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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썩을 살 아끼면 무엇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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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썩을 살 아끼면 무엇 하랴? [몸의 일기 ⑧] 몸이라는 핑계, 몸이라는 방법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기. 타인의 은밀한 기록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기분은 상상만 해도 짜릿합니다. 그래서 기회만 온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여기 자신의 일기를 통째로 공개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일기에는 열두 살 때부터 여든일곱 살까지 그 남자의 내밀한 기록으로 빼곡합니다.

그 남자의 첫 몽정(13세), 첫 섹스(23세), 첫사랑(26세), 첫아기(28세). 그의 첫 외과 수술, 즉 코 막힘과 코골이의 원인이 되는 코 안의 용종 제거 수술(27세), 오른팔 안쪽에 생긴 첫 검버섯(44세), 노안에 난생 처음 쓰게 된 안경(45세), 처음으로 본 손자(53세),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처음으로 망각한 일(62세).

이뿐만이 아닙니다. 49세 때 갑자기 찾아온 이명과 친구 되기, 60세가 넘어서면서 평생을 갈 것 같았던 아내와의 욕망이 사그라진 현상.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 손자의 동성애를 접한 70대 할아버지의 당혹스러움, 오랜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손자의 때 이른 죽음. 그리고 시간 앞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육체.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기.

그렇습니다. 이 남자의 일기는 보통의 일기와 다릅니다. 우리가 그간 엿보았던 대부분의 일기는 내면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죠. 그런데 이 일기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몸'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그 몸의 일기를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죠. 그 남자의 몸에는 사랑, 갈등, 관계, 과학, 역사 등 세상의 온갖 것들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 남자의 몸의 일기를 엿보면서 한 남자의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온갖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덤이고요. 이 특별한 일기를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가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펴냈습니다. 페나크가 누구냐고요?

페나크는 '말로센 시리즈',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 <소설처럼>, <학교의 슬픔> 같은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페나크가 일기 형식을 빌려서 '소설인 듯 소설 아닌 소설처럼'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몸의 일기>입니다.

<프레시안>과 문학과지성사는 이 <몸의 일기>를 먼저 읽은 여덟 명의 독후감을 매주 화요일, 금요일 두 차례씩 연재합니다. 20대의 젊은 작가, 40대의 의사, 60대 70대의 노(老)작가까지 다채로운 빛깔의 독후감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여덟 번째 마지막 독후감의 주인공은 70대 초반의 평론가이자 번역가 황현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입니다.

몸이라는 핑계, 몸이라는 방법

▲ <몸의 일기>(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죽으면 썩을 살 아껴서 무엇 하랴.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가장 끔찍한 경계의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인간의 삶은 오직 고통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그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몸의 멸망 뒤에 올 허망함이다.

육체의 쾌락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이 말은 그렇다고 어떤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는 '썩을 살'에 대비하여 어떤 영원함이 버티고 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훈계는 하나의 질문과 그 대답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다. 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 대답은 이렇다. 몸은 저 자신의 노예이자 그 노예의 끝없는 핑계다.

<몸의 일기>의 저자도 몸을 하나의 핑계로, 다시 말해서 영악한 방법론적 도구로 사용한다. 저자가 한 사람의 몸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 몸에 관한 일기를 쓰게 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몸에 관해 무람없이 말할 수 있는 온갖 핑계를 마련한다. 게다가 소설은 액자 구조로 짜여 있어서, 저자가 필요에 따라 제 방법을 비판하고 수정하고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거기서 얻어진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상상해낸 온갖 서사에 몸과 무관한 것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헤라클레스의 신화도, 아킬레스의 신화도, 비너스의 신화도 모두 몸에 관한 이야기다. 무협 소설도 영웅 서사도 마찬가지다. 낭만주의 소설이나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에서부터 하찮은 단역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제 성격과 어울리는 얼굴과 몸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러나 이 몸들의 서사는 인간의 몸을 불태우고 신의 몸만 남아 있는 헤라클레스의 몸처럼 몸을 생략하는 데 오히려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점에서 <몸의 일기>는 그 생략된 몸의 복원과 같다.

하품하기, 트림하기, 방귀뀌기, 코딱지 파내기, 오줌 누고 똥 싸기, 몽정과 자위가 인간의 글에 이런 방식으로—어떤 다른 목적도 없이 그 행위 그대로—나타난 예는 아직 없었다. 당연히 섹스가 하나의 주제를 형성하지만, 거기에는 성적 환상이 없으며, 일기를 쓰는 자의 관심은 오직 성기의 우람한 팽창과 그 지속성에 있을 뿐이다.

고전극에서 중요한 일이 항상 무대 뒤에서 벌어지듯이, 이 일기에서도 부모의 죽음, 결혼 같은 인간의 대사는 여기저기 본문에 붙는 주석처럼 꾀바르게 나타나는 '리종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편하고 간략하게 처리된다. 독자들은 '일기'를 들추며 한 사내의 삶을 엿보고 있지만 끝내 그 직업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 일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몸과 무관해서가 아니라 몸에 대한 기록을 샛길로 끌고 갈 염려가 크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또한 몸에 대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몸의 외곽에 위치하는 '세속적 이야기들'을 피해 갈 수 있는 핑계로 기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저자가 하품하기, 트림하기 따위를 제 글에 내내 쓰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인간의 글쓰기 속에, 어떤 사상적 토대도 드러내지 않고, 어떤 미학적 고려도 없이, 위로도 환상도 없이, 조심성도 예절도 없이, 이들 지저분한 이야기를 써 넣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방법이 철저하게 실천되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가 걱정했던 것은 철저함에 뒤따르기 마련인 관념을 타고 저 수상한 '정신'이 슬그머니 끼어들어와 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사태였으리라. 이 소설의 철저함은 바로 거기 있다. 몸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을 다 말하면서 정신이 침입할 길을 빈틈없이 막아내는 데 있다. 일기를 쓰는 자는 '86세 9개월 10일'이 되는 날, 백내장 수술을 받으면서 말한다. "끝까지 바라볼 것. 한 조각도 놓치지 말 것."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믿는다. 어둠 속의 명상 같은 것이 결코 그를 유혹할 수 없다. 육체가 쇠하고 마침내 무너진 자리에도 초월은 없다. 이 소설의 철저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저 '죽으면 썩을 살'로 돌아가게 된다. 몸이 믿을 것은 몸밖에 없다. 몸의 모든 목적은 몸에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도 몸에 있다. 다만 살은 '죽으면 썩을 살'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살, 지금 여기 남아 있는 살'이다.

첫 번째 사족. 이 건조한 글에는 그러나 상징체계가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선에서 독가스를 마신 주인공의 아버지는 마비된 몸에 철학자의 머리를 지니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흉내 낸다. 철학자의 머리가 신의 몸이라면 마비된 몸은 생략된 인간의 몸이다. 아들은 인간의 몸을 다시 복원하면서 성장한다. 그 성장을 돕는 것이 노동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의미가 깊다.

두 번째 사족. 번역자는 글쓰기의 어떤 기쁨도 허용하지 않았을 이 번역을 수행하면서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꼼꼼한 주석은 일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가끔 빗나가거나 잘못된 주석도 있다. '17세 5개월 11일'의 일기에 언급되는 피에르 루이스에 대해, 옮긴이는 그의 상징주의와 유미주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대목에서 아폴리네르와 함께 나타나는 것은 두 사람이 모두 포르노 작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27세 29일'에 쓴 일기의 "경쾌한 흑인 바나니아"에 관해 옮긴이는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말하는데, 1950년의 일기가 1975년에 출간된 소설을 참조할 수는 없다. 바나니아는 프랑스의 유명한 초콜릿 음료이며 그 상표에 명랑한 흑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70대 초반의 남성인 황현산 평론가는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같은 학교 명예교수이다. 아폴리네르를 중심으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로 대표되는 프랑스 현대시를 연구하고, 여러 권의 번역서와 번역 관련 글을 발표했다. 한국번역비평학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팔봉비평문학상·대산문학상·아름다운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얼굴 없는 희망>(문학과지성사 펴냄),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펴냄), <밤이 선생이다>(난다 펴냄) 등이, 옮긴 책으로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문학과지성사 펴냄), 기욤 아폴르네르의 <알코올>(열린책들 펴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미메시스 펴냄),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문학동네 펴냄) 등 다수가 있다.)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는…

▲ 다니엘 페나크. ⓒCatherine Hélie/Editions Gallimard
본명은 다니엘 페나키오니. 1944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에는 열등생이었으나, 그 시기에 독서에 남다른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 니스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26여 년간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말로센 시리즈'와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에서 보여준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넘치는 표현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밖에 강압적인 독서 교육을 비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우치는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펴냄), 열등생이었던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학교의 슬픔>(문학동네 펴냄) 등의 에세이와 소설, 시나리오를 발표했으며, 한 남자가 10대부터 80대까지 몸에 관해 쓴 일기 형식의 소설 <몸의 일기>는 2012년에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1995년부터 교직에서 물러나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교실을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미스터리 비평상(1988년), 리브르앵테르 상(1990년), 르노도 상(2007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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