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가는 길,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파리총회가 거둘 성과에 대해서는 엇갈린 전망이 나온다. 협상 타결을 점치는 사람들은 미국과 중국의 달라진 태도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변호사 역할을 자임하면서 기후변화 협상의 고비마다 사사건건 대립해 왔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두 국가는 기후변화 협상에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분위기는 낙관적인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주석이 기후변화 공동 대응에 전격 합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온실가스를 2025년까지 2005년 배출량에 견줘 26~28퍼센트(%)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중국은 2030년 이전부터 배출량이 줄어들도록 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얼마 전 미국은 작년 발표했던 감축목표를 공식화했고, 중국은 2030년까지 에너지원단위를 2005년 대비 60~65% 줄인다는 내용의 자발적 기여(INDC)를 UN에 제출한 상태다.
반면, 파리 총회의 성과를 비관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협상이 타결된다 해도 그 내용은 세계 시민사회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 주요국들이 국가이기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2도씨 이상 상승하는 것을 억제한다"는 국제사회의 합의된 목표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여전히 크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다.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주요국의 자발적 기여(INDCs)를 분석해 발표한 보고서는 국제사회가 처한 냉정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배출국들이 내놓은 Post-2020(2020년 이후) 감축목표를 모두 달성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금세기 말 지구평균기온은 2.6도씨(℃) 상승이 불가피한 것으로 전망된다. 2℃ 상승 억제가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마지노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세계는 여전히 기후변화라는 깊은 낭떠러지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뒷걸음질치는 온실가스 감축정책
문제는 목표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는 우리나라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난 6월 말 정부가 발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2030년까지 배출 전망치의 37%를 감축하되, 그중 11.3%는 해외에서 구입한 '탄소크레딧(CER)'으로 상쇄하고, 산업부문 감축률은 12% 수준을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당초 제시했던 14.7%에서 31.3%까지 감축하는 4개의 시나리오에 비해 목표가 상향 조정되었다며 2020년 목표보다 진전된 안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상향 조정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해외 감축을 제외한 순수 국내 감축분만 따지면 배출 전망치의 25.7%를 줄인다는 시나리오 3안과 같기 때문이다. 이 경우 2030년에 국내에서는 온실가스를 6억3200만 톤(t) 가량 배출하게 된다. 이는 2020년 목표 배출량보다 16.4% 증가한 양으로써, 2020년 감축공약 파기를 전제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수치다. 이미 정부는 감축안 확정에 앞서 4개 시나리오를 발표하면서 "2030년 목표가 확정되면 2020년 목표를 수정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산업계는 감축목표가 과도하다며 반발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공산이 크다. 기대했던 것보다 큰 선물을 정부가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정부 발표문은 18.5%였던 산업계의 감축률을 대폭 줄여 12%를 초과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산업계는 15년 후에도 지금보다 온실가스를 8.8%가량 더 내뿜어도 된다. 한쪽에 특혜를 주면 다른 쪽은 그만큼 더 허리가 휠 수밖에 없다. 가정, 상업, 수송 등 다른 부문은 부당하게 높은 감축 부담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7월 G7 정상들은 2100년까지 화석연료 퇴출을 공식 제안했다. 미국은 재생에너지에 연간 4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중국도 1000여 석탄광산의 폐쇄 계획을 세우는 등 '녹색 중국'으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최근 런던정경대 연구진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중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시진핑 주석이 발표한 2030년보다 5년 앞서 2025년에 정점에 도달한 후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남들은 저탄소 경제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녹색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만 '갈색 성장' 시대에 남겠다고 고집부리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당분간은 정부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할 상황이다. 배출권거래제 등 온실가스 감축정책도 내년 INDC 이행계획 수립과정에서 줄줄이 후퇴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시민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단기적으로는 파리 기후변화총회를 지렛대 삼아 기후변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인식을 끌어올려야 한다. 지난 6월 16일 출범한 '전환을 위한 기후행동 2015'(이하 기후행동)은 그와 같은 목적으로 결성된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수평적 네트워크이다. 환경연합을 비롯해 환경, 여성, 청년, 개발, 종교 등 다양한 부문에서 총 46개 조직이 참여하고 있다. 기후행동 2015는 기후변화의 다양한 모습을 조망하는 '파리로 가는 길 - 대화(對話) 2015', 전국의 기후변화 피해 현장과 에너지 전환 현장을 찾아 시민들의 견해를 청취하는 '2015 기후 여정(Climate Yatra)', 영상보고서 '기후변화 - 101개의 목소리' 발간 등을 통해 신기후체제 협상 타결을 촉구하는 세계 시민들의 행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삶의 현장에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우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것으로 보인다.
좀 더 긴 호흡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화석연료 투자 철회운동(divest movement)의 전개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 운동의 취지는 "화석연료 투자에서 손을 떼는 대신 재생에너지에 투자하자"이다. 기후변화를 고려하면 석유 및 석탄 관련 사업들은 곧 부실자산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투자처를 미래의 에너지인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미국 록펠러 형제재단, 스탠퍼드 대학, 세계교회협의회(WCC), 독일의 거대 에너지기업 RWE와 E.ON에 이어 최근에는 9000억 달러(약 900조 원) 규모의 세계 최대 국부펀드인 노르웨이 정부 연기금이 석탄 관련 사업에서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간 시민사회가 주력해왔던 에너지기본계획과 전력수급기본계획 대응운동은 기후변화의 주범인 화석연료 산업의 돈줄을 막는 투자 철회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온실가스 감축이 에너지 효율적인 산업구조를 촉진함으로써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믿음을 확산시켜나가야 한다. 산업계는 온실가스 감축이 기업에 부담을 준다고 강변해 왔다. 하지만 국내외를 통틀어 온실가스 규제 때문에 기업이 문을 닫거나 해외로 이전한 사례가 있는가. 온실가스 감축과 경제성장이 상충한다는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낡은 사고방식과 경제구조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서 감축과 성장은 충돌하지 않는다.
1990년 이래 GDP가 44% 증가하면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은 20% 줄어든 EU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특별보고서 '에너지와 기후변화'를 통해 2030년까지 세계 경제는 88% 성장하겠지만, 탄소 배출량 증가는 8%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10년 전 600억 달러였던 세계 재생에너지 투자액은 현재 3100억 달러 수준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2030년이면 전력부문에서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25%로 확대되면서 석탄과 가스를 추월해 선두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계가 유포하고 있는 '온실가스 감축 = 경쟁력 약화' 프레임을 그대로 두고서는 굳건한 '성장 동맹'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판을 바꾸려면 '온실가스 감축 = 건강한 경제' 프레임으로 대체해야 한다.
변화는 시작됐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과 도시의 에너지 전환을 통해 궁극적으로 국가를 변화시키는 상향식 운동 전략에도 주목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시설의 50% 이상을 시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독일의 경험은 에너지 전환과 온실가스 감축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정치적 힘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서울시의 '원전 하나 줄이기'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서울의 약속', 경기도의 에너지자립선언, 제주도가 2030년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카본 프리 아일랜드(Carbon Free Island)' 계획 등이 대표적이다. 뒷걸음질치고 있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정책과 지자체들의 미래 지향적인 에너지 비전 사이에 시민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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