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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동은 '항상-이미' 결정됐다고? "내가 보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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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의 행동은 '항상-이미' 결정됐다고? "내가 보기엔…" [이렇게 읽었다]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 외
1.
내가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지음, 그린비 펴냄, 현재 제2개정 증보판)라는 책을 처음 본 것은 1996년이나 그 이듬해 독일 쾰른에서였다. 독문학을 전공하는 유학생 동료가 한번 보라고, 이걸 보니 근대철학 전반에 대해서 감이 잡힌다는 소감과 함께 건넨 그 책을 나는 차마 다 읽지 못했다. 내가 나름대로 틀을 잡아가던 근대철학 해석과 <철학과 굴뚝청소부>에 담긴 비판 일색의 해석이 정말이지 상극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시절에 내가 매일 읽던 책은 헤겔의 <대논리학>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거론하는 모든 것 - 모든 대상, 모든 개념, 우리 자신 - 에 '주체'라는 기묘한 이중구조가 항상 이미 내장되어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논리학인 동시에 존재론이며 또한 주체이론인 그 궁극의 이야기, 혼자 추는 2인무이자 둘이 추는 독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 우아한 춤이 절정에 이르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정말이지 나는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싶었다(물론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던 것이 중요한 이유일 게다. 괴테를 연구하던 그 동료는 헤겔의 '동일성' 추구와 '목적론'을 꾸짖으며 대안으로 '풍요 그 자체'를 내세웠다. 나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헤겔이 말하는 동일성은 형이 생각하는 동일성하고 전혀 달라! 목적론은 '보고 또 보고 끝까지 봐야 정체를 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냐! 헤겔이 말하는 '전체'가 바로 '풍요 그 자체'야! 라고 설명해봤자 별 무소용이었다.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손가락 두 개 들어갈 홈이나 엄지발가락 걸칠 턱이라도 하나 보여야 운신을 해보겠는데, 눈앞에는 온통 완벽하게 매끄러운 수직 암벽뿐이었다.

옛날에 괴테가 헤겔에게 자네의 철학을 좀 알고 싶은데 읽기가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헤겔은 괴테에게 '선생님은 안 읽으셔도 됩니다. 이미 다 아시는 얘기예요'라는 취지로 응대했다. 나도 이런 식으로 품위 있게 대화를 이어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뿔싸 사뭇 옹졸하게도 나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형, 이 책 읽지 마!' 해버렸다. 이때 이 책이란 당연히 <대논리학>이 아니라 <철학과 굴뚝청소부>다.

▲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요컨대 당시 나에게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도무지 거두기에 벅차서 차라리 내치고 싶은 책이었다.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책 제목으로까지 격상된 굴뚝청소부 일화(<철학과 굴뚝청소부> 2005년 판 56쪽)는 그야말로 난감했다. 아니, 이 일화가 근대적 주객 관계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같은 대목에서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로 등장하는,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거울상이 관찰자 자신의 얼굴과 같은 모양인지 의심한다는 설정 자체가 지극히 작위적이고 기괴하다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거울'을 '주체'로 놓는 것(같은 책 57쪽)은 도무지 수긍할 수 없는 설정이었다. (근대철학의 딜레마와 관련 예들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나중에 펼칠 것이다)

주체란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인데, 세상에 자기를 '나'라고 부르는 거울도 있나? 설마 이진경이 염두에 둔 것은 <백설공주>에 나오는 그런 거울? 그럴 리는 없겠고, 아마도 그는 거울이 주위 물체들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거울을 '주체'로 설정한 듯했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인과 관계로 얽힌 물리 세계의 모든 물체 각각을 주체로 설정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두드리는 키보드는 내 손가락의 운동을, 키들의 움직임과 '타닥타닥' 하는 소음으로 반영한다. 나의 체온, 이 방의 온도, 지구의 중력과 그에 맞선 탁자의 반작용도 반영한다. 비록 검은 색이고 표면도 울퉁불퉁하지만, 빛에 반응하는 방식도 원리적으로 거울과 전혀 다름없다. 따라서 이 키보드도 주체일까?

제도권 안에서 헤겔 철학을 수련하던 내가 보기에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였다. 거울은 물리학법칙을 따르는 대상일 뿐이다. 기하학적으로 말하면 3차원 공간에 놓인 물체의 2차원 상이 맺히는 유한 평면일 뿐이다. 심지어 그 2차원 상을 재료로 삼아 3차원 물체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관찰자의 뇌 속 시각 시스템들도 주체가 아니라 물리적 대상이다. 뇌 과학자와 물리학자가 연구하는 그런 대상을 주체로 설정하여 "거울에 비치는 대상"(같은 책 57쪽), 곧 관찰자의 얼굴과 대비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문법 오류였다. 주춧돌부터 어그러져 있어서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는, 옳고 그르고를 따지고 말고 할 건더기도 없는 헛소리였다.

그랬다. 당시에 나는 어렸고 이진경의 공로와 명성에 대해 전혀 몰랐으며, 진리는 모든 것 속에 스며들어있다는 헤겔의 가르침을 이제 막 접하던 차였기에, 이진경의 표면적 문법 오류의 바탕에 아주 흥미롭고 복잡한 맥락이 진리의 한 자락으로 깔려있음을 간파할 역량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와 그 동료는 헤겔도, 괴테도,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제쳐 놓고, 주로 우리나라 인문학계에 대한 성토를 안주로 삼곤 했다. 하루 종일 컴컴하다가 네 시만 되면 깜깜해지는 그 도시의 늦가을, 그 좋다는 독일 맥주를 짝으로 사다놓고 기숙사 방에 쭈그려 앉아 맥주거품과 함께 게거품을 물던 우리는 제법 애국자였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진리는 그때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 속에도 알코올과 함께 스며들어 있었다.

지금 나는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거두러 나서는 중이다. 이 책에 담긴 근대철학 비판을 싹 청소해 버리고 '근대철학 만세'를 외치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진경의 비판에 담긴 "한 줌의"(최근에 출판한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문학동네 펴냄, 2012년)에서 이진경이 긍정적인 의미로 즐겨 쓰는 표현이다) 진리를 백 번 인정하면서 나름의 변론을 제시해보겠다는 뜻이다.

내 역량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능력"(<방법서설, 성찰, 데까르뜨 연구>(르네 데카르트 지음, 최명관 옮김, 서광사 펴냄, 9쪽), 곧 "양식(bon sens)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같은 곳)라는 근대인의 선언이 '너도 할 수 있다'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철저히 근대적이어야 한다(One must be absolutely modern)"라는 시인 랭보의 외침도 머뭇거리지 말라는 충고로 들린다.

그러나 내가 이진경과 대화하고자 하는 이유는 결코 이런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도권 학계의 평가는 다를지 몰라도, 내가 두루 살피건대 이진경은 지금 이 땅의 지식인 지형에서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여러 봉우리 중 하나다. 이것이 공식적인 첫 번째 이유다.

2.
권보드래는 2000년에 이진경과 한 인터뷰를 정리한 글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자기의 청년 시절로 기억하는 먹물들이라면 이진경이란 이름 앞에 범연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먹물"에 내 친구 물리학자들도 포함되는지 여부에 따라서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이진경이 발휘해온 영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평가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수십 권의 책을 썼을 뿐더러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친구들의 공동체를 꾸려 철학에 관심이 있는, 특히 20세기 프랑스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왔다. 탈근대, 들뢰즈, 유목, 탈주 등이 이 땅에서 누리는 인기는 이진경을 빼면 설명하기 어렵다.

1994년 처음 나온 그의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은 무려 20년 동안 대표적인 근대철학(또한 탈근대철학) 입문서로 사랑받아왔다. 참으로 드문 베스트셀러 철학 책이다. 모든 가치 평가를 떠나서, 대중의 호응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한국어로 철학하는 이들과 대화하고자 하는 내가 이진경을 빼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에 가깝다.

더구나 이진경은 이 땅에서는 보기 드문 미덕을 어느 지식인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탁월하게 실천하는 인물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는 대안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천해낸다! 내가 보기에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그를 이끌어온 힘은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겠다는 사명감이다. 그런 사명감을 가진 사람은 꽤 있겠으나, 개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를 꾸림으로써 대안의 실천에 나선 이는 이진경 외에는 얼마 없지 싶다. 이것이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부분이다.

▲ <맑스주의와 근대성>(이진경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그의 공동체는 즐거운 지식과 자발적인 공부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의 구실을 한다. 제도권 안의 철학자들이 대학이라는 막강한 권위에 기대어 공로 없이 으쓱대거나 피땀으로 연명할 때, 이진경과 그의 친구들은 출판계와 언론계가 대표하는 지식 시장에서 자력으로 권위를 얻었다. 물론 이진경 본인에게 시장의 평가는 기껏해야 부차적이겠지만, 일관된 삶과 사상으로 공동체를 꾸리고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그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추측컨대 이 땅의 지식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품은 꿈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내가 이진경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우선 존경의 표현이다.

그런데 나에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진경의 철학적 입장이다. 앞에서도 얼핏 내비쳤지만, 그는 철저한 근대철학 비판자다. 실제로 그의 베스트셀러는 1990년대 중반 탈이념·탈근대의 기치와 함께 부상했고, 그는 누구보다 야멸차게 '주체'를 깎아내리는 일에 주력해왔다. 말하자면 '탈근대의 전사'쯤 되었다. 마르크스 철학을 재해석하는 책(<맑스주의와 근대성>(그린비 펴냄))도 쓰고 수학의 역사를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책 뒤표지의 선전 문구) 들었다 놨다 하는 책(<수학의 몽상>(휴머니스트 펴냄))도 썼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다루든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은 '주체'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한 냉혹한 비난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자유에 대한 문제 제기와 맞물리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진경은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은 정말로 자유로이 선택하고 자유로이 실천하는가?"(<맑스주의와 근대성> 1997년 판 115쪽)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선택과 행동에만 국한해서 제한적으로 제기할 때만(즉, 사회적 인간을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는 사회과학자의 입장에서 제기할 때만) 유의미하다. 철학의 차원에서 무릇 인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의심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기 쉽다. 왜냐하면 철학자에게 인간은 관찰 대상이기 이전에 동등한 대화 상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진경과 내가 서로의 자유를 심각하게 의심한다면, 우리의 대화는 무의미한 쇼다. 나 말고 내 편에서 진짜 책임질 수 있는 누군가가 나서고, 이진경 말고 그의 편에서 진짜 책임질 수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대화해야 옳다. 대화 상대가 나에게 '당신은 정말 자유롭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아마도 '그러는 당신은 정말 자유롭습니까?'라고 반문하는 것이 그나마 적절할 테고, 이 반문의 진짜 의미는 '판을 깨실 작정입니까?'다. 대화에 나서는 양편은 피차가 이성과 자유(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양심')를 동등하게 지녔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건 불가침의 전제다.

이를 스스로 감지하기 때문인지, 이진경이 곧이어 내놓는 대답은 조심스러운 질문의 형태로 포장되어있다. "우리의 실천이나 행동은 (…) 항상-이미 결정되어 있는 코드에 따른다. 그렇다면 사람들 각자가 자유로이 선택하고 자유로이 실천한다고 하기는 매우 곤란해지는 게 아닐까?"(같은 곳) 참 재미있다. 살짝 가려졌기에 더욱 도드라지는 이 대답에서 보듯이, 이진경의 시선은 "항상-이미 결정되어있는 코드"에 꽂혀있다. 그리고 그런 코드가 있는 한, 우리 각자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이진경의 음울한 진단으로 보인다.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많다. 이진경은 지금 이런 말을 하면서 자신도 "항상-이미 결정되어 있는 코드"에 따르고 있다고 생각할까? 혹은 자신만큼은 그 코드에서 해방되어 보편의 관점(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요컨대 그는 홀로 해방된 선각자로서(스피노자가 말하는 "현자"(<에티카>(강영계 옮김, 서광사 펴냄, 320쪽 등))로서) 아직 그 코드에 매여 있는 다른 모두("무지한 자"(같은 곳))에게 죽비 소리를 들려주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선각자 이진경이 소수의 선각자들을 대화상대로 상정하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자기네와는 전혀 다르게, 공장, 학교, 병원에서 길들여진 노예로, "주어진 규범과 규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근대적 주체"(<맑스주의와 근대성> 18쪽)로 살아가는 다수를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며 선각자들끼리 대화하려는 요량일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이진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어느 쪽이든 간에, 나는 평범한 나의 눈높이에서 철학하는 근대인으로서 이진경의 진단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이 내가 그와 대화하려는 두 번째 이유다. 동의하기 어려우면 그만이지 대화는 왜 하냐고? 이질적인 양편이 나누는 대화,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대화다.

"항상-이미"라는 부사구의 사용이 퍽 상징적이다. 나도 이 부사구를 즐겨 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늘 바탕에 깔아야 하는 궁극의 전제를 말하고자 할 때 쓰면 참 적절한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부사구의 대표적인 용례가 '항상 이미 자유와 책임을 짊어진 나와 너'라고 생각하는데, 이진경은 "항상-이미 결정되어 있는 코드", "항상-이미 잡힌 스케줄"(<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215쪽)에서 보듯 '외적인 강제'가 이 부사구와 궁합이 맞는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 문제는 이 글의 주요 논제들 중 하나이며, 어쩌면 이진경과 내가 끝내 갈라서는 지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진경의 이 같은 근대성 비판이 이 땅에서 큰 호응을 얻는다는 사실은 그가 저자로서 거둔 성공이 증명한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대관절 어째서일까? 왜 많은 사람들은 '자유로운 나'가 아니라 '결정되어 있는 코드'가 "항상-이미"와 어울린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근대성의 핵심은 '항상 이미 자유로운 나'인데, 도리어 "항상-이미 결정되어 있는 코드"를 지적하는 이진경의 근대성 비판이 호응을 얻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나는 "근대화가 곧 식민지화로 연결되었던 한국의 조건"(<근대의 그늘>(김동춘 지음, 당대 펴냄, 103쪽))을 돌아본다. 지금도 이 땅에서 '근대성'이라는 허울을 쓰고 번창하는 '야만'을 둘러본다. 이런 근대화와 근대성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려는 개인 존중과 대화로서의 근대정신은 얼마나 낯설겠는가. '자율'이라는 근대의 핵심 기획은 이 땅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얼마나 공허한가. 이런 분위기에서 이진경의 근대철학 비판이 호응을 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강력한 규율 아래의 자기통제와 자기감시를 축으로 하는 근대적 생활양식"(<맑스주의와 근대성> 125쪽), "명령하고 통제하는 권력에 익숙하게 길든 근대인"(같은 책 24쪽), "대중들은 깨이지 못한 자, 몽매한 자로 간주"(같은 책 26쪽)되는 상황! 이 표현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키며 격하게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진경의 성공은 그들의 공감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땅의 왜곡된 근대화에 치인 다수의 가슴에 즉각 와 닿는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성공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모든 현상은 근대철학의 참모습, 근대성의 참뜻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다. 나는 이 땅의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근대성 비판에 맞서서, 바로 그 근대성이라는 악기로 훨씬 더 멋진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요컨대 이진경의 근대성 비판(또한 그것이 일으키는 공감)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겪었고 실은 지금도 겪고 있는 역사가 짙은 그늘로 드리워있다. 그는 그 그늘을 조명으로 삼아 근대철학을 읽는다. 푸른 산을 깔아뭉개는 중장비의 굉음과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새마을 노래>를 들으며 데카르트를 읽는다. 개항 이후의 충격과 혼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수탈을 추체험하고, 독재 정권들의 야만적 억압을 몸소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헤겔을 읽는다.

나는 이런 태도를 비판하기는커녕 적극 옹호한다. 철학은 이렇게 독자 자신의 삶과 엮어서 읽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감동이 있고, 독창적인 해석이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모든 독창적인 해석에 불가피한 치우침을 우리가 알아채느냐 하는 점이고, 그 치우침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데카르트와 헤겔의 철학에서 사뭇 다른 근대성을 주목한다. 그것은 이 땅에서 흔히 거론되는 근대성이 아니라 '모든 각자의 단 한번뿐인 삶'을 지고의 가치로, '대화'를 유일한 길로 삼은 근대성이다. 나는 이렇게 개인과 대화를 앞세우는 정신이 근대성의 참뜻에 더 가까우며 이 정신을 옹호함으로써 이진경의 근대성 비판을 멋지게 보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맙게도 이진경은 최근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나누어서' 보게 마련이다.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그 일면성이 세상의 '원리'가 되고, 그런 주장이 거대한 권세를 얻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만 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228쪽)

나는 나의 일면성이 유일한 "원리"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치우친 탈근대론을 보완하는 하나의 목소리로서 요긴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진경에게 근대철학의 핵심은 '주체의 무모한 독립에서 비롯된 헛된 몸부림'쯤 된다. 이를 그는 "근대철학의 딜레마"라고 표현한다. 나에게 근대철학의 핵심은 '관점과 대화'다. 이를 나는 '내가 보기에'라는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 부사구로 요약한다. 과연 우리가 서로를 보완할 수 있을까? 이제 이진경이 근대철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가 말하는 딜레마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살펴볼 차례다.

3.
이진경이 근대철학 전반을 어떤 틀로 해석하는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첫 장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에서도 "데카르트의 문제설정"(38쪽 이하)과 "근대철학의 딜레마"(56쪽 이하)라는 두 절이다. 이 결정적인 대목에서 이진경은 근대철학 전반에 대해 몹시 비관적인 진단을 내리는데, 그 핵심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1) 근대철학은 주체를 신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성립했다.
2) 근대적 주체는 대상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3) 이렇게 이중으로 분리된 주체는, 제3자의 판정이 없는 한, 자신의 앎이 진리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갈 듯 말 듯 한데, 어쨌든 엄청난 이야기라는 것만큼은 '주체', '신', '진리' 같은 어마어마한 개념들이 등장한다는 것에서 능히 짐작이 간다. 나는 설명을 더 듣고 싶다. 이진경이 '분리', '분할', '독립', '떼어냄' 등으로 표현하는, 근대의 출발점에 일어난 그 근본적인 사건은 정확히 무엇일까? 근대 이전에는 '주체'가 '신'에, 또한 '대상'에 찰싹 달라붙어있었다는 뜻일까? 또 그가 말하는 (혹은 그가 보기에 근대철학이 말하는) '진리'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의 글을 읽어보니 그 '진리'가 모종의 '일치'라는 것은 알겠는데, 일치하는 쌍이 무엇이냐가 불분명하다. 이진경은 그 쌍을 주체-대상(56쪽), 정신-육체(56쪽), 인식한 것-대상(56쪽), 판단-실재("내 얼굴이 어떻다는 판단과 실제 내 얼굴의 상태가 일치하는지…" 59쪽), 개념-대상(182쪽) 등으로 변주한다. 또 내 생각에는 주체가 참된 앎에 도달할 수 없다고만 지적해도 비판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이진경은 왜 굳이 참된 앎에 도달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쉽게도 이진경의 서술을 보고 또 봐도 위에 요약한 것 이상의 설명이나 논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1)에서부터 2)와 3)이 따라 나온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이것도 짐작일 뿐이다. 그가 애용하는 전술은 반복과 예화이지, 논증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근대철학은 주체라는 범주를 신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성립했"(<철학과 굴뚝청소부> 56쪽)다. 그런데 이 이중의 "분리와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같은 곳)가 있다. 곧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같은 곳)다. 근대철학은 "이처럼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을 '진리'라고 했으며, 이 '진리'가 바로 근대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같은 곳)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같은 곳)이다. 그런데 문제설정을 이렇게 하면 "곧 딜레마(…)에 빠지게"(같은 곳) 된다. "예컨대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다시 말해 진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같은 곳)한다.

나는 이진경이 '주체'를 영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과감한 의심을 품어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아는 (또한 내가 보기에 데카르트가 말한) 주체는 기본적으로 대상 속에 스며들어 있지,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애당초 '분리'라는 개념 자체가 주체의 삶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적절한 그릇이다. 그래서 '주체'가 신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말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거리 두기'라는 개념을 써서, '주체가 신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라거나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분리'와 '거리 두기'는 얼핏 비슷한 말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단절'을 함축하는 반면, 후자는 정반대로 '새로운 관계 설정'을 함축한다.

실제로 '거리 두기'는 주체가 살면서 취하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다. 어떤 대상 앞에서도 거리를 둘 수 있는 놈,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리를 둘 수 있는 놈, 그것이 주체다. 이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데카르트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신다면, 다름 아니라 데카르트의 간판인 '의심'이 '거리 두기'의 한 예라고 말씀드리겠다. 데카르트는 보편적 의심가능성을 발견했다. '나'가 어떤 믿음이든지 의심할 수 있다는 발견은 곧 '나'의 거리 두기가 언제 어디에서나 이미 일어난다는 발견이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주체의 삶을 발견했다!

이런 주체, 즉 언제나 대상으로부터(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주체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나의 근대철학 해석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진경의 해석을 톺아가면서 필요에 따라 나의 해석을 곁들이는 방식을 채택하려 한다. 그러므로 분리되고 고립된 주체를 성토하는 이진경의 해석을 더 살펴보자. 그가 주체를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 예레미아스 팔크의 <거울을 보는 늙은 여인>(1656년 경). ⓒWikimedia Commons
이진경은 주체의 인식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주체 자신이 확인할 길이 없다는 딜레마를 지적하고 나서 곧바로 '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를 예로 든다. 원래 강의를 기반으로 만든 책이기 때문인지 구어체로 진행되는 서술에서 그는 "여러분이 거울에서 본 게 자기 얼굴인지 어떻게 알지요?"라고 묻는다. 어라? 나 같으면 당장 몇 가지 근거를 대고, 시간만 충분하면 무한정 근거를 대겠는데, 실제 강의에서는 뭔가 심오한 얘기가 나오나 보다 하고 다들 침묵했던가 보다.

이진경은 "여러분은 자기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즉 자기 얼굴이 어떤지 미리 알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말을 잇는다. "만약에 거울을 처음 본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거울에 대고 말을 걸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게 자기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에 수강생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내가 듣기에는 대단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뭘 생각하고 말고 하나? 그냥 딱 보면 자기인 줄 안다. 심지어 코끼리, 돌고래, 침팬지도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본다. 물론 약간의 학습은 필요할 테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학습이 무척 경이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경이로움, 설명하기 어려움, 생각하기 어려움과 별개로, 우리와 코끼리와 돌고래와 침팬지가 거울 속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요컨대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이야기하기 위해 '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를 예로 들면,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기 얼굴을 잘만 보고 산다. 딜레마는 없다!

거울 속의 얼굴이 당신의 얼굴인지 정히 궁금하다면, 거울을 보며 주먹을 들어 당신의 관자놀이를 힘껏 가격하라. 거울 속 얼굴의 관자놀이에 웬 주먹이 날아와 닿는 순간, 당신의 관자놀이에서 강한 통증이 일어나고 당신은 적잖은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진실은 평범하다. 그 얼굴은 당신의 얼굴이 맞다. 혹시 여전히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치아 손상을 막기 위해 어금니를 꽉 다물고) 턱을 있는 힘껏 가격……하지 말고, 당신의 의심과 그 근거를 당신 자신에게, 또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아라.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전혀 딜레마가 아니다. 충분히 해결의 길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다음 대목이다.

"거울에 비치는 대상(나)과 그걸 비추는 거울(주체)이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나와 거울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철학과 굴뚝청소부> 57쪽)

'나'가 대상으로 설정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실제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또한 '나' 자신에게도 일차적으로 대상이다. '나'도 개와 소나무와 바위와 다름없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이것들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이런 관점을 채택하면 '나'의 존엄과 자유라는 근대의 근본원리가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이 혹시 있다면, 염려 푹 놓아도 된다. 대상으로서의 '나'는 자유롭고 존엄한 주체로서의 '나'가 살아가는 데 장애물이기는커녕 오히려 필수적인 요소다. 아무튼 이 예에 더 적합하게 '나'를 '나의 얼굴'로 좁히면, 이것은 누가 봐도 대상이 맞다.

문제는 '거울'이 주체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꽤 길게 말했지만, 거울은 물리적 공간 속의 물체, 더 정확히는 인공물, 다양한 목적으로 빛의 반사를 이용하고자 할 때 쓰는 도구다. 이진경은 "나와 거울만 가지고는" 뭔가를 알 수 없다고 하는데, 하나 마나 한 얘기다. 대상(=나)과 도구(=거울)만 있는데, 앎이 있을 턱이 있나. 쉽게 말해서 '안다'라는 술어와 짝을 이룰 주어가 없는데, 어떻게 문장이 성립하겠는가.

흥미롭게도 위의 인용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주어가 없다. 누가 알 수 없다는 말일까? 어떤 주어가 생략되었을까? 상식적으로는 '내가 알 수 없다'는 꼴로 주어를 복원해야겠지만, 지금 이진경이 짠 구도에서는 '나'가 대상이고 거울이 주체이므로 '거울이 알 수 없다'는 꼴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위 인용문은 '내 얼굴이 거울에 비치는데, 내 얼굴과 거울상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거울이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진경도 그렇지만 꼼꼼히 분석하는 나 역시, 내가 봐도 참 해괴하다.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을까? 이진경의 취지는 상식과 다를 바 없이 '나'의 얼굴과 거울상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나'가 알 수 없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앎의 주체는 '나'다. 이 상황은 주체로서의 '나'가 거울을 도구로 써서 객체로서의 '나'를 마주한 상황이다. 대체 왜 거울이 주체인가?

거울을 주체로 놓는 이진경의 해괴한 행마를 그나마 이해해볼 길은 추측하건대 그가 '나의 얼굴'과 거울상 사이의 관계를 대상과 '표상'(=관념) 사이의 관계로 간주한다고 보는 것뿐이지 싶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진리를 일치로 규정하면서 (혹은 근대철학이 그렇게 규정했다고 해석하면서) 일치하는 양편 중 하나를 '주체', '인식한 것', '판단', '개념'으로 변주하는데, 이 느슨한 어법이 나의 추측에 힘을 실어준다. '인식한 것'(곧 인식 내용), '판단', '개념' 등, 의식의 내용 일체, 정신의 눈으로 가리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뭉뚱그려 부르는 전통적인 명칭이 바로 '표상'이다.

이진경은 표상과 주체를 동일시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진리를 일치로 규정하는 것 역시 표상과 관련이 있지 싶다. 진리대응론이라는 가장 표준적인 진리 이론에서 진리란 대상과 표상(쉽게 말해서 '사실'과 '믿음')의 대응이다. 이것이 이진경의 (혹은 이진경이 이해한 근대철학의) 진리관이 유래한 출처로 보인다.

요컨대 이진경이 거울을 주체로 설정할 때, 그의 진의는 표상(거울상)을 주체로 설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설정은 타당할까? 아니, 타당하지 않다. 표상 역시 기본적으로는 주체가 마주한 대상이다. 다만 물리적 공간 속의 물체와 달리 주체의 내면('내면'의 의미는 상식선에서 이해하기로 하자)에 들어앉아 있다는 점에서, 표상은 말하자면 주체가 손 안에 쥐고 아직 내려놓지 않은 (혹은 내려놓았다가 다시 거둔) 대상이다. 그래서 '표상'을 '주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동일시의 정당성은 오로지 '주체'가 표상을 대하는 태도에서 유래한다. 즉 표상의 주체성은 오로지 표상을 품은 (혹은 마주한) 주체에게서 나온다.

관건은 표상이 아니라 주체, 주체 자신이 흠뻑 스며들어있는 표상을 품고 내려놓고(대상화하여 마주하고) 다시 거두는(표상으로서 마주하는) 주체다. 바로 이런 주체,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이중구조로서의 주체가 근대철학의 주춧돌이다. 이진경은 이런 주체를 그저 표상으로, 혹은 그저 '인간'(호모사피엔스라는 사회학적 생물학적 대상)으로 이해하는 듯한데, 이것은 근대철학을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지름길이다.

4.
이진경이 '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라는 예에 이어 내놓는 '굴뚝청소부 일화'(57쪽)는 더욱 혼란스럽다. 굴뚝청소부 주인공이 동료와 함께 굴뚝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주인공이 동료의 얼굴을 보니 새까맸다. 그래서 자기 얼굴도 새까마려니 짐작하고 세수를 했다. 그러나 그는 동료와 달리 얼굴이 새하얀 상태였다. 그러니 그는 자기 얼굴의 상태를 잘못 알고 바보짓을 한 셈이다. 여기까지가 일화의 줄거리다. 이진경은 이 일화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 19세기 말 굴뚝 청소부의 모습. ⓒWikimedia Commons
"이 두 사람(인식주체/대상)만으로는 내 얼굴이 어떻다는 판단과 실제 내 얼굴의 상태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59쪽)이다. "얼굴이 더럽다는 판단을 한 게 사실과 정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59쪽)이다. "이 두 사람"이란 굴뚝청소부들인 주인공과 동료를 말한다. 두 번째 문구는 쉽게 이해가 간다. 주인공의 판단과 사실이 엇갈렸다. 세상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첫 번째 문구, 특히 "이 두 사람(인식주체/대상)"이라는 대목이다. 주인공과 동료가 인식주체와 대상이라는 뜻일까? 더 이상의 설명이 없으니 나로서는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주인공(=인식주체)이 동료(=대상)를 아느냐 마느냐가 아니지 않은가! 이 일화에서 인식주체는 주인공, 인식대상은 주인공의 얼굴이라고 해야 맞다. 주인공은 일치하려니 짐작했지만 실제로는 일치하지 않은 두 항은 주인공의 판단("내 얼굴이 어떻다는 판단", "얼굴이 더럽다는 판단")과 주인공의 얼굴("내 얼굴의 상태", "사실")이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이런 두 항(믿음과 사실)이 불일치하는 일은 그냥 다반사다. 이진경이 지적하는 근대철학의 주체/대상 분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일화에 대한 나의 해석은 간단하다. 주인공은 동료의 얼굴(대상1)을 보고 자기 얼굴(대상2)을 추론했다. 그런데 그 추론이 틀렸다. 이게 다다. 한 대상을 보고 다른 대상을 추론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활동이며 때로는 오류로 귀결될 수 있다. 누구나 뻔히 아는 얘기다. "내 얼굴"이라는 약간 특별한 (왜 그런지 곧 이야기하겠다) 대상을 거론하기 때문에 언뜻 지혜의 향기 비슷한 것을 풍기지만, 이 일화의 논리적 줄거리는, 대상1을 근거로 대상2에 대해서 판단했는데 틀렸다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를테면 실험실에서 하얀 생쥐 두 마리가 검댕이 잔뜩 낀 관 속으로 들어가서 한참 기어 다녔는데, 한 마리(대상1)가 검댕을 새까맣게 뒤집어쓰고 나왔다. 아직 안 나온 한 마리(대상2)는 어떨까? 라는 수수께끼와 다를 바가 없다. 이 수수께끼를 받고, 아직 안 나온 놈도 "새까맣다"고 대답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유사한 대상 두 개가 같은 조건 아래 놓이면 같은 상태를 취하기 마련이라는 원리와 명석판명한 증거(대상1의 상태)가 이 추론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이 합리적인 추론과 대답은 당연히 틀릴 수 있다.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대상2가 특수한 유전자를 보유한 생쥐여서 날 때부터 털가죽에 방오(=오염방지) 기능이 내장되어있다면, 혹은 누군가가 미리 녀석의 털가죽에 최첨단 방오 처리를 해놨다면, 녀석은 새하얀 털가죽을 뽐내며 굴뚝에서 나올 테고, 수수께끼의 답변자는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흔쾌히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것이다(이 경우에 대상1에서 대상2로 진행하는 추론의 구멍은 두 생쥐가 유사하다는 전제가 틀린 것에서 비롯된다). 물론 성격에 따라, 또 수수께끼에 판돈이 얼마나 걸렸냐에 따라, 답변자가 이렇게 반발하며 펄펄 뛸 수도 있겠다. "이거 뭐야? 어떤 놈이 마우스 가지고 장난 쳤어?"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주체/대상의 분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라는 상황과 '굴뚝청소부 일화'의 공통점은 둘 다 '나 자신의 얼굴'이 대상으로 등장하는 사례라는 점이다. 이 사례들이 왠지 오묘하고, 심지어 아래와 같은 이진경의 어마어마한 주장과도 어울릴 법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느낀다면,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단 하나, 이 이야기들이 '나 자신의 얼굴'을 거론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대목이어서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와 '굴뚝청소부 일화']는 똑같은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딜레마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고, 양자가 일치하는 게 진리라고 한다면, 어떤 지식이나 인식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결코 확인할 수도 없고 보증할 수도 없다는 난점을 가리킵니다. 그게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주는 제3자 - 예를 들면 신 - 가 없다면 근대철학으로선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합니다. 주체가 신에게서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근대철학의 '원죄'인 셈입니다.(59쪽)

이진경이 누차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이 딜레마라는 점은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이 딜레마가 이 딜레마가 "위의 두 가지 이야기"와 무슨 상관인지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과연 이 딜레마가 존재하기는 하는지, 심지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지도 몹시 의심스럽다.

'나 자신의 얼굴'은 과연 특별한 구석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얼굴은 나와 가장 강하게 동일시되는 대상들 중 하나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일상적인 환경에서 깊은 숙고 없이 취하는 세계관에서 '나 자신의 얼굴'은 무엇보다도 강하게 '나'와 동일시된다. '나의 얼굴'에 뱉는 침은 곧 '나'에게 뱉는 침이다. 그래서 내 컴퓨터에 뱉는 침, 내 어깨에 뱉는 침보다 훨씬 더 모욕적이다. 게다가 더욱 오묘한 것이, '나'와 그토록 가까운 '나의 얼굴'이(이진경이 강조하듯이!) '나'의 눈에는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안 보인다. '굴뚝청소부 일화'는 탈무드에도 나온다던데, '나의 얼굴'이 가진 이 같은 특별함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철학은 감이 아니라 논리로 하는 활동이다. '나의 얼굴'은 많은 경우에 '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대상일 뿐이며, 이 특별함도 따지고 보면 제한적이다.

첫째, 어느 분야에서든 일가를 이룬 인물은 흔히 그의 '얼굴'이 아니라 '작품'과 동일시된다. 발레리나 강수진을 대표하는 것이 그녀의 얼굴인가, 아니면 춤인가? 당연히 춤이다. 무대 위에 선 그녀의 온몸에 스며들어있는 춤, 그 숨결이 곧 강수진이다. 소설가 조정래를 대표하는 것은 <태백산맥>을 비롯한 그의 대하소설들이다. 얼굴? 옛날에 물지게 지고 언덕을 오르던 정래 오빠를 흠모한 동네 소녀가 혹시라도 있었다면, 그 소녀에게는 조정래의 얼굴이 곧 조정래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나를 비롯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조정래는 곧 <한강>이요, <아리랑>이다.

둘째, '나'가 '나의 얼굴'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특수성은 시각을 통한 접근에만 국한해서 성립한다. 촉각과 후각과 미각은 얼마든지 '나의 얼굴'에 접근할 수 있다. 내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고 주무르면서, 난로의 열기에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내 얼굴에 묻은 화장품 냄새를 맡으면서, 혀를 내밀어 입 주변을 핥으면서, 나는 내 얼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시각을 통한 접근도 도구(거울, 사진기 등)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나아가 만약에 내가 동아시아인의 얼굴 형태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학자라면, 또한 온전히 그런 학자의 마음가짐으로 나의 얼굴을 대한다면, 나의 얼굴은 수많은 예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요컨대 '나의 얼굴'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라는 상황과 '굴뚝청소부 일화'의 오묘함과 의미심장함은 기껏해야 표피적이다. 이 사례들로 저 위에 인용한 이진경의 어마어마한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예시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수다. 이쯤 되면 그 주장 자체가 타당한지, 심지어 유의미한지도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 18세기 이마누엘 칸트의 초상화. ⓒWikimedia Commons
나는 이진경이 '주체'를 영 오해하고 있다고 강하게 의심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이진경만의 실수가 아니다. 근대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도 유사한 실수를 범했다. 아뿔싸, 그는 주체를 '실체'로 간주하고 말았다. '정신'이라는 실체, 혹은 '영혼'이라는 실체로 말이다. 이건 큰 실수이며 17세기 형이상학이 공유한 한계다. '실체'라는 개념은, 항상 이미 자기거리를 품은 자기관계로서 살아가는 '주체 이중구조'를 담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인데, 그 시절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형이상학자들(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은 이걸 잘 몰랐다. 그럼 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진술해야 할까? 칸트의 문장 하나를 인용하겠다.

나의 모든 표상에 '내가 생각한다(Das: Ich denke)'가 따라붙을 수 있어야 한다.(<순수이성비판> B131)

많은 이들에게 암호나 마찬가지일 독일어 원문을 굳이 병기한 것은 거기에 칸트의 지혜가 오롯이 담겼기 때문이다. 나의 표상에 항상 "따라붙을(begleiten)" 수 있어야 하는 놈, 바로 이놈이 주체다. 그런데, 잘 보라! 칸트는 이놈을 낱말로 지칭하기를 거부한다('Das: Ich denke'는 '내가 생각한다(Ich denke)'라는 문장을 그대로 명사화한,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표현이다). 낱말을 동원해서 주체를 가리키는 순간, 주체는 대상화하고, 나아가 실체화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 그놈을 '내가 생각한다'라는 문장으로 가리키면 상황이 달라질까? 무척 달라진다. 우리말에서 표상에 따라붙은 '내가 생각한다'는 '내가 생각하기에'(더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내가 보기에')라는, 뒤이은 문장 전체에 걸리는 부사구로 표현된다. 가장 기본적인 문장 형태를 '무엇은 어떠하다'라고 한다면, 이 부사구는 '내가 보기에 무엇은 어떠하다'의 꼴로 활용된다. 바로 이 부사구, 사태(혹은 대상)에 드리운 '관점'을 나타내는 이 부사구가 '주체'를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내가 보기에'가 인식주체의 참모습이라면, 인식주체의 분리나 독립은 애당초 배제된다. '내가 보기에'는 그 자체로 완결된 말이 아니고 항상 '무엇은 어떠하다'에 붙어서 구실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식주체는 항상 이미 인식대상에 스며들어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내가 보기에'가 '무엇은 어떠하다'에 쏙 들어가서 숨지 않고 별도로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인식주체는 항상 이미 인식대상과 거기에 스며들어있는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이로써 주체 이중구조가 대상과 더불어 완성된다. 진리는 평범하다. 나는 '내가 보기에 무엇은 어떠하다'라는 평범한 문장 틀 하나에서 근대적 주체와 근대철학 전반을 이해할 열쇠를 본다.

이진경은 이런 '주체 이중구조'를 아예 몰랐거나 처음부터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설명하기 위해 내놓는 예들을 더 검토해보자. 꼬치꼬치 따지는 일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살다 보면 내 취향뿐 아니라 심지어 대세까지도 거슬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5.
<철학과 굴뚝청소부> 2001년 개정판을 내면서 이진경은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고, 양자가 일치하는 게 진리라고 한다면, 어떤 지식이나 인식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결코 확인할 수도 없고 보증할 수도 없다는 난점 (…) 근대철학의 '원죄'"(59쪽)와 관련하여 벨라스케스의 그림 한 점을 삽입했다. <거울 앞의 비너스>라는 작품인데,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거울을 보는 여인이 등장한다. 또 거울을 들어주고 있는 날개 달린 꼬마가 등장한다.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1647년 경). ⓒWikimedia Commons

그림 아래에 붙인 설명에서 이진경은 작품 속 여인이 거울 속 얼굴과 자기 얼굴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모른다고 말한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참 해괴한 설정이다. 그러더니 "벨라스케스는 (…) 거울 옆에다 천사를 한 명 앉혀 두었다"라는 해석을 제시한다. 이어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아마도 그 천사가 말하겠지, '이게 네 얼굴이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그 다음에 나온다.

"비너스의 얼굴도 볼 수 있고, 거울에 비친 것도 볼 수 있는 자만이 진실을 알 수 있다. (…) 결국 거울을 보는 우리에겐 항상 천사나 '신'이 필요하다. (…) 내가 아는 게 진리인지 대체 누가 확인해줄 것인가? 그래서 (…) 지금도 많은 사람이 신이 없으면 불안해하며, 신을 대신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게 아닐까? '진리' '돈'…"(58쪽)

처음엔 나도 '어, 재미있네. 어떻게 벨라스케스가 이진경의 생각에 꼭 들어맞는 그림을 그렸지?' 했다. 그런데 제목을 다시 보니 그 여인은 인간이 아니라 여신 비너스다. 그렇다면 거울을 들고 있는 꼬마는 당연히 큐피드, 서양회화에서 비너스와 흔히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신이다. 천사가 아니다! 더 나아가 큐피드와 비너스의 관계는 하인과 마님의 관계쯤 된다(큐피드가 비너스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긴 하다. 하인이든 아들이든, 상하 관계를 따지면, 비너스가 위고 큐피드가 아래다). 실제로 그림에서도 큐피드는 거울 옆에 그냥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한 무릎을 꿇고 다른 무릎도 거의 꿇은 채로 비너스를 위해 거울을 들어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너스는 거울 속 얼굴이 자기 얼굴인지에 심각하게 의심하고, 큐피드는 "이게 네 얼굴이야"라는 대사로 그 의심을 풀어준다? 무척 독특한 상상이다. 나의 상상력으로는 "마님, 오늘도 역시 아름다우십니다. 어서 나갈 채비 하셔야죠" 정도가 큐피드의 대사로 적합하지 싶은데, 나는 역시나 평범하고 식상한 수준인가 보다.
솔직히 나는 이진경이 죽어서 말을 못하는 벨라스케스의 의도("나르키소스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까지 대신 거론해가면서 큐피드를 "천사"로(사실상 비너스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로) 둔갑시킨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진경이 절실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반칙에 가깝다는 느낌이 못내 남는다.

내친 김에 그림을 한 점 더 보자. 역시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다. 이진경은 "자아, 새로운 절대자"(12쪽 일러두기)와 유관한 일련의 미술품들 중 하나로 이 작품을 골라 삽입하고(40쪽) 이런 설명을 달았다.

"벨라스케스는 (…) 소실점이 있는 자리, 무한한 공간을 통일시키는 그 자리에 거울을 갖다 놓았다. 그 거울에는 (…) 인물이 슬며시 비쳐져 있는데 (…) 왕과 왕비가 그들이다. 바로 그 자리가 (…) 왕의 자리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소실점은 우주를, 모든 대상을 보고 사유하는 주체의 자리다. 우주 전체를 (…) 영유하고 장악할 수 있는 자리. 데카르트나 파스칼이 (…) 확실한 지식의 기초는 바로 '나'라고 믿었던 것은 (…) '생각하는 나'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확신 때문은 아니었을까? 주체, '사유하는 나', 이것은 적어도 근대철학 안에서 '왕의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여기서도 이진경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겠다. 근대철학에서 주체가 '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흔히 듣는 말이다. 인간의 오만, 자연 파괴, 과도한 이기심 추구 따위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근대적 주체의 개념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물론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 드문 사람이다. 나는 근대적 주체가 왕이 아니라 민주사회의 시민이라고 본다.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1656년).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지금 내가 문제 삼으려는 것은 이진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고, 상대는 경청해야 한다. 문제는 "소실점"이다. 이 작품 <시녀들>의 소실점은 왕과 왕비가 비친 거울의 자리가 아니다!

화면 우상귀에서 중앙 쪽으로 뻗은, 천장과 벽이 맞닿아 이룬 직선을 연장해보라. 거울의 위치는 그 직선을 벗어나 있다. 따라서 소실점(vanishing point)일 수 없다. 이 작품의 소실점은 거울 오른편의 문에 서 있는 사내 근처다. 위키피디아 영어판에서 "las meninas"(<시녀들>의 원제) 항목을 읽어보라. 또 구글에서 "las meninas vanishing point"를 검색해보라. 여러 보조선을 그어 소실점의 위치를 콕 찍어주는 이미지들이 많이 뜬다.

이진경은 틀림없이 알 테고, 푸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대개 알 테지만, 푸코는 <말과 사물>이라는 저서의 첫 장 전체를 <시녀들>에 대한 해석에 할애했다. 난해하면서도 매혹적인 그 해석에서 푸코는 왕과 왕비가 비친 거울을 대단히 중시한다. 그러나 그 자리가 소실점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한국어판(이광래 옮김, 민음사 펴냄, 1987년)에는 '소실점'이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의 난해한 해석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도 거울의 자리를 소실점으로 보지 않았나 추측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에 정말로 푸코가 거울의 위치를 소실점으로 보았다면, 푸코도 틀렸다. 소실점이 어디냐 하는 문제는 명석 판명한 기하학의 문제여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진경의 그림 활용이 대단히 독특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그는 <수학의 몽상>(2012년 개정판)의 3장 '수학의 마술사, 혹은 마술사의 수학'(93쪽 이하) 서두에 파우스트를 잠깐 언급하더니 곧장 "캘큘러스"('계산'이라는 뜻)라는 가상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런 '허구 동원하기'는 이 책 전체에 일관된 전술이다. 숱한 허구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3장에만 해도 캘큘러스, 아날리스, 가날리스, 나날리스,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악마 메피스토가 등장한다. 3장의 대부분이 이들의 가상 대화로 구성된다.

요컨대 이진경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허구의 인물들에게 연극을 시킨다. 좋다. 경직된 학계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대중을 상대하는 저자로서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서술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렘브란트의 에칭 한 점을 삽입해놓고(135쪽) 이런 설명을 붙인다는 점이다.

"캘큘러스 박사의 초상 : 아무도 캘큘러스 박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림 제목을 '파우스트'라고 써놓았다."

▲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의 <파우스트>(1650년 경). ⓒwikipaintings

삽입된 그림은 렘브란트가 1650년경에 제작한 에칭 작품(위키피디아 영어판 'Faust' 항목에도 삽입되어 있음)이며, 이 작품의 제목은 엄연히 <파우스트>, 따라서 작품 속 인물은 렘브란트가 상상한 파우스트다. 그럼에도 이진경은, 렘브란트의 망각 때문에 '파우스트'라는 제목이 붙었을 뿐이지, 사실 그 인물은 자신이 지어낸 연극의 등장인물 캘큘러스라고 말한다. 이런 그림 활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허구의 인물들을 꾸며내서 저자 마음대로 부리는 것은 괜찮지만, 엄연한 역사 속 인물인 렘브란트와 그의 작품까지 끌어들여 마음대로 부리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을까?

혹자는 내가 너무 고지식해서 이진경의 자유분방한 서술, 허구와 실재를 뒤섞는 참신한 기법을 못 알아본다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이진경의 멋진 유머라고, 그걸 즐길 줄 모르는 내가 지질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지금 나는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덤비는 꼴일까?

주목해야 할 것은 이진경이 이 유머를 통해 넌지시 내놓는 주장, 곧 파우스트와 캘큘러스의 동일성(혹은 유사성)이다. 이진경의 캘큘러스는 계산적 합리성의 화신, "탈주술화"(막스 베버의 개념)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화신이다. 파우스트는 16세기 이래 유럽의 설화에 가장 널리 등장하는 인물의 하나이며, 독일의 유랑 치료사, 연금술사, 마법사, 점성술사, 예언자인 요한 게오르크 파우스트(Johann Georg Faust, 약 1480~1540)가 그 모델로 추정된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파우스트는 괴테가 쓴 희곡 <파우스트>의 주인공이다. 이 파우스트는 독일 낭만주의의 화신,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라는 명언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런 파우스트와 캘큘러스가 서로 유사하다? 나는 노력하기에 방황하는 낭만주의자 파우스트를 사랑한다. 또한 얼음보다 더 차갑고 수정보다 더 깨끗하며 칼날보다 더 예리한 계산을 그에 못지않게 사랑한다. 그러나 파우스트와 캘큘러스를 대뜸 동일시하는 이진경에게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 그런지 설명하다보면, 수학과 과학에 대한 우리의 입장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이 차이는 근대적 주체의 본질과 직결되므로 은근슬쩍 유머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촌놈 소리를 듣더라도 따질 건 따져야 한다.

6.
이진경은 미적분학에서 모순을 본다("그것[미적분학]은 수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적인 개념이지만…"(<수학의 몽상> 135쪽)). 그가 콕 찍어서 문제 삼는 것은 17세기 미적분학의 주춧돌이라고 할 만한 '무한소' 개념이다. 그의 연극 속에서 '무한소'는 메피스토가 캘큘러스에게 알려주는 "악마적인 개념"(127쪽)으로 등장한다.

메피스토 : ……한없이 작아서 0에 가깝지만, 결코 0은 아닌 이 값을 '무한소'라고 함매.(106쪽)

나는 이 '무한소'의 개념이 왜 모순인지 도통 모르겠다. 이것이 모순이라면, 어째서 모순인지 명석판명한 증명을 보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물론 "어떤 수가 0인 동시에 0이 아니라는 것"(134쪽)은 확실히 모순이다. 그러나 이 모순적인 진술과 위 대사 속의 '무한소' 정의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다만 "한없이 작아서"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불명확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불명확성은, 이진경도 잘 알듯이 "19세기 프랑스 수학자 코시" 등이 발전시킨 "극한의 개념"(178쪽)에 의해 대폭 개선되었다. 요컨대 '무한소'에 담긴 생각을 더 명확하게 다듬은 산물이 '극한'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무한소'가 악마의 선물이라면, '극한'도 그렇다. 극한이 모순적인 개념인가? 이 주장을 진지하게 하려면, 무척 깊은 연구가 필요할 성싶다.

자세히 뜯어보면, 여기에서도 이진경은 특유의 느슨한 어법을 구사한다. "모순적인", "악마적인", "매우 수학적으로 취약한"(134쪽), "불안정성"(177쪽) 등이 적당히 혼용된다. 적어도 수학을 논하는 저자가, 몇 백 년의 수학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저자가 이런 어법을 구사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싶다. 취약하거나 불안정한 요소는 미적분학뿐 아니라 수학 전체(나아가 과학 전체)에 예나 지금이나 수두룩하게 널렸다. 숱한 수학자가 밥 벌어 먹고 산다는 것이 그 증명이다. 또한 거의 확실히 예언하건대, 미래에도 수학자들은 밥벌이를 잘 할 것이다.

반면에 모순적이거나 악마적인 요소는 어떨까? 일단 "악마적인"은 수학적으로 무의미하니 제쳐두고, 모순적인 요소가 수학에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무 근거 없이 판정할 사안이 아니다. 일단 공허하더라도 원리적인 수준에서 대답한다면, 현재 대다수의 수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다양한 이론에 모순이 숨어있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누군가가 연구를 통해서 그런 모순을 밝혀낸다면, 즉 이 이론에 이런 모순이 들어있음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정말 중요한 업적이요 수학의 진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보여주기'는 반드시 '모순 없는 증명을 통해 명석판명하게 보여주기'여야 한다. 예컨대 괴델은 힐베르트 프로그램이 실현가능하다는 생각에 모순이 있음을, 모순 없는 증명을 통해 깨끗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수학의 참모습이다. 수학에 모순적인 요소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수학, 더 나아가 과학의 본질은 모순 없는 증명이다.

▲ <수학의 몽상>(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반면에 이진경은 수학을 비롯한 과학(적어도 "근대 이후 서구 과학 전체"(<수학의 몽상> 137쪽>)의 본질을 '계산'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라는 말이 (…) 어떤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계산가능성'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같은 곳) "수학화하고 계산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근대 과학의 핵심이었다."(<수학의 몽상> 47쪽) 더 나아가 그의 규정은 근대 문명 전체를 싸잡는다. "계산하는 생활, 모든 것을 계산하려는 문명, 그것이 근대 문명의 특징"(<수학의 몽상> 6~7쪽)이다. "계산은 근대적 삶의 바탕에 있다."(<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218쪽)

근대적 문명과 삶은 일단 제쳐놓고, 과학에서 계산이 중요하다는 말은 백번 옳다. 계산을 동반하지 않은 주장은 과학자들의 대화판에 끼기 어렵다. 계산을 동반하지 않은 실험 데이터는 무작위한 수열과 다름없다. 우주배경복사를 엄청난 정밀도로 측정해서 데이터를 산더미만큼 쌓아놓았다 하더라도, 계산과 분석이 없으면 그 산더미 속에 무슨 보물이 들어있는지 전혀 모른다. 최근에 우주배경복사 관측 데이터에서 오래전 인플레이션 기간에 발생한 중력파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 발견은 초인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 데이터를 벽에 붙여놓고 뚫어지게 바라봐서 이룬 것이 아니라, 계산을 통해 이룬 것이다. 그렇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개념[계산] 없는 직관[데이터]은 맹목이다."(<순수이성비판> B75)

그럼 거꾸로, 데이터 없는 계산은 어떨까? "내용[데이터] 없는 생각[계산]은 공허"하다는 것이 칸트의 대답이다. 이로써 칸트의 명언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같은 곳)가 완성된다. 역시나 진리는 평범하다. 우주배경복사 데이터가 없다면, 또한 다른 증거들도 전혀 없다면, '인플레이션'도 '빅뱅'도 일반상대성이론에서 귀결되는 희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애당초 일반상대성이론도 에딩턴의 관측 자료로 입증되지 않았다면, 그냥 앞뒤가 맞는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데이터는 필수다.

과학에서 계산과 데이터,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이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겠다. 과학이란 '증거 대기' 곧 '증명'을 필수 규칙으로 삼은 대화다.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을 내놓느냐가 아니라, 그 주장을 대화 규칙에 맞게 증거를 대면서 내놓느냐다. 이때 '증거 대기'는 계산을 통해서도 할 수 있고, 대화판에서 실물 증거를 꺼내놓는 방식으로도 할 수 있고, 대화 상대들을 아프리카 밀림으로 데려 가서 대상을 함께 관찰하는 방식으로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이 어우러져 과학을 일군다.

그러므로 데이터와 아예 무관한 수학도 과학의 일종이다. 수학에도 '증명'이, 그것도 가장 탁월한 의미의 '증명'이 있지 않은가. 수학을 비롯한 모든 과학 분야의 본질은 증명이다.

그럼 계산은 뭘까? 계산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증명이거나, 증명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이진경은 굳이 계산에 방점을 찍는다. 그에 따르면 "수학은 근대 과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수학의 몽상> 47쪽)

"어떤 주제여도 (…) 수식이나 문자식으로 표현되고, 계산할 수 있는 공식을 통해 설명되면 분명히 과학이라고 보아 틀리지 않는다."(같은 곳)
"이제 마술사를 과학자로 만드는 법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건 마술사가 외우는 주문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바꾸면 된다. '에프이퀄엠에이, 이이퀄엠시스퀘어, 에프이퀄엠에이 이이퀄엠시스퀘어…'"(같은 곳)

나는 과학에서 계산이 중요함을 인정한다. 그런데 무조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계산은 증명에 이르는 강력한 수단이거나 그 자체로 가장 단순하고 선명한 증명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증명은 대화라는 더 큰 맥락 안에서 제 구실을 한다. 쉽게 말해서 과학은 대화판, 엇갈리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증거들이 오가는 판이다. 이 판에서는 목소리 큰 놈이나 혈통 좋은 놈, 주먹 센 놈, 돈 많은 놈, 잘생긴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명석 판명한 증거를 내놓는 놈이 이긴다. 이런 판에서 왜 계산이 중요할까? 하늘이 두 쪽 나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증거를 내놓아 승자가 되려는 사람이 가장 확실하게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계산이기 때문이다.

이진경은 수학과 계산이 무슨 마술사의 주문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농담 삼아 하는 얘기 같기도 하다),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마술사와 과학자는 계산을 하느냐, 수학 공식을 활용하느냐, 숫자를 들먹이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과학이라는 대화 판에 나선 놈이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된다. 마술사의 주문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어야 적당하다. 어차피 바람소리나 작은북 소리, 천둥소리 같은 효과음향이지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술사도 이런저런 이야기('이 몸이 해남 달마산 토굴에서 지네만 먹고 이십 년, 계룡산 너럭바위에서 이슬만 먹고 삼십 년…')를 풀어놓겠지만, 어차피 그의 한방은 모자 속에서 뿅! 나타나는 토끼지, 명백하게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다.

반면에 과학자의 한방, 나아가 본분은 그런 주장과 증명이다. 모자 속에서 토끼를 수백 수천 마리 꺼내고 심지어 공룡을 꺼내더라도, 이 한방이 없으면, 어디 마술사 일자리를 알아봐야지, 과학자로 밥 벌어 먹기는 글렀다고 봐야 한다.

▲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16세기 초 그림 <마법사>. ⓒWikimedia Commons

거듭되는 말이지만, 내가 보기에 과학에서 계산이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과학이 대화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진경이 근대 과학의 중심에 수학과 계산을 놓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그는 숫자와 계산에서 자본주의를 본다. 그에 따르면 "숫자와 계산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을 숫자들의 질서, 수학적인 질서(!)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자연의 수학화'와 비교해서 '사물의 수학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사물이 상품화되는 것이고 (…) 자본주의의 역사가 그것이다."(<수학의 몽상> 69쪽) 그는 수학화에서 상품화를 보며, 숫자에서 화폐를 본다.

"모든 사물을 계산 가능한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화폐, 그 화폐가 만드는 계산공간 (…)"(137쪽)

"(…) 안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숫자 - 화폐 – 이다."(73~74쪽)

실로 대단하다. 이진경은 지금 근대적 과학-계산-자본주의를 엮는 신공을 구사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에 "과학혁명"은 "신에게서 독립하려는 (…) 근대철학자들에겐 등대불 같은 하나의 희망"(<철학과 굴뚝청소부> 60쪽)이었고 "신에게서 벗어난 주체(인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과학"(같은 곳)이었으므로, 그의 엮기 신공은 근대철학과 그 주춧돌인 주체에까지 미쳐, 근대적 '주체-과학-계산-자본주의'라는 두름을 낳는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가 파우스트와 캘큘러스를 넌지시 동일시했던 것도 이 주체-과학-계산-자본주의가 본래적으로 띤 "악마적인" 색깔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이것은 뛰어난 통찰일까? 한편으로 나는 이 엮기에 상당한 정도로 동의할 수 있다. 과학과 계산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이미 충분히 밝혔다. 또한 나는 주체와 과학 사이에도 뗄 수 없는 관계가 성립한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적 주체의 본질은 대화이고, 그 대화의 한 모범이 바로 과학이기 때문이다. 또 계산과 자본주의도, 바탕에 대화를 깔지 않으면 둘 다 기괴한 짓거리가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강하게 연결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계산은 대화를 위한 수단이거나 단순한 대화다. 심지어 혼자 계산할 때에도, 계산하는 사람은 자신과 대화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준비한다. 자본주의 기업에서도 노조와 고용자 사이의 대화는 필수다. 이 대화가 없으면, 자본주의가 아니라 야만이다. 소비자와 판매자, 투자자와 경영자, 각종 계약의 쌍방 당사자 사이에서도 계산(회계)에 기초한 대화는 필수다. 그래서 회계 장부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 적어도 투명한 계산과 대화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사회들에서는,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엄벌에 처하지 않는가.

요컨대 근대적 주체-과학-계산-자본주에 항상 이미 대화가 숨결처럼 스며들어있다면, 나는 하나 같이 거대한 이 논제들을 이렇게 한 두름으로 엮는 것에 학자로서의 조심성을 무릅쓰고 과감히 동조하겠다. 그러나 이진경이 엮은 주체-과학-계산-자본주의 두름은 대화와는 상극에 가까워 보인다. 아무래도 그의 두름에는 '단절'과 '독단'과 '지배'라는 "악마적인" 원리가 스며들어있는 듯하다. 그가 주체-과학-계산-자본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지 싶다.

그러나 과연 단절과 독단과 지배가 근대정신의 참모습일까? '내가 보기에 무엇은 어떠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당신의 눈에는 단절과 독단과 지배를 노리거나 누리는 놈으로 보이는가? 단절을 원하는 자는 아예 말을 안 할 테고, 독단하려는 자는 그냥 '무엇은 어떠하다'라고 단언하고 돌아설 것이며, 지배하려는 자는 '무엇은 어떠하다'라고 말하고 나서 상대가 대들면 온갖 수단으로 윽박지를 것이다. 이들은 구질구질하게 '내가 보기에'를 붙일 까닭이 없다. 근대인이란 '내가 보기에 무엇은 어떠하다'를, 자기를 포함한 모든 각자의 진술이 공유한 기본 틀로 여기는 사람이다. 이 기본 틀은 '당신이 보기에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항상 이미 품고 있다. 근대인은 단절자, 독단자, 지배자이기는커녕 오히려 대화를 향해 열린 주체다.

대화판을 전제하지 않으면, 근대철학, 근대과학, 근대적 주체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잘 보면, 이진경은 대화가 끼어들 여지를 철저히 봉쇄하면서 근대철학을 해석한다. 굴뚝청소부 주인공과 동료는 웬일인지 전혀 대화하지 않는다. 거울을 보는 '나'도 외톨이인 데다가 혼잣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입도 뻥긋 안 한다. 큐피드(이진경의 "천사")가 비너스에게 하는 말("이게 네 얼굴이야.") 역시 진리 판정권을 독점한 "천사"의 일방적인 통보이므로 대화와 거리가 한참 멀다.

다음 절의 주제는 이 마지막 사례에서 두드러지는 진리 판정의 문제, 혹은 진리 "보증"의 딜레마다. 이 문제를 논하다 보면, 이진경이 근대적 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또 그 이해가 나의 이해와 얼마나 다른지 잘 드러날 것이다. 그 다름의 드러남이 곧 보완이기를 바란다.

7.
참 흥미롭게도 이진경은 근대적 주체가 처한 곤경을 진리 "보증"의 딜레마로 규정한다. 즉, 근대적 주체가 '진리에 도달할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에 도달했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다. 그러면서 그는 "제3자"의 판정이 필요함을 거듭 강조한다.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 제3자가 없다면 양자[주체와 대상]의 일치(진리)를 보증할 수 없다는 것"(<철학과 굴뚝청소부> 61쪽)이 문제다. 왜 굳이 진리 보증(사실상 진리 판정)을 중심으로 판을 짜는 것일까? 왜 '진리에 도달할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했는지 확인할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일까?

나는 끙끙거리며 머리를 짜내고 끝내 연필까지 굴려가며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채점 통보를 기다리는 학생을 상상해본다. 운 좋게 정답을 맞혔다면, 이 학생은 진리에 도달하기는 했으나 진리에 도달했는지 확인하지 못하는 처지다. 그래서 조바심할 테고, 선생이 빨간 동그라미를 쳐줘야 비로소 '아, 기쁘다. 내가 진리에 도달했구나' 할 것이다. 진리의 판정권은 오로지 선생에게 있고, 학생은 선생이 손에 쥔 빨간 펜의 궤적 하나에 울고 웃는다.

학생이 부족하나마 그 답안에 도달하기 위해 쏟은 뜨거운 열정, 아! 누가 모르겠는가, 머리에 쥐가 나고 창자가 꼬이는 그 처절한 몸부림, 마침내 던진 건곤일척의 승부수는 한낱 물거품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빨간 동그라미, 심지어 선생이 무슨 생각으로 펜을 놀리는지조차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지면 그것으로 끝, 학생은 외친다. '만세, 내가 진리에 도달했다!'

▲ <데카르트 연구 - 방법서설·성찰>(르데 데카르트 지음, 최명관 옮김, 창 펴냄). ⓒ창
이진경은 이런 상황이 '진리'를 둘러싼 전형적인 맥락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설마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진짜 진리와 그 맥락은 전혀 이렇지 않은데, 데카르트를 위시한 근대철학이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을 빚어냈다고 해석하는 것이리라. 정말 그렇다면, 나는 이진경의 접근법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본다. 알다시피 데카르트는 외부의 판정권자에게 기대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제일원리로 삼은 사람이 아닌가. <방법서설>에 나오는 첫째 규칙을 보라.

첫째는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게 또 아주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않을 것.(<방법서설, 성찰, 데카르트연구> 20쪽)

한마디로 무릇 진리 판정에 '내가 보기에'를 붙이겠다는 다짐이다. 이런 사람 앞에서 '당신에게는 제3의 판정권자가 필요해!'라고 지적하는 것은 해석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고 그냥 딴 얘기다. 차라리 '당신의 방식으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어!'라고 지적한다면, 이것은 그나마 들어볼 만한 비판일 수 있다.

비유하건대 데카르트가 말하는 근대적 주체(위 인용문에서 '나', 곧 데카르트 자신)는 항상 이미 선생과 대등한 학생이다. 그런 학생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묻고 싶다면, 주위를 둘러보라. 똘똘한 학생들은 자신의 답안이 확실한 정답인지 아닌지 스스로 알 때가 많다. 심지어 때로는 선생이 빨간색으로 사선을 쭉 긋더라도,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나는 이러이러한 근거로 답안을 작성했다고 설명한다. 만약에 이런 학생의 능력을 문제 삼고 싶다면 그냥 '진리에 도달할 능력'을 문제 삼으면 된다. 굳이 '진리에 도달했는지 확인할 능력'을 따로 떼어서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요컨대 '진리에 도달할 능력'과 '진리에 도달했는지 확인할 능력'은 근대철학의 관점(근대정신)에서는 사실상 동의어다. 아주 옛날, 고대 그리스보다 더 옛날에는 사정이 달랐을 수 있다. 이른바 '진리'를 신전에, 신전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은밀한 곳에 모셔두고 오로지 최고 성직자만 거기에 접근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 '진리'에는, 자격 없는 자가 그것을 보면 죽는다거나 성불구자가 된다거나 돌덩이로 변한다거나 아무튼 혹독한 벌을 받는다는 위협도 따라붙어 있었다.

그 시절에 한 젊은이가 그믐밤을 틈타 신전에 잠입한다고 해보자. 쥐도 새도 성직자도 모르게 지성소의 휘장을 걷고 진리의 궤짝에 다가가 뚜껑을 연다고 해보자. 그는 무엇을 보게 될까? 먼지와 거미줄, 새까맣게 고여 있는 어둠, 쥐의 배설물과 좀 벌레의 허물.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아무튼 그는 진리에 도달한 셈이고, 혹시라도 궤짝 안에 묵직한 물건이 있어서 움켜쥐었다면, 진리를 움켜쥐기까지 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말로 진리에 도달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정말로 여기가 지성소인지, 이것이 진리의 궤짝인지, 혹시 이 물건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진리인 것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이진경은 이런 유형의 '진리'를 진리의 전형으로, 혹은 근대적 진리로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그가 이런 터무니없는 시대착오에 빠져있을 리 없다고 믿는다. 하여 그가 굳이 '진리 확인 능력'을 문제 삼는 것은, 제3의 판정권자를 게임에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고밖에 이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포석은 이미 말한 대로 부적절할 뿐더러 어떤 의미에서는 데카르트와 근대철학의 뺨을 다짜고짜 후려갈기는 폭력에 가깝다.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주체'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의 판정권자'다. '주체', 곧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가 진리를 판정할 능력을 동등하게 지녔다는 선언, 바로 이것이 근대정신이다. 혹시 당신은 이런 당당한 근대인으로 자처하려니, 당신이 범할 수도 있는 오류가 걱정되는가? 청신 차려라, 당신은 답안지를 제출한 학생이 아니다! 진리 판정의 권한과 책임을 짊어진 근대인이다! 무릇 진리주장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오류는 삶의 필수 영양분이다. 진리주장을 내놓고, 오류를 범하고, 수정하고, 다시 진리주장을 내놓으며 성장하는 놈, 바로 이것이 근대인이다.

혹시 '모든 각자'가 진리의 판정권자라면, 세상이 아수라장이 될 것 같은가? 이른바 "유아론의 딜레마"(61쪽)가 발생할 것 같은가? 걱정 붙들어 매라. 우리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항상 이미 개인의 것인 동시에 모두의 것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 각자는 항상 이미 대화중이다. 물리학계, 수학계, 생물학계를 보라. 민주사회를 보라. 나는 나의 안팎에서 참된 대화의 힘이 작동함을 믿는다.

제3자의 보증을 들먹이는 무리수까지 두어가며 이진경이 진리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아마도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 실체존재론이 함축하는 정신과 육체 사이의 관계설정 문제가 진리의 문제에까지 미친다는 것이 이진경의 해석인 것으로 보인다.

▲ 프란츠 할스의 <르네 데카르트>(1648). ⓒWikimedia Commons
데카르트가 실체이원론자라는 지적은 백번 옳다. 그는 분명히 정신과 육체를 전혀 이질적인 두 실체로 규정했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는 정신과 육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지독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른바 "심신문제(mind-body problem)"로 불리는 이 골칫거리는 오늘날의 뇌 과학에서도 (비록 주요 문제로는 아니더라도) 거론되며, 영어권에서는 숱한 철학자가 이 문제로 먹고 산다. 그러니 굉장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분명히 명토 박아두는데, 심신문제는 존재론의 문제,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라는 개념을 주춧돌로 삼은 실체존재론의 문제다. 그런데 이진경은 이 문제를 '진리의 문제'로 변주한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철학과 굴뚝청소부> 56쪽)를 언급할 때 그는 암묵적으로 주체/대상 문제와 정신/육체 문제를 동일시한다. 인식론(진리)의 문제와 존재론(실체)의 문제를 한 두름으로 엮는 것이다. 이것은 타당한 동일시이고 깊은 통찰이 배어있는 엮기일까? 나는 전혀 아니라고 본다.

이 엮기 신공은 17세기 실체존재론을('실체'라는 개념을) 궁극의 기반으로 전제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어차피 우리는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마련이고, 심지어 우리가 아무 이야기 안 해도 결국 존재하는 것은 실체-속성-양태이니, 실체를 맨 위에 놓고 그 아래에서 인식과 진리와 윤리와 기타 모든 것을 논해야 한다는 입장에 쏙 빠져들어 있는 사람만이 이런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요컨대 이진경은 17세기 실체존재론으로 데카르트의 철학 전체를 덮는다. 그럼으로써 혁명가 데카르트를 가리고, 근대정신을 가리고, '주체'를 말소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근대철학을 연 혁명가 데카르트지, 실체존재론에 매인 17세기 형이상학자 데카르트가 아니다. 혁명가 데카르트는 '관점', 곧 '내가 보기에'를 발견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관점' 혹은 '관점들의 엇갈림'은 그의 시대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있었고 (똑같은 신을 섬기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혁명가는 이 현실을 끌어안는 철학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17세기 형이상학자 데카르트는 그 '관점'을 "생각하는 놈(res cogitans)"으로 규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안타깝게도 부사구 '내가 보기에'를 '정신'이라는 명사로 대체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생각하는 놈"이 "공간을 차지한 놈(res extensa)"과 맞서는 구도가 짜인다. 더 나아가 양자가 각각 존재론적 인식론적 자족성을 갖춘 실체로 규정됨에 따라, '등 돌린 맞섬'이라고 할 만한 퍽 이상한 구도가 짜인다.

원래의 통찰은 무릇 '대상'에 항상 이미 '관점'이 스며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두 항, 곧 '대상'과 '관점'은 이질적이다! 아마도 데카르트는 이 이질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이원론을 고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관점'과 '대상'이 이질적인 것은 빛과, 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물체가 이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빛은 물체와 맞서지 않고 물체에 드리운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우리 각자가 동등하게 지닌 양식 혹은 이성을 "자연의 빛"으로 칭하기도 했다. 사실은 이 비유가 최선이었다. 양식 혹은 이성, 곧 '주체성'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대상에 항상 이미 드리워있는 '빛'이다. 이 '빛'과 '대상'을 마치 흰 바둑돌과 검은 바둑돌처럼 맞세운 것, 이것이 데카르트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그러나 무릇 혁명과 혁명가에게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우주 모형을 구성해놓고도 겁이 많아 죽기 직전까지 발표를 미뤘고, 거의 100년이 지난 뒤에도 갈릴레오는 그 모형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도 자기가 인도에 도착했다고 착각했다. 지지난 갑오년에 전주성을 점령했던 농민군은 본격적인 벼농사 철을 앞두고 자진 해산했다. 곧 감꽃이 필 참인데, 모름지기 농사꾼이 논을 놀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근대를 연 데카르트한테서 근대의 완성까지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관점'의 작동에서 '주체'라는 놀라운 이중구조를 읽어내는 일, 더 나아가 이 구조를 모든 존재와 대상과 개념에 박아 넣는 일, 다시 말해 '관점을 내장한 존재론' 곧 '주체존재론'을 세우는 일은 데카르트의 몫이 아니라 후배 철학자들의 몫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들 중 하나다. 근대는 완성되지 않았다.

일상적인 우리말에서는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고, 어떤 이들은 근대 너머의 탈근대를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에게 근대철학은 아직 그 잠재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한 악기와도 같다. 수백 년 된 바이올린으로도 윤이상을 연주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더구나 그 바이올린이 스트라디바리우스라면, "양식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투박한 선언이 결국 철학의 시작이요 끝이라면, 이름도 생김새도 요상한 최신식 악기들에 매혹되는 것이 도리어 어리석은 짓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다. 내가 보기에 이진경은 근대철학이라는 악기에 애당초 애정이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그의 애정은 '근대 너머'의 악기와 음악에 꽂힌 듯하다. 그는 근대철학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는커녕 주로 근대철학의 문제, 한계, 약점 같은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는데, 그나마도 내가 보기에는 현악기의 울림통을 두드리면서 이것이 타악기로서 영 신통치 않다고 지적하는 격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사랑하는 근대 너머의 악기로는 이진경도 아주 좋은 음악을 연주하리라 믿는다. 나의 연주는 지금까지 충분히 들려준 셈이지만, 그 뼈대를 한참 앞에서 내가 요약한 이진경의 세 가지 해석과 비교하며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1)', 2)', 3)'이 나의 해석이다.

1) 근대철학은 주체를 신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성립했다.
1)' 근대철학은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주체를, 곧 '자기를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를 진리의 판정권자로 삼음으로써 성립했다.

2) 근대적 주체는 대상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2)' 근대적 주체는 대상과 거기에 스며들어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즉 '관점'을 의식한다.

3) 이렇게 이중으로 분리된 주체는, 제3자의 판정이 없는 한, 자신의 앎이 진리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3)' 근대적 주체는 대화한다. 이것이 궁극의 진리다.

마지막 절은 일종의 부록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8.
이제 '분리된 주체', '대상', '진리', '진리 보증' 같은 엄청난 개념들은 제쳐두자. '관점', '주체 이중구조', '대화', "자연의 빛" 같은 더 엄청난 개념들도 제쳐두자. 그래도 이진경과 나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 이진경의 근대를 대표하는 것은 자본주의인 반면, 나의 근대를 대표하는 것은 민주주의다.

▲ <세계인권선언>(이부록 그림, 조효제 옮김, 안지미 아트디렉터, 프롬나드 펴냄). ⓒ프롬나드
내가 근대인으로 자처할 때 속으로 읊조리는 것은 이런 문장들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며 서로 동포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1조, <세계인권선언>(이부록 그림, 조효제 옮김, 안지미 아트디렉터, 프롬나드 펴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대한민국헌법 1조)

내가 어리석은가? 이런 이데올로기를 곧이곧대로 믿다니, 근대의 교묘한 통제에 길들여져 추악한 진실을 못 보는 촌놈인가? 단언하건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카르트와 함께 기꺼이 촌놈이고 싶다.

"나로서는 내 정신이 보통 사람의 정신보다 어떤 점에서나 더 완전하다고 주제넘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방법서설, 성찰, 데카르트연구> 10쪽)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 땅에는 민주주의가 아직 뿌리 내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딜레마가 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본래의 뜻에 더 적합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법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해야 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소선거구제를 혁파해야 하고, 비례대표도 대폭 늘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선거 제도 자체, 대의 민주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입장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이진경은 "근대 사회로선 피할 수 없는 딜레마"(<맑스주의와 근대성> 137쪽)를 지적한다. 그것은 "통제와 자유가, 사회적 질서와 그 근거인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서로 이율배반에 빠지는 것이고, 그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딜레마"(같은 곳)다. 간단히 말해서 "자유로운 개인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딜레마"(같은 곳)다. 그에 따르면,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근대적 전략은 '지배자 없는 지배'라는 역설로 요약할 수"(같은 곳)있다. "즉 사람들이 (…) 자발적인 복종을 '이성에 따른 행동'으로 간주한다면 (…) 이율배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같은 곳) 암울하기 그지없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땅의 소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가 있는 시나리오다. 급기야 이진경은 선거에 대해서도 "'전체'의 이름으로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요구하는 대표적 제도인 선거"(<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10쪽)라고 일갈한다.

나는 이진경이 말하는 딜레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자유로운 개인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인류는 이 과제의 해결을 위해 애쓰며 진보해왔다. 물론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삼천대천세계에 쉬운 일이 어디 있나?

이진경은 굳이 지배와 복종의 도식으로 근대 사회를 재단하려 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동등한 주권자들의 공동체, 우리가 스스로 정하고 따르는 규칙과 제도와 법은 정녕 허상일까?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말처럼, 자유니 평등이니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오로지 "자발적인 복종"과 "지배자 없는 지배"만이 진실일까? 오히려 모든 각자가 주체로서 참여하는 대화가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는 없을까?

▲ 양우석 감독의 2013년 작 <변호인>. ⓒ위더스 필름

그냥 간단히 내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나는 동등한 주권자들의 공동체, 곧 민주공화국의 현실성을 믿는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주인공이 그 터무니없는 야만의 법정에서 대한민국헌법 1조 2항을 읊고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개뿔도 모르고 외칠 때, 촌스럽게도 나는 눈물이 찔끔 났다.

나는 국가이고 싶다. 세상을 둘러보며 이것이 내가 원한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책임 있는 주체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지금은 차마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 사회를 나와 동지들이 일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열심히, 악착같이 선거에 참여할 것이다. 선거는 공적인 대화의 꽃이고, 나는 대화를 본분으로 삼은 근대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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