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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를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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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를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바로… [이렇게 읽었다] 스터즈 터클의 <일>
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있다. 그는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가 하던 일은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 선택하기에는 다소 낯선, 트럭을 몰면서 생활협동조합의 물품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거기엔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만들어 온 사람이다. 음악은 그의 삶에서 단순하게 취미 정도로 분리해 낼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었다. 음악을 업으로 삼는 길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의 음악을 한 소절이라도 듣는다면 말끝을 흐릴 것이다. 그는 그 생소한 장르가 한국 사회에서 돈벌이가 될 수 없으리란 현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차라리 삶에서 돈 버는 일을 떼어 내 따로 자리를 만들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은 그것이 되는 데에도, 되고 나서도 너무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이 되기를 요구했다. 최저임금이 턱없이 낮아 프리터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낮에는 몸을 쓰고 밤에는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일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이 전략은 1년 만에 불가능으로 판명 났다. 노동 시간은 너무 길었고, 몸의 피로와 정신의 유지 문제도 분리되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의 하대를 똑같이 택배 기사들에게 되풀이하는 경비원들을 매일 마주하며, 자기도 누군가에게 화풀이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밥벌이와 '나'를 분리하고 싶었지만, 나와 내 삶이 일로써 크게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현재 그는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을 모색 중이다.

▲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스터즈 터클 지음, 노승영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스터즈 터클의 <일>(노승영 옮김, 이매진 펴냄) 맨 앞장에 윌리엄 포크너의 말이 인용돼 있다. "하루 여덟 시간 동안 먹을 수 없고, 하루 여덟 시간 동안 마실 수도 없으며, 하루 여덟 시간 동안 사랑을 나눌 수도 없다. 여덟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일뿐이다. 인간이 자신과 남들을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 그가 누구인지는 많은 경우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게다가 (이제는 짧다고까지 느껴지는) '여덟 시간'은 상징일 뿐이다.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직업과 삶이 엉겨붙어버리는 양태다. 예컨대 한 관객은 공연을 눈이 빠져라 보다가 무대 뒤로 배우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연 내내 당신 이빨 때운 자리만 쳐다봤습니다. 누가 치료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관객의 직업은 치과 의사였다. (<일> 20쪽)

"일은 영화에서 좀처럼 다루지 않는 소재예요. 이 점이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죠." 영화평론가 폴린 카엘의 말처럼 일 자체는 지극한 일상이며, 보통 드라마틱한 것과 정 반대 지점에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말해주고 내 삶이 곧 일이라는 단순하고 자명하기까지 한 사실은 누구의 내면에나 가장 큰 드라마의 원천이다. 편집인 노라 왓슨은 누구보다 간명하게 말한다. "사람을 온전히 담을 만한 큰 직업은 없어요." 그녀에게 '소명'이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외에는 없지만 스스로 인정하듯 "자기 자신으로 살라고 돈을 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매일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는 것, 이거야말로 영화 아닌가.

스터즈 터클의 <일>에는 1970년대 미국 사회의 매춘부부터 관료, 철강 노동자에서 카피라이터까지, 일터의 위치나 업무 방식, 옷깃의 색깔을 막론한 총 133명의 다양한 직업인의 구술이 담겨 있다. 그 많은 양에 담겨 있는 내용과 의미를 한 줄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내가 주로 본 것은 의미라는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정자로서의 사람들이 그것을 일에서 찾으려고 했을 때 벌어지는 안착 혹은 혼란, 그리고 상처의 광경들이다.

일,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빈둥거리다가 퇴거 명령을 받은 뒤로 그것은 언제나 "인류의 운명"이었다. 일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행위로,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행위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은 익숙하다. 특히나 이 책 <일>이 쓰인 1970년대 미국은 생산 자본주의 신화와 청교도적 노동 윤리관이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던 시기였다. 책의 앞 장에는 닉슨의 다음과 같은 연설도 인용돼 있다.

"인간은 노동의 행위 덕택에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쟁력인 미국인의 '노동 윤리'는 1971년 노동절인 오늘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곧 시민의 윤리이며 직업에 귀천이란 없다는 믿음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사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어떻게 합리화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데다가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데서 <일>의 슬픔이 탄생한다. 800쪽이 넘는 이 책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책이다." 그 폭력과 소외는 단순 노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꼬마 곰이 시리얼 상자 주위에서 뛰놀다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겁니다. 어른들이 이런 일을 하다니 좀 우습죠."(카피라이터 존 포춘)

화이트칼라건 블루칼라건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을 기계에 비유하며 "갇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치 짝패처럼, <일>의 거의 모든 인터뷰에는 '꿈'이 언급된다. 그들은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낸다. 그것을 강렬하게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슬픔은 커진다.

역자의 글에 따르면 마샬 버먼은 <맑스주의의 향연>(문명식 옮김, 이후 펴냄)에서 분명한 착취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이 책 <일>을 인용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봉기를 일으키는 대신 자신의 모든 지적 능력과 감수성을 사용해 자기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노동을 아름다움과 환희로 물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즉 일자리의 하찮음을 직시하여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그들 각자가 좀 더 추상적인 수준의 합리화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얘기다. 지은이가 서문에서 유머러스하게 늘어놓은 것처럼 병원의 외상 수금원을 '환자 대리인'으로 청소부를 '위생 엔지니어'로, 무덤 파는 인부를 '직무 대행인'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차 기계로 대체되어 갔고, 사용자는 노조를 압박했다. 체제는 존속되어야 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의심 없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과 조건을 갖춘 일은 특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서 무의미와 모멸감을 느낀 사람들은 체제를 바꿀 수는 없으니 컨트리 바에서 주먹을 휘두른다. 이 책에서 히피에 대한 경멸과 인종에 대한 발언이 반복되는 것도 그저 곁다리 배경이 아니다. 히피족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상징적 적이며, 인종 문제(일터에 주로 어떤 인종이 있는지, 어떤 인종이 명령을 내리는지 등)는 멸시를 경험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유혹받는 거짓 존엄과 결부된다.

분명 사회를 개혁하고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다면 이 개인적 서사의 경사와 사회적 고통의 총량은 완화될지도 모른다. 논평이나 입장을 배제하려고 애쓴 이 책에서 그나마 어떤 '정서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맨 앞의 마이크 르페브르(철강 노동자) 인터뷰에서 인터뷰이는 자문한다. "1년 동안만 모든 국민이 주당 20시간만 노동하는 실험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지만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의 핵심은 바로 그 다음 말에 담겨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이 내일 히틀러를 다시 살려낼지 어떻게 압니까? (…) 시간이 남아돌면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시간이 문제입니다. 부잣집 젊은이들이 정치에 열광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평생 일만 하던 사내들이 정년퇴직하자마자 대들보가 뽑히듯 곧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르페브르는 또 덧붙인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국가를 수립한 다음에는 왜 항상 사람들을 트랙터 앞에 세워놓고 노래를 시키는 겁니까?"

<일>은 좌파 지식인들의 흔한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데 기여하려는 책이 아니다. 이건 모든 미국인이 다 겪는 일이고, 그 모멸감을 참아내면 어딘가에서 소명의식이 짠하고 나타날 거라며 어깨를 두드리는 희망 섞인 위로는 더더욱 아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노조를 조직해 손잡고 싸우라 종용하는 책도 아닌 것이다. <일>은 그저 그런 상태인 우리의 삶을 말하고 있다. 처지에 만족하는 사람의 것이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의 것이건, 좌파의 것이건 우파의 것이건 무심할 정도로 공평하게 133개의 일에 관한 목소리를 툭 던져놓기만 하는 책이다.

그 목소리가 "일상의 조건, 상처받는다는 것에 대한 자각,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독자는 134번째 인터뷰이로서 자신이 했던 일을, 본질적으로 폭력인 그 일을, 그래서 누군가를 상처 줄 수밖에 없었던 일을 떠올릴 것이다. 40여 년의 시간과 먼 거리, 사회 모습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대 인간의 상처와 좌절, 존중받고 싶다는 감정은 비슷한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상처와 좌절은 가장 공명하기 쉬운 경험이다. 그리고 공명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내가 지난 4년 6개월간 일을 하면서 변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있다면 바로 내가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예컨대 24시간 컴퓨터 앞에서 당신의 원고를 기다리거나 부탁을 들어주는 기계로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좌절을 느낀 뒤로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메신저나 메일 너머에서 나와 비슷한 구체적 모습으로 일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지만 자신은 없다. 분명히 내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느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일을 통해 정말 변한 게 있다면, 이제 눈에 남들이 일하는 게 보이고, 그렇기에 그 사람이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비스를 받는 순간 그들이 어떤 식으로 고용되어 있는지, 어떤 선택에 의해 여기로 오게 되었을지, 어떤 순간엔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을지, 그 접점을 자연스레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거래하는 관계에서 만나는 사람이 기계가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일터에 있는 그 사람이라는 감각을 갖는다면 아파트 주민은 경비에게 화풀이하고, 경비는 택배 기사에게 화풀이하고, 택배 기사는 자기가 모는 트럭이나 지나가던 똥개에게 화풀이하는 분노의 악순환은 사라질…, 아니 적어도 그것이 악순환이라는 인식은 발생하지 않을까?

다시 일과 정체성 이야기다. 사실 내가 어울리는 집단에서는 일은 일일뿐 나나 삶이 아니며, 업무와 영혼은 분리되어야 하고, 직장 걱정과 집안 걱정을 서로의 영역에 교통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좀 더 일반적이다. 행인1로 있을 때조차 "너 어디서 뭐 하는 애야"를 묻고, 반대로 업무로 만난 사이에서 사생활을 끌어오는 무례가 잡초처럼 흔한 사회다. 무엇보다 업무 시간 외에도 업무 때와 똑같은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폭력이다.

그러나 4년 6개월간 내가 일했던 회사, 내가 가졌던 직업은 그 특성상 언제나 '나'와 완전히는 분리되지 않았다. 거기엔 자의적이고 이기적인 혼란도 있었다. 미치도록 쓰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던 기사에 달린 바이라인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진짜로 원해서 쓴 것들은 그 과정과 성취가 온전히 나로 귀속된다고 착각했다. 어쨌든 나는 <프레시안> 안은별 기자로 완전히 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일은 그야말로 삶이다. 그러나 일은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은 일이고 나는 나다. 그러나 나는 일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모순을 말하고 싶어서, 마지막 일로 <일>을 읽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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