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남 곡성에 사는 19살 홈스쿨러 이한결입니다. 1997년에 울산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2002년에 귀농하는 부모님을 따라 전북 부안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다 2006년 이곳 곡성으로 와서 9년째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귀농을 결심했을 때 저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냥 시골로 이사를 했고 부모님이 밭에서 일할 때 옆에서 흙을 밟고 나무 막대기를 흔들며 놀았죠.
저는 홈스쿨링을 해요. 사전에 '홈스쿨링'은 '학교를 가는 대신 집에서 부모에게 가르침을 받는 재택 교육'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최근 "획일적인 공교육을 반대하고 자녀의 적성, 특성에 맞는 교육을 가르치거나 배우게 하는 홈스쿨링이 확산되고 있다"고 하네요. 1993년 미국에서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의 교육과정을 집에서 가르치는 걸 합법화하는 법정 공방이 몇 년에 걸쳐 이뤄졌다는 이야기도 봤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중학교는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냥 학교 다니는 게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또 5학년 때 학교생활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졸업을 1년 앞두고 집이랑 더 가까운 삼기초등학교라는 곳으로 전학을 갔는데 그곳 생활은 매우 즐거웠습니다. 전교생이 50명밖에 안 된다는 게 더 좋았고, 선생님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셔서 학교생활이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구나 싶었어요. 그래도 중학교는 이렇게까지 전혀 즐거울 것 같지 않아서 배치고사만 치르고 학교를 나왔습니다.
2011년에는 홈스쿨링을 하는 가족들이 모여 소통하고 즐기는 '홈스쿨링 가정연대' 모임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저의 제일 친한 친구들이죠. 지금은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 녀석은 오디션을 거쳐 에스팀이라는 소속사에 합격해 모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아버지, 누나, 곡성에 사는 아는 분과 곡성군 여기저기 열여섯 군데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러 다녔습니다. 온종일 페인트칠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속으로 툴툴대기도 했습니다. 벽화 일을 하며 하루에 6만 원씩 받았고 그 돈을 모아 연말에 한 달 동안 인도와 네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충북에 있는 '선재마을'이라는 곳에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열댓 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데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도착한 인도는 시끄럽고 정신없었지만, 한국에선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이 있었습니다. 동갑내기 남자 애들 5명과 이곳저곳 구경하고 군것질도 하고 신 나게 돌아다녔습니다. 관광객과 여행자들이 넘쳐났던 멋진 타지마할, 갠지스 강이 있는 바라나시,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르차 등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네팔로 넘어갔습니다.
맑은 날이면 보인다는, 저 멀리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포카라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렌트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고, 현지 어린이들과 공터에서 축구도 했어요. 또 값이 싼 작은 한식당에서 끼니를 자주 때웠던 일도 생각납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한 부분을 트래킹했는데요. 하필 전날 세수하며 코를 잘못 풀어서 한쪽 귀가 중이염에 걸려 도중에 내려와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습니다. 다툼도 있었고 난감한 일도 여럿 있었지만, 아주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큰 여행을 다녀오니, 조금이나마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꽤 값진 성과인 것 같아요.
그리고 2012년 2월, 또다시 열심히 놀았습니다. 캠프도 가고 친구들과 제주도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17살이 되던 2013년까지는 집에서 일하고, 친구를 만나는 반복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놀기 위해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렇다 할 일도 별로 없었고요.
지난해 4월에는 제주도에 갔습니다. 친구가 아버지와 집을 짓고 있는데 한 달 정도 같이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죠. 마침 그 친구와 배낭여행을 계획 중이었는데, 수고비도 준다고 하셔서 경비를 마련하기로 했죠. 제주도에 도착한 지 이틀 뒤인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초저녁에 들어왔는데, 전부 세월호 얘기였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밝혀진 사실을 보고, 어이없을 만큼 무능한 정권과 대통령에게 화도 났습니다. 지난 2월에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경기도 안산~팽목항까지 도보행진을 해 담양 근처에서 함께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통령인지 아닌지는 제가 여기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좋았습니다. 가족들이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늘 그랬듯 저 없어도 잘 살더라고요. 공사를 쉬는 날엔 친구와 시내에 나가서 놀거나 쉬면서 여행 계획을 짰습니다. 수고비를 70만 원 받았는데, 일을 잘한 것도 아니라서 죄송스럽기도 했습니다. '더 열심히 할걸…' 후회되기도 합니다. 부모님과 누나에게 용돈을 드리고 부산에서 갖고 싶었던 물건 등을 사니, 돈이 순식간에 줄어들어서 충격이었죠. 돈이 정말 가볍구나 싶었어요.
제주에서 수고비를 70만 원 받았는데 별로 일을 잘한 것도 아니라서 조금 죄송스럽기도 했습니다. 더 열심히 할걸 후회되기도 합니다. 부모님과 누나에게 용돈을 챙겨드리고 부산에서 갖고 싶었던 물건들이나 먹을 걸 사먹고 교통비도 나가다 보니 돈이 순식간에 줄어들어서 충격이었죠. 돈이 정말 가볍구나 싶었어요.
8월에는 홈스쿨링가정연대에서 기획한 청소년 예술캠프와 어린이 캠프에서 도우미를 했습니다. 조별로 찰흙을 빚어 상상한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 향에서 피어나는 연기의 흐름을 그려내고 밤에는 친구들과 게임도 하고 신나게 놀았어요. 캠프가 오랜만이라, 정말 재밌었습니다. 어린이 캠프는 아무래도 이리저리 날뛰는 아이들을 통제하고 지켜보는 게 조금 힘들었습니다. 캠프 참가 어린이들의 부모님이 집안의 어린 막내들까지 데려오고 하다 보니 그 아이들까지 감당하는 일이 벌어져 고생이었어요.
12월에는 인천에 사는 누나네 집에 갔다가 갑자기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버랜드'에서 놀면서도 잠깐씩 책을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홈스쿨링을 하면서 책을 읽은 적이 별로 없었어요. 19살이 되니, 그동안 놀기만 한 것 같았고 이렇게 지내면 답이 없겠다는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씩 '이렇게 살아도 되나?'를 고민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이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심각했죠. 그냥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 하며 재밌게만 지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집 앞에 카페를 짓는데 엄마가 거기서 커피와 빵을 만들어 파는 건 어떻겠느냐며, 직업전문학교에서 바리스타와 제과제빵 기술을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막상 시작하려 하니, 고용센터에 가서 상담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용센터에서는 '위기 청소년'으로 학교를 중퇴한 게 아니라는 상담을 받고 추천서를 받아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곡성군 청소년센터를 찾아갔는데, 이번에는 제적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위기도 없는 저를 '위기 청소년'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게 싫다며, 내년에 20살이 되면 배우러 가라고 했습니다. 결국 삼기초등학교의 졸업증명서와 추천서를 가지고 고용센터를 방문한 뒤에나 직업전문학교 상담이 가능했습니다.
제가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조금 떨리기도 하고 기대도 됩니다. 저와 다르게 친구들은 하고 싶은 걸 찾아 먼저 도전하는데, 저는 늘 망설이고 핑계를 대며 피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친구들을 보며 열등감도 느끼며 조급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웃기네요. 저랑은 다른 '사람'이니까 저마다 생각과 마음가짐도 다른데 말입니다.
찬이 이야기
자퇴
저는 이찬이라고 합니다. 14살이며 초등학교 3학년 1학기에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한결이 형이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것을 제가 부러워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이 제가 자퇴하는 것에 동의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홈스쿨링을 하면서 집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엄마와 친한 아주머니가 오셔서 수학을 가르쳐줍니다.
닭 돌보기
10살 때 학교를 그만두면서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뭘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닭장이 떠올랐습니다. 집 뒤편에 오래된 닭장에서 토종닭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지금은 닭 쓰다듬는 건 일도 아닙니다. 하루에 4~5개 정도의 달걀이 나왔고, 엄마에게 달걀값을 받았습니다. 달걀 한 개에 500원씩.
닭장이 쥐떼에게 습격당하면 구멍을 돌로 막았고, 닭이 죽으면 밭에 묻어줬습니다. 건강했던 닭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태어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상의 순리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토막에 매직펜으로 죽은 닭의 이름을 써서 묘비를 만들어줬습니다.
친구네 집
일주일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은 토요일과 일요일입니다. 왜 주말을 기다리느냐고요? 친구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일 때 그 친구가 전학을 왔습니다. 전학 온 날부터 우리는 곧바로 친해졌고 가끔 머리를 쥐어뜯거나 볼을 꼬집으며 다투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더욱 친해진 것 같습니다. 친구네 아버지가 목사라, 일요일은 교회 예배가 있는 날입니다. 친구와 일요일에 놀기 위해서는 예배도 드려야 합니다. 뭐, 그렇다고 예배가 지루하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니까요. 2학년 때부터 우정을 나눴으니, 이제 5년째네요.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4년 9월 현재 71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 바로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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