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저마다 무사생환을 염원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100일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바닷속에 아직도 열 명의 실종자를 남겨두고 단 한 명도 살려내지 못한 무능의 100일이 흘렀습니다. 유가족들이 곡기를 끊고 마르지 않는 눈물을 쏟으며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시청광장까지 고행의 행진을 벌이는 와중에도 염치를 모르는 정치는 절망과 망각을 부추깁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목사가 있었습니다. "학교 수학여행을 가다가 개인회사의 잘못으로 희생된 사건을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해 달라는 것은 이치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는 글을 지인들에게 퍼 나른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 임무를 맡은 국정조사특위의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그랬다는군요. 도무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 같지 않은 몇몇을 빼고는 우린 세월호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물욕의 화신이 된 기업과 기업의 물욕을 통제하지 못한 국가의 무능이 열여덟 살 어린 생명들을 한순간에 몰살시킨 겁니다. 참사의 이 같은 본질이 가리키는바, 기업과 국가는 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절대로 출항해선 안 될 배를 바다에 띄운 기업의 책임은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로 알려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게 돌아갑니다. 그는 단지 피해 배상뿐만 아니라, 참사의 원인 규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 백골의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주범(主犯)'에 대한 생포 실패는 곧 공권력의 실패입니다. 검찰 110명, 경찰 2500명에 해경과 군 병력까지 동원하고 전국에 임시 반상회까지 열어가며 벌인 단군 이래 최대의 검거 작전이 세월호 참사를 그대로 빼닮은 공권력의 무능만 드러낸 채 허무 개그로 끝난 겁니다.
검경은 밀항 가능성까지 대비했으나, 정작 유 전 회장의 시신은 이미 40일 전에 그가 숨어 있던 곳 인근에서 발견됐습니다. 유류품들은 주인이 '유병언' 임을 명시하는 직접적인 단서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검찰은 하나같이 수사의 기본을 망각했습니다. 초동수사부터 허둥대더니, 40일 동안이나 죽은 사람을 잡겠다고 설친 꼴입니다. 게다가 검찰은 유 전 회장의 별장을 급습해 수색했음에도 불구하고, 통나무 벽 안에 숨어 있던 그를 놓치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했습니다. 황당하고 허탈하기만 합니다. 이제 그의 죽음과 함께 탐욕이 부른 참사의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불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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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또 다른 한 축, 총체적으로 부실한 국가의 책임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합니다. 이는 개별 기업의 책임에 견줄 수 없을 만큼 포괄적이고 본질적입니다. 그러나 국가적 비극에 있어 대통령의 자리는 대단히 모순적인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참사의 책임자인 동시에 수습의 책임자가 바로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도의적, 정치적 책임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정확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참사 100일이 지난 지금 시점에 돌아봐도 우리 대통령이 자신에게 부여된 막중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태 초기, '이게 정상적인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하는 들불 같은 분노가 대통령 하야 요구로 표출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과 대통령 주변의 정치 기술자들, 이들의 선전부대가 된 일부 언론들은 유병언 전 회장에게 그 모든 책임을 덤터기 씌우려 온갖 소동을 벌였습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검토해서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다섯 차례나 유병언 검거를 채근하던 박 대통령은 유병언 검거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유체이탈 화법으로 방관자처럼 행세하던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사과의 말을 듣는 과정도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참사가 벌어진 지 무려 한 달이 지난 5월 19일에야 비로소 대국민담화를 통해 직접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6.4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흘린 눈물조차 '선거용이었나' 하는 의심이 여전한 이유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이후 수차례 공언한 약속이 모두 허언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은 사고 발생 이튿날인 지난 4월 17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유가족들에게 약속했습니다.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으로 책임질 사람은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사고 한 달째 되던 5월 16일엔 청와대에서 유가족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진상규명에 유족 여러분의 여한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깊은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이틀 후 가진 대국민담화에선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신뢰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박 대통령의 약속은 어찌 된 일인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했던 정홍원 국무총리는 두 달 만에 원위치로 돌아왔습니다. 수첩에 적힌 인사리스트도 씨가 말랐는지, 안대희·문창극 등 부실한 총리 후보를 내세워 홍역을 겪은 뒤에는 아예 새 총리 찾기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이로써 국가혁신의 출발점인 인사 개혁은 헛말이 됐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이 정부에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모양새가 됐습니다. 새누리당이 6.4 지방선거에서 '박근혜의 눈물'을 팔아 정치적 고비를 넘기자 세월호 참사의 정부 책임론을 뭉개려는 오만이 똬리를 틀기 시작한 겁니다.
청와대의 무능과 태만도 어물쩍 넘어가려 합니다. 국회 국정조사를 통해 드러났듯이, 세월호 침몰 당시 청와대와 해양경찰청 간의 핫라인 통화 내용에는 국가적 재난을 대하는 청와대의 무책임한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300명이 넘는 국민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보고를 받고도 청와대 관계자는 "큰일 났네, 이거 VIP 보고 다 끝났는데"라며 구조자 숫자 파악에만 전전긍긍했습니다. 실상이 이러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비서실장의 입에서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말이 버젓이 나올 수 있었던 거겠죠.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잘못된 보좌의 총책임자인 김기춘 비서실장에 대한 경질 요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국정조사를 지켜본 세월호 유가족들은 박 대통령이 사고 당일인 4월 16일 오후 5시 15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대면보고나 대통령 주재 회의가 없었던 점을 지적하며 "대통령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김기춘 비서실장조차 8시간 동안의 박 대통령 행방에 대해 "모르겠다"고 답했으니, 합당한 의심입니다. 유가족들이 제기한 89가지 의혹의 상당수는 이처럼 청와대를 향합니다. 유가족들은 국정조사가 맥 빠진 채로 헛바퀴를 굴리는 데에는 총체적 무능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걸 막으려는 집권세력의 의도가 한몫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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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정치권이 약속한 법안 처리 시점(7월 16일)을 훌쩍 넘겨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공전하는 까닭도 새누리당의 발목잡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일 만큼은 여야를 함께 꾸짖어선 곤란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월호 특별법을 유가족들 앞에서 약속한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특별법의 핵심은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 구성에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진심으로 진상규명과 유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단으로 특별법을 제안했다면, 협상을 공회전시키는 새누리당을 설득해야 합니다.
새누리당은 현재까지도 수사권과 기소권을 진상조사위에 부여하면 국가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이 뒤흔들린다며 호들갑을 떱니다. ‘민간기구’에 공권력의 핵심인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수는 없다는 논리인데, 조사위원회는 엄연히 법률에 의해 설치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위원들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라는 점에서 새누리당의 주장은 기본부터 틀렸습니다. 새누리당은 또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진상조사위원회의 전례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듭니다. 하지만 과거의 숱한 진상조사위원회가 겉핥기만 하다가 활동 종료했던 점에 비춰보면, 새누리당의 트집은 세월호 조사위에 강제력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만 제대로 진상을 규명할 수 있다는 유가족들의 반박 앞에 무색해지는 주장입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이 철저해야 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국가적 재난 대응의 역사적 분기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국가혁신과 적폐 청산을 위한 출발점은 세월호 진상규명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이 아니고선 새누리당의 저 완강한 반대 입장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참사 100일을 맞은 오늘까지도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세월호 특별법에 관해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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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누구보다 빨리 평상으로 돌아간 박 대통령은 누더기 2기 내각을 이끌고 연일 창조경제 타령입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유가족들의 요구가 도가 지나치다며 자식 잃은 부모들과 대놓고 대거리를 합니다. 이른바 시민단체의 탈을 쓴 이들은 "유족이 벼슬이냐"라며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집권세력과 거대신문들은 이제 분노를 삭이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입니다. 6.4 지방선거를 지나면서부터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을 겁니다. 7.30 재보선을 세월호의 덫에서 벗어나 조용한 선거로 치르고자 하는 정치 기획자들의 속삭임입니다. 야권의 무능 탓에 재보선도 그럭저럭 면피하고 지나면 세월호 참사의 정치적 책임은 물을 기회도 한동안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고 내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세월호 참사 이후의 대한민국은 우리가 일상의 안위만을 살피며 살아가도 될 만큼 안전해지고 있습니까? 무능한 정부가 환골탈태해 이제 어떤 사건 사고에도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내 줄 만큼 믿음직스러워진 겁니까? 작동을 멈춘 정치를 손가락질하는 사이, 분노는 어느새 체념으로 식어버린 건 아닐까요?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한 노란 리본이 하나 둘 일상에서 자취를 감춰가는 즈음,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살아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되새기며 다시 한 번 희생자들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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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남북관계·한반도/국제/생태 등 다섯 개 분야로 나눠 정리한 '주간 뉴스 일지'와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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