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 비난이 계속되고 있다. 전통적 대남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뿐만 아니라 남조선 인권대책협회, 전국연합근로단체 등 갖가지 단체들이 모두 동원되는 양상이다. 표현에 있어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입을 "용접해버려야 한다"는 등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아마도 북한 내에 "남한을 비난하는 것이 내 몸에 이롭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듯 하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남한과 대화와 타협을 논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탓일까? 정부 당국자들은 요즘 공통적으로 "북한의 태도가 상당히 경직돼있다"고 말한다. 정부 차원이든 민간 차원에서든 접촉하는 북한 관계자들의 태도가 유연함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내 이런 분위기가 이른바 '김정은의 공포 정치' 때문인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는 모르나, 북한이 경직된 태도를 보이면서 남북간 관계 진전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상황 타개 못 하고 '현상 유지'에 머무를 가능성
우리 정부가 이러한 북한에 대처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기초하고 있다. 일단 만나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자면서, 낮은 수준에서부터 신뢰를 차근차근 쌓아 큰 신뢰를 만들어가자고 강조한다. 드레스덴 선언에서의 인도적 지원, 민생 인프라 구축, 남북한 동질성 회복과 민생, 환경, 문화의 3대 통로 개설 등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구체화된 내용들이다.
낮은 수준에서부터 신뢰를 쌓자는 접근법이 북한의 거부로 잘 작동되지 않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신뢰 프로세스라는 접근법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면 그러한 선택에 지지와 협력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보상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신뢰를 쌓아나가는 과정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부정적 측면의 신뢰 프로세스'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긍정적 측면의 신뢰 프로세스'가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하는 듯하다.
하지만, 북한 내부가 경직된 상황이라면, 낮은 수준에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긍정적 측면의 신뢰 프로세스'는 언제쯤부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정부가 제안한 드레스덴 선언이나 3대 통로 개설 같은 사업들이 아무리 남북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사업이라 해도, 북한 내부가 대남 협력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데 언제쯤이나 성과가 나겠냐는 것이다. 북한 내부가 유연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라면, '부정적 측면의 신뢰프로세스'는 단순한 현상유지 정책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높다.
비공개 접촉 통해 큰 틀의 신뢰 구축해야
북한은 대단히 정치적인 사회다. 상층부의 방향이 정해지면 하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상층부의 분위기가 부정적이면 하부에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과 같이 경직된 상황에서는 낮은 수준의 협력이 이뤄지기 힘들다는 얘기다.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남북 관계 개선의 출구는 남북 최고지도자의 결단에 의해 마련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남북 최고지도자의 의중을 담은 인물들이 비공개 접촉을 통해 최고지도자의 의견을 간접 교환하면서 남북 관계 개선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남북 관계 개선의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하나,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개선 지점은 분명히 있다. 이러한 지점에 대한 남북 최고 지도자의 공감대가 마련돼야 남북관계 경색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정부 고위 당국자도 "현 정부에서 비선접촉을 안하겠다는 것은 브로커를 통한 비선 접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남북 관계의 모든 부분을 다 공개하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고위 당국자의 말대로 정부가 비공개를 통해서라도 남북 간 소통을 추진해보기를 바란다. 민생과 환경 같은 작은 신뢰를 쌓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최고 정상 간의 의중을 간접 교환하는 큰 틀의 신뢰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 포커스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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