문제점에 대해 방송했다. 사건이 발생한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 관할 지역이었고, 당시 일본제국 형법에는 '외국인이 일본인을 외국에서 살해한 경우' 외국인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 조항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법 재판'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애당초 군사 강권의 논리밖에 알지 못했던 제국주의 일본의 정객들, 아베의 선조들에게 "불법 재판이었지 않느냐"고 묻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개명 천지 21세기 일본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온 "테러리스트", "사형판결을 받은 인물"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안 의사는 평화주의자였다. 안 의사의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안 의사에 대한 수사를 담당한 미조부치 다카오 검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반하는 것이고, 당신이 믿는 천주교에서도 죄악이라 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안 의사의 답변은 이러하다.

"나는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거나 또 이에 반하는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을 뿐이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처형당한 목사가 있었다. 이름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미친 운전자가 인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자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4월 9일 새벽, 독일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어느 누구도 본회퍼를 '암살 예비음모자', '사형수'라 하지 않는다. 안 의사와 본회퍼 모두 다수의 평화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목숨을 희생한 사람이다.

안 의사는 평화주의자였다. 안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를 포기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했던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남았지만, 안 의사는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와 나눈 대화에서 <동양평화론>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중일 3국 대표로 동양평화회의 조직, 공동은행의 설립과 공동화폐 사용, 한중일 3국이 로마 교황청의 인증을 받아 세계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실현가능성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라고 하는 것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서 온전히 실현된 적이 없으되, 인류가 추구해 온 그리고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본디 '이상적'인 것임을 기억해야 하리라.

박은식 선생은 손수 지은 <안중근 전>에서 안 의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안중근을 역사에만 근거하여 평가할 때 어떤 사람은 그를 몸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라 하였고, 또는 한국을 위해 복수한 열렬한 협객이라고도 하였다. 나는 이런 찬사에 그친다면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근은 세계적 안광을 가지고 평화의 대표를 자임하던 사람이다. 중근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이토를 평화의 공적으로, 그 괴수로 그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하리라 여겼기에 자기의 목숨을 던져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을 무상의 행복으로 생각했다."

올해 3월 26일은 여러모로 뜻깊은 날이 될 것 같다. 네덜란드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 앞서 만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월 하얼빈 역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대해 덕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양국 정상의 덕담처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한중 우호 관계의 상징물'을 넘어서서 세계 평화의 상징물이 되기를 바란다.

한중 정상회담에 이어 한미일 정상회담도 헤이그에서 열린다고 한다. 헤이그는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만국 대표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대한제국 최후의 외교사절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파견되었던 곳이다. 이후에도 헤이그는 국제적 분쟁 해결을 위한 평화회담이 여러 차례 열렸던 국제평화를 상징하는 도시다. 나의 예견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이 평화의 도시에서 열리는 3국 정상의 만남에서도, 과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지한 반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안 의사가 순국 직전까지 집필한 <동양평화론>과 <안응칠 역사>의 원본마저 은닉했다. 일본의 기록보관소 어디에선가 후손들이 발견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동양평화론>. 안 의사가 제시했던 미완의 <동양평화론>에서 '핵 없는 세상', '반전 평화'의 씨앗을 찾아내 일구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다. 그것은 안 의사가 순국에 앞서 유언으로 동포들에게 당부했던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2014년 3월 26일, 순국 104주년의 아침에, 삼가 안 의사 영전에 머리 숙인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