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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만큼 위대한 명의, 침술로 조선을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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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허준만큼 위대한 명의, 침술로 조선을 살리다!" [소설을 쓴 한의사] <허임> 공동 저자 이상곤 인터뷰
가깝게는 2013년의 <구암 허준>, 2000년의 <허준>과 90년대 베스트셀러 <소설 동의보감>,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76년 <집념>까지, 4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이은성이라는 작가를 만난 허준의 삶은 현대에 익숙한 스토리로 여러 번 복원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한의학엔 허준 외의 인물은 없는 것일까? 비염 치료의 권위자이자 <낮은 한의학>(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저자인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은 또 다른 걸출한 인물, 허임(1570~1647 추정)에 주목한다.

허준이 58세 때 겨우 34세의 나이로 그 명의에게 지극한 칭송을 받은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이자, 서출이지만 양반가였던 허준과 달리 완전히 밑바닥에서 출발한 극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허준이 의술뿐 아니라 사상 전반에 통달한 '마에스트로' 형 인간인 데 비해, 허임은 실전 경험과 손 기술을 중시한 전문가 형 인간이라는 대비가 재미있다. 임금이 오라고 재촉해도 느긋하게 등장했다는 평소 성격에 대한 기록도 이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한다.

<허임>(전 3권, 성인규·이상곤 지음, 황금가지 펴냄)은 그런 허임을 주인공으로 하여, 임진왜란이라는 거친 시대를 배경으로 무수한 생과 사를 그려내고 침의 의미를 되짚는 한의학 대하소설이다. 이는 이상곤 원장이 허임에 붙들려 4년 전에 완성한 원고를 바탕으로, 무협 전문 작가인 '장담' 성인규 작가가 풍성하게 살을 붙이는 공동 과정으로 탄생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질투나 사랑으로 얽힌 인물관계에 대한 생생한 묘사, 속도감 있는 전개로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대중 엔터테인먼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인물이 가진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그가 완성하고 '조선화시킨' 침법의 의미보다는 앞에 세울 수 없다고 공동 저자인 이상곤 원장은 말한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그 소재를 발굴한 사람이 '한의사'란 직업을 가진 이이니 만큼, 소설적 성취를 넘어 숨어 있는 의미들을 알아보고 싶었다.

허임이 완성시킨 침법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우리 민족에게 침이란 어떤 존재였나. 나아가 소설 창작이라는 경험은 한의사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한의학이 말하는 건강한 삶은 어떤 것일까. 다음은 지난 4월 22일 서울 서초구 소재 갑산한의원에서 이상곤 원장과 가진 인터뷰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허임>(전 3권, 성인규·이상곤 지음,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조선에는 허임 침법 밖에 없다"

프레시안 : <허임>이 나오기까지 장장 4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저자 후기에 "처음에는 경락과 경혈의 탐색을 위해 고민한 사유를 정리하기 위해 시도된 기획이었다"고 썼는데, 기획의 첫 단계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상곤 : 4년 전 <프레시안>과 제가 힘을 합해 구당 김남수라는 분과 일전을 치렀죠. 그 과정에서 한의학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과연 우리에게 침이란 무엇인가, 조선에는 조선만의 침이 있었나 하는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허준의 <동의보감>은 우리 고유의 한의학인 '향약'과 중국에서 들어온 한의학을 합쳐서 만든 새로운 자주의학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비슷한 흐름으로 자주적인 '우리의 침'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침 잘 놓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허임 같은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리 잘 해도 '누구누구의 침법' 같은 것은 없었는데 허임의 침법엔 이름이 있었거든요. 나중에 산센준안(山川淳菴)이라는 오사카 출신 의사가 조선에 유학 왔을 때 조선에는 허임의 침법 밖에 없다고 규정했을 정도로 그의 침법은 일세를 풍미했습니다.

프레시안 : 그 침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십시오.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프레시안(최형락)
이상곤 :
'보사법'이라고 합니다. 만약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가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숨을 들이마시게 합니다. 이는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는 것처럼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이라 하여 보법입니다. 사법은 이와 반대로 풍선에 공기를 빼는 것처럼 자침합니다.

허임이 특히 강조한 것은 오른손으로 침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에는 혈(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요. 혈은 구멍인데 피부로 덮여 있습니다. 열려진 것이 아니라 피부이므로 문질러서 내면의 기의 흐름이 활발할 때 자침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에요.

혈자리는 기를 조절하는 것이 기본 목표입니다. 기라는 것은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하늘과 땅이 마주쳐서 생기는 기후의 변화로 대표됩니다. 태양으로 대표되는 하늘의 변화를 시간으로 규정하고 사방팔방의 공간인 땅의 변화를 합해서 계량화한 것이 혈자리가 되지요. 바람, 더위, 추위, 습기 등 기후변화처럼 혈자리는 하늘과 땅의 만남을 통해 몸을 데우고 식히며 팽팽하게 만들거나 수축하는 변화의 중심축이 됩니다.

또 세 번을 나누어 2푼, 2푼, 1푼으로 찌른 것은 상중하의 뜻으로 천지인의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감나무에 감이 다 떨어져도 감 하나는 반드시 남겨두었습니다. 하늘의 새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였지요. 그들이 꿈꾸었던 하늘과 땅,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자연의 세상이 바로 천지인입니다. 허임의 보사법에는 이런 천지인의 삼원론이 깔려 있죠. 참고로 허준의 <동의보감>도 정, 기, 신이라는 삼원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허임이라는 브랜드로 '의료 한류'를"

프레시안 : 그렇다면 허임의 삶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허임의 침법에서 출발한 기획이네요.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채택한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상곤 : 네, 침법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어요. 그게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후에 다른 침법이 수입되고 나서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규명하고 싶어 허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인물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더라고요. 완전히 드라마예요. 아버지는 악공이고 어머니는 노비였는데 당상관까지 올라갔다는 건 조선시대로선 불가능한 얘기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준이 어릴 때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조선 최고 허 씨 집안 출신이고 부유하게 자랐어요. 단지 서출이었으니 벼슬하는 데 조금 제약이 있었다 뿐이지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점이 많아요. 그런데 허임은 정말 밑바닥에서 출발한 인생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오로지 침 잘 놓는 능력 하나로 최고 직책까지 올라 임금 앞에서도 자기 자존심을 부렸으니까요.

광해군이 어느 날 아침에 침을 맞을 테니 침의들더러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를 내렸는데,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사간원이 엄하게 징계하라고 아뢴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어요. '내 기술 하나는 최고다'라는 마음이 있으니 임금 앞에서도 그리 대범할 수 있지 않았겠어요. 항상 이념이 우세한 조선 사회였던 만큼, 기술이 우세한 광경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 스릴러 영화 <역린>. 황금가지에서 소설도 나왔다. 역사를 소재로 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대표 사례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한의학을 브랜드화 하는 데 일조하고 싶어서입니다. 예전에 일본 이비인후과 의사 네 명과 밥을 먹는데 제일 처음에 묻는 게 "유의태를 아십니까"더라고요. 드라마 <허준> 얘기였습니다. 안에 있다 보면 드라마의 영향력을 잘 모르는데 그 사람들은 그걸 통해 우리를 안다는 거죠.

지금 전 세계적으로 침구학이 주목되고 있는데, 서양에는 전부 중국제 침, 중국 의사들만 진출해 있어요. 그 사람들이 한국의 침법이 무엇인지 물으면 대답할 만한 한국의 브랜드가 없습니다. 사실 손 기술로 보면 우리가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데도요. 게다가 중국은 기나긴 공산주의 경제 경험 때문에 우리 같은 '돈 놓고 돈 먹기' 역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술이라는 것은 '돈 놓고 돈 먹기' 할 때 제일 발달하지 않습니까. 우리 한의학은 50년간 그걸 했거든요.(웃음)

한국의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데, 한의사들은 그런 점에서 별로 잘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얼마든 내세울 수 있는 영웅들을 잊음으로써 세계에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온 거예요. 말하자면 한의학에서도 '의료 한류'를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허임의 침술을 내세워보겠다는 것이지요. 인물을 발굴해 이야기를 구상하고 그것이 나아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한국의 침술에 매력을 느끼고 한 번쯤 맞아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 허준의 삶은 드라마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MBC

침, 부차적 기술? 가난한 이들에게 축복!

프레시안 : <허임>에는 침을 쓰는 법과 약을 쓰는 법이 대립하는 듯한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장면입니다.

그때 허준이 갑자기 물었다.
"하나 물어보마. 침구 치료가 심한 편두통에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디 네 생각을 말해봐라." (…)
"오히려 약보다 낫다고 봅니다."
허준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팼다. 조금은 불쾌하게 느낀 듯 묻는 목소리의 끝이 높아졌다.
"무엇이 낫다는 것이냐?" (……)
"하지만 침을 잘못 놓으면 약으로 인한 부작용보다 훨씬 더 위험해질 수가 있다. 그리고 근본적인 치료라고는 볼 수 없지."
"그 말씀도 옳습니다만,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습니다." (2권 221쪽)

이런 장면을 보면서, 문외한으로서 그 시대 한의학에서 약을 높이 치고 침과 뜸을 부차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어떤가요?

이상곤 :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볼 수 있어요. 기록을 보면 강릉의 부자 다섯 명이 일 년에 한 번씩 보약을 지어 먹자고 계모임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지금이야 몸이 허하다 싶으면 아무나 가서 보약을 지어 먹는데, 그때는 부잣집 사람들도 1년에 한 번 먹을 만큼 약재가 귀했다는 얘기죠. 그러니 일반인들이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침하고 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약 한 첩 못 먹고 죽는다"란 말도 있었습니다. 결국 가난하다보니 우리 한의학은 침이나 뜸에 대해 집착을 해 왔어요.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안 그래도 비싼 약재가 더더욱 줄어들면서 침과 뜸이 중요한 치료 수단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게다가 약재는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오다 보니 당시에 몇 년이 걸렸겠어요. 약효나 약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겠죠.

다만 기본적으로 침과 뜸은 아프잖아요. 지금 쓰는 침처럼 작은 것도 아니고 치료에 고통이 심했으니까 약 먹는 것을 선호하긴 했겠죠. 그런데 허임 같은 경우엔 워낙 침을 잘 놓으니까 덜 아프기도 하고 효과도 좋았던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 '내가 침을 맞고 싶으니 어의들은 간섭 마라. 침 놓는 자의 기술을 따라라'라고 경고를 줬던 거죠. 그건 그만큼 허임의 침법이 독특하고 잘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영조임금이 원래는 몸이 약했는데 이중탕(理中湯)을 오래 복용해서 굉장히 오래 살았어요. 조선시대 임금의 평균 나이가 47세였는데 83세까지 살았으니, 두 배를 살았던 겁니다. 그 다음부터 어의들이 어떻게 했겠어요. 정조에게 인삼을 먹이려고 눈이 벌게졌지요.(웃음) 그런데 정조는 인삼이 정말 안 받는 사람이었고 그것 때문에 죽기까지 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의사들이 일반인들보다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도 실제로는 경험을 더 중시합니다. 좋은 걸 보면 따라하고 싶은 게 일반적인 의사들의 습성이고, 그게 그들의 한계이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가 되면 다시 약 위주로 가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의원이 드문 세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상. 큰 도성이 아니면 관청에 가야 겨우 의원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그나마도 천민들은 약값이 비싸서 치료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비싼 약을 쓰지 않고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오죽 좋을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침구술이야말로 진짜 백성을 위한 의술이지.' (1권 206쪽)

기록에 상상을 짜 넣다

프레시안 : 역사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보니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으로 구축된 내용일지 궁금했습니다. 허임의 출신, 전란 중 행적이나 궁중 기록 등은 거의 <조선왕조실록>을 그대로 따랐겠지만 연애 이야기나 악역인 유진하와의 관계, 스승 임영과 운주사에서의 기(氣) 수련 등은 어떻습니까?

이상곤 : 일단 허임을 질투하는 유진하나 스승 임영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임영의 경우 모델은 있어요. 정읍의 임언국이라는 사람인데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명조 대(1545∼1567)에 이 사람이 영은사의 노스님으로부터 침법을 배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말의 종기를 치료하다가 거기에 앵무새 고기를 넣었더니 지혈이 잘 됐다는 기록이라든지 상처를 절개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요. 허임이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살았고 가까운 나주 출신이었으니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만난 적 있거나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상상한 거죠. 두 사람의 침법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이 학술적으로도 여러 번 증명된 바 있거든요.

다만 임언국이 명조 대 사람이고 허임이 선조~광해군 대 사람이니 시간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 시간 차이를 중간에서 메우는 인물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게 임영이 되는 거죠. 즉 임언국의 영향력 안에서 허임이 그런 기술을 익힐 수 있지 않았을까, 개연성은 충분한 것 같아요.

운주사의 경우, 실제 있는 절이지만 허임이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이 절의 배치가 독특해서 후에 허임의 침법에 담긴 생각과 연결 지으면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운주사는 우리 민족이 언젠가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지는 칠성신앙에 입각해 모든 배치가 북두칠성 구조로 되어 있는 사찰입니다. 이 칠성신앙이 천지인의 근거라고 본다면, 허임이 칠성신앙과 불교신앙이 마주하는 모습을 보고 침에 내재된 철학을 깨우치지 않았을까 추측해서 그가 운주사에 가도록 만든 거죠.

또 연애 소재는 다 제 머릿속에 있었던 거예요. 허임이 남성으로서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인가 하면…… 그건 조금 의문이 가는데(웃음), 왜의 첩자인 남장 여자 전하성은 완전히 상상으로 만든 인물이죠. 하지만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그렇게 첩자를 보낸다든지 해서 미리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또 허임이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기 전에 말의 종기를 치료하면서 치료법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고요. 김만익은 실제 있었던 인물입니다. 제주도에서 워낙 많은 말을 길렀기 때문에 조정에도 말을 바쳐서 높은 벼슬까지 올랐던 사람이죠.

(임영에게 의술을 배우던 시절 허임은 말의 종기 치료를 본격적으로 익히기 위해 제주도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만난 전하성이라는 허약한 소년이 왜에 정보를 보내는 첩자이자 여성이라는 사실을 혼자 알게 된다. 전하성은 허임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으며, 임진왜란 때 적진에서 재회하여 허임의 목숨을 살려주게 된다. -편집자)

프레시안 : 역사적 기록에 의존해 썼다는 원래의 원고에서 성인규 작가가 살을 붙이는 작업으로 넘어가고 난 뒤에는 거의 수정을 안 했나요?

이상곤 : 그때부터는 의술과 관련된 전문적인 내용을 많이 봤죠. 특히 뒤로 갈수록 거의 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궁중에서 허임이 치료한 기록들이 굉장히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실 말고는 쓸 수가 없었죠. 허준과 만나서 임금의 진료를 의논하는 모습도 나와 있으니까 둘의 관계도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허준이 '통섭의 대가'라면 허임은…

프레시안 : 말씀하신 허임과 허준의 관계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허준이 허임을 크게 아낀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침은 네가 조선 제일이다"라고 인정하는 장면이 나와요. 허임 역시 허준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면서도 어느 부분에선 못마땅해 하곤 합니다. 우리가 두 사람을 각각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지가 궁금합니다. '허임은 허준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할 수 있나요? 혹은 둘이 가는 길이 달랐다면 어떤 의미에서 달랐을까요?

ⓒ프레시안(최형락)
이상곤 :
선조 37년 허준이 임금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 기록이 있습니다.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 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동의보감>을 보면 허준은 침에 대해서도 너무나 상세하게 잘 알고 있었어요. 그는 한의학 전반에 다 통달한 그야말로 마에스트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의학이라는 학문을 대하는 입장에서 허준만큼 공부를 많이 한 이도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유학, 불교, 도가 전반을 꿰뚫는 텍스트로 지금 우리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급 의학서예요. 침이라는 한 분야에 통달했던 허임을 한의학 전반의 대가와 경쟁 관계로 놓고 비교하기는 곤란한 면이 있죠.

비유하자면 통섭을 상징하는 대 학자와 한 가지 분야의 기술 장인은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허임도 침구라는 부문에 있어서는 탁월한 기술자이면서 이론적으로 완성한 부분도 틀림없이 있지요. 그러니까 최고 대가인 허준이 어린 허임을 칭송하지 않았겠습니까.

프레시안 : 허준과 허임이 남긴 의서를 비교한다면 어느 점에서 다릅니까.

이상곤 :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착각하는 사실이기도 한데요, 조선시대에 천민들은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언어를 갖는 것은 양반뿐이었죠. 조선에서 나온 많은 한의학 책은 대부분 양반들이 쓰거나 양반 손을 빌려 쓴 겁니다. 허준은 그 긴 <동의보감>을 자기 손으로 다 썼어요. 앞서도 말했듯 비록 서자였지만 굉장히 좋은 집안 출신이었으니까요.

허임은 책을 쓸 때 모르긴 몰라도 남의 손을 빌려서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침구경험방>을 보면 정말 경험을 강조한 냄새가 물씬 풍겨요. "침구기법을 손에 익혀라", "비법은 주어도 교묘한 재주는 줄 수 없다"며 관념적 학문보다는 실질을 중시했습니다. 조선의 침구학 책은 앞서 나온 책을 베낀 경우가 많았는데, 허임의 책은 자기가 직접 침을 찌르고 경과를 봤던 구체적 사례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의미가 컸던 겁니다. 산센준안은 이 책을 일본에서 두 번이나 출간했을 정도지요.

참고로 허준은 심약(審藥)을 지낸 적이 있는데, 이 직책은 말 그대로 약(藥)을 찾는(審) 것으로 약재 공급을 위해 여러 번 전라도에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허준과 허임이 이전부터 알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선조 대 뛰어난 의학 관계자들이 대부분 담양, 나주 등 전라도 지방과 가까웠다고 해요.

어쩔 수 없는 천재

프레시안 : 사람들이 어떤 질병을 앓는지를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습니다. <허임>에서 종기 치료 장면이 대단히 많이 나오는데, 이는 다른 사극을 봐도 궁금한 점이었어요. 현대에 종기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이상곤 : 제일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웃음) 종기를 앓은 왕이 많았거든요. 세종도 종기로 고생했고 문종도 종기 때문에 1년 반을 앓다가 죽었지요. 왜 현대에 와서는 종기를 찾아볼 수 없는가, 여기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제가 느끼기엔 수돗물인 것 같습니다. 수돗물이 나오고 난 다음부터는 종기가 그렇게 치명적인 병이 아니게 된 것 같아요.

조선시대엔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었지요. 항생제가 없다보니 대부분 2차감염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종기를 잘 낫게 하는 것은 명의가 되는 가장 큰 조건이었어요. 허임은 침을 잘 놓았을 뿐 아니라 종기도 잘 고쳤습니다. 그가 지낸 벼슬 이름 자체가 '치종교수'잖아요. 그래서 그가 짐승의 종기를 치료하며 오랫동안 치료술을 갈고닦았다는 설정을 넣은 겁니다.

프레시안 : 소설에서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이 지나치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임금의 눈치를 잘 안 보는 것도, 신분 고저 차별 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강직함과 맞물려 '올곧다'는 느낌을 주고요. 그런데 천출이면서 오로지 실력만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면 오히려 좀 더 악독한 면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허임이란 실제 인물의 인성과 의원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어떻게 생각하며, 소설 속 인물로 각색할 때는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습니까.

이상곤 : 글쎄요. 사실 허임은 천민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침을 배운 거잖아요. 그도 이익을 좇아 행동했고 누구보다 성공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실제 인물이건 소설 속 묘사건 무조건 의롭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듭니다.

문제는 허임이 타고나면서부터 천재였다는 거죠. 선조가 "침으로 일세를 풍미한 허임을 불러다오"라고 했을 때 허임이 고작 20대였거든요. 분명 뛰어난 스승을 만나 배우기도 했겠지만 타고난 기질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천재를 천재가 아닌 인물로 그려낼 순 없잖아요.(웃음)

프레시안 : 대체로 주인공 허임에 무게가 가 있지만 개성 있는 조연들도 많이 나옵니다. 애착이 갔던 조연이 있다면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상곤 : 일본 여자 전하성입니다. 조선시대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는 의술 교환이 빈번히 이루어졌죠. 그래서 전하성과 허임의 관계를 끌고 나가면서 두 사람이 말 치료나 침술, 한의학 전반에 있어서 서로 호흡하며 일본과 조선의 의학적 교류라는 측면을 설명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상상을 하기엔 힘이 부족하더라고요.

프레시안 : 소설적 재미를 위해 사랑, 질투, 복수, 배신 같은 통속적인 소재를 적절히 버무렸습니다. 공동 작업이다 보니 두 집필자가 여기에서 의견이 갈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의도대로 가지 못한 부분, 원래 더 쓰려고 한 부분이 있다면요?

이상곤 : 허임이 세종 때 허조라는 사람의 6대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허조는 당시 예학의 일인자였고 예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지요. 그러다 갑자기 사육신들의 싸움에 관여되어 일족이 멸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허조가 천민으로 도망 다니다가 의원으로 재기하는 과정도 그리고 싶었어요. 이건 완전히 사실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고 추측입니다만. 어쨌든 조선 사회의 역동성을 막는 암초인 성리학적 이념을 깨는 인물로 그려낼 수 있었을 텐데, 소설적 구성을 생각하다보니 이 부분은 빠졌습니다. 이 '출생의 비밀'까지 넣으면 <허임>이 좀 더 긴장감 넘치고 다이내믹한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요. 만약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넣고 싶습니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선조와 광해군의 불행을 헤아리다

프레시안 : 이 소설의 배경인 선조 대는 어떤 시대였다고 생각하는지요.

이상곤 : 저는 그저 의사에 불과하기에 역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주제 넘은 일이겠지만, 그런 생각은 듭니다. 조선은 이념에 지배당한 사회였잖아요. 그 이념은 성리학으로, 성(性)은 마음 심 옆에 날 생 자를 쓰죠. 태어난 바의 마음의 이치를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마음의 수양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자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도 선조 대는 성리학의 극단으로 간 시대였습니다. 이황과 이이, 기대승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한꺼번에 다 있는 시대였어요. 거기다 선조가 서자에 삼남이라 원래 자기가 왕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가 명종이 갑작스레 죽으면서 왕이 된 것 아닙니까. 왕이 될 때부터 정통성 시비가 일었고, 그로 인해 유학자들에게 많이 휘둘렸죠. 권력이 진공 상태였으니까 그만큼 당파도 생긴 거고요.

기본적으로 권력에 정통성이 있으면 유학에 대한 토론은 살짝 옆으로 제쳐두고 신하들 꽉 잡고 힘을 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신하들이랑 계속 문답을 하면서 유학 토론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했던 거죠. 그런 가운데 전쟁을 만났으니 얼마나 불행했겠어요. 말하자면 집에서 공부만 하던 사람더러 갑자기 운동선수로 뛰라고 한 것 아닙니까.

프레시안 : <허임>의 서술적 자아는 선조를 크게 비판하면서 광해군에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인물에 대한 판단은 성인규 작가의 것인지 이상곤 원장의 것인지 궁금합니다. 방금 전 이야기에선 선조에 대해 일종의 연민이랄까 이해를 내비치셨는데요.

이상곤 : 두 임금에 대해서는 성인규 작가의 판단이 커요. 그리고 사실 임진왜란을 놓고 평가하면 선조는 돌 맞아도 마땅하지요. 하지만 선조로서는 평생 공부만 하다가 전쟁을 치르라니 얼마나 내면이 불행했겠습니까. 저는 그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보고자 한 거죠.

한편 광해군은 평가가 상당히 엇갈리는 인물이지만, 임진왜란 자체만 놓고 보면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죠. 이순신 장군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감독이잖아요. 감독을 하다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간 게 선조라면, 부감독이 감독 역할을 해내며 난리를 통제한 것이 광해군이라 할 수 있겠죠. 위기관리 능력은 뛰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저도 애정은 가더라고요.

그런데 의학 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문제는 전쟁 동안 이 사람(광해군)이 너무 고생을 했다는 겁니다. 평생 궁궐에서 자라다 갑자기 숲에 가서 '비박'을 하며 얼마나 많은 죽음을 봤겠어요. 이 경험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심약해졌겠지요. 그래서 광해군 대로 넘어가면,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에 묘사된 것처럼 멋진 역할도 했겠지만 실제로는 공포감 때문에 숨어 지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신하들이 언젠가 자신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불안에 시달려 무속에도 굉장히 크게 의존했고요.

▲ <광해-왕이 된 남자>.

행복한 한의학의 미래

프레시안 : 현대 의학과 한의학은 몸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한의학이 학(學)이 아니라 유사과학이나 미신이라는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학' 자체가 근대화 이후 서양식 교육과 대학을 통해 성립된 개념이고요. 결국 한의학은 그 나름의 몸에 대한 입장을 가지면서도 서양의학의 사고체계 안에 포섭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한의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할까요?

이상곤 :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같은 신체를 놓고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르게 보죠. 아주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면 서양의학이 '육체'를 보는 공간적인 관점이라면 한의학은 '기'를 다루는 시간적인 관점입니다. 또 서양의학은 구조적인 측면에서 기능이 온다고 보고, 한의학은 기능적 측면에서 구조가 온다고 봅니다. 한의학에서 그 기능이 바로 기(氣)의 정체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눈 자체가 재미있잖아요. 옛날 한의사들은 기능을 통해 구조를 예측해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고 불행했겠어요. 지금은 구조도 보고 기능도 보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런 시대일수록 현대의학을 이해함으로써 한의학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현대의학이라는 적이 있는 게 아니라 한의학을 보는 더 다양한 관점이라는 무기 내지는 동행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평소의 건강을 위한 쓰임에 있어 이런 비유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면 보통 어떻게 하죠? 아스피린이나 해열제를 먹지요. 그런데 감기라는 것은 콜드(Cold), 즉 몸이 차가워졌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뜨거워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열제를 먹으면 열이 내려가지요. 지금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카드를 쓰는 거지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건 아니란 겁니다. 한방에서는 매운 것, 따뜻한 것을 먹어 땀을 내고 열을 올려 차가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의학은 적금에 가깝고 현대의학은 카드에 가깝지 않은가 싶어요. 여유 있을 땐 적금도 들고 당장 급할 땐 카드도 쓰면서 때와 사정에 맞춰 건강을 위한 양날의 검을 쓸 수 있으니 이 또한 지금 시대의 축복 아닌가 싶습니다. 한의학이 그동안 진단 측면에서는 현대의학에 떨어지는 측면이 분명 있었지만, 100세 시대가 코앞에 온 만큼 늙어서 소모될 우리 몸의 생명력을 미리 보충해주는 적금을 들어 둔다는 의미에서 앞으로 더 각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가장 사적인 몸과 관련되는 일이자 가장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인 보건·의료에 대한 관심이 평균 수명과 정보 접근성의 향상과 함께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기'란 화두를 고민하는 모두에게, 한의사로서 주고 싶은 조언이 있습니까.

이상곤 : 건강에 대해 '얍삽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작은 노력을 들여 몸이 확 좋아지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건강에서 제일 중요한 건 실천과 시간의 투자입니다. 돈 버는 데, 연애하는 데, 공부하는 데는 시간 투자하면서 건강해지려고 투자는 별로 안 해요. 작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일확천금의 논리가 건강을 바라보는 데에도 깊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삼시 세끼 열심히 챙겨먹고, 가끔 몸에 좋은 것 찾아 먹고, 밖에서 라면 같은 것 덜 먹고, 약간 적게 벌더라도 집에 일찍 들어가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애쓰면 그 누가 건강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다들 이런 작은 실천은 무시하고 건강에 뭔가 비법이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의학에서는 몸이나 마음이나 늘 일정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말합니다. 너무 피로하거나 무리하지 말고, 극단적인 노여움이나 기쁨, 슬픔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죠. 또 조금 덜 생각하고 마음을 적게 쓰면서 감정의 격변에 빠지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이 조선 왕들이 건강을 유지하는 지침 중 하나이기도 했어요.

프레시안 : 소설 쓰느라 생각도 마음도 많이 쓰셨을 텐데요.(웃음) 혹시 앞으로 또 소설로 써보고 싶은 소재가 있습니까?

이상곤 : 소설 정~말 힘들더라고요. 진이 다 빠졌어요. 당분간 책 집필은 좀 쉬어야지요. 혹시 다음에 여유가 되면 우리 시대, 즉 80년대가 무엇이었나를 묻는 자전적인 소설을 써보고 싶은데… 아내가 크게 반대할 겁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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