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육상쟁'을 길게 끌어봤자 롯데그룹의 이미지만 추락하는 결과가 뻔히 예상되자, 주주총회가 됐든 법적 소송전이 됐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승부"가 아니라, 하루빨리 사태를 수습하는 절차에 불과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이 신동빈 회장의 승리로 정리가 되더라도, 이미 롯데그룹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심지어 롯데그룹의 '과거사'들도 다시 롯데그룹에 대한 이미지를 부메랑처럼 때리는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불거진 '과거사'로는 일본 롯데의 '아사다 마오' 후원이 있다. 일본 롯데는 지난 2009년 이후 일본의 피겨 스타 아사다 마오를 후원해왔다. 그동안 일본 롯데가 한국롯데와 별개처럼 알려진 상황에서는 "그저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간 일이었다.
롯데 이용 고객, 눈치 보이는 신세
하지만 한국롯데가 사실은 일본롯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일본기업'이라는 것이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내분으로 드러나자, '아사다 마오' 후원은 이제 롯데그룹이 김연아 선수를 후원하지 않고, 오히려 김연아의 숙적인 아사다 마오를 후원한 '반민족 기업'으로 몰리는 문제가 돼버린 것이다.
이제 롯데그룹의 시설이나 서비스,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친일 반민족 기업'을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이용하는 우매한 국민이거나, '죄의식'에 눈치를 보면서 이용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롯데그룹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부산 지역조차 "신격호 총괄회장과 장남 신동주 씨가 부자간 대화도 일본어로 하고, 공중파 방송에서 신동주 씨가 일본어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것을 보고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말들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부산을 근거지로 하는 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한다는 한 야구팬은 눈치가 보였는지, "롯데팬이 아니라 자이언츠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롯데그룹 계열사와 관계가 있는 각종 식음료 제품들의 매출도 급감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롯데아사히주류의 대표 상품 '아사히 맥주'는 롯데의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지난 달 26일 이후 한 대형마트에서 40% 가까이 매출이 감소하는 등 "평소에 이용하던 서비스나 제품이 롯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나면 꺼림칙해진다"는 반응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예 노골적인 불매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특히 롯데그룹은 다른 회사에서 만든 제품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막강한 유통망으로 순식간에 관련 제품 시장을 장악하는 수법으로 시장에서 원성을 많이 사온 터라,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700만 회원을 둔 소상공인연합회가 앞장 서서 불매운동에 나선 것도 주목된다.
연합회 관계자는 "롯데는 유통대기업 중에서도 가장 무차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영세상인들의 비난을 받아왔다"며 "최근 경영권 분쟁으로 오너일가의 탐욕과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이 알려지면서 반감이 커졌다"고 불매운동 배경을 설명했다.
한 금융 분야 시민단체는 롯데카드,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롯데손해보험, 롯데제과 등 소비자 밀착형 제품을 판매하는 7~8개 계열사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해 전개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롯데쇼핑 영화사업부문 계열사의 경우 개봉작의 흥행에 타격을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롯데쇼핑내에 롯데시네마, 롯데엔터테인먼트 등의 영화사업 부문 계열사를 두고 영화사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이병헌, 전도연 주연의 <협녀, 칼의 기억>의 경우 이달 13일 개봉을 앞두고 '롯데그룹발 악재'에 초조한 모습이다. <협녀, 칼의 기억>은 당초 올해 상반기 개봉이 예상됐지만 이병헌 씨가 성희롱 구설수에 휘말리며 개봉을 미뤄왔는데, 또 암초를 만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계열사가 비상장인 롯데그룹에서 그나마 상장된 계열사 8개 중 7개도 '롯데 사태'의 여파로 주가가 코스피 평균의 두 배나 하락했다.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7일까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주가는 평균 2.81%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코스피 지수 하락률(1.42%)의 약 2배 수준이다. 7개사 중 주가가 가장 많이 하락한 종목은 롯데손해보험이다. 롯데손해보험은 지난 7일 2985원에 거래를 마쳐 지난달 28일 이후 8.58% 하락했다.
재계 5위 재벌그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경영행태
롯데그룹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배경에는 재계 5위의 재벌그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전근대적 경영방식도 크게 자리잡고 있다. 롯데그룹 사태로 온국민이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상법을 무시한 초법적 경영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아흔넷의 나이로 '단기기억 상실증' '치매 증세' 등의 의심을 받은 상황에서도 이른바 '손가락 해임'을 시도한 것에서 드러났듯, 재계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은 문서에 직접 서명하는 일 자체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말이 곧 법"이라는 제왕적 권력을 놓치 않으려 했다.
정작 그룹 전체의 지분 중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분율은 0.05%이며, 총수 일가의 지분을 모두 합해도 2%를 조금 넘기는 정도라는 것도 이번에 알려졌다. 국내 재벌 총수일가들이 이런 쥐꼬리만한 지분으로 그룹을 사유재산처럼 다루는 비결이 바로 순환출자다.
그런데 2013년까지 국내 재벌들의 악명높은 순환출자 고리가 10만 개에 육박할 때, 알고보니 롯데그룹이 그중에 97%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새삼 부각됐다. 2013년 기준 롯데그룹의 9만5033개 순환출자 고리는 올해 4월 기준 416개로 감소했다.
그나마 롯데그룹이 노력한 것이라고 하는데, 공정거래위원회의 '2014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대기업집단) 순환출자 현황’에 따르면 대기업집단의 순환출자 고리 수는 483개라는 점에서 여전히 86%가 롯데그룹이 차지하고 있다.
재계 5위의 재벌 롯데그룹이 국내 재벌그룹의 문제로 지적된 순환출자 고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본롯데 계열사는 모두 비상장사이며 한국롯데 80여개 계열사 중 상장사는 불과 9개에 불과하다는 불투명성에 대해 정치권과 사정당국은 "손을 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효성이 없는 '생색내기'에 그치는 게 아니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