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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라도 가려고 했던 그 문, 결코 닿을 수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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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라도 가려고 했던 그 문, 결코 닿을 수 없었네 [금정연의 '요설'·마지막회] 카프카의 <성>
<제29장> 독자들께 드리는 보고 (3)

여기서 잠깐, 우리의 주의를 또 다른 K의 이야기로 돌려봅시다. 어차피 요제프 K는, 그 가련한 친구는 조금쯤 기다려도 상관없겠지요. 이미 충분히 가련한데다 자기 자신의 소송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K는 측량사입니다. 성의 부름을 받은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밤늦은 시간에야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있는 마을에 도착해요. 성이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고, 성이 있음을 알려 주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부터 불안하죠. 그래요, 카프카의 모든 주인공이 그렇듯, K 또한 시작부터 곤경에 처했습니다.

K는 일단 여관을 찾습니다. 여관에는 빈 방이 없었고 - 외진 마을의 허름한 여관에 방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때도 지금처럼 불륜 커플이 많았던 걸까요? 성이 있는 산은 등산하기에 좋은 산이었을까요? 왜 전공자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는 거죠? - 주인은 짚으로 채운 매트리스를 가져와 휴게실에서 자라고 합니다. K는 이내 곤한 잠에 빠져들지만 그리 긴 잠은 아니에요. 누군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거죠. 다행히 K는 벌레로 변한 것도, 체포를 당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리를 듣습니다. 마을은 성의 영지이고, 백작의 허가증이 없는 사람은 그곳에서 숙박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K는 의외로 태연해요.

"그럼 나도 허가를 받아 와야겠군요." K는 하품하며 말하고는 일어나려는 듯 이불을 밀어젖혔다.
"대체 누구의 허가를 얻겠다는 거요?" 젊은이가 물었다.
"백작님이오." K가 말했다. "달리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이런 한밤중에 백작님의 허가를 받겠다고요?" 젊은이가 소리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된다는 건가요?" K는 태연하게 물었다. "그럼 왜 나를 깨웠어요?"
(<성>(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8~9쪽)

▲ <성>(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펭귄클래식코리아
가련한 K는 - 그렇습니다, K라는 이름은 카프카 이후 가련함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쯤에서 제 이름의 이니셜 또한 K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네요. -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방에서 체포당한 요제프 K가 그랬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눈이 부시지만 커튼이 없어 선글라스를 낀 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처럼. 이어서 카프카 식의 소동극이 펼쳐집니다. 웅성웅성, 말들이 쏟아지고, K는 영문도 모른 채 큰소리를 치는데, 이래서야 해결될 리가 없지요. 결국 누군가 나서서 성에 전화를 겁니다. 부지런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성의 관리들은 그 시간에도 근무를 하고 있었고,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명쾌한 답변을 내립니다. 사실무근이라고. 하지만 이내 다시 전화가 걸려와 K가 측량사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전형적인 공무원이라고 할까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혹시 공무원이 계신가요? 아,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다만 카프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결국 사람들은 풀이 죽은 채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고 의기양양해진 K는 다시금 잠을 청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K는 여관주인에게 자신과 곧 도착할 조수들이 묵을 방을 마련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달방을 놓게 되었으니 좋아하는 게 당연할 텐데 주인은 별로 기뻐 보이질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묻습니다. 조수도 K와 함께 성에 묵는 게 아니냐고.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다짜고짜 손님들, 특히 K 같은 손님을 단념하고서 무조건 성으로 가라고 하는 걸까? K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직 분명하지 않아요. 먼저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아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여기 성 아랫마을에서 일하게 된다면 여기 거주하는 게 더 사리에 맞겠지요. 게다가 저 위 성에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지요. 나는 언제나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요."
"나리는 성이 어떤 곳인지 모릅니다." 주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14쪽)

그렇습니다. K는 성이 어떤 곳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유니 어쩌니 하는 한가한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소설의 내용 또한 모두 K가 성을 알지 못해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K는 마을에 머물며 성에 닿으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고, 사람들은 그에게 냉담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조수 두 명은 말썽꾸러기에 방해만 되고, K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관리 클람은 좀처럼 만날 수 없고, 클람을 포함한 성의 사람들은 누구도 만날 수 없고, 클람의 애인이었던 술집 종업원 프리다와의 연애 또한 엉망진창이고, 학교 관리인이라는 임시 직업을 갖기도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고, 우연한 기회에 성으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지만 깜박 잠이 들어 날려버리고… 그리하여 소설은 K를 거듭된 실패 속에 놓아둔 채 미완성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가련하죠. 가련합니다. 그렇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여러분이나 저보다 특별히 더 가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특별히 가련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면, 통속극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통속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시간을 보내기엔 통속만한 것이 없는 법이죠. 아니, 시간을 개인으로 한정짓는다면,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통속은 시간 그 자체입니다. 인생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 시간을 이겨내고 살아남는다면, 그것을 뛰어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결코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자기 몫의 생을 살아갈 뿐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결코 그냥 넘어가질 못하죠. 여기 그 예가 있습니다.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파우스트'라고 부른 <성>을 신의 심판과 은총, 신과의 실질적 단절, 원죄의 문제를 중심으로 풀어가려는 종교적 해석, 둘째, 1963년 프라하에서 열린 '카프카 회의'에서 <아메리카>를 계급투쟁의 입장에서 해석한 공산주의 입장의 해석, 셋째, 카프카가 자신의 부친에 대해 갖는 콤플렉스를 창조의 원천이라고 보는 심층심리학적 해석, 넷째, 극한 상황에 처한 현대인이 거대한 악마적 존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다는 실존주의적 해석, 다섯째,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시온주의적 해석이 그것이다. (옮긴이 해설, 468~469쪽)

지난 회에서 말씀드렸던 <소송>에 대한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신 운운하는 막스 브로트의 레파토리는 똑같고,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비인간적인 오스트리아의 관료 제도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소송> 해석은 <성>을 "극한 상황에 처한 현대인이 거대한 악마적 존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다"는 실존주의적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초점의 층위가 다를 뿐이지요. 물론 그 작은 차이가 중요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중요할까요? 글쎄요, 적어도 오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메리카>를 계급투쟁의 입장에서 해석한 공산주의 입장의 해석"이라는 말은 제게 지난 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계급관계>를 떠올리게 하네요.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가 <아메리카>를 각색해 "미국으로 간 독일 청년의 모습을 통해 자본화된 문명의 황폐함을 통찰"(14회 전주국제영화제 자료집)했다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성>에는 노동자가 된 K의 입장에 대한 고찰이 종종 등장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영화 중간에 졸았거든요. 전날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셨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그렇게 준다면 누구라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는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 영화 <계급관계> 중. ⓒJIFF

시온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라면 구스타프 야누흐가 지은 <카프카와의 대화>를 참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야누흐에 따르면 "카프카는 확고한 시온주의 신봉자"였고, 유대인에게는 고향이,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네요. 또한 옮긴이는 해설을 통해 "이는 유태민족을 벗어나 현대인 일반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한 민족과 관계없이 전 지구인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습니다. 문득 조용필의 '꿈'이 떠오르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불러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이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조용필, '꿈' 중에서)

아무래도 제가 나이를 먹은 모양입니다. 갈수록 눈물이 많아지네요. 죄송합니다. (잠시 침묵) 그건 저 노래의 제목이 '꿈'이라는 사실은 제법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은 전혀 다릅니다만, 꿈과 고향이 어쨌거나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할 말이 있겠지요. 얼마 전에 카프카의 <꿈>(워크룸프레스 펴냄)이라는 책이 배수아의 번역으로 출간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것 또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라고 해야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카프카가 자신의 부친에 대해 갖는 콤플렉스를 창조의 원천이라고 보는 심층심리학적 해석"입니다. 이것은 "카프카가 바우어와 겪은 약혼과 파혼 과정을 그린다"고 본 빈더의 자서전적인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저한테는 그 차이가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이런 말씀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무식해 보일 테니까요.

알다시피, 알다시피 이 표현은 정확히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할 때 적당히 뭉뚱그려 넘어가기 위해 쓰는 표현입니다, '부친에 대해 갖는 콤플렉스'는 죄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이라는 거대한 존재, 실상은 초라합니다만, 에게 인정받으려는 K의 노력은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카프카의 노력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K는 표면적으로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노하고 끊임없이 요구하지요. 하지만 그는 성을 떠나지 않습니다. 성의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자신을 주장합니다. 그러니 죄의식은 심층 아래에, 그러한 시도와 요구를 가능케 하는 무의식적인 동기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잠시 침묵) 죄송합니다, 너무 지루해서 잠깐 졸았습니다.

▲ <소송>(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펭귄클래식코리아
어쨌거나 그것은 <소송>의 죄의식과도 이어집니다. <소송>의 요제프 K가 처한 상황을 아버지의 뜻에 나를 맞출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죄의식,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바우어와의 파혼에서 파생된 죄의식이라고 해석하는 관점에 굳이 '자서전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겠지요.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 따르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굳이 자서전적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인류 보편의 문제니까요. 뭐,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니까요.

하지만 이 자리는 그런 이야기를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소송>과 <성>을 통해 제멋대로 이어져온 이 연재를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저는, 어떻게든 이것들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해야겠지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난 시간에 "우리 관청은 결코 주민들의 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게 아니고, 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죄에 이끌려서 우리 감시인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이게 법이라는 거요"라던 감시인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 말을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기억을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지금 말했으니까요. 결국 죄가 생기는 순간 감시인들 또한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요제프 K가 소송에 그토록 매달리는 사실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다면, 게다가 체포라는 것이 말만 그렇지 사실상 생활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이고 소송이라는 것이 그토록 추상적인 것이라면, 무시하고 살아가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제프 K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적어도 그의 무의식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죠. 그것은 바우어와 파혼한 죄가 아니라, 이미 그가 지어버린, 그리하여 바우어와 파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죄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가 "모든 생각을 자신의 일에만 집중해야 하는 이때, 아직 승진 가능성이 많고 어느새 부지점장한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매시간이 대단히 빨리 흘러가는 이때, 그리고 젊은이로서 짧은 저녁과 밤을 마음껏 즐기고 싶은 이때, 이런 청원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시작"해야 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글쓰기에 몰두했다는 지적한 바 있습니다, 바우어와 파혼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문학은 모순과 불화의 장소이다. 문학에 가장 깊숙이 얽매인 작가는 또한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을 가장 극심하게 느낀다. 문학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고, 그리고 그는 문학에 만족할 수도 문학을 고집할 수도 없다. 자신의 문학적 소명을 확신한 카프카는 문학을 하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106쪽)

요제프 K의 죄는 <성>에서 '부름'의 형태로 반복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송>에서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던 수동적인 노력이, <성>에서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소송>의 요제프 K는 자신에게 지어진 죄를 부정하지만, 아니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만, <성>의 K는 자신에게 부여된 부름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군요. 요제프 K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입증해야 하지만(청원서를 통해), K는 성에게 채용되어 성으로 왔지만 채용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의 공문을 부정하는 촌장의 입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미치도 전적으로 나와 생각이 같으니, 이제 알려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공문이 아니라 사신(发信息)입니다. 편지 서두의 '존경하는 귀하에게'라는 문구를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지요. 게다가 거기엔 당신이 측량사로 채용됐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영주에게 봉사한다는 말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고, 그것도 구속력 있게 표현된 게 아니라, 그저 '귀하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채용되었을 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당신이 채용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성> 112쪽)

그렇다면 문제는 '죄', 혹은 '부름'의 정체입니다. 바우어와의 결혼을 취소하게 만들었지만, 끝내 그를 받아들여주지는 않았던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론 글쓰기입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카프카에게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죄의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생각을 자신의 일에만 집중해야 하는 이때, 아직 승진 가능성이 많고 어느새 부지점장한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매시간이 대단히 빨리 흘러가는 이때, 그리고 젊은이로서 짧은 저녁과 밤을 마음껏 즐기고 싶은 이때, 이런 청원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는 편치 않았던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글을 써나갑니다.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법의 집행을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합니다. <소송>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갑작스러운 처벌, 즉 죽음을 통해서. 그것은 상징적인 혹은 사회적인 죽음이고, 따라서 그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회적인 의무들에서 벗어나(이를테면 파혼), 적어도 심적으로는,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아무리 해도 그것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K는 성의 부름을 받은 측량사로서 성에 들어갈 자격이 있고, 카프카 자신은 문학의 부름을 받은(<꿈>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는 문학적인 어떤 환영의 습격을 받는) 작가로서 자신이 그리던 어떤 문학적 이상에, 무형의 공간에 들어갈 자격이 있지만, 그들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작가도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에 오롯이 가닿을 순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인정하고 포기하기엔, 카프카는 문학에 너무 "깊숙이 얽매인" 작가였습니다. 블랑쇼가 말하는 "글쓰기의 불가피함"이 숙명이자 위협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은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다시 한 번 블랑쇼를 인용하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자기 실존을, 가치의 세계에 소송을 거는 것이고,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선에 유죄를 선고하는 일이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잘 쓰려고 애쓰는 것이고,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글쓰기의 불가능성을 떠맡는 일이고, 그것은, 하늘처럼, 말없이 있는 것, "벙어리만을 위한 메아리가 되는 것"이다.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08쪽)

이로써 연재는 끝이 났습니다. 저의 발전이나 지금까지의 목표를 개관해볼 때, 저는 불평도 만족도 하지 않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책상 위에 맥주 캔을 놓고(선글라스를 꼈더니 맥주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제 싸구려 의자에 반쯤은 눕고 반쯤은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봅니다. 거의 언제나 마감이 끊이지 않는데, 저는 분명 예상보다 훌륭히, 그러나 아주 훌륭하지는 않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감을 끝내면 저의 아내가 저를 기다리고 있어, 저는 강아지처럼 그녀 곁에서 편안함을 취합니다. 월말에는 그녀를 보기가 편치 않습니다. 그녀의 숨에서 어쩔 수 없는 가계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오직 저만이 알아보는데, 저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저는 도달하려고 했던 것에 도달한 셈입니다. 그것이 애쓸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덧붙인다면, 저는 박사님들의 엄밀한 판단은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단지 견문을 넓히고자 할 뿐입니다. 저는 다만 보고할 따름입니다. 고매하신 독자 여러분들께도 저는 다만 보고를 드렸을 뿐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 (wikimedia commons)
지금까지 이상한 소설들의 계보, 금정연의 '요설'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본 연재는 머지 않은 미래 단행본으로 묶여 독자 여러분을 만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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