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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 우리가 진짜 기억해야 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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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 우리가 진짜 기억해야 할 것은… [시민정치시평] 기억은 동사다
진도 팽목항에 다녀왔다. 매주 금요일 서울에서는 '기다림의 버스'가 출발한다. 실종자들을 기다리는 가족의 간절한 마음을 나누자는 취지다. 실종자 가족들이 얼마나 애끓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엿보러 가는 버스가 아니다. 간절한 기다림은 각자의 몫이다. 타인일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기다림을 헤아리며 각자의 위치에서 나눌 수 있는 기다림을 찾아보자는 버스다. 쉽지는 않았다. 자욱한 안개는 마치 무언가를 헤아리려는 시도가 얼마나 겁 없는 것인지 알려주려는 듯 완고하게 바다 위를 채우고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을 직접 지원하는 부스 외에는 모든 부스들이 철거된 조용한 밤바다에서, 무언가 떠올리려고 할 때 기댈 수 있는 것은 '팽목항'이라는 이름밖에 없었다. 4월 16일부터 언론을 통해 전해졌던 수많은 광경들, 울부짖는 목소리들, 넋을 놓은 듯한 얼굴들, 가족들을 도우려 분주히 움직이던 자원봉사자들의 손발들, 수백 개의 표정을 품은 주위 사람들의 얼굴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같은 현장에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웠던 정치인과 관료들의 얼굴…….

그러나 이런 잔상으로는 누군가의 기다림을 미처 헤아릴 수가 없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자신에게 남은 트라우마를 보살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죄스럽다 고개를 떨구고, 죽은 사람을 확인한 가족들이 다행스러움과 남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괴로워하는, 남은 가족들의 외로움 속에서 깊어지는 절망과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억'은 섣부르다. 도대체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모두가 한다. 그러나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이 없는 약속은, 기억의 약속이 되지 못한다. 4월 16일 진도 인근 해상에서 '세월호'라는 이름의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살아 돌아온 사람보다 죽어 돌아온 사람이 훨씬 많다는 소식을, 수학여행을 떠났던 고등학생들이 거의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내용의 전부라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암기에 불과하다. 기억은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자나 동영상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조차 4월 16일을 '국민 안전의 날'로 지정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과거의 사건을 암기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참사를 함께 겪겠다는 약속이어야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합동분향소에 발길이 뜸해진지 오래됐다. 지방선거를 전후로 언론 보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는 사이 박근혜 대통령은 개각을 해왔다. "세월호 사고 수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해양수산부 장관 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니,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해 책임 있는 사람들을 유임시킨 것인지, 기준도 방향도 여전히 대통령 본인의 것이기만 한 개각이다. 올해 초 "이벤트성 개각은 안 된다"고 스스로 말하더니 이게 이벤트가 아니고 뭔지 모르겠다. 초국적, 초대형 이벤트인 월드컵도 시작됐다. 이렇게 점차 세월호 참사가 잊히면 어떡하나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벤트 때문에 잊힐 것이었다면, 그것은 그 전에도 '기억'은 아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기억'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몰릴 때에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가 있다. 그러나 관심만으로 변화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스스로 연루되지 않는 관심은 지켜보는 마음일 뿐이다. 참사를 겪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안타까움만으로는 각자의 기억을 만들 수 없다. 수백 명에 이르는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와 그 가족들의 시간을 섣불리 짐작할 수도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닌 뭉뚱그려진 집단으로서만 존재할 때, '가족'이라는 이름에 허용되는 모습은 참사의 고통에 내내 슬퍼하고 분노하는 모습뿐일 것이다. 누군가를 타자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니 각자의 자리에서 참사를 직면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겪을 수 있다. 그때 거기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만 묻지 말자.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묻자. 그래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할 수 있다.

왜 그때 세월호가 위태롭게 침몰하기 시작했는지 묻는 것은, 지금 내가 어떤 배를 탄다면 짊어져야 할 위험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당시 청와대를 비롯한 각종 정부 기관들이 무엇을 알거나 몰랐으며 무엇을 했거나 하지 않았는지 묻는 것은, 지금의 정부가 나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전원 구조 오보와 수많은 언론 통제 의혹을 밝히자는 것 역시,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고 있는 것인지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위험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 위험을 정확하게 알 길이 없는 누군가에게로 온통 위험이 전가되고 있으며, 누군가는 아무런 구조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의 사고가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 중인 참사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규제를 더욱 완화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비용을 절감하겠다며 주판알을 굴리고, 서로의 안전을 지켜줄 권리를 빼앗으려 들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직면하게 된 세상은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우리의 기억도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며칠 전 코레일은 안전 업무를 담당하던 승무원 65명과 역에서 역무 업무를 맡았던 역무원 65명을 강제로 맞바꾸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서로에게 안부를 묻기 어려운 현실을 고백하고 고발하며 '안녕하십니까' 조심스레 물었던 대자보 열풍과 철도총파업의 기운을 떠올려보면, 현실의 벽은 암담하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게 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너무나 투명하게. 그래서 어쩌면, 격한 슬픔과 깊은 분노가 체념과 침묵으로 이어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우리의 안전에 대한 권리를 서로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지, 질문이 절박한 만큼 대답은 막막해진다.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막막하더라도 질문을 내려놓지 말자는 약속이다. 그래서 기억은 사실의 암기가 아니라 현실에의 개입이다. 언제나 동사인 것, 그리고 언제나 정치적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은 안전이 최고 가치라며 호령하던 정부도, 모든 것이 소비자를 위한 것이라며 광고하던 기업도 아니다. 거대한 세상 앞에서 무력하지만, 그래서 서로 거들고 기대고 부축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우리들로부터, 안전에 대한 권리는 시작된다. 우리가 모여서 움직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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