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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 속에서 '현실' 찾는 그대여, 지적 유희는 범죄가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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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 속에서 '현실' 찾는 그대여, 지적 유희는 범죄가 아니라네 [김창규의 '기계 나비의 꿈'] 맞닿아도 괜찮은 평행선, 두 개의 태도
(아마도 편집자께서는 눈살을 찌푸리시겠지만)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차이나 미에빌(China Mieville)은 영국 판타지/SF작가로 어마어마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차이나 미에빌을 좋아하는지라 국내에 번역되기에 앞서 읽기도 한다. 그의 최근작 중에 판타지인 <도시와 도시>(The City & The City)가 있다. <도시와 도시>는 작중 세계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얼핏 아주 흔하고 간단한 은유를 도입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배경이 되는 것은 두 도시, '베스젤'과 '울 쿼마'다. 이 둘은 분명 다른 도시지만 하나의 도시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베스젤과 울 쿼마는 서로 상대를 무시하며 존재한다. 즉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베스젤 사람은 (눈에 빤히 보일 텐데도) 바로 옆에 있는 울 쿼마의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런 규칙은 각 도시의 시민에게도 적용된다. 평행우주나 다른 차원이나 시간의 교차처럼 SF적인 요소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두 도시는 문자 그대로 한 공간에 공존한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 『The City & The City』(China Mieville, Del Rey) ⓒDel Rey
물론 필자도 알고 있다. <도시와 도시>의 설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현실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빤하고 닳고 닳은 은유이다. 차이나 미에빌은 이 은유가 곧 피할 수 없는 현실인 세계를 치밀하게 그린다. (그리고 중반을 넘어가면서 이 은유는 빤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굳이 번역도 되지 않은 작품을 언급하는 이유는 물론 있다. <도시와 도시>를 읽은 독자는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굳어버린 우리나라의 현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척?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생각이다.

필자는 직업 때문에 독자나 작가 지망생이나 소설을 영화화하고픈 영화계 관계자를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도시와 도시>를 다시 읽는 느낌을 받는다. 즉 픽션(물론 이 픽션에는 사이언스 '픽션'도 포함된다)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를 발견한다는 얘기다. 이런 태도의 차이는 때로 물과 기름과도 같아서, 심지어 SF나 판타지를 '공부'하겠다는 한 가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 간에도 섞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두 가지 태도란 무얼까. 한 쪽은 픽션을 끌고 가는 이야기와 설정을 그 자체로 즐긴다. 그 픽션이 SF나 판타지일 경우 각 장르의 장점을 얼마나 잘 살렸는지, 그 작품만의 특징은 무언지를 발견하고 즐긴다. 반면에 다른 한 쪽은 작품의 내용이 현실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에만 주목한다. 허구 속에서 부단히 '현실'을 찾아 헤매고,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그 연계가 약하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자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작품의 현실 은유성이나 풍자라는 요소를 경시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동시에 그런 이유만으로 작품을 폄하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상상력이 주는 재미를 즐기고, 다양한 작품을 모두 아우르려 한다. 반면에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일단 손에 자를 들고 작품을 대한다. 그들은 SF나 판타지를 객체화시켜두고, 어떡해서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또는 사회적인 의미라는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 (우리나라의 기존 독자들이 익숙한) 여타 소설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 대조하려는 경우도 있다. 평가나 재단의 결과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은 수비적이거나 공격적인 갑옷을 한 번 두르고 접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SF나 판타지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못 겪어 봤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즐겨 그린다. 따라서 후자에 속하는 태도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인 오류다. 이런 태도를 접할 때마다 필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 시절을 돌이키지 않을 수가 없다. SF나 판타지가 쓸데없는 망상이라며 앞뒤 안 가리고 폄하하던 시절 말이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주 일부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망령이 형태를 바꿔 무의식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는 건 아닐까.


SF와 판타지의 스펙트럼은 넓고 넓다. 그런 강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그 스펙트럼은 <레고 스타워즈>에서 <멋진 신세계>에 이르고, <반지의 제왕>에서 <1984>에 이르며, 게임에서 소설과 시와 음악에 이른다. 경제와 역사를 어느 정도 알면 현실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잘못된 시각에 쉽게 혹하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픽션의 세계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눈과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그물을 걷을 필요가 있다. (무의식적인) 장르 거부증에 걸린 사람은 그 그물을 방충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그 그물은 예쁘장한 열대어가 이쪽 바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정신의 가두리 양식장일 수도 있다. 그레그 베어의 <블러드 뮤직>(Blood Music)이 정말 의식적인 게으름에 빠진 자들의 퇴행기에 불과할까?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 매트릭스>(Schismatrix)는 미래를 빙자한 정치적 우화에 불과할까?​ 이 두 작품 안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SF를 즐기는 독자에게는 바로 그 무언가가 핵심이 된다.

ⓒwww.tomswift.org

이 간극은 아마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도시와 도시>에 나오는 두 도시의 시민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 버린 경향일 수도 있고, 이른바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우열이나 계몽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문제도 아니다. 특정 장르를 거리낌 없이 즐긴다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굳이 작정하자면 여기에 보수와 진보, 폐쇄와 개방 등 여러 가지 가치를 심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통계가 없을뿐더러 당분간 그런 통계는 요원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상에서 느낀 바를 적는 데에 그치겠다.

그래도 이런 공평무사함이 양방향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다. 세상 모든 작품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 건 필연이겠지만 그 전에 색안경은 벗어주었으면 한다. 또한 SF나 판타지에 새로 관심이 생기는 분들이라면 적어도 기존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정도는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다양한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은 의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죄나 단점도 아니다. 함께 즐길 수 없으면 놔두면 된다. 그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이해할 수 없다고 부정하거나 꼬리표를 붙여봐야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만 될 뿐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에서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의식과 픽션의 세계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애써 눈앞에 그물만 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접점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직선이 평행선처럼 보였던 것도 실은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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