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인 이완구, 우윤근 의원이 지난 11월 28일 내년 예산안 처리에 대해 합의했다. 양당 정책위의장과 원내수석부대표인 주호영, 백재현, 김재현, 안규백 의원도 합의 당사자다.
합의문 제1항은 이렇다. "정부는 2015년도 누리과정 이관에 따른 지방교육청의 재정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순증액 전액 상당의 대체사업 예산을 확보한다."
지난 한 달 동안 수많은 부모와 교육자들이 애태우던 문제에 대해 양당이 내놓은 해법이다. 그런데 이 합의문의 뜻을 모르겠다. 왜 양당이 예산 심사 중에 국회가 아니라 정부의 의무를 정할까? 국회는 언제부터 예산 결정권을 행정부로 넘겨줬나? 누리과정은 내년부터 갑자기 지방으로 이관되나? 순증액 전액 뒤의 '상당'은 무슨 뜻인가? 누리과정을 '대체'하는 사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수능이었다면 둘도 아니고 수십 개 이상의 복수정답이 있는 질문이다.
국회의원들끼리도 해석하기 어려웠나보다. 최근 과정을 보면 순증액 전액 '상당'이란 지방채 발행 이자를 뜻하는 표현이겠지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예산소위 위원들도 해석이 달라 아무 합의도 하지 못한 채 예결위로 넘겼다.
중앙정부 사업을 지방으로 넘길 때는 재원도 넘기는 게 상식
지금 누리과정 예산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중앙정부가 누리과정을 교육청에 넘기면서 그에 상응하는 재정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프랑스 헌법 제72-2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모든 권한 이양은 그 권한의 행사에 충당되던 재원의 이양을 수반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지출을 증가시키는 모든 사업의 신설이나 확대는 법률에서 정하는 재원을 수반한다." 또한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은 헌법이 아니라 기본법이라 부른다) 제104a조 제2항은 이렇다. "연방의 위임으로 주가 (사업을) 집행하는 경우에는 연방은 이에 소요된 지출을 부담한다."
프랑스와 독일이었다면 중앙정부가 시도에 누리과정을 위임하려면 이에 필요한 재원 전액을 부담하든지, 이양해야 합헌이다. 한국처럼 중앙정부가 누리과정 시행을 결정하고서도 재원 모두를 시·도교육청에게 전가한다면 이는 프랑스, 독일이었다면 위헌이고 무효다.
중앙정부 공직자들이 대통령 공약을 지키지 말자니…
물론 대한민국 헌법에는 프랑스, 독일 같은 조항이 없다. 대통령 비서실 안종범 경제수석은 11월 9일에 이렇게 말했다. "누리과정은 '유아교육법', '영유아보육법',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등에 따라 법적으로 반드시 편성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세 법률 어디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 '영유아보육법 시행령'에만 "영유아 무상보육 실시에 드는 비용은 예산의 범위에서 부담하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 따른 보통교부금으로 부담한다"는 내용이 있다.
매년 4조 원 규모의 조세와 세출을 법률의 위임 없이 행정부가 정하는 시행령에 담는다면 한국에서도 위헌이다. 영유아보육법 어디에도 보육 재원을 부담할 책무는 국가와 시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에게 있지, 시·도교육청이 부담하라는 조항은 없다.
최경환 장관도 11월 6일에 이렇게 말했다. "교육청이 재량 지출인 무상급식 예산은 편성하면서도 법령상 의무사항인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기로 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이 말도 사실과 다르다.
교육감이 자신의 공약을 이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러 시도가 지방자치 법령인 조례로 무상급식 예산 편성 의무를 교육감, 시도지사, 기초단체장에게 부과하고, 교육감은 이를 이행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이렇다. "0세부터 5세까지 보육과 유아교육은 국가 완전 책임제를 실현하겠다"고. 그런데 누리과정 도입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 아니다. 2011년 국회가 누리과정 도입을 이미 결정했다. 2012년 초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누리과정 재원을 2015년까지 중앙정부 분담을 없애고, 모두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충당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지방자치재정의 편성권도, 심의의결권도, 집행권도 없다. 2012년 말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이미 누리과정이 시행 중이었다.
이때 박근혜 후보가 '국가 완전 책임제'를 약속했다. 당연히 유권자 모두 보육과 유아교육 재원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대통령 공약이행 의무는 정부 예산안 편성 실무책임자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있다. 그런데 교육청에 해당 예산을 지원하지 않는다. 중앙정부 스스로 공약을 어기고 있다. 도대체 청와대 비서실 수석이나, 장관이 대통령 공약을 이행하지 말자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과감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학생한테 누리과정 재원 부담하라고?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란 지방교육자치 재원이다. 즉 유·초·중·고·특수학생들의 교육 기회다. 교부금은 중앙정부가 사용처 결정에 개입할 권한이 없는 지방자치 재원이다. 우리 세금은 국세 80%, 지방세 20%다. 중앙정부가 세금의 대부분을 가져간다.
대신 중앙정부와 지방이 재정 사용에서 균형을 지니기 위해 교부금 제도가 있다. 현재 중앙정부가 교육청에 제공하는 교육교부금(내국세의 20.27%와 교육세 전액을 시·도교육청에 총액으로 교부)과 지자체에 제공하는 지방교부세(내국세의 19.24%와 종합부동산세 전액을 시·도와 시·군·구로 총액 교부)가 그것이다. 이러한 교부금 제도 덕택에 세출은 중앙정부 45%, 지자체 55%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중앙과 지방의 재정구조에서 중앙정부가 교부금의 총액을 늘리지 않으면서 누리과정 4조 원을 교육청에 부담시키면 학생들이 교육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누리과정의 재원은 우리 학생들의 다른 교육 기회를 희생해서 충당돼야 한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16조 원의 누리과정 재원 대부분은 학생들의 교육기회 축소를 의미한다.
내년 교육청 예산안을 보면 학교 냉난방비, 교직원 인원이 크게 줄어든다. 교육감과 어린이집 부모 사이의 갈등이란 본질이 아니다. 교육재정 부족액 대부분을 지방채로 충당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상처 덧씌우기다. 지방채 역시 내년 이후 학생들의 교육기회를 당겨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교육 재정 방치가 근본 원인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예산(2004~2008)은 해마다 9.3%씩 늘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7년 동안 교부금 예산(2009~2015)은 해마다 4.5%씩 늘었다. 그 중 박근혜 정부 2년(2014~15) 증가율은 평균 0.4%씩이다. 정부 재정에서 규모가 큰 부문 중에서 유·초·중·고 지출만 증가 추세가 꺾였다.
2012년 초 국무총리, 장관들은 누리과정을 교육청으로 넘기면서 2015년 교부금은 49조 원이 된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 때의 성장률과 조세정책을 유지했다면 내년 교부금은 54조 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내년 예산안에 명시된 교부금은 39.5조 원에 불과하다. 올해보다도 1.4조 원 준다. 법으로 정해진 교부금이 줄어드는 이유는 성장률 하락과 감세다. 이는 정부와 국회, 특히 경제부처 공직자들의 책임이지 전혀 학생들 탓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교부금은 이전 추세보다 44.6조 원 줄었다. 학생 1인당 620만 원씩 교육기회가 사라졌다. 누리과정을 없앨까, 무상급식을 없앨까는 논란거리가 아니다. 지출이 증가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부금 규모가 준 것이 문제다. 과제는 교육재정 확충이다.
중앙정부는 세수 증가 추세가 꺾였음에도 다른 지출은 빚을 내서 늘렸다. 중앙정부 재정적자는 올해 25.5조 원에서 내년에는 33.6조 원으로 8.1조 원 늘어난다. 이렇게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다른 지출은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늘렸지만, 유독 학생 교육기회만은 제외했다.
만약 내년 교부금이 54조 원이었다면, 누리과정(3.9조 원)과 고교무상교육(2.5조 원)은 물론, 교직원 6만 명 증원(모든 초·중·고교에 상담, 사서, 영양, 보건교사 배치 포함, 2.4조 원), 모든 초·중·고교 기본운영비 2억 원씩 증액(2.2조 원), 모든 유·초·중·고·특수 학생 체험활동비 면제(2.2조 원, 1인당 30만 원), 모든 중고생에게 매년 교복과 체육복비 1인당 30만 원 보조(1.1조 원) 등이 모두 해결될 수 있다. 즉 박근혜 대통령의 유·초·중등 교육공약을 모두 이행할 수 있다. 대통령을 도와주는 일이다.
누리과정 재정은 중앙정부가 부담하는 것이 상식
누리과정으로 촉발된 교육 예산의 문제를 미봉책으로 처리해선 안 된다. 근본적 해법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국민에게 무상급식이냐, 무상보육이냐를 선택하라는 방식으로 갈등을 조장하는 건 곤란하다. 교육청에 누리과정을 넘기려면 상식에 맞게 재정도 제공해야 한다.
국회는 시도교육감 모두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요구대로 교부금의 내국세 비중을 5%포인트 늘려 25%까지 올려야 한다. 중앙정부는 돈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정부 지출 가운데 교육보다 효과성, 형평성, 경제성이 떨어지는 11조 원을 구조조정하거나, 이명박 정부 시기 감세를 철회해야 하고, 필요하면 다른 세목이라도 증세해야 한다.
또한 국회는 특별교부금을 교부금의 4%에서 0.4%로 낮춰야 한다. 국회, 지방의회의 심의 없이 무려 1.4조 원 규모의 세금 지출(특별교부금)을 장관이 독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세금 있는 곳에 대표 있다"는 근대민주주의에 크게 위배된다. 특별교부금에는 재난 대비 0.4%만 남겨두고 나머지 3.6%를 교육청에 그대로 넘겨야 한다. 임명직 장관 1명이 아니라 직선 교육감 17명이 이 재정을 현장에 맞게 훨씬 잘 배정할 수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 시스템이 우리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단계로 진입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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