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숙청된 지 3개월이 훌쩍 지났다. 장성택의 처형 직후 대규모의 숙청이 일어날 것이고 북한 체제가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지만, 예상했던 대규모 숙청은 발생하지 않았고 북한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조짐 역시 적어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왜 고모부이자 자신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던 장성택을 내쳤을까? 국민대학교 겸임교수이자 <민족21>발행인인 정창현 교수는 영문 외교전문지 <글로벌아시아>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장성택 숙청을 두고 “2012년 말부터 장성택이 북한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성택 숙청이 지난해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김정은의 리더십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정 교수는 지난해 1월 29일 노동당 제4차 세포비서대회 당시 ‘세도와 관료주의’가 비판의 대상으로 떠올랐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기서 세도라는 것은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을 겨냥한 것으로, 2003년 장성택은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로 비판받으며 해임된 바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장성택 숙청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김정은 중심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을 저해하는 ‘분파행위’에 있었다”고 진단했다.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체제가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북한은 곧바로 평온한 모습을 되찾았다. 장성택의 측근으로 거론되며 숙청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인물들이 공식 석상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2003년 장성택과 관련된 간부들이 ‘분파행위’로 2년간 ‘혁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외부에서 거론하는 ‘장성택라인’은 사실상 해체됐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장성택사건은 과거 1950년대 이래 북한 내부에서 발생한 ‘반당반혁명사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보다는 공고화로 귀결된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다만 그는 장성택 숙청이 북한 2세대의 퇴진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재 4~50대인 북한 3세대들이 당·정·군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하는 정도의 인적 교체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어 정 교수는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경제 건설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느냐가 향후 체제 안정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며 “경제건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외부 자본유치이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적 대외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 북한은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과 6자회담 재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아래 글은 정창현 교수가 <글로벌아시아>의 2014년 봄 북한특집호에 기고한 영문 칼럼의 한국어판이다. <글로벌아시아>는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이 발행하는 영문 계간지로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주요 현안 및 관련 이슈를 아시아의 시각으로 심층적으로 다루고 이를 전 세계의 독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회원 가입 후 로그인을 하면 <글로벌아시아>에 게재된 글을 볼 수 있다. () 편집자
1. 장성택 숙청을 보는 시각
2013년 12월 북한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의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반당반혁명 종파행위’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된 것이다. 북한의 ‘사실상 2인자’라고까지 불린 장성택의 갑작스러운 숙청은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과 해외에서는 그동안 장성택을 ‘김정은 제1비서의 후견인’으로 평가해왔기 때문에 그의 숙청 이후 북한의 체제 변화와 정책 방향에 미칠 파장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반면 북한 내부에서는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거스르는 ‘종파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북한의 입장을 반영하는 일본의 <조선신보>는 “조선(북한)에 사는 보통사람들이 이번 사변으로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종파의 숙청, 처형 자체가 아니라 국내에 당의 유일적 영도를 거슬러 정변을 기도한 자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이라고 평가했다.(1)
북이 장성택에 대한 정치국 결정서와 판결문을 전격적으로 공개했지만 여전히 ‘장성택 숙청’의 정확한 배경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일부에서는 당과 군부의 ‘권력투쟁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장성택 사건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2012년 말부터 장성택이 북한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장성택 숙청이 갖는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장성택 숙청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기초해 종합적인 분석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2. 김정은 시대 첫 과제는 유일영도체계 확립
김일성 주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의 권력승계과정을 통해 볼 때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은 ‘제도적 리더십’과 ‘인격적 리더십’의 결합으로 완성된다. 이를 기준으로 볼 때 김정은 제1비서는 2012년 4월 당․정․군의 최고직책을 모두 승계함으로써 ‘제도적 리더십’을 확립했고, 이후 ‘인격적 리더십’형성단계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제1비서의 ‘인격적 리더십’ 형성은 곧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과 맞물려 진행됐고, 2012년 4월 노동당 제4차 대표자회 개최를 계기로 본격화됐다. 김정은 제1비서는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당의 최고강령으로 수정하고,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은 “전당에 당중앙(김정은)의 유일적 영도 밑에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혁명적 규율과 질서”를 엄격히 세우는 것을 의미했다.(2)
먼저 김정은 제1비서는 김정일시대에 비대해진 군부의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군에 대한 당의 지도를 강화했고, 군의 무역권을 내각으로 이관하도록 했다. 2012년 6월 2일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지금은 밖에서 밀려오는 적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회주의 요람 속에서 성장한 일꾼(간부)의 관료화·귀족화가 문제”라며 군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대해 경고했다. 김정은 제1비서는 군부의 반발이 계속되자 2012년 7월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을 전격적으로 해임한 후 군부에 대한 세대교체를 단행해 군을 확고히 장악했다.
다음으로 김정은 제1비서는 노동당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북한은 2013년 1월 29일 노동당 제4차 세포비서대회를 개최했다. 당의 기층조직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통해 노동당 내의 ‘유일적 영도체계’확립에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세도와 관료주의’였다. 제4차 당세포비서대회에서 김정은 제1비서는 직접 “세도군(勢道群), 관료주의자들이야말로 우리 당이 단호히 쳐야 할 주되는 투쟁대상”이라며 처음으로 ‘세도’를 언급했다.(3) 조선노동당의 정치이론지 <근로자>(월간)도 2013년 5월부터 집중적으로 ‘세도’와 ‘종파행위’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주목할 대목은 ‘세도’란 단어가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을 겨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장성택이 2003년에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로 비판받았을 때도 ‘세도와 관료주의’가 언급된 사실에서 확인된다. 1990년대 중반 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외부에서 ‘사실상의 2인자’라는 평가를 듣던 장성택은 2003년 말 해임돼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자기비판을 하며 ‘혁명화’과정을 거친 경험이 있다. 따라서 김정은 제1비서가 언급한 ‘세도군’은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을 지칭하며, 당 행정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월권행위에 대한 경고였다.
실제로 12월 8일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채택한 결정서는 “장성택일당은 당의 통일단결을 좀먹고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저해하는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감행”했다고 지적했다.(4) 결국 장성택에 대한 재판에서 다양한 죄목이 거론됐지만, 장성택 숙청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김정은 중심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을 저해하는 ‘분파행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장성택사건의 재구성: 체포에서 사형까지
장성택은 김정일시대에 들어와 가장 주목받은 간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95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취임한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에 자주 동행하기 시작했다. 2003년 ‘분파행동’이 문제가 돼 2년간 ‘혁명화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외부에서는 항상 그를 사실상 ‘북한의 2인자’라고 호칭했다.
실제로 장성택은 2006년 1월 당 중앙위 제1부부장으로 복귀한 뒤 2007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승진했다. 특히 2009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다음 해에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 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 위원으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군부대 산하의 일부 이권 사업들이 장성택이 관장하는 당 행정부로 넘어갔다.
장성택은 2012년 4월 김정은이 노동당 제1비서에 공식 취임할 때 마침내 당 정치국 위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2012년 한 해 동안 장성택은 106차례나 김정은 제1비서의 현지지도에 수행하면서 최측근임을 과시했다. 2012년 11월 장성택은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이로써 그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정치국 위원, 당중앙군사위 위원, 인민군 대장, 당 행정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국가체육지도위원장 등 무려 8개의 직책을 갖게 됐다. 외부에서는 장성택이 북한의 2인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장성택 판결문에도 “장성택이 김정은 동지로부터 이전시기보다 더 높은 직무와 더 큰 믿음을 받았다”라고 지적돼 있다.(5)
그러나 장성택의 권력은 거기까지였다. 장성택이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뒤 당 행정부의 위상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2013년 들어 장성택의 영향력은 갑자기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김정은 제1비서의 현지지도에 수행하는 횟수가 급감했고, 그마저도 주로 체육행사나 예술공연에 국한되었다. 국가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장성택이 배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 1월 26일 김정은 제1비서가 핵실험과 관련된 중요 정책 결정을 위해 소집한 ‘국가안전 및 대외 부문 일군협의회’에 장성택은 참석하지 못했다. 2013년 초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을 때도 장성택은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장성택이 2012년 12월 ‘은하 3호 장거리 로켓’발사와 2013년 2월의 3차 핵실험에 대해 반대의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이 공식 채택된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지만 장성택은 이 노선에 부정적 의견이었다는 것이다. 2013년 12월 8일 정치국 결정서는 ‘장성택과 그 추종자들’이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했으며 당의 노선과 정책을 집행하는 데도 태만하거나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장성택이 노동당 정치국회의나 국방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거나 집행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장성택의 첫 번째 위기는 5월에 찾아왔다. 장성택은 2013년 5월 13일 김정은 제1비서의 인민내무군협주단 공연 관람 이후 6월 10일 평양국제축구학교 시찰에 동행할 때까지 한 달여 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판결문에는 “장성택은 석탄을 비롯한 귀중한 지하자원을 망탕 팔아먹도록 하여 심복들이 거간군들에게 속아 많은 빚을 지게 만들고 지난(2013년) 5월 그 빚을 갚는다고 하면서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도 서슴지 않았다”라고 지적돼 있다.(6) 장수길이 책임자였던 당 행정부 54국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은 분명했다. 실제로 9월경에는 행정부 54국이 관여하는 해외사업 관계자들이 평양으로 소환됐다.
3개월 후인 8월 말 또 다른 대형악재가 터졌다. 2013년 8월 28일 김일성경기장에서 김정은 제1비서가 직접 관람한 ‘횃불컵’ 1급 남자축구 결승경기가 끝난 뒤 부정선수 출전을 이유로 우승팀이 뒤바뀐 것이다. 북한은 숨겨도 될 사안을 즉각 공개했다. 북한의 체제 속성상 당연히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었던 장성택의 입장에서도 난처한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때까지는 장성택의 위상에 큰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런데 리룡하 당 행정부 제1부부장, 장수길 부부장이 체포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 11월 초에 발생했다. 당 정치국 결정서는 “당에서는 장성택일당의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알고 주시해오면서 여러 차례 경고도 하고 타격도 주었지만 응하지 않고 도수를 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어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당 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적 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기였다”라고 지적돼 있다.(7) 이 결정서에서 언급한 장성택일당의 ‘도를 넘은 행동’은 11월 초에 남포수산사업소 관할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무력 충돌’과 관련이 있다.
남포특급시에 있는 남포수산사업소는 원래 군대가 관할하고 있었지만, 장성택이 국방위원 부위원장이 되면서 당 행정부(54국)로 운영권이 이관되었다. 2013년 군대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비서는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이 회사의 운영권을 다시 군대에 되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군대가 이 회사를 접수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장수길 당 행정부 부부장이 장성택 부장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며 거부했고, 이 과정에서 수산사업소 경비대와 군대 간에 총격전까지 발생했다.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총격전까지 벌어지는 중대사안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리룡하와 장수길이 체포돼 총살되는 사태로까지 비화됐고, 장성택까지 체포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 행정부가 벌어들인 자금이 경제건설에도 쓰였기 때문에 자금 마련과정에서 자원을 헐값으로 판 행위, 광산개발권을 투자 대가로 넘긴 행위, 라선특구의 토지를 넘긴 행위 등과 장성택의 과거 행적과 부정부패 등은 어쩌면 군더더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장성택이 ‘혁명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사령관 명령에 불복하는 반혁명적인 행위’, 장성택을 ‘1번동지’라고 지칭한 행위 등이 조직지도부와 국가안전부의 ‘합동검열’에서 드러난 순간 장성택도 최악의 상황을 피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13년 11월 18일 장성택이 전격적으로 가택 연금되고, 장성택의 측근인 노동당 행정부의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체포됐다. 11월 6일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猪木寛至) 참의원을 만난 것이 장성택의 마지막 공개활동이었다.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은 ‘월권’과 ‘분파행위’,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거부’ 등의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장성택 등의 뒤에 숨어서 당 위의 당으로, 내각 위의 내각으로 군림하려 했다”고 비판받았다.(8) 조사를 마친 두 사람은 11월 27일경 당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됐다.
12월 8일 노동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장성택이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정치국 확대회의는 장성택을 유일영도체계 저해, 당의 노선과 정책 왜곡, 부정부패행위, 도덕적 해이 등의 죄목으로 비판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4일 후인 12월 12일 장성택은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돼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을 선고받고 측근 7명과 함께 300여 명의 당 간부들 앞에서 총살됐다. 가택연금에서 사형까지 한 달도 채 안 돼 사건이 마무리된 셈이다. 장성택에 대한 당의 비판과 최종판결까지 공개적으로, 속전속결로 진행한 것은 북한이 이 사건의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4. 장성택사건이 김정은 체제에 미치는 영향
그러나 북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2월 12일 특별군사재판을 열고 ‘국가전복음모행위’라는 새로운 혐의를 추가해 장성택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곧바로 공개 총살했다. 김정은 제1비서의 유일영도체계 확립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과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장성택 공개처형에 대해 국제사회는 북한이 역사상 많은 정치적 숙청을 했지만 이같이 공개적으로 한 것은 처음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장성택 처형은 인권법 위반”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9) 다만 북한은 과거에도 ‘반당반혁명사건’에 대해서는 특별재판을 거쳐 공개총살을 해왔다. 북한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인도적인 행위인 셈이다.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은 곧바로 평상을 되찾았다. 국내외 언론에서는 북한의 특정인사를 장성택의 측근이라고 거론하며 줄줄이 체포될 것이라고 보도하고, 일부 인사가 이미 망명했다고 거론했다. 그러나 거론된 인사의 대다수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3년 장성택과 관련된 간부들이 ‘분파행위’로 2년간 ‘혁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외부에서 거론하는 ‘장성택라인’은 사실상 해체됐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당 중앙당 간부 중에서 장성택사건과 직접 관련돼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장성택사건은 과거 1950년대 이래 북한 내부에서 발생한 ‘반당반혁명사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보다는 공고화로 귀결된 가능성이 크다. 2013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제1비서는 “우리 당이 적중한 시기에 정확한 결심으로 반당, 반혁명 종파일당을 적발, 숙청함으로써 당과 혁명대오가 더욱 굳건히 다져지고 우리의 일심단결이 백배로 강화되었다”고 평가했다.(10) 장성택 숙청이 흔히 거론되는 최룡해 총정치국장으로 대표되는 군부와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당과 군 전반으로 숙청작업이 확대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장성택 숙청은 북한 2세대의 퇴진을 의미하기 때문에 40~50대의 북한 3세대들이 세대교체를 통해 당, 정, 군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또한 김정은 제1비서가 직접 추진하는 경제개선과 경제특구 확대 정책도 장성택 숙청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물론 2~3년 안에 경제건설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느냐가 향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북한이 경제건설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제건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외부 자본유치이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적 대외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과 6자회담 재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 필자주석
(1) 조선신보 (2013.12.20)
(2) 근로자 2013년 제10호, p.14
(3) 로동신문 (2013.01.30.)
(4) 로동신문 (2013.12.09.)
(5) 로동신문 (2013.12.13.)
(6) 로동신문 (2013.12.13)
(7) 로동신문 (2013.12.09.)
(8) Seoul Shinmun (2013.12.06)
(9)
(10) 로동신문 (201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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