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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아니라 위안소 문제, 명백한 국가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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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위안부 아니라 위안소 문제, 명백한 국가 범죄" ['일본군 위안부' 논쟁·②] 충남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 윤명숙 전임연구원 인터뷰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을 짚어보는 두 번째 순서는 충남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 윤명숙 전임연구원 인터뷰다. 윤 전임연구원은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던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 증언 이후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 및 각종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는, 국내 위안부 문제에서 손꼽히는 권위자다.

윤 전임연구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이 직접 조선인 여성들을 끌고 간 경우가 많지 않았고, 그래서 위안부가 강제 연행되지 않았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는 이미 업자나 포주가 많은 상황이었고 '공창'과 유사한 위안부 시스템이 구축됐기 때문에 굳이 조선 사람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군이 직접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모집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본인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안소에 끌려가서 성폭력 피해를 받았다"는 본질적인 측면은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위안부의 모습이 '민족의 순결한 딸'로 일반화되는 것이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윤 전임연구원은 "그런 표상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만든 것"이라면서 순결 이데올로기 속에 여성들을 가둬놓는 가부장적인 의식이 위안부 피해자를 하나의 모습으로만 기억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는 위안부 피해자가 평화비(소녀상)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윤 전임연구원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이 평화비 때문에 전부 누락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야 한다"며 "분명 소녀가 아닌 사람들도 피해를 입은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내가 피해자다'라고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위안부 피해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사회의 인식에도 문제가 있다는 일침이다. 다음은 지난 1일 오후 서울 모처에서 진행한 윤 전임연구원과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충남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 윤명숙 전임연구원 ⓒ프레시안(최형락)

포주? 업자?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중요

프레시안 : 박유하 교수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세간에 화제가 된 이후 위안부 성격 논쟁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눔의 집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책에 대한 소송을 하기 전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분들이나 관련 단체에서는 박 교수의 문제제기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던 같다.

윤명숙 : 일단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측면을 잘 모르고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박 교수가 일본군위안소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본다. 위안소 제도는 한 가지의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군이 직접 운영하는 군 직영 위안소, 업자를 두고 관리·감독하는 군 전속 위안소, 이미 있는 유곽이나 성매매업소를 군이 지정해서 이용하는 위안소,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경우 위에 언급한 모든 위안소에 다 있었다. 게다가 대체로 위안부가 한곳에만 머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군 직영 위안소에 있던 피해자가 그 다음에는 전속 위안소로 옮겨가기도 했고, 업자가 통째로 위안소 자체를 이동시키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위안소를 경험했던 피해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군위안소제도라는 것은 군인이나 군속만 이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프레시안 : 박 교수가 제기한 업자와 포주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박 교수는 업자와 포주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윤명숙 : 물론 업자나 포주의 잘못도 있다. 그렇지만 군위안소제도의 성격을 들여다보면, 국가가 정책으로 위안소제도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점에 방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 점을 가장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일본 국내의 공창제도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생각했다. 즉 정부가 위생적인 위안시설을 만들어서 관리해주면 이를 안전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식민지에는 일본의 공창제도를 법으로 이식했다. 하지만 점령지는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공창제도와 같은 시스템을 점령지에서는 위안소로 만든 것이다. 당시의 위안소가 공창과 같이 업자가 있고 돈을 받고 남자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고 하는, 이런 식의 형태를 갖췄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점령지라고 전혀 없던 시스템을 새롭게 마법처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방식을 점령지에 맞게 적용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위안소의 여러 형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봤을 때 처음에는 군이 직접 운영하는 위안소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난징대학살 이후 상하이에 직영위안소가 설립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처음에 일본군은 군이 직접 나서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항일 운동이 커지다 보니 갑자기 전선이 확대됐고 위안소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를 군이 직접 만들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래서 업자를 두고 위안소를 운영하는 형식으로 위안소가 점점 확대되는 것이다.

군이 직접 개입했다는 것은 문헌 자료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1938년 3월 4일 육군성 통첩에도 군의 개입이 잘 드러난다. 또 이후에 나온 군사 진중일지, 위안소 규칙 등을 보더라도 군이 업자와 같은 역할을 했거나 이들을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모두 제외한 후 포주와 업자 이야기만 한다면, 독자는 결국 위안부 동원의 책임은 이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박 교수가 중시하는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경험 역시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경험과 구술이 책임을 묻는 유일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가가 어떤 역할이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공창제도에서 국가와 업자의 관계는 국가는 영업을 허가하지만 업자의 위법을 단속하는 역할이라면, 군위안소제도에서 국가는 업자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장면에서는 좀더 상세하게 따져야 하겠지만, 크게는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업자의 책임도 있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박 교수가 업자나 포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국가범죄'라는 부분이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그런데 실제로 당시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 군이 직접 여성들을 끌고 가는 것보다 업자나 포주가 데려간 경우가 더 많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강제 연행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힘을 얻는 측면도 있는데.

윤명숙 : 우선 징모업자의 구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징모업자는 이를테면 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의 구조다. 즉 상위에 군이 직접 허가·선정하는 징모업자가 있고, 그 밑으로 하청업자가 층층이 아래로 내려온다. 하청업자 아래 또 하청업자가 있는 식으로. 그래서 동네아저씨 김 씨에게 취업사기를 당하기도 했다는 구술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말단의 하청업자의 역할이 아니고 이 징모업자의 구조를 누가 관리·통제하느냐 이다.

그리고 군이 직접 여성을 끌고 갈 필요가 없었다. 그건 조선이 이미 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일제는 3.1운동의 경험으로 헌병정치에서 문화정치라는 지배 형태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경험은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일본의 패전 직전인 1944년부터이다. 즉 식민지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 주었을 때 그 총부리가 어디로 향할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은 제국의 식민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식민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함부로 군이 여성을 총부리를 앞세우고 끌고 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또 당시 한국에는 여성에 대한 이른바 '순결'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서 군이 직접 여자를 끌고 간다? 그것도 전국적으로? 만약 이런 사태가 광범위하게 벌어지면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군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갖춰진 측면도 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조선에서의 위안부 징모에 이미 이식되어 있던 공창제도의 매커니즘이 활용되었기 때문에, 여성들을 끌고 갈 업자들이 존재했다. 특히 1940년 이후에는 직업소개령이 개정되면서 이를 통해 국가총동원체제 하에서 국가가 징모업자를 편법으로 관리할 수도 있었다. 군이 뒤에 숨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굳이 조선 사람들의 반발을 사는 방식을 통해 위안부를 끌고 갈 필요가 있었을까? 즉, 식민지인 조선의 여성은 일본의 총칼이 없이도 끌고 갈 수 있는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징모에 있어서 식민지와 점령지에서의 방식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이야말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얼마나 일상적 폭력이었는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쨌든 식민지 조선의 위안부와 점령지 여성은 모두 본인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안소에 끌려가서 성폭력 피해를 받았다는 본질적인 측면을 보면 동일한 피해자다.

무엇보다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점은 일본정부가 위안부들의 징모나 이송 과정에서 정부 및 군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은폐하려 했던 정황이 당시에 이미 있었고 이는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지적 관계?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한 것 아닌가

▲ 충남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 윤명숙 전임연구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박 교수의 저서에서 논란이 됐던 또 하나의 대목은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가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는 부분이다. 이들이 일본 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동지적 관계였다는 것인데,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에게 '섹스'라는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환경에서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 가능한 것인가?

윤명숙 : 우선 일본인과 조선·대만 사람은 평등하지 않았다. 물론 조선·대만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제국의 영토였고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일본제국의 국적을 갖고 있던 상황이라 이른바 '제국의 신민'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든 자격을 똑같이 부여받았던 것은 아니다. 동등했다면 식민지라고 부르지 않을테니까.

그럼에도 박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인식의 차이에 기반한 것이라고 본다. 위안부 문제를 제국의 시각에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 피해자 입장에서 파악할 것이냐가 관건인데 박 교수는 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 교수의 이러한 인식은 누가 국가 폭력의 피해자인가를 보는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똑같은 '취업 사기'라는 방식으로 A와 B라는 사람이 끌려갔다고 치자. A는 남경의 위안소로 끌려갔고 B는 만주의 유곽으로 끌려갔다고 하면,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위안소에 끌려간 사람들만 피해자로 보고, 유곽으로 끌려간 여성들은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 제국의 시각으로 보니 위안소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각 자체를 '식민지 피해자' 시점으로 가져오면 양쪽 다 피해자다.

이것은 당시의 국제법과 일본의 형법을 통해서도 증명이 가능한 사안이다. '매매춘'을 위해 사람을 국외로 이송하는 것은 당시 형법에도 위반되는 사항이며 위안부 피해가 인도에 반한 죄 등 당시 국제법에 저촉되는 위법한 것이었다.

따라서 박 교수는 '동지적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제국의 개념을 이용하지만, 저는 '피해자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제국의 개념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제국이 가졌던 속성으로 인해 피해의 양상이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는 것이다.

프레시안 : 박 교수는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가 힘든 상황 속에서 서로 감정을 공유했고, 사랑을 했고 심지어는 결혼을 약속하기도 했다는 피해자의 증언을 책에 기록했다. 동지적 관계가 아니라면 이런 정도의 친밀함을 갖기 힘들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나타낸 것 같은데?

윤명숙 : 개인의 경험은 백이면 백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그런 개인의 경험을 동지적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활용했다면, 죄송한 이야기지만 박 교수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어떤 조건에 있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위안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나?

피해자는 웃어서도, 좋은 일이 있어서도, 추억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상정하고 만약 그런 좋은 일이 있었다면 꼭 피해를 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폭력적인 발상이다. 피해자라고 항상 우울한 삶을 살아야만 하나?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어떤 이유를 대서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면서 버틴다. 그 안에서 결혼을 약속했든 사랑을 했든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을 전공했다는 분이 이런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지 않고 피해자의 삶에는 '불행'만 있다는 기계적 사고가 어떻게 가능한지 되묻고 싶다.

이와 관련해서는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면서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라는 책을 쓴 저자 김연자 씨의 저술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김 씨는 책에서 기지촌 생활이 너무 힘들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자주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셨다고 회고했다. 사람의 삶이 이런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민족의 순결한 딸'로 만든 것, 정대협이 아니라 한국 사회

프레시안 : 박유하 교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위안부 피해자를 평화비(소녀상)로 표상되는 '민족의 순결한 딸' 이미지로 일원화했다고 비판한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윤명숙 : 그런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런 지적을 정대협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가져가고 싶지는 않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공론화됐던 1990년대 초, 정대협이 이 문제를 '가해자 일본 대 피해자 조선 민족'이라는 구도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위의 구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과연 한국 사회가 이 문제를 받아들였을까? 아마 '매춘부들이 돈 벌려고 일본을 갔구나'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지, 정대협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소녀상이 곳곳에 퍼지는 것은 민족주의, 소녀, 순결 이데올로기가 포함된 것이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은 소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기생이었던 여성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느 누가 "난 원래 기생이었다"라고 증언할 수 있었겠나.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성매매를 자발적인 것이라고, 피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볼 때 중요한 부분이다. 마치 성매매 여성이면 피해자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회적 구조, 즉 가난이나 복지 정책 부재 등으로 인해 성매매에 뛰어든 여성도 많다. 지금의 성매매 역시 구조로서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특히나 식민지 여성의 피해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위안부제도'라는 용어보다는 '위안소제도'라는 용어가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더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라고 하면 한 개인, 여성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이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큰 틀의 구조에 초점을 맞춰서 인식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서 성매매 여성과 순결한 소녀를 나누려고 하는 것, 이 부분에 대해 한국 사회 스스로도 반성해야 한다.

물론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측면도 '민족의 순결한 딸'이라는 이미지를 표상화시키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우리 내부의 친일을 제대로 청산했다면 굳이 민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을 앞세우는 것이다. 즉 위안부 문제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다 얼키고 설켜있는 것이다.

결국 '정대협'이 평화비를 세움으로써, 소녀가 아닌 피해자들은 "내가 피해자다"라고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에서의 인식의 문제에서 비롯된 일이다. 여기에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 위안부 평화비 ⓒ연합뉴스

프레시안 : 정대협이 베트남전 당시 피해 입은 여성들에 대한 상담을 했던 활동 등에 비춰 보면,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시각에만 입각했다고 보기 어렵지 않나?

윤명숙 : 정대협이 출범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 세월 동안 바뀌어 가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민족주의적인 담론으로 운동을 했고 그 부분을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20년 전체를 하나로 보고 지금까지도 정대협이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초기에 그런 식의 운동이 진행됐다면, 왜 그랬고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 한국 사회 전체 관점에서 바라봐야 정대협에 대한 비판이 발전적으로 사회 전체에 반영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비난의 수준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 '어떻게' 해결할지가 중요하다

프레시안 : 위안부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할지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위안부 문제는 '이거다'라고 정립할 수 있는 개념이 있나?

윤명숙 : 사람들은 명쾌한 답을 원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기는 힘들다. 민족차별문제, 여성차별문제, 계급문제 등등 다양한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약자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도 본질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각적으로 보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야 어떤 해결이 가능한가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갈 것인가에 최종적인 목적이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윤명숙 : 국가 폭력, 즉 국가 범죄이다.
프레시안 : 다시 말하면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소, 즉 개인이 아니라 구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인가?

윤명숙 : 그렇다. 그래야만 기지촌에 있는 여성이 왜 폭력을 받은 여성인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개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업자와 포주의 책임만 부각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구조의 문제로 보자면, 결국 당시 위안부를 만들라고 지시한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근데 현재 일본 정권은 전혀 책임지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문제가 계속 평행선으로만 내달리는 것 아닌가?

윤명숙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결을 위해 무리하게 타협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인지 묻고 싶다. 해결을 위한 해결이 아니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한계였는지를 밝히고 이를 뚜렷하게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만 해도 그렇다. 정치적 타협을 했던 당시 협정으로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지지 않았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무리하게 정치적 타협을 추진하면 당시 협정을 되풀이하는 셈이 된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본은 절대로 강제 연행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또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노력을 인정해서 타협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해결 그 자체보다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 개개인으로 보면 이들을 위해 빠른 시일 내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문제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인 것도 분명하다. 그래서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집중을 하고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무게를 둬야 한다.

또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가 어떻게 해결할지를 논의하는 장을 넓혔다는 데 나름의 의미도 있다고 본다. 지금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져가야 한다.

▲ 충남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 윤명숙 전임연구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의 논리가 일본 우익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실제 일본 우익에 이 책이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윤명숙 : 우려의 지점이 잘못된 것 같다. 만약 일본이나 한국에서 우익이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박유하 교수의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한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인권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이를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는 상황이다.

즉, 위안부 문제를 인권의 측면에서 본다면 여기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고 그 인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런 사람들이 주류가 돼야 한다고 본다.

프레시안 : 민족주의를 뛰어 넘어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져가야 할 사상적 무기 같은 것은 없을까? 물론 앞서 말씀하신대로 '민족의 순결한 딸'이라는 표상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데 공감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지 않나?

윤명숙 : 이 문제가 일본이 가해자고 한국이 피해자라는 식의 구조로만 이야기하면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성폭력을 일으킨 것이나 한국군이 한국 전쟁에서 위안부를 둔 것이나, 1970년대 미군 기지촌을 정부가 관리한 사실 등등을 봤을 때 민족 대 민족의 구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이 구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한국과 일본, 또 그 외 국가의 시민 간 연대가 필요하다. 국가 단위로 잘리지 않는 시민 간의 연대를 넓혀 나가야 한다. 실제로 1990년대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지했던 시민들은 한국과 다 같이 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자층, 운동층,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층위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

더불어서 정부와 시민 사회가 횡으로 연대할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다.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사안에 대해 권력과 민중, 시민 사회가 뜻을 같이해서 연대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프레시안 : 말씀하신대로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든다면 좀 더 해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본다. 현재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장급 협의도 하고 있는 중이다.

윤명숙 : 그런데 아쉬운 부분이 있다. 정부가 이 문제에서 책임있는 자세로 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에서 고노 담화의 작성 경위를 검증하는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에서 일본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집어넣고 불리한 것은 제외시켰다. 그런데 보고서의 내용보다 더 눈길이 갔던 부분은 일본이 정부가 나서서 이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무국이 일본 내각 관방과 외무성에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보고서를 작성한 5명의 신분을 일시적으로 공무원으로 만들었다. 이는 곧 정부에서 이 문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 여론이 지탄을 하고 있는 검증 결과조차 일본은 정부의 이름을 걸고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최근에 위안부 백서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백서는 말 그대로 백서일 뿐이다. 정부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1992년 중간 보고서를 만든 이후로 지금까지 정부의 보고서가 나온 적이 없다.

제가 말하는 정부 보고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보고서를 의미한다. 현재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용역을 줘서 백서를 만든다고 하던데, 이것은 정부가 책임을 지기 싫은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보고서 만드는 데 민간 전문가 필요하다. 비전공자인 행정공무원이 어떻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모두 챙길 수 있겠나? 하지만 그 보고서의 명의, 주체는 명확히 정부가 돼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한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정부가 이렇게 책임있는 자세로 임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들에게는 곧 명예회복이요, 정의가 실현되는 방식이자 치유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일본군 위안부 논쟁 기획>

■ 일본군 위안부' 논쟁·① 박유하 교수 인터뷰 : "투사 소녀? 위안부 할머니도 욕망 가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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