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지난 12월 5~7일 영국 런던에서 '탐사언론센터'가 주최한 "비밀, 감시와 검열에 대항하는 동맹 구축"이라는 주제의 '로건 심포지엄'에서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호주의 존 필저가 한 연설 '미디어에 의한 전쟁, 그리고 프로파갠다의 승리(War by Media and the Triumph of Propaganda)'의 전문 번역이다.
필저는 이 글에서 현재의 국제상황이 핵전쟁이 될 지도 모를 전면적인 전쟁 위기에 직면해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배후에는 권력의 나팔수가 되는 주류 미디어들이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필저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 러시아를 ‘악마화’ 시키기 위해 꾸민 음모라면서, 러시아의 푸틴을 ‘새로운 스탈린’, ‘새로운 히틀러’로 몰아가는 선전에 주류 미디어들이 침묵과 동조로 가담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필저는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도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거짓 증거’를 대중이 진실처럼 믿도록 선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러 탐사보도 저널리스트들과 유엔 등의 ‘내부고발자’들을 인용해 폭로했다.
존 필저는 ‘미디어에 의한 전쟁’에서 흔히 권력의 앞잡이로 알려진 극우보수 언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도 펼쳤다. 이라크 전쟁 때도 <폭스뉴스>가 아니라 가장 권위있는 진보언론 <뉴욕타임스>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거짓말은 이라크 전쟁의 최대 명분이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가 이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보도하면서 ‘선전’이 완성됐다는 지적이다.
필저에 따르면 <워싱턴포스트>와 <가디언>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소위 ‘진보언론’ 신문들은 지금도 독자들이 새롭고 위험한 냉전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도 이들은 러시아의 잘못된 행위로 빚어진 것이라고 보도해왔다. 필저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실상은 파시스트 세력의 쿠데타이며, 이 쿠데타는 독일과 나토의 지원을 받아 미국이 주도한 공작이라고 단언한다.
나아가 그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진실에 대한 억압은, 가장 완벽한 뉴스 차단 사례 중 하나가 되고 있으며, 제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서방 군사력이 코카서스와 동유럽 지역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 철저하게 감춰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글의 원문은 '//johnpilger.com'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왜 언론은 그토록 선전(propaganda)에 끌려 다니는가? 어째서 검열과 왜곡이 (언론의) 정상적 관행으로 굳어진 것일까? 왜 BBC는 그렇게 자주 탐욕스러운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으며, 어찌하여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자신들의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 걸까?
젊은 기자들이 언론이 다뤄야 할 진정한 현안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고상한 목표를 내세우지만 저열한 목표를 추구하는 (권력의) 가짜 객관성에 도전하도록 교육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소위 주류언론이 전하는 내용의 본질이 정보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점을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이상은 매우 시급한 질문들이다. 지금 세계는 핵전쟁이 될지도 모를 전면적인 전쟁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빌미로) 러시아, 나아가 중국을 고립시키고 도발하기로 결정했음이 분명해진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진실은 대부분의 언론에 의해 위와 아래가 뒤바뀌고, 겉과 속이 뒤집어진 채 대중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들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가능케 한 (미국 정부의) 거짓말을 유포시켰다. 그 결과는 엄청난 대학살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너무도 위험하다. 반면 현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너무도 왜곡돼 있다. 이제 선전은 에드워드 버네이스(PR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전 전문가. 편집자)가 말했던 '보이지 않는 정부'의 수준을 넘어섰다. 정부 그 자체다. 선전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그 주된 목적은 대중을 정복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 능력,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을 빼앗으려 한다.
“언론이 할 일 했다면 이라크 전쟁 피할 수 있었다”
정보 시대는 사실상 미디어의 시대다. 미디어에 의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에 의한 검열, 미디어에 의한 악마화, 미디어에 의한 보복, 미디어에 의한 진실 회피 등이 자행되고 있다. 권력에 순종하는 상투적 언사와 거짓된 프레임의 초현실적인 결합이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내는 (권력자들의) 능력은 오랜 기간에 걸쳐 구축된 것이다. 45년 전 <미국 녹색화(The Greening of America)>라는 책이 화제가 되었다. 이 책 표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 과거의 혁명들과는 다를 것이다. 이 혁명은 개인에서 시작될 것이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특파원으로 일할 때인데, 예일대의 젊은 교수였던 이 책의 저자 찰스 라이시는 단숨에 현자(guru)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메시지는 이제 진실 폭로나 정치적 행동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문화'와 자기성찰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도 못 가서 이윤과 이익을 좇는 '자기중심주의(me-ism)'의 광풍이 불면서 함께 행동하면서 함께 사회정의와 국제연대를 추구한다는 생각은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계급과 성, 인종은 각기 별개의 문제로 취급됐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고, 미디어는 곧 메시지가 되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조작된 새로운 '위협'은, 20년 전이었다면 강력한 저항세력의 구심점이 됐을 사람들의 정치지향성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2003년 나는 미국의 저명한 탐사저널리스트 찰스 루이스를 워싱턴에서 인터뷰했다. 인터뷰 몇 개월 전에 우리는 이라크 침공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만일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언론이 있어 조지 부시와 도널드 럼스펠드에게 제대로 도전했더라면 어땠을까? 결국 조잡한 선전으로 드러난 그들의 주장(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9.11 테러세력과 한편이라는)을 곧이곧대로 보도하는 대신 그 실체를 꼼꼼하게 검증했더라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는 "언론인들이 할 일을 했다면,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았다"고 답했다.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또한 내가 같은 질문을 던졌던 다른 저명한 저널리스트들도 동일한 대답을 했다. CBS의 앵커였던 댄 래더, <옵서버>와 BBC의 중진 기자이자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로스(익명으로 남길 원했지만)들도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달리 말하자면, 언론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그들이 (권력자의) 선전을 증폭시키는 대신 선전 내용에 대해 의문을 품고 검증을 했다면, 수십만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수 백 만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난민이 되지 않았고,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파 전쟁이 촉발되지 않았으며, 악명 높은 이슬람국가(IS)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라크 희생자가 고작 1만 명 정도라는 영국인들
심지어 지금도, 수 백 만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지만, 서방 국가의 대중들 대부분은 그들의 정부가 이라크에서 얼마나 거대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잘 모르고 있다. 이라크 침공 전 12년 동안(1차 걸프전쟁이 끝난 1991년부터 2003년까지) 미국과 영국 정부가 (가혹한 경제 제재를 통해) 이라크 주민들의 생계수단을 차단함으로써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더 드물다.
1990년대 이라크 경제 제재에 책임이 있는 영국의 한 고위 관료가 유니세프에 이렇게 고백했다. 미.영의 중세식 봉쇄 조치로 5세 미만의 이라크 어린이 50만 여명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이 관료는 카니 로스다. 그는 런던 외교부에서 '미스터 이라크'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오늘날 그는 서방 정부가 대중을 어떻게 기만하고, 언론인들은 어떻게 자발적으로 이 기만을 퍼뜨리는지에 대해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 "우리는 정부가 가공한 사실을 언론인들에게 던져주거나, 아니면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름끼치는 침묵의 시기에 내부고발자 역할을 한 인물은 데니스 핼리데이였다. 그는 당시 유엔의 사무부총장이자 이라크 주재 유엔 고위관료였지만 집단학살이라고 그가 표현한 정책들을 수행하는 대신 사표를 냈다. 그는 이라크에 대한 제재로 100만 명이 넘는 이라크 주민들이 살해됐다고 추정했다.
그때 핼리데이에게 닥친 일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무시됐다. 또는 헐뜯기의 대상이 되었다. BBC의 시사프로그램 <뉴스나이트>의 진행자 제러미 팩스먼은 그에게 "당신은 사담 후세인을 옹호하는 자 아니냐?"고 소리쳤다. <가디언>은 최근 이 대목을 "팩스먼이 연출한 '인상 깊은 순간'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지난 주 팩스먼은 100만 파운드짜리 저술 계약을 맺었다.
억압적 권력의 시녀들은 역할을 잘해냈다. 영국의 여론조사기관 컴레스의 2013년 조사 결과, 영국인 대다수는 이라크에서 발생한 희생자가 1만 명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실제로는 100만 명 이상이 숨졌다. 편집자). 실제 희생자 수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규모다. 이라크에서 영국으로 이어지는 피의 흔적은 거의 깨끗이 지워진 것이다.
선전의 완성은 <뉴욕타임스> 같은 진보언론의 역할
루퍼트 머독은 미디어 조폭의 대부로 불린다. 127개에 달하는 신문과 4000만에 달하는 부수, 폭스 네트워크 등 그가 거느린 매체가 휘두르는 힘에 대해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머독의 미디어 제국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전체 미디어업계의 영향력에 비하면 별 게 아니다.
가장 효과적인 선전은 <선>이나 <폭스뉴스>가 아니다. 진보언론이다. <뉴욕타임스>가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보도했을 때, 그 거짓말은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폭스뉴스>가 아니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와 <가디언>도 예외가 아니다. 두 신문은 독자들이 새롭고 위험한 냉전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자유주의 성향의 이 세 신문들 모두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의 잘못된 행위로 빚어진 것이라고 보도해왔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실상은 파시스트 세력의 쿠데타이며, 이 쿠데타는 독일과 나토의 지원을 받아 미국이 주도한 공작이었는데도 말이다.
진실의 전복이 너무도 광범위해서 이제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봉쇄와 위협은 논쟁거리가 안 된다.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제1차 냉전 시기(1945-1989년) 내가 자라면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흑색선전과 공포 분위기 속에 진실은 억압되고 있다.
다시 한 번 또 다른 스탈린, 또는 더욱 사악하게, 새로운 히틀러가 우리를 정복하려 한다(는 선전이 횡행하고 있다). 아무에게나 악마라는 이름을 뒤집어씌워 마구 찢어발겨도 아무 문제가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진실, 철저히 억압되고 있어”
우크라이나 사태의 진실에 대한 억압은,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완벽한 뉴스 차단 사례 중하나다. 제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서방 군사력이 코카서스와 동유럽 지역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 철저하게 감춰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주민들에게 전쟁범죄를 저지른 우크라이나 정부와 신나치 집단에 대한 미국의 은밀한 지원도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말레이시아 항공기 격추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서방측 선전과 모순되는 증거들도 보도되지 않고 있다.
다시 한 번 이른바 ‘진보 언론’은 검열관의 역할을 맡았다. 한 언론인은 어떤 사실이나 증거도 대지 않은 채 우크라이나의 한 친러시아 지도자를 말레이시아 항공기 격추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이 인물이 '악마'로 알려졌다고 썼다. 이 ‘악마’가 자신을 겁준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언론인이 내세운 유일한 증거다.
서구 언론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계 주민들을 이방인으로 묘사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우크라이나 시민으로서 연방제를 통해 자치를 추구하거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외세가 개입해 쿠데타로 전복시킨(지난 2월 야누코비치 정부의 축출을 말함. 편집자) 것에 저항한 사실은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책임지지 않고 맘껏 이용할 수 있는 '유령 악당'이다. 나토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미국의 나토 사령관 필립 브리드러브는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나온 듯한 인물이다. 그는 아무런 물증도 없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스탠리 큐브릭의 잭 D. 리퍼 장군이 그대로 환생한 듯한 인물이다.
브리드러브는 4만 명의 러시아군 병력이 우크라이나 국경 쪽으로 집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그리고 <옵서버>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옵서버>는 전직 기자 데이비드 로즈가 폭로했듯, 블레어의 이라크 침공을 뒷받침해주는 거짓과 조작으로 점철된 보도를 한 전력이 있다.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들이 재회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나팔수들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던 그 논설위원들이다.
“결의안 758은 러시아에 대한 전쟁 준비 선언”
독립 언론인 로버트 패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지’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미국의 정치. 언론계 전반을 덮고 있는 광기를 보라.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조작된 논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사실이나 이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란-콘트라 사태를 폭로한 패리는 러시아 외무장관이 말한 이른바 '치킨게임'에서 언론이 한 핵심 역할을 보도한 몇 안 되는 언론인 중 하나다. 그런데 이것이 게임인가? 내가 썼듯 미국 의회는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를 갖추자"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결의안 758을 채택했다.
19세기 작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세속적 자유주의를 "최후의 종교, 저승이 아닌 이승에 둥지를 튼 종교"라고 표현했다. 오늘날 그 신성한 권리는 무슬림권이 저지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위험하다. 다만 이 종교가 거둔 최대의 성공은 자유롭고 공개적인 정보라는 환상을 대중들에게 심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뉴스에서 모든 나라들이 사라질 판이다. 극단주의와 서구가 지원한 테러의 근원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 가격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소식 외에는 얘깃거리가 안 된다. 예멘은 12년 동안이나 미국의 무인기 공격을 감내해 왔다. 누가 알겠는가? 누가 신경 쓰나?
차베스에 대한 BBC 편파보도 연구
2009년 웨스트잉글랜드 대학교가 베네수엘라에 대한 BBC 보도 10년치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출간했다. 304건의 방송 보도 중 우고 차베스 정부가 도입한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도한 것은 단 3건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맹퇴치 프로그램은 지나가듯 간단히 언급됐을 뿐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독자와 시청자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주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놀랄 만한 정책들이 시행됐고, 상당수가 차베스가 주도했다는 것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 BBC와 마찬가지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가디언> 등 서방권의 권위 있는 언론의 보도에는 잘못된 신념이 깔려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차베스는 사망할 때에도 조롱받았다. 저널리즘 학교에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영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왜 '긴축'이라는 집단적인 처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설득되었는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아주 잠깐이지만, 썩어빠진 체제가 폭로됐다. 은행들은 공공의무를 저버린 사기집단임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기업들의 지나친 '보너스' 문제가 비판을 받았을 뿐, 몇 달 못가서 메시지가 바뀌었다. 잘못을 저지른 은행가들의 사진은 타블로이드신문에서 사라지고, '긴축'이라는 이름의 의무가 서민들에게 지워졌다. 무슨 뻔뻔해져도 되는 마술이라도 부린 것인가?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많은 장치들이 해체되고 있다. 사기꾼들이 초래한 부채를 갚아주기 위해서다. '긴축'을 위한 재정지출 삭감은 830억 파운드에 달한다. 이 금액은 은행들, 아마존과 머독의 '뉴스 UK' 같은 기업들이 탈세한 세금과 거의 맞먹는 규모다. 게다가 사기꾼 은행들은 연간 1000억 파운드에 달하는 보조금을 보험과 보증을 위한 명목으로 지원받고 있다. 이 보조금이면 영국의 국민건강보험 전체를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이다.
경제위기라는 것은 순전히 선전이다. 극단적인 정책들이 영국, 미국, 유럽 대부분, 캐나다와 호주 등에서 판을 치고 있다. 다수를 대변하고 진실을 전하고,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을 누가 하고 있나? 저널리스트들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에 대한 기괴한 침묵
1977년 워터게이트 보도로 명성을 얻은 칼 번스타인은 400명이 넘는 저널리스트와 언론사 고위인사들이 CIA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뉴욕타임스>, <타임>, TV 네트워크들도 포함돼 있었다. 1991년 <가디언>의 리처드 노튼 테일러는 영국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폭로했다.
이제는 CIA를 위해 일하는 언론인이 필요 없을 정도가 됐다. 거의 모두가 한통속이 됐기 때문이다. 누가 <워싱턴포스트>을 비롯한 미디어들에게 에드워드 스노든이 테러리즘을 돕고 있다고 비난하도록 돈을 지불하겠는가. 누가 줄리언 어산지를 끊임없이 음해하라고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겠는가. 물론 그들은 다른 대가를 많이 받고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어산지가 그토록 원한과 악의, 시기를 한 몸에 받게 된 주된 이유는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미화된 부패한 정치엘리트의 허울을 위키리크스를 통해 허물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어산지는 대폭로의 시기를 열어 제치면서 적들을 만들었다. 또한 미디어업계, 특히 그의 위대한 특종을 보도하고 이용한 신문들의 편집자들을 빛나게 했으며 또한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공격의 대상인 동시에 '황금 거위'가 되었다.
위키리크스와 그 창업자를 소재로 수익이 기대되는 책과 할리우드 영화 제작 계약들이 맺어지고, 미디어업계의 기획들이 생겨났다. 위키리크스가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동안, 사람들은 큰돈을 벌었다.
지난 12월 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이런 사실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날 이곳에서 <가디언>의 편집인 앨런 러스브리저는 에드워드 스노든과 함께 대안 노벨평화상으로 알려진 '바른생활상'을 공동 수상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 행사에서 어산지와 위키리크스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것이다.
디지털 폭로 시대를 개척하고 <가디언>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특종에 속하는 정보를 제공한 인물을 위해 발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홍콩에 있던 에드워드 스노든을 안전한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유능하고 눈부신 활약을 펼친 것도 어산지와 그의 위키리크스 팀이다. 그런데도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이렇게 철저한 무시가 더욱 아이러니하고 참담하고,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 행사가 열린 곳이 스웨덴 의회라는 점이다(어산지가 성폭행 혐의로 고소된 곳이 바로 스웨덴이다. 편집자). 어산지의 업적에 대한 비겁한 침묵은 스웨덴의 정의가 기괴하게 실종된 사례다.
옛 소련 반체제인사 예프투셴코는 "진실을 말하는 대신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우리 언론인들은 바로 이런 종류의 침묵을 깨부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계전쟁을 획책하는 권력과 정신병자들에게 봉사하는 무책임한 언론에 대해 해명을 요구해야만 한다.
18세기 에드먼드 버크는 언론의 역할을, 권력을 견제하는 '제4부'의 기구로 묘사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나? 이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제5부'의 기구가 필요하다. (주류 언론의) 선전에 대해 감시와 분석, 반박을 하고 젊은이들을 권력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일꾼이 되도록 가르치는 저널리즘 말이다.
러시아어로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하는, 거짓된 지식에 대한 반격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진짜 저널리즘이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다. 당시 기자들은 침묵과 결탁의 대가로 보상을 받고 작위도 받았다. 학살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당시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맨체스터 가디언>의 편집자 C.P 스콧에게 "만일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내일이라도 전쟁은 끝날 수 있다. 물론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제 사람들이 알아야 할 때다.
(번역: 이승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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