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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대답해 주어야 할 문제입니다! [금정연의 '요설']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금정연의 '요설' 전편, <부바르와 페퀴셰> 편 바로 가기

<제27장> 독자들께 드리는 보고 (1)


그렇다면 문학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문학은 세계 내에서 작업하고자 하고, 세계는 그의 작업을 무의미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여긴다. 문학은 실존의 어둠을 향한 길을 열어 가고, 그리고 거기서 저주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더 이상은 안 돼'라는 말을 발음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학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왜 카프카 같은 한 인간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그르쳐야 한다면, 그로서는 작가가 되는 것이 진실을 가지고 삶을 그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67쪽, 강조는 인용자)

*

고매하신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독자로 살아온 저의 이력에 대한 보고서를 '프레시안 books'에 제출하도록 요구하심으로써, 최소한 막지는 않음으로써 저에게 영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벌써 16개월이나 이어진, '18'개월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유감스럽지만, '요설'을 마무리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보고인 동시에 일종의 결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론이라면, 시대의 요청에 따라, 분명 명쾌해야만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맥락에서라면 저는 권고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거의 사 년 가까이 저는 서평을 써서 먹고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통해서라면 눈 깜빡할 사이의 세월입니다만, 제가 그래왔듯이 달음질쳐 지나가기에는 무한히 긴 세월이었습니다. 구간에 따라서는 유명한 작가들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충고, 그보다 많은 질책, 그리고 거의 절대적인 무관심을 받았지만, 아무튼 여전히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읽었던 모든 책들이 – 비유적으로 말씀드리지만 – 제 등 뒤에서 저를 떠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가족의 기대나 월급봉투의 추억에 고집스레 집착하려 했다면, 이러한 성과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바로 모든 고집을 포기하는 일이 제 자신에게 부과했던 최고의 계명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부과했다면 말이지만. 천진난만한 원숭이나 마찬가지였던 저는 이 멍에에 순응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통장 잔고가 점점 저에게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과거의 상사들이 허락했을 경우에, 내가 나의 전 직장으로 되돌아가는 문은 처음엔 하늘이 지상 위에 세운 문 전체만큼이나 커다랬는데, 그 문은 앞으로 앞으로 채찍질로 이루어진 저의 독서와 더불어 점점 낮아지고 옹색해졌습니다. 오직 책 속에서만 한결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을 가졌습니다. 텅 빈 잔고 위로 불어오는 차가운 북풍도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오늘날 저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다만 늦은 밤 가계부를 들여다보며 내쉬는 '안해'의 작은 한숨일 뿐입니다.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아마 이런 보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좀 더 큰 한숨을 내쉬겠죠. 어쩌면 혼날지도 모릅니다만 그 또한 저를 책으로 이끄는 채찍질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한 남자와 함께 살도록 운명 지어진 모든 여자들의 숙명이므로, 어쨌거나 숨은 쉬어야 하니까요, 그녀의 한숨을 덜어주기 위한 힘과 의지가 아무리 충분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만 제가 그녀의 눈에 되도록 띄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 신혼인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는 비유를 택하고 싶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부장님들이 할 일도 없으면서 늦도록 퇴근을 미루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신사 여러분, 여러분이 그러한 어떤 '다정함'을 지니고 있는 한, 저의 일상이 여러분에게도 무관한 것이라고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볍지 않은 머리통을 이고 다니는 모두의 목덜미를 간질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난한 서평가든 뻣뻣한 부장님이든 간에 말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면 제가 무슨 보고를 드릴 수 있을까요? 어차피 다 아시는 이야기일 텐데? 언젠가 모리스 블랑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 없는 시도이다. 왜냐하면 독자는 자신을 위하여 쓰여진 작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거기서 미지의 무엇을, 또 다른 현실을, 그를 변화시킬 수 있고 그가 변화시킬 수 있는 별개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낯선 작품을 원한다. 곧장 대중을 향하여 글을 쓰는 저자는 사실 쓰지 않는 것이다. 쓰는 것은 대중이고, 이러한 까닭에 대중은 더 이상 독자가 될 수 없다. 독서는 겉치레에 불과하며,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다. (21쪽)

제가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블랑쇼의 말을 따르자면, 이 지면을 채우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독서는, 그러니까 제가 끊임없이 도피하는 그 무형의 장소는,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주십시오. 저는 원래 말하거나 쓰는 것보다는 듣고 읽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원고료만 제 통장으로 들어온다면,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 잠시 양해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마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계속해서 이 가망 없는 보고를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직 여러분의 도움으로만 완성될 수 있을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완성을 해야만 한다니,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만, 굉장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글쓰기 자체의 모순을 닮았습니다. 다시 한 번 블랑쇼를 인용하겠습니다.

헤겔이 말하기를 글을 쓰고자 하는 자는 처음부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모순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 자체를 두고 볼 때 천부적 소질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작품을 쓰지 않는 한, 작가는 작가가 아니며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작가가 될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글을 쓴 다음에야 재능을 갖게 되는데,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 (16쪽)

물론 여러분은 저의 보고를 들으며 실은 재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 채셨을 겁니다. 블랑쇼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최고작들이 내적인 요구가 아닌 우연한 주문에서 태어났음을 고백하는 발레리를 통해 "발레리에게 유팔리노스를 의뢰하였던 출판사 아르쉬텍튀르 자체가 바로 그 작품을 쓰기 위해 발레리가 처음 가졌던 재능을 가능하게 한 형식이다. 이러한 의뢰가 그 재능의 시작이었고, 그 재능 자체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의뢰가, 다시 말해 원고 청탁이 재능 자체라면, 누군가 그에게 그것을 의뢰하도록 만든 이전의 글, 그것을 쓰는데 필요한 재능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블랑쇼는 곧바로 "하지만 또한 발레리라는 존재, 그의 재능, 그의 세상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그가 그러한 주제에 관해 보여 주었던 관심, 이 모두를 통해서만 의뢰는 실제의 형식을 얻게 되고 진정한 계획이 되었음을 덧붙여야겠다"(18쪽)고 덧붙이고 있습니다만, 이 또한 명쾌한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답할 문제 또한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이쯤에서 이 보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변신‧시골의사>(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의 요청에 대하여, 침묵은 곧 동의라는 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극히 제한된 의미에서는 물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매우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지난한 경력을 통해 배운 것은 독서의 무용함입니다. 다소 나쁘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오늘 저는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제 생애의 어떤 분기점에 있는 지금, 저러한 결론에 대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이 독자 여러분에게 무언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제시해주는 것도 아니며, 저에게 요구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 것입니다.

그리고 실은 이미 지난 몇 번의 연재를 통해 그것을 말해버렸습니다. 이 자리가 저에게 요구하는 것, 그러나 제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가져도 말할 수는 없는 것 – 그건 어디까지나 천진난만한 원숭이에 불과했던 사내가 위대한 문학 작품을 통해 어떻게 사람 꼴을 하게 되었는지, 다시 말해 '독서 멘토'들이 주구장창 주장하는 독서의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 논술시험이나 대학교 리포트나, 소개팅 자리에 도움이 될 만한 요약정리와 적절한 인용을 통해 쉽게 풀어달라는 것이겠지요. 한 마디로 간증 말입니다. 물론 저는 그런 걸 할 자격이 없고,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그것은 바로 독서가 사람을 어떻게 그르치는지에 대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이 또한 여기저기서 늘어놓았던 이야기군요. 아시다시피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고, 나이를 먹으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게 마련입니다. 저는 다만 그것이 건강에, 그렇습니다, 건강입니다,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책을 읽는지, 그것으로도 모자라 글을 쓰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을 뿐입니다. 블랑쇼의 표현대로라면 "왜 카프카 같은 한 인간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그르쳐야 한다면, 그로서는 작가가 되는 것이 진실을 가지고 삶을 그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하는 의문입니다. '요설'이라는 이름이 썩 어울리는 연재의 마지막에 썩 어울리는 물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

*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패러디한 글임을 밝힙니다. 인용 문구 없는 인용이 있습니다. <변신 – 카프카 단편전집>(이주동 옮김, 솔 펴냄)과 <변신‧시골의사>(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를 번갈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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