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입니다. 3년 전, 2012년 3월 15일 한미 FTA가 발효됐습니다. 작년과 재작년 이맘 때, 정부는 한미 FTA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대대적인 선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조용했습니다. 다만 각 언론사들이 한결같이 미국 쇠고기가 얼마나 잘 팔리고 있는지, 백화점 쇠고기 코너 사진을 실었죠.
혹시 제가 뉴스를 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느끼는 건지도 몰라서, 정부의 보도자료를 검색해 봤지만 "관계부처 합동"의 이름으로 단 10쪽자리 "한미 FTA 발효 3년차 교역. 투자 동향"을 발표했을 뿐입니다. 여러 번 말씀 드린 대로 원화표시 수출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가운데 대미수출이 13.3% 증가했으니(수입은 9.1% 증가), 한껏 자랑할 만한데도 조용히 지나간 겁니다.
아마도 정부 발표문의 이 표에 답이 있지 않을까요? 작년과 재작년에는 FTA 혜택 품목의 수출증가율이 높았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만(표를 보면 1년차와 2년차에 FTA 비혜택 품목, 즉 관세가 그다지 많이 내려가지 않은 품목의 수출증가율은 마이너스였으니까요), 작년의 실적을 보면 FTA 혜택 품목은 6.7% 증가한 반면 FTA 비혜택 품목은 15.6%나 증가했으니 FTA가 얼마나 수출에 도움이 되는지 선전하는 건 아무래도 떨떠름했겠죠.
< 그림1> 대미, 대EU 수출입 추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상당한 기간의 대미, 대EU 수출입 추이를 보더라도 FTA의 효과를 논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작년의 성적이 좋다고 하지만 한미 FTA가 발효되기 전인 2010년의 수출증가율이 훨씬 높았고 EU의 경우에도 한EU FTA가 발효된 직후의 수출증가율은 마이너스였으니까요. 즉 상대 국가의 경제상황이 압도적으로 중요한 변수였고, FTA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온당합니다.
어쨌든 정부가 이상한 수치를 들고 나와서 FTA의 효과를 선전하지 않은 건, 기특한 일입니다. 우리 정부도 꽤 성숙했다고나 할까요?
제가 누누이 강조했습니다만 한미 FTA의 핵심은 무역이 아닙니다. 미국이 FTA 전략을 들고 나온 것 자체가 WTO의 다자간 협상의 지적재산권, 투자, 서비스 분야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미 FTA는 수출입과 무관해 보이는 이 세 분야에서 미국 대기업의 이익을 거의 100% 반영한 협정입니다. 이와 관련된 우리나라의 법령 63개가 이미 제·개정됐죠.
국내 제도의 변화는 서서히 나타날 겁니다. 언론들은 백화점의 쇠고기 판매대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른바 '광우병 괴담'을 비웃고 있지만 광우병의 잠복기가 10년 이상이라는 점을 알려주지 않습니다(물론 앞으로도 이들의 비웃음을 당하기를 바랍니다만…).
진정한 문제는 한미 FTA가 이미 파산이 증명된 미국식 경제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수출입이 아니라 이런 법과 제도의 변화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미국화'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고 그 결과는 점점 더 증폭되어 나타날 겁니다.
2007년부터 저는 한미 FTA와 자발적 민영화가 결합될 경우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규제를 '제거해야 할 암덩어리'로 보는 박근혜 정부의 움직임이 바로 그겁니다. KTX 일부 구간 민영화, 의료 민영화, 공적 연금의 약화와 사적 보험의 확대는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민영화, 규제완화에 미국자본이 참여할 경우(이들 분야에 투자하는 대기업은 틀림없이 미국 자본을 끌어들일 겁니다), 그 때부터 저 악명 높은 투자자국가제소권(ISD)은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모펀드 론스타가 제기한 투자자-국가제소(ISD)는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당시엔 한미 FTA가 발효 전이었기 때문에 한-벨기에 투자협정을 이용했지만 한미 FTA에는 더욱 강한 투자자-국가제소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투자의 정의가 훨씬 넓고, 정부가 소송 결과에 불복할 경우엔 보복관세를 물릴 수도 있으니까요.
완전히 비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현재 알려진 소송 액수만 무려 43억 달러(약 4조6590억 원)입니다. 2012년 12월 외환은행 매각 과정이 지체돼 심각한 손해가 발생했고 매각에 따른 세금 부과가 부당하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거죠. 이 소송에 배정한 예산만 한 해에 47억6800만 원입니다. 물론 이 돈은 우리의 세금이죠.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 걸까요? 더 큰 문제는 투자자국가제소권의 존재 자체가 정부의 정책을 위축시킬 거라는 데 있습니다. 이른바 위축효과(chilling effect)죠.
한미 FTA+로 알려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역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미국을 넘어 12개국과 더욱 강해진 투자 협정을 맺는 겁니다. 우리 정부가 TPP에 가입하려고 애쓰는 만큼 입장료는 더욱 비싸지겠죠.
이미 미 무역대표부(USTR)는 "2015년 대통령의 교역 의제"에서 "미국은 자동차와 금융서비스, 관세 분야에서 한국 측에 많은 우려를 제기했고 앞으로 미국제품을 차별하는 장벽과 계속 싸워나갈 것"이라며 "FTA의 완전한 이행과 매끄러운 운영을 위해 한국과 적절한 시기에 이에 대한 논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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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발이라도 맞추듯 지난 3월 16일과 17일에 한미FTA이행위원회가 개최됐습니다.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만(왜 FTA만 관련되면 모조리 비밀인 걸까요?) 한반도 역외 가공지역위원회, 의약품·의료기기위원회, 자동차작업반이 참여했다는 건 자동차와 의약품 분야에서 미국의 통상압력이 거세다는 걸 의미합니다. 불을 보듯 뻔하게 환경부의 "저탄소협력금제도", 의약품의 지적재산권 강화가 논의될 것이고요. 금융 고객정보 반출, 쇠고기 수입 완전 개방과 함께 이들 분야가 TPP의 입장료가 될 겁니다. 아마도 한미 FTA 4대 선결요건의 추억이 떠오르실 겁니다.
더구나 한국의 TPP 참여는, 엉뚱하게 불거지고 있는 미 미사일방어망(사드) 참여와 함께 외교안보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중국 쪽에서 보면 경제와 군사 양 면에서 자신을 포위한다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요. 도대체 경제적으로도, 외교안보적으로도 아무런 실익이 없고 명분도 없는 이런 정책을 왜 추진하는 걸까요?
만일 이번에 한미 FTA 발효 3주년을 조용히 지나간 것이 정부의 성숙을 반영하는 거라면 TPP나 사드 문제에 대해서도 그 성숙함이 발휘되기를 빌어 봅니다. (다음 주에는 한은의 기준 금리인하를 계기로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가계부채 문제를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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