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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며느리·손자까지 죽인 왕, "귀가, 왼쪽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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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며느리·손자까지 죽인 왕, "귀가, 왼쪽 귀가…" [낮은 한의학] 인조의 이명 ①
9월부터 '낮은 한의학'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조선 왕조 실록> 등 기록을 통해서 조선 왕의 건강을 초점을 맞췄던 '왕의 한의학'에 이어서 현대인을 괴롭히는 질병 중 하나인 이명(귀 울림)의 모든 것을 살펴봅니다. '왕의 한의학'을 연재하면서 축적된 이명의 옛 기록과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의 오랜 임상 경험을 씨줄과 날줄로 '역사'와 '인간'과 '의학'을 얘기하는 새 연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소리는 마음을 움직인다. 아침의 새소리, 교회의 종소리, 사찰의 풍경소리는 걱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길 가다 혹은 차를 몰고 가다 우연히 들리는 음악에 순식간에 기분이 바뀌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들리는 소음만 제거해도 행복도가 높아진다는 연구까지 염두에 두면, 마음과 소리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다.

흔히 '귀 울림'으로 알려진 이명 역시 마음과 밀접한 병이다. 귀의 울림은 곧 자신의 마음이 괴롭다는 신호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명 환자들이 한방과 양방의 온갖 병원을 숱하게 다니면서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의 괴로움이 여전하니 그 울림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 동안 1년 넘게 '왕의 한의학'을 연재하면서 조선 왕들의 건강과 관련된 기록을 샅샅이 훑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역시 귀 울림, 즉 이명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 중에서도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을 겪었던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가 대표적이다.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죽인 마음의 병

인조는 숙부 광해군의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 광해군과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소외당한 서인 세력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런 권력 교체가 사림 세력을 넘어서 일반 백성에게도 얼마나 명분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듬해(1624년) 반정 공신이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서 서울에 입성했을 때,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 때 인조는 서울을 떠나 공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는데, 어떤 백성은 한강변의 인조가 탈 배를 숨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 민심의 소재가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처지에 사림의 꼭두각시로 왕에 올랐고, 심지어 민심까지 얻지 못했던 새로운 통치자는 항상 불안했다. 인조가 왕에 오르고 나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정원군(선조와 공빈 김 씨의 아들)을 왕으로 추숭(追崇)한 것도 이 때문이다.

▲ 2013년 방송된 <궁중 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 인조(이덕화). ⓒJTBC

이런 내면의 불안은 주변 인물에 대한 의심으로 번졌다. 그 첫 번째 타깃은 인목대비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권력을 놓고 다퉜던 영창대군의 모이다.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영창대군 세력을 제거하고(1613년), 나중에는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가두기에 이른다(1618년). (영창대군은 1614년 살해당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사림 세력에 의해서 '패륜'으로 규정되었고, 이들이 인조반정 때 내세운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다. 또 형식적으로는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가 왕위를 이은 것도, 존호를 회복한 인목대비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인조는 바로 이런 인목대비를 의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계기도 어처구니없다. 인조 재위 10년(1632년) 인목대비가 죽고 나서 그의 처소에서 비단 백서 세 폭이 발견된다. 이 비단 백서에는 임금을 폐하고 다시 세우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 임금이 광해군을 말하는지, 인조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인목대비가 자신을 폐하려고 저주를 걸었다고 강하게 믿게 되었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측근이자 선조의 후궁이던 귀희와 상궁 옥지가 자신을 죽이려는 저주를 걸었다는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1639년(재위 17년)에는 원손이 거주할 향교동 본궁에서 저주할 때 쓰는 물건이 발견된 것을 빌미로,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마저 해코지하려 했다. 최명길 등 대신의 만류가 없었으면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이런 인조의 의심은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으로 그 타깃이 바뀐다. 1645년(재위 23년) 5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고 몇 달 뒤(1646년 2월 2일), 그는 이렇게 며느리를 의심한다. "강빈이 귀국할 때 금과 비단을 많이 싣고 왔으니, 이것을 뿌린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결국 인조는 강빈도 죽이고, 어린 세 손자를 제주도로 보냈다.

이 와중에도 인조는 강빈의 저주가 자신의 질병의 원인이라고 확신했다. 실록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인조의 고백을 보면, 그의 정신 상태가 얼마나 피폐해 있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강빈의 무리가 곤장을 맞고 죽고 나서부터, 환절기가 되면 으레 아프던 허리와 다리 관절의 통증이 재발하지 않았다."

귀에서 큰물이 흐르는 고통을 너희가 아는가?

1646년(인조 24년),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바로 그 해 겨울부터 이명 증상이 시작되었다. 겨울의 초입인 음력 10월 17일, 인조는 이명 증상을 호소한다. 실록이 전하는 인조의 증상은 한의원을 찾는 수많은 이명 환자의 그것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인조의 하소연을 직접 들어보자.

"전에부터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났었다. 그런데 금월 13일, 왼쪽 귀에서 홀연 종치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는 가는 소리가 아니라 큰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다. 어제 아침에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침을 맞으면 좀 낫지 않겠는가?"

영의정 김자점을 비롯한 신하와 어의들은 먼저 귀 감기로 진단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귀가 찬 기울을 만나 감기가 들었고, 그 결과 이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감기약으로 땀을 내면 체력이 떨어져서 증상이 심해질 수도 있다며, 귀에 뜸을 떠서 온기를 더해서 이명의 치료를 돕겠다고 처방한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인조의 이명 증상은 잡히지 않았다. 인조는 "귀에 뜸을 뜨고 나서도 밤에 열이 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4~5일 전부터는 종을 치는 듯한 큰소리가 귀에서 나서 심신이 현란할 정도가 되었다"고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다. "왼쪽 귀의 압력이 달라서 불쾌한 느낌이 오른쪽으로도 퍼졌다"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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